소설리스트

20화 (21/26)

각성한 늑대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지척에 있는 상대의 존재를 확인하고, 뒤늦은 안부를 묻고,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시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처가 저절로 나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랐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건 더 놀라웠는데, 제가 갑자기 SS급이 되었다니.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시윤이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 이제 대장님이 폭주하셨을 때도 얼마든지 가이딩할 수 있는 거네요?”

“그렇지.”

청호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행여 시윤과 떨어질까, 손을 조금 더 단단히 맞잡았다.

“대장님 귀걸이, 다시 안 만들어도 되겠어요.”

시윤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광대를 동그랗게 올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말갛고 순수해서, 청호는 따라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렇네. 네가 있으니까.”

청호가 시윤의 팔뚝부터 팔꿈치까지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또 그 눈길에 애정이 어찌나 충만한지. 시윤이 배시시 수줍게 눈을 휘며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그 웃음을 정면에서 마주한 청호가 참지 못하고 시윤의 턱을 그러쥐었다.

산뜻한 봄바람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뭉근해졌다. 시윤이 반쯤 눈을 감고 청호의 입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청호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곧 입술이 맞물렸다. 청호는 시윤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가며 가볍게 빨았다가 놨다. 그러다 시윤이 살짝 입을 벌리는 순간, 뱀처럼 혀를 집어넣었다.

혀는 부끄러움 없이 얽혀 들었다. 거리낌 없이 비벼지고, 주춤거림 없이 넘나들었다. 그를 따라 끈적한 호흡과 타액 역시 넘나들었다.

“으응…….”

입천장을 세게 긁어내리는 청호의 혀끝에 시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자 청호가 시윤의 입술을 간질이듯 핥으며 그를 달랬다. 곧 평온을 찾은 시윤이 청호의 혀를 사탕처럼 빨아 댔다.

키스는 오래 이어졌다. 입술만 붙었다가 떨어지는 프렌치 키스였다가, 혀뿌리가 아릿할 정도로 짙은 딥 키스였다가, 가끔은 장난처럼 쪽쪽 뽀뽀만 반복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시윤이 청호의 단단한 가슴팍을 쓰다듬듯 밀어 냈다. 청호는 순순히 물러났다.

“아파?”

청호가 물었다.

“아니요. 전혀요.”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청호의 숨결도, 타액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냥 청호 그 자체의 체온과 맛뿐이었다. 목구멍을 통해 청호의 힘이 빨려 들어오는 건 느껴졌다. 근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히려 몸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시윤이 찹찹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 청호가 다시 입술을 붙이려 하는데, 시윤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피했다. 청호가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왜? 하기 싫어?’라는 표정으로 시윤을 응시했다. 시윤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장님, 저…….”

“응.”

“배고파요.”

“…….”

눈썹까지 올리며 긴장했던 청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널찍한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찼다. 늦은 새벽이었는데, 청호가 아주 맛있는 음식을,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빨리 가져오라 명령한 덕에 에로아스 병사들은 자다 말고 벼락 맞은 너구리처럼 엉덩이를 퍼덕거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다.

그래도 그 덕에 다행히 그럴싸한 음식들을 장만할 수 있었다. 큼지막한 고깃덩이가 한가운데에 떡 자리 잡은 걸 본 청호가 만족스레 미소 지으며 병사들을 물렸다.

소파에 앉은 시윤은 곧장 오렌지 주스부터 집었다.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주스가 그렇게 청량하고 달콤할 수 없었다. 그동안 청호는 고기를 잘랐다. 하지만 시윤과 손을 잡고 있어야 해서 영 칼질이 이상했다.

답답함에 염력을 쓰려는 찰나, 시윤이 킥킥 웃으며 포크로 쿡 고기를 눌러 고정했다. 덩달아 웃은 청호가 빠르게 고기를 잘라 냈다. 염력을 쓰면 칼 두 개를 이용해 단숨에 썰어 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재미있지 않은가. 소꿉놀이라도 하듯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그러나 아쉽게도 소꿉놀이는 금세 끝나 버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시윤이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참 맛있게 먹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화산 전투 때 고기를 먹어 치우던 시윤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청호는 간간이 음료나 사이드 디시를 집어 시윤의 입으로 배달했다. 물론 오물거리며 움직이는 시윤의 볼에다 입술을 비비고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윤은 음식을 매우 조용히 먹는다. 쩝쩝거리지도 않고, 입가에 묻히지도 않았다. 큰 음식은 조각내어 먹었으며 수프나 소스 같은 걸 떨어트리는 법도 없었다. 근데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더 귀여웠다. 바지런히 도토리를 갉아 먹는 다람쥐 같달까. 기다란 풀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토끼 같기도 하고.

시윤이 식사하는 걸 넋 놓고 바라보던 청호가 참지 못하고 그를 껴안아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 뒀다. 구운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던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요?”

“그냥. 너 밥 먹는 거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아서.”

청호가 시윤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말에 우물우물 바쁘게 움직이던 시윤의 턱이 멈췄다. 그가 청호와 맞잡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네요……. 같이 식사한 지 오래되긴 했어요…….”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며 웃고, 그날 있었던 일을 공유하고, 내일을 약속하고. 간질간질한 설렘과 소담한 웃음이 넘나들었었지.

그 이후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비루한 제 가이드 능력, 이기적이고 악마 같은 아버지, 불쾌한 동화 같은 휴, 그리고 오해와 속죄.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아직 멀었다. 종우는 행방불명이고, 아마 내일쯤 정원이 들이닥칠 터였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건, 제 가이드 능력이 올랐다는 거고, 청호와 이리 몸을 붙인 채 웃음을 주고받고 있다는 거였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한 시윤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는데 청호가 시윤의 관자놀이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앞으로 많이 하면 돼. 하루에 세 번씩. 다 너랑 먹을 거야.”

“……좋아요.”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적당히 소란스러운 식사가 이어졌다. 청호와 시윤의 웃음이 번갈아 터졌고, 음식은 착실히 줄어 갔다. 물론 양이 어마어마한지라 다 먹진 못했다.

마침내 시윤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청호가 조금 더 먹지 않겠냐고 물었으나 고개를 내저었다. 청호는 병사들을 시켜 음식을 물리고, 손수 홍차를 내려 주었다. 시윤이 짧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따뜻한 찻잔을 받았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청호가 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윤이 그런 청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박종우 하사가 제가 열여섯 살에 버리고 도망쳤던 그 가족의 아들이었어요.”

시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청호는 알고 있었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럼 시윤이 왜 진작 이야기해 주지 않았냐며 아쉬워할 것 같아서. 또, 그걸 알면서도 절 종우와 둘이 보냈던 거냐고 화를 낼 것 같아서.

치졸하고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청호는 죽는 것보다 시윤에게 미움을 받는 게 더 싫었다.

“그래서 휴랑 아주 오래전부터 저를 죽일…… 죽일 계획을 세웠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엄청 미웠겠죠? 그래서 그렇게 오래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거겠죠?”

“다 지난 일이야. 넌 이미 한 번 죽었고, 그걸로 됐어.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살아났잖아요. 박종우 하사의 아버지와 동생은 살아나지 못했는데.”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청호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게 맞으나, 종우를 생각하면 제가 되살아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윤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청호가 그를 따라 코로 한숨을 내뱉었다. 시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더는 자책하지 않았으면 했다. 어쨌든 종우는 시윤을 한 번 죽였으니 계산은 끝났다.

추후 그가 다시 제 앞에 나타난다면 망설임 없이 목숨을 거둬 갈 생각이었다. 시윤이 살아났으니 그의 어미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만, 종우는 제 경고를 귓등으로 처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청호가 시윤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곤 넌지시 말을 돌렸다.

“휴는 널 왜 죽이려 한 거야? 네가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아…… 그게……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이유더라고요.”

“뭔데?”

“죽고 싶대요.”

“……뭐?”

청호의 눈썹이 아치를 그리며 올라갔다. 시윤의 말마따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죽고 싶다니. 죽고 싶어서 시윤을 죽였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런 걸 바랐다면 시윤이 아니라 저를 찾아왔어야지. 친히 목을 썰어 줬을 텐데. 왜 시윤에게…….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청호의 표정에 시윤이 알맹이 없이 텅 빈 미소를 지었다.

“휴는 너무 오래 살아왔대요. 말하는 거로 가늠하면, 인간이 세상에 있기 전부터 살아온 것 같던데 진실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시간이 괴롭고, 더는 살고 싶지 않댔어요. 그래서 죽고 싶은데, 자신은 죽지 않는 몸이래요.”

“…….”

“그러다 어느 날, 대장님이 세상에 태어나셨는데, 휴는 대장님이 자신을 죽여 줄 존재라고 생각했나 봐요. 근데 알고 봤더니 그게 대장님이 아니라…….”

“너였다고.”

“네. 근데 어떻게 해야 그를 죽일 수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제가 제 힘을 온전히 가지면 그걸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봐요.”

“…….”

“이상하지 않나요? 제가 힘이 있어 봐야 가이드일 뿐인데,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다는 걸까요? 휴가 또 장난을 치는 걸까요?”

시윤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

입을 한일자로 다문 청호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혼수상태에 가까웠던 시윤은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청호는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답던 녹색 눈동자. 그에게로 마구 빨려 들어가던 주위. 그건 가이드 능력이 아니었다. 에스퍼 능력이라고 명명할 수도 없었다.

아마 휴가 원하는 능력이리라.

청호는 구태여 어제 있었던 일을 논하지 않았다. 몇 시간 뒤면 모건이 이런저런 결과를 가지고 나타날 터였다. 시윤의 상태와 힘을 확실히 인지하고 계획을 짜야 했다. 휴가 자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크게 문제되지 않을 텐데. 거짓일 수도 있으니 그를 대비해야 했다.

“뭐든 괜찮아. 내가 계속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청호가 빙긋 웃으며 시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런 청호를 물끄러미 보던 시윤이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청호가, 계속, 내 옆에.

너무 낭만적인 말이었다.

* * *

청호와 시윤은 이른 아침부터 모건의 연구실에 와 있었다. 모건이 밤새도록 연구해 알아낸 것들을 듣기 위해서였다. 근데 시윤은 뭐가 그리 걱정인지, 상담실에 불려 온 학생처럼 전전긍긍이었다.

청호가 괜찮다는 듯 시윤의 손등을 도닥거렸다. 그런데도 시윤의 손가락은 꼼지락꼼지락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고운 입술을 물어뜯기도 했다. 보다 못한 청호가 자못 엄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 마. 피 나면 화낼 거야.”

청호의 경고에 시윤이 그제야 평온 아닌 평온을 찾았다. 그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홀로그램을 쳐다보던 모건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석유로 보일 정도로 새까만 커피를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켜며 청호와 시윤에게 다가왔다.

“자, 내가 쭉 브리핑할 테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질문해.”

“네.”

“응.”

모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홀로그램 차트를 하나 띄웠다. 흔히 볼 수 있는 능력자 표였다.

[이름: 채시윤]

[직위: 준위(WO)]

[종: 가이드]

[어빌리티 등급: SS]

[신체 발달: C]

[자가 치유 능력: C]

[소유 능력: - ]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고개를 앞으로 쑥 뺐다. 그리고 몇 자 되지 않는 활자를 읽고 또 읽었다.

시윤의 눈엔 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표였다. 가이드 등급이 SS로 오른 건 청호가 말해 주어 알고 있었다. 아직 향상된 능력을 경험하진 못했으나, 추후 청호가 폭주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근데 소유 능력이 이상했다.

“소유 능력은 왜 비워 두셨습니까? 저번엔 무(無)였던 것 같은데.”

시윤이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팔을 들며 물었다.

“…….”

그 질문에 모건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능력을 왜 비워 뒀냐니. 어째서 무(無)가 아니냐니. 몇 시간 전, 시윤이 잡아먹다 만 간호병에게 로봇 팔을 달아 줬거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어제 일 기억 못 해.”

청호가 슬쩍 설명을 덧붙였다. 모건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그램을 뒤적거렸다. 그러곤 수술실 CCTV로 녹화한 것을 찾아내 재생시켰다. 푸른색 눈동자를 한 시윤이 발작하며 주위를 마구 빨아당기는 상황이 낱낱이 담긴 동영상이었다.

시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동영상 속의 제 얼굴을 한 남자가 진정 자신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병사 하나가 팔을 잃고 비명을 내질렀다. 시윤이 다급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저 병사, 설마 죽었…….”

“안 죽었어.”

비록 팔은 잃었지만. 모건이 뒷말은 쏙 숨겼다. 청호가 눈을 부라리며 침묵을 종용해서였다.

모건의 말에 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동영상을 쳐다봤다. 몸을 퍼덕거리며 주위를 삼키는 제 모습이 꼭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 같았다. 그만큼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저게 무슨 저주 같은 능력인가. 청호처럼 염력이나 불을 다룰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든가, 하늘을 날 수 있다든가, 힘이 아주아주 세서 탱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째서 저는 항상 평균치를 못 채우는지 모르겠다.

시윤이 침울한 얼굴로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어깨를 다정히 도닥였다. 모건은 그들이 어떠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시윤이 능력은…… 생전 처음 보는 거라 새롭게 명명해야 했는데, 아직 좋은 걸 못 찾았어.”

“정확히 어떤 능력인데?”

“어…… 뭐랄까……. 블랙홀이라고 보면 돼.”

“블랙홀?”

일반적인 능력자의 능력과는 영 동떨어진 단어에 청호가 고개를 뒤틀었다. 그러나 모건은 손뼉을 짝, 치며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신난 표정을 해 보였다.

“오, 블랙홀 좋네. 채시윤, 가이드, SS급, 소유 어빌리티 블랙홀. 간지난다, 야.”

모건이 자신의 창의력이 감탄스럽다는 듯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블랙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 그대로 블랙홀이야. 그냥 다 잡아먹는 거지. 사물이든, 인간이든. 물론, 클롭스도 빨아들일 거고. 어빌리티 능력치로 봐서는 너랑 동급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도시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모건이 자신의 턱 아래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에 청호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고, 시윤은 지구 평면설을 믿는 이의 괴론을 듣듯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좋은 겁니까?”

“시윤이 네가 능력을 조절할 줄 알게 되면 좋겠지. 그전까지는 스위치 없는 폭탄이랑 별다를 바가 없고. 청호가 염력을 쓰는 것처럼 세세하고 능통히 다룰 줄 알게 되면 아주, 아주, 아-주 대단할 거야.”

“제가 저 능력을 다룰 줄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시윤이 영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저렇게 괴물처럼 주위를 집어삼키는데, 다룰 줄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는 거였다.

모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다르지. 지금은 마구잡이로 삼키지만, 조절이 가능하면 네가 원하는 것만 없앨 수 있는 거야. 병사들이랑 클롭스들이 난투를 할 때 클롭스만 쏙쏙 골라 없앤다거나, 쏟아지는 포탄들을 삼켜 버린다거나. 더 세세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방사능을 없앨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생각지도 못했던 능력의 응용에 시윤이 헤-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상상만 해도 엄청났다. 제게 그런 능력이 생겼다니. 기쁘기보다는 얼떨떨했다.

반면, 이번엔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아무거나 막 집어삼키는데 나쁜 건 없어? 유리 조각이나 칼 같은 걸 삼키면…….”

“블랙홀이라니까.”

“그게 뭐.”

“블랙홀은 지가 뭘 삼키는지 몰라. 그냥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절대적인 천체야.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지. 채 준위 체내에 쌓이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영향을 주지도 못해.”

“…….”

“완전한 소멸. 그보다 알맞은 설명이 없다.”

모건이 두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완전한 소멸. 휴가 바라는 죽음이 어떠한 모습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시윤이 상처가 갑자기 나은 이유는 뭐야?”

청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모건이 멀끔하게 붙은 시윤의 귓불을 보며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건 휴의 능력. 아마 네가 뽑아낸 그 붉은 돌덩어리 같은 거에서 나온 것 같아. 그러니까 휴는 시윤이가 다시 살아날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검사 결과 시윤이는 여전히 자가 치유 능력이 없어. 다치면 그냥 다치는 거고, 피가 나면 그냥 피가 나는 거야. 회복 속도, 신체 능력은 여전히 퓨어랑 같아.”

“맞아요. 휴가 그랬어요. ‘잠깐만’ 죽으면 된다고.”

시윤이 말을 더했다. 그때는 휴의 말이 그렇게 이상했는데. 정말 잠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시윤이 괜히 가슴팍을 문질렀다. 휴의 심장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던 게 여전히 생생했다. 그 차가운 이질감. 부서지는 뼈. 갈라지는 근육. 소름이 끼쳤다.

부르르 몸을 떠는 시윤에 청호가 그를 보듬어 안았다.

“혹시 시윤이가 내 피를…… 마시면 다친 게 회복되거나, 폭주가 안정될 수도 있어?”

“피요?”

갑작스러운 흡혈 타령에 시윤이 콧잔등을 구겼다. 그러자 모건이 대수롭지 않게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네가 어제 발작하고 청호 피를 막 드라큘라처럼 마셔 댔거든.”

“……드라큘라가 뭡니까? 아니, 아니. 제가 대장님 피를 마셨다고요?”

시윤이 턱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세상에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니, 라는 표정이었다. 십계명을 어긴 독실한 신자 같기도 했다.

“괜찮아. 청호 쟤는 몸속에 있는 피가 죄 빨려도 안 죽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청호 피는 시윤이 너한테 일종의…… 약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청호 힘이 응축된 약. 그렇다고 상처가 아물 정도는 아닌데, 어제 같은 상황에는 효과가 있지.”

“…….”

“청호 너 폭주하면 피가 존나 막, 세게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핏줄이 찌릿찌릿하고 심장이랑 머리는 터질 것 같고 그렇잖아. 능력자의 힘을 만드는 게 결국엔 피라서 그런 거거든.”

“…….”

“시윤이는 지금 엄청나게 거대한 배수구야. C급 시절의 요만했던 배수구가 아니라, SS급짜리 배수구라고. 예전에는 그 배수구가 너무 작아서 아팠는데, 지금은 거기가 지나치게 커서, 텅 빈 상태라 발작하는 거야.”

모건이 손가락으로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가 팔을 통째로 들어 큰 원을 만들어 보였다.

“근데 네 힘이 들어가면 배수구가 조금 차니까 안정이 되는 거지. 시윤이 배수구는 오로지 네 힘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고, 널 가이딩하면 그 배수구에 채워져야 할 게 채워지는 거니까.”

“…….”

“그래서 폭주하면 블랙홀처럼 마구 끌어당기다가, 너랑 닿으면 그 힘이 자연히 가이딩으로 옮겨 가면서 폭주가 멈춰.”

“…….”

“그러니까 굳이 피일 필요는 없어. 네가 폭주해서 시윤이한테 가이딩을 받을 때처럼 진-하게 스킨십하면 되는 거야. 어제는 스킨십하기엔 좀, 응, 좀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이해했어.”

퍽 간단한 이치에 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윤은 혼란을 떨쳐 내지 못하고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한참 그러고 있더니 또 빼꼼 손을 들었다.

“근데 제 능력은 왜 여태…… 온전히 발현되지 못했을까요?”

“인간의 몸은 살려는 의지가 강해. 상처가 생기면 회복하고, 병이 들면 고치려고 하고, 면역력을 키우고,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지. 아마 네 몸이 힘을 억눌렀을 거야. 갑작스레 폭발하듯 힘이 터지면, 자기 몸을 자기가 집어삼켜 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아…….”

“그래서 휴가 일부러 너랑 청호를 자극하고, 네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회복시키기를 반복했던 거고. 네 몸이 네가 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한 거지.”

시윤이 쌉싸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원, 지극정성도 이런 지극정성이 없다. 이 정도면 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윤과 청호는 병실 소파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며칠 새 시윤은 영양분도 충분히 섭취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어느 정도 극복했다. 하지만 모건이 아직 능력이 안정되지 않았다며 조금 더 입원하길 권유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흘러가는 시간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처음엔 청호와 잠시 떨어지기만 해도 몸이 후끈후끈하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그래 봐야 샤워하는 이삼십 분가량이었으나, 어쨌든 그동안은 폭주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여 일이 터질까, 씻자마자 얼른 청호의 품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니 폴이 들어와 청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어제부터 에로아스 병사들이 이따금 와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하고 갔는데, 청호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서 시윤은 듣지 못했다.

시윤은 어렴풋이 정원이나 종우와 관련된 일이리라, 짐작했다. 그들의 행방과 현재가 궁금하긴 했는데, 듣는다고 한들 제가 뭘 할 수 있겠나 싶어 말았다. 죄인 주제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을 얹는 것도 우스웠다.

폴이 나가고, 청호는 시윤의 젖은 머리칼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빙하가 가득했던 Z 구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을 빗처럼 세워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그러자 축축하게 처져 있던 머리칼이 금세 살랑살랑 부풀어 올랐다.

간지러우면서도 설레는 스킨십에 시윤이 킥킥 웃음을 흘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하얀 볼이 위로 솟아올랐다. 청호가 거기다 코와 입을 동시에 비벼 댔다. 그러다 자연히 시윤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살짝 마주 닿았을 때였다.

“시윤아.”

청호가 나지막이 시윤을 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분위기가 덩달아 착 가라앉았다.

“……네.”

시윤이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

청호가 시윤의 가슴 언저리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쓰다듬었다. 손바닥 가득 시윤의 체온이 넘실거렸다. 가이딩 특유의 은은한 기운도 느껴졌다. 하나같이 시윤이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이었다.

“…….”

시윤이 바스러질 듯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제 죽음에 청호가 많이 놀랐구나, 싶었다. 하긴 저도 청호가 다치면 심장이 섬뜩했다. 클롭스에게 어깨를 물어뜯겼을 때나, 검게 타 버린 설산 위에서 피를 토하며 추락했을 때나, 정말 끔찍했지. 근데 온전히 죽은 저를 본 청호는 어떻겠나. 차게 식은 저를 껴안고 포스까지 오며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시윤이 청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대장님.”

“응.”

“좋아해요.”

“…….”

갑작스러운 고백에 청호가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시윤이 나직이 웃으며 그런 청호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잠깐 굳어 있던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저돌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뽀뽀가 금세 키스로 탈바꿈했다. 자꾸 밀어붙이는 청호를 이기지 못한 시윤이 뒤로 풀썩 넘어갔다. 청호가 기다렸다는 듯 시윤의 위로 올라탔다. 가이딩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근 이틀 동안 한순간도 시윤과 떨어지지 않았던 터라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온전히 육욕이었다. 시윤의 하얀 살결에 입을 맞추고, 그의 토실한 엉덩이 사이에 좆을 비비고 싶은 육욕. 시윤의 달뜬 신음에 취하고, 예쁜 눈동자에 쾌락을 채우고 싶었다.

시윤은 그런 청호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다리를 벌리고 청호의 허벅지를 감쌌다. 청호의 커다란 손이 얇은 샤워 가운 안으로 쑥 들어왔을 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가 울렸다. 시윤은 흠칫 어깨를 떨었으나 청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병사들이라면 알아서 물러갈 것이고, 모건이면 눈치 없이 들어오겠으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염력으로 날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시윤의 입술을 줄줄 빨던 청호가 가느다란 목으로 옮겨 갔다. 시윤이 난처한 얼굴로 그의 널따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장……님……. 밖에 누가…….”

“괜찮아.”

청호가 대수롭지 않게 시윤의 걱정을 일갈했다. 끙, 앓는 소리를 낸 시윤이 에라 모르겠다, 하며 청호의 목을 껴안았다.

하지만 눈치 없는 방문객은 물러갈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똑똑, 노크했다.

이번엔 청호가 먼저 반응했다. 으득, 이를 간 그가 짜증스레 문을 노려봤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고, 방문객의 정체가 드러났다. 에로아스 병사도, 모건도 아니었다.

청호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시윤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리고 벌떡 튕기듯 일어났다.

“어, 엄마……?”

선화였다.

선화가 청호와 시윤의 앞에 섰다. 바로 옆에 일인용 소파가 있었지만, 그녀는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바닥 한 귀퉁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있었다.

청호가 가만히 선화를 쳐다봤다. 시윤은 어쩔 줄 모르고 청호와 선화를 번갈아 보며 숨만 거꾸로 삼켰다.

선화는 이전에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땐 내내 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오늘은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파리한 안색이었다.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은 어디 가고,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방랑자 신세였던 것처럼 비쩍 마른 상태였다.

머리는 곱게 빗어 넘겼지만 어딘가 부스스한 모습이었고, 옷도 단정하게 챙겨 입었으나 급격하게 체중이 내린 덕에 썩 어울리진 않았다.

“…….”

“…….”

정적이 이어졌다. 기다리다 못한 청호가 무슨 일이냐, 묻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선화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니, 무릎을 꿇었다. 차고 딱딱한 바닥일랑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 엄마.”

그 모습에 놀란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청호는 입을 꾹 다문 채 선화를 쳐다봤다. 선화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선화가 매우 공손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가늘게 경련하는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또박 자신의 죄를 나열해 갔다.

“남편이 청호 대장 어머니에게 그런, 그런 짓을 한 거. 정말 미안해요.”

“…….”

“내 남편이 그렇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줄 몰랐어요. 아니, 이것도 변명이지요. 몰랐다는 것도 죄예요. 나는 그이와 제일 가까운 사이였고, 그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하는지 다 안다고 자만했어요.”

“…….”

“내 남편만큼 국민을 위하고, 자애롭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죠. 그는 집에서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아빠였거든요.”

선화가 당시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청호의 어미가 죽은 건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었다. 고작 해 봐야 10년 전이다. 청호에게는 10년‘이나’였을 시간이기도 했다.

어미를 잃은 청호가 지옥에서 살 동안, 저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악마 같은 남편과 하하호호 참 등신같이 살았다.

“근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가 너무 부끄럽네요. 진즉 눈치챘어야 했는데. 진즉 알고 청호 대장 어머니에게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내가 안일했어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청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선화는 참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차분하고, 조곤조곤하고, 발음은 곧으며 감미롭다. 시윤과 닮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가 강의할 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선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애절한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죽음의 신처럼 우직하니 앉아 있는 청호를.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제 불쌍한 아들을.

“그러니까…… 미워하고, 원망하고, 복수하려거든 나한테 해요. 우리 시윤이는 그냥…… 부모 잘못 만난 어린애였어요.”

그 말에 청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화는 제가 시윤에게 못된 짓을 할까 봐 심히 걱정되어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긴, 저 때문에 시윤이 정신을 잃고 입원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니 그럴 만도 했다.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전신에 멍울을 뒤집어쓰고, 코피를 흘리고, 피를 토하며 골골댔지.

어딘가 못마땅한 듯한 청호의 표정에 선화가 서글픈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못난 속내를 털어놓았다.

“맞아요. 나는 지금 청호 대장에게 미안한 것보다 시윤이가 다칠까, 아플까, 상처받을까, 그게 더 무서워요. 내가 이기적인 엄마라서 미안해요.”

“…….”

“근데…… 진심이에요. 내 팔다리를 잘라도 괜찮아요. 목숨을 거둬 가도 좋아요. 그러니 내 아들만은…… 아프게 하지 말아 줘요.”

“엄마!”

듣다 못한 시윤이 고함치듯 선화를 불렀다. 무릎을 꿇은 선화의 모습은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라, 감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라 놀랐다. 가슴도 지끈거렸다.

그래도 청호에게 잘못을 비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아, 엄마만큼은 정상이구나, 아버지처럼 비인간적이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근데 덧붙여지는 말은 지금 이 상황에 나와서는 안 될 말이었다. 시윤이 선화에게 다가가려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청호가 그의 손등을 도닥였다. 가만히 있으란 뜻이었다.

선화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나로 묶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아들은, 시윤이는 진심으로 청호 대장을 사랑하고 있어요.”

“…….”

“신에게…… 신에게 뜻이 있었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세상을 이렇게 만들고, 내 남편을 창조한 것도 신이지만, 청호 대장의 반려로 시윤이를 정해 준 이유가 있을 거예요.”

“…….”

“그러니까 한 번만 눈감아 줘요. 시윤이를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라 생각하지 말아 줘요. 그냥 시윤이 그 자체로 봐 줘요.”

선화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선화라고 이런 이기적인 사과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근데 이틀 전, 시윤이 죽었다는 소식과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실로 달려왔다가 본 장면이 뇌리에 쿡 박혀 떠나질 않았다.

발작하는 시윤. 그런 시윤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던 청호.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갈라서 시윤이에게 피를 먹이던 청호. 기절하듯 잠든 시윤을 껴안고 연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청호.

선화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봤다. 어쩌면 정원이 망쳐 놓은 이 끔찍한 집안에서 시윤을 떠나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온 것이다. 청호에게 시윤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서. 여태 드문드문 봐 온 것으로 말미암아, 청호는 단호하고 잔인하지만 제 사람에겐 항상 너그러웠다. 그들을 존중할 줄 알고, 아꼈고, 위했다.

선화는 시윤이 온전히 청호의 사람이 되길 바랐다. 정원의 나락이 확정된 지금, 시윤을 지켜 줄 수 있는 이는 청호뿐이었다.

“…….”

청호는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미 시윤과 정원을 완전히 떼어 놓은 상태라 선화의 부탁이 무의미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두방정을 떨며 긍정해 주자니 추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고, 썩 꺼지라며 내치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청호에게 아픈 존재라서.

그래서일까. 어째 정원이 더욱 미워졌다. 대체 그 하나 때문에 몇 명이 피해를 보고, 속죄의 길로 자처해서 들어가는 건가.

다시 정적이 자리했다.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선화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선화가 겁먹은 듯한 얼굴로 청호를 응시했다. 청호 역시 굳은 얼굴로 선화를 바라봤다. 그에 부정을 가늠한 선화가 얼른 입을 뗐다.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시윤이를 미워했습니다.”

“……네?”

난데없는 소리에 선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든 말든, 청호는 낮은 목소리로 마음에 묻어 두었던 말을 이어 갔다.

“열두 살. 내가 전장에서 돌아와 발바닥이 터지라 어머니의 행방을 찾을 동안, 나의 어머니가 병원 지하에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갈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던 시윤이가 미웠어요.”

“…….”

“한편으로는 채정원에게 가족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나의 반려 가이드라는 게 저주 같기도 하고, 신이 내게 복수할 칼자루를 쥐여 준 것 같기도 했죠.”

“…….”

“그래서 괴롭혔습니다. 아프게 하고, 울리고, 함부로 대하고, 나쁜 말도 했어요.”

“…….”

“시윤이는 아마…… 제가 준 상처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내가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청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선화가 멍하니 청호를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해에 원망보다는 얼떨떨함이 컸다. 죄를 빌고 자비를 구하러 온 건 저인데. 갑자기 역할이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호가 선화처럼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나를…….”

“…….”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청호의 목소리가 널찍한 병실을 잔잔히 울렸다. 그 말을 들은 선화와 시윤은 넋이 빠졌는데, 정작 그는 담담했다. 소파에서 일어난 시윤이 청호의 곁에 풀썩 쓰러지듯 앉았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대장님. 이러지 마세요.”

청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제가 그를 가이딩하며 울고, 피를 토하던 때를 잊었을 거라 여겼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근데 어째서 청호는 제 어머니에게 이리 절절히 용서를 빌고 있나. 송구하기 짝이 없었다. 이마저도 제 업보처럼 느껴졌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보며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손을 뒤집어 시윤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시윤이와 평생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잠들고 싶고, 그와 함께 일어나고 싶고, 이 끔찍한 세상에서 그를 지켜 주고 싶어요.”

“…….”

“내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청호는 여전히 무덤덤한 낯이었다. 헌데 신기하게도, 그래서 더 진실로 느껴졌고, 그래서 더 애절하게 보였다.

선화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뚝뚝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녀가 청호의 반대 손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

“정말…… 고맙습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더 끔찍한 아비에게서 내 아들을 지켜 줘요. 내 아들을 사랑해 줘요. 내가 평생 속죄할 테니, 당신을 위해 기도할 테니, 부디 내 아들과 행복하길.

선화는 시윤의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으며 온갖 걱정을 늘어놓더니 내일 올 땐 식사를 준비해 오겠다며 바쁘게 병실을 나섰다. 그에 시윤이 ‘내일은 엄마 뒤로 형들까지 줄줄이 올 거’라며, ‘음식이 목젖까지 차오를 만큼 먹어야 할 거’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청호는 나직이 웃으며 시윤의 볼을 매만졌다. 살이 많이 빠졌으니 많이 먹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쩐지 시훈, 시준이 할 법한 말에 시윤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정원은 시윤을 찾으러 나간 이후로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단다. 대체 어디 있냐는 시윤의 질문에 선화는 “모른다. 그이가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라며 일갈했다.

그 후 청호와 시답잖으면서도 시답잖지 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창밖으로 노을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나른해지는 풍경에 시윤이 크게 하품했다.

“졸리면 자.”

청호가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면서 청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이 평온하고 정적인 시간을 잠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청호와 대화하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게으른 고양이 같은 시윤에 청호가 목울대를 일렁이며 웃을 때였다. 똑똑. 또 노크가 울렸다.

“안 바쁘지? 그럼 기부 좀 해라.”

모건이었다.

모건은 시윤에게 다른 에스퍼 병사들을 만나 볼 것을 부탁했다. 대외적으로는 ‘만남’이었으나 실상은 가이딩이었다.

“장벽 전투 때 가이드 막사가 박살 났잖아. 그래서 가이드 없는 에스퍼가 왕창 생겼어. C급 에스퍼들은 폭주 자체를 잘 안하니까 상관없는데, B급이랑 A급 에스퍼는 죽기 직전인 애들이 수두룩해. 몇 명은 이미 죽었고.”

모건이 퍽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그에 시윤의 눈썹이 덩달아 처졌다. 반면에, 청호의 얼굴은 험상궂게 뒤틀렸다. 평생 타인에게 관심일랑 없던 모건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다른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보나 마나 시윤을 꾀어내기 위한 같잖은 연기겠지.

“시윤이 네가 SS급이니까 가볍게 손만 잡아 줘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살릴 수 있는 애들은 살려야지. 죽게 둘 순 없잖아.”

그 말에 청호가 하, 조소했다. 제 가이드가, 저의 시윤이가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한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말도 안 됐다.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그냥 죽으라지.

만면 가득 심술을 채운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본성부터가 이타적이며 공감성이 높은 시윤은 이미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청호가 뿌득 이를 갈며 모건을 노려봤다. 모건이 그런 청호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승리의 미소였다.

청호가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훑었다. 뭔가 뾰족한 게 있을 텐데. 주삿바늘이나 메스 같은 거. 단번에 모건의 목을 갈라낼 수 있는 거.

청호가 마침 찻잔 하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저걸 통째로 모건의 머리에 박아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대장님. 같이 가요.”

나갈 준비를 끝낸 시윤이 청호를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청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자 모건이 쑥 얼굴을 내밀며 히죽거렸다.

“그래, 시윤이가 또 폭주할지도 모르니까 네가 옆에 있어야지.”

저 멀리 있던 찻잔이 들썩거렸다.

연구센터로 향하는 길. 시윤이는 오랜만에 바깥에 나온 게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봐야 부대 안인데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크게 들이마시고, 바지런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안부를 묻는 에로아스 병사들과 이런저런 대화도 주고받았다.

청호는 세 걸음 정도 떨어져 걷고 있었다. 빙글빙글, 얄밉게 웃고 있는 모건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기 위해서였다.

“미쳤지, 아주?”

청호가 시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으르댔다. 모건이 짐짓 순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시윤이 능력도 확인하고 좋잖아. 지금 시윤이는 이것저것 해 봐야 해. 갓 태어난 애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배우는 것처럼.”

“좆 까. 그렇게 깊-은 생각 아니잖아. 시윤이 가지고 연구할 요량이면서.”

“……뭐, 연구해서 나쁠 건 없지. 시윤이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다른 에스퍼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시윤이도 좋아할걸.”

“나는 싫어. 시윤이는 내 반려야. 나만 가이딩하면 돼.”

청호가 단호히 말했다. 모건은 흐음, 목으로 신음하더니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한들, 청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앞서 걷던 시윤이 불편한 몸짓으로 코트 소매를 걷어 올렸다. 병실에서 나오기 직전, 청호가 입혀 준 청호의 코트였다. 묵직하게 박힌 별 네 개에 붉은색 견장, 커다란 품, 두꺼운 모직은 시윤이 입기에 영 버거워 보였다. 코트를 입었다기보다는 코트에 잡아먹혔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모건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좁혔다. 어느샌가부터 청호의 코트를 청호보다 시윤이 더 많이 입고 있는 것 같은데.

“시윤이도 코트 하나 만들어야겠다.”

“코트?”

“어. 네 거랑 똑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줄게.”

모건 딴에는 선의였다. 거기다 같은 디자인이니 청호가 좋다고 웃을 줄 알았다. 근데 예상외로 청호가 확 미간을 구겼다.

“싫어.”

“또 싫어? 넌 뭘 다 싫어해? 뭐가 싫은데? 코트 만드는 게? 그게 왜 싫어?”

“내 거 입게 놔둬.”

“왜?”

“귀엽잖아.”

청호가 묘하게 뒤뚱뒤뚱 걷는 시윤의 뒷모습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꼭 이불을 뒤집어쓰고 걷는 듯한 시윤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돌돌 말아 올린 소매 아래로 보이는 가느다란 손목도 예쁘고, 이따금 코트 뒤를 추켜올리는 것도 깜찍하고, 마치 제 것인 양 익숙하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것 역시 사랑스러웠다.

푸근한 미소를 띠는 청호와 달리 모건은,

“……미친놈.”

똥이라도 씹은 듯 얼굴을 구겼다.

연구센터에는 가이드 없는 에스퍼 수십 명이 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결같이 몰골이 엉망이었다. 그들이 폐병에 걸린 환자처럼 기침할 때마다 하얀 바닥 위로 피가 뿌려졌다. 그 덕에 하나같이 입술이 시뻘겠다. 반면 얼굴은 백지장이거나 녹빛이었다.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먼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가이드가 없어 역류하는 피를 수시로 삼키던 때 말이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폭주가 오면 삼키고, 홀로 어둠에 틀어박혀 묵묵히 고통을 견뎌 내던 제 모습이 투영됐다.

그래서 시윤이 에스퍼들을 만나는 걸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저는 언젠가 제 반려 가이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 저들은 있던 가이드가 죽었으니 그 희망조차 없을 터였다.

시윤은 에스퍼들의 손을 하나하나 공들여 잡아 주었다. 가이드 막사가 폭발한 게 제 탓도 아닌데, 묘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던 터라 더욱 열심히 했다.

다행히 시윤의 가이딩은 효과가 좋았다. SS급이다 보니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에스퍼들의 구멍 난 장기와 뒤틀려 있던 근육이 본모습을 찾아 갔다. 모건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시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이딩은 길었다. 그동안 모건은 옆에서 시윤과 에스퍼의 몸 상태를 상세히 기록했고, 청호는 눈치 없이 포옹이나 더 깊은 스킨십을 원하는 에스퍼에게 있는 힘껏 눈을 부라려 주었다.

시윤을 만난 에스퍼들은 신의 실체를 보고 감동한 신자들처럼 황홀한 얼굴로 연구센터를 나섰다. 청호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고지식한 과학자 같은 얼굴이었다.

모든 가이딩이 끝나고, 연구센터에서 나왔을 땐 한밤중이었다. 저 멀리서 밤 벌레 소리가 들리고, 찬 바람이 머리칼 사이를 헤쳤다. 시윤이 뿌듯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저는 전장에 나가서 클롭스를 죽이는 게 제일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이것도 꽤 멋진 것 같아요.”

“……결국 누군가를 살렸다는 건 똑같으니까.”

청호가 시윤의 어깨 아래로 내려간 자신의 코트를 추켜올렸다. 시윤이 씨익 웃으며 고양이처럼 청호의 팔뚝에 볼을 비볐다. 청호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에로아스 병사들은 몇 미터 떨어져 따라왔다.

시윤이 화한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흘끔 청호의 안색을 살폈다. 청호는 특유의 무감한 표정으로 앞만 직시하고 있었다.

“대장님.”

“응.”

“화나셨어요?”

“화? 아니.”

청호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시윤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옆으로 흘렸다.

“왜요?”

“어?”

“왜 화가 안 나셨지.”

시윤이 흐음, 자못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청호가 덩달아 눈썹을 구겼다.

“화가 나길 바란 것 같은 말이네.”

“맞아요.”

“어째서?”

“저는 대장님이 저 말고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받으면 무지 화날 것 같거든요. 대장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깜찍하기 그지없는 시윤의 발언에 청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지한 모습으로 에스퍼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주면서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시윤답지 않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그가 절 사랑하긴 하는구나, 싶어서 기쁘기도 했다.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감싸고 볼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화났어. 네가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게 끔찍하게 싫어. 짜증 나. 걔들 목을 다 비틀어 버리고 싶었어.”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안 했을 텐데.”

“걔들 모습이 내가 널 만나기 전이랑 비슷하길래.”

“…….”

“그리고 내가 잠깐의 질투를 참아서 걔들이 한 달 더 살 수 있다면, 참는 게 맞지 않겠어?”

청호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에 시윤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청호가 덩달아 멈춰 섰다. 그러곤 의아한 눈빛으로 시윤을 내려다봤다.

시윤은 아무런 말 없이 빤히 청호를 올려다봤다. 청호가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다물린 입은 떨어질 줄 몰랐다. 청호가 자신의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실수했나. 제 검은 속내를 오롯이 보이면 시윤이 싫어할 거라 생각해서 너그러움을 흉내 냈거늘. 그른 판단이었을까.

청호가 말을 정정하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시윤이 와락 청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대장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

예상치 못한 칭찬에 청호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좋은 사람이라. 영웅 취급은 수도 없이 겪었으나 이렇게 과분한 취급은 또 처음이었다.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저는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잔인한 데다 감정에 무디기까지 한데.

……뭐. 시윤이 그리 생각하면 됐지. 이런 오해라면 두 손 들고 환영이었다.

청호가 뿌듯한 얼굴로 시윤을 마주 안았다.

시윤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와인 몇 잔을 기울이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시윤의 이불을 추슬러 준 청호가 병실 문을 조심히 닫고 나왔다. 폴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대장님.”

“박종우는? 찾았어?”

“아니요. 얻은 게 없습니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청호가 짜증스레 이마를 쓸어 올렸다. 종우의 행방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휴의 도움을 받아 포스 바깥에 있는 걸까. 그건 아닐 텐데. 하나뿐인 그의 어머니도, 복수의 대상인 시윤도 포스 안에 있는데 멀리 있을 리 없었다.

“박종우 모는?”

“여전히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탐문 결과 박종우가 먼 곳으로 출정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합니다.”

소득 없는 보고였다.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수들은?”

“여태 동쪽 별채에 모여 있습니다.”

“미친놈들. 거기 모여서 머리 처박고 있으면 묘안이 생긴대?”

청호가 비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에로아스의 쿠데타는 싸움 없이 승리로 끝났다. 일반 국민과 군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마 별다를 거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리라.

청호가 에로아스 부대를 이끌고 교도소에서 나오는 순간, 원수들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헐레벌떡 자취를 감췄다. 그래 봐야 포스 안이었지만, 어쨌든 도망이었다.

에로아스는 텅 빈 포스를 착실히 집어삼켜 갔다. 통신을 장악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원수들 곁에 붙어 영악한 짓을 하던 놈들은 죄 포스 밖으로 던져 버렸다. 하나같이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힘은 없으면서, 움직일 줄 아는 건 나불거리는 입술뿐인 것들.

원수들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척결할 수 있었다. 다만 재판 없이, 명목 없이 죽여 버리면 그저 살인이라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채정원은?”

“그 역시…… 행방이 묘연합니다.”

청호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좁혔다. 이제 정원과 종우, 두 명만 정리하면 되는데. 그 두 명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잡히기만 제가 잘근잘근 씹어 먹을 걸 알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마른 입맛을 다신 청호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이만 물러가란 뜻이었다. 폴이 바른 자세로 경례하고는 뒤를 돌았을 때였다.

“대장님.”

알렌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런 알렌의 뒤로 익숙한 인영 하나가 따라왔다.

* * *

해가 뜨기까지 꽤 시간이 남은 새벽이었다. 와인을 마신 시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청호는 그를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밤 벌레조차 잠든 모양인지 세상이 고요했다. 느리게 부유하는 달빛만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 사이로 시윤의 숨소리가 평화로이 흘렀다. 이대로 아침을 맞는다면 제법 완벽한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소음일랑 없이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방문객의 숨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척을 지나치게 숨긴 걸음걸이였다.

달빛이 방문객을 향해 오밀조밀 모여들었다. 그 덕에 길쭉한 그림자가 더욱 짙고 무거워졌다.

청호와 시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평화로운 밤에 빠져선 낯선 등장인물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방문객은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청호와 시윤이 깊이 잠든 게 맞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

전과 다른 정적이 흘렀다. 묘하게 복잡한 정적이었다. 분명 조용한데, 모순적이게도 시끄럽게 느껴졌다.

방문객이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림자가 은근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난데없이 환한 보랏빛이 푸르게 물들어 있던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청호의 미간에 총구가 겨누어졌다.

날카로운 살의에 청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큼지막한 샷건이 눈을 부릅뜨고 청호를 직시하고 있었다. 샷건 또는 산탄총이라 불리는 총기는 여타 총과 달리 탄환이 흩어진다. 배나 가슴에 맞으면 농구공만 한 구멍이 생겼다. 근데 그걸 머리에 겨누다니. 방문객은 청호의 머리통 전체를 터트려 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

“…….”

청호가 슬쩍 눈동자를 돌려 방문객을 바라봤다. 정원이었다. 그새 머리가 희게 세어 폭삭 늙어 보이는 정원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말 없이, 또 움직임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보라색 원이 침대 아래를 지배한 지금, 청호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청호가 아무리 SS급이라 한들, 다른 능력자의 능력을 쓸모없게 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정원은 S급이 아니던가.

청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제 품에 안긴 시윤을 흘깃 바라봤다.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염력을 써 총알을 다른 곳으로 날릴 수야 있겠지만, 그러다 잘못 터지기라도 하면 시윤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반면에 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아쇠 위로 검지를 올렸다. 그는 청호만 죽이면 다 정상으로, 과거로 돌아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려를 잃은 시윤이 한동안 슬퍼하긴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상처는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거다. 다 겪고, 다 잊고 살아가는 것이니 시윤 역시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

거치적거리는 에로아스 역시, 청호가 죽으면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 능력이 출중한 병사들이지만 그래 봐야 A급이고 저를 비롯한 원수들이 막아 내면 하루면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청호만 죽으면, 청호만 죽으면 모든 게 다시 제 손아귀에 들어온단 말이다.

정원이 계획인지 상상인지 모를 나래를 펼쳐 가고 있는데,

“병신.”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그런 정원을 비웃었다. 총구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일랑 하등 없는 얼굴이었다.

정원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청호는 어찌하여 저리 여유롭게 저를 비웃나. 평생 죽음과 함께해 온 터라 그런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까지 저를 조롱하려 저러는 것인가.

정원은 청호가 제 힘을 깨고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런 청호의 모습이 이해될 리 없었다.

정원이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청호가 그의 기회를 가로챘다.

“당신은 멍청해.”

“……뭐?”

뜬금없는 소리였다. 제 어미를 죽인 살인귀라며 원망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비난이라니.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정원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잊고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그러자 청호가 친히 그가 멍청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살기에 급급한 인간들을 모아 두고 왕처럼 군림하면서 당신이 똑똑한 줄 알았겠지. 계획하는 대로 착착 이루어지니 모든 게 당신 것 같았겠지. 포스를 만들어 줘서, 인간의 에덴을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신이라도 된 듯 우월감을 느꼈을 거야.”

“…….”

“이젠 아니야. 나는, 우리는, 더는 바깥의 괴물이 두렵지 않아.”

“…….”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해. 네가 지배하던 우매한 인간들과 다르단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죽을 때가 되니, 너도 놀릴 게 입밖에 없나 보구나.”

정원이 시니컬하게 조소했다. 그래. 저는 여태 자신이 왕이고, 신인 줄 알고 살아왔다. 사실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는 방사능에 절은 풀 따위를 캐 먹고 사는 인간을 구원했고, 그들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주었다. 청호 또한 제가 구원한 인간 중 하나였다.

그런 주제에 저를 비난하다니. 역시, 청호는 죽는 게 맞는다. 정원이 쯧 혀를 차며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봐봐. 나를 죽이겠다고 여기 온 것도 얼마나 멍청해.”

청호가 눈치 없이 또 정원을 살살 놀려 댔다. 근데 이번엔 좀 께름칙한 말이었다. 여기 온 게 멍청하다니. 휘청이는 정원의 눈동자를 본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잡아 쨌다.

“여기까지 오는 데 보초 하나 없지 않던?”

“…….”

“근데 설마 내가 묵는 곳에 보초가 없을까. 온종일 내가 죽을까, 아플까 걱정하는 내 병사들이 나를 혼자 둘 리가 없지 않아?”

“너…….”

“그래. 당신을 기다리면서 비워 둔 거지.”

청호의 문장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퓩. 어둠 속에서 은빛 총알 하나가 날아왔다. 그것은 정원의 등을 뚫고,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혔다.

“큭…….”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타격에 정원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혔다. 그가 붉은 꽃이 피어나는 가슴팍을 더듬었다. 아프다.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통각인지 모르겠다. 근래 선화에게 가이딩을 받지 못한 터라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가 총알이 날아온 곳을 향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검은 달그림자 안에 숨은 이는 쉽사리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넌 뭐야……?”

“나는 당신 아들의 죄야.”

어둠 속에 숨은 이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 아들의 죄라니.”

정원이 다시 물었다.

“…….”

그러나 신원이 모호한 인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둠 밖으로 두 걸음 걸어 나왔다. 정원이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안다고 하기엔 뭣하고 눈에 익은 얼굴.

교도소에서 청호가 가르쳐 줬던, 박종우 하사였다. 시윤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라기에 그의 입대 정보를 보고 또 봤었다.

“허…….”

결국 그도 청호의 끄나풀이었나. 헌데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나. 저는 왜 그걸 몰랐나.

포스에 있으면, 정원은 지나치게 해이해졌다. 제가 만든 나라에, 제가 세운 건물에, 제가 뽑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보초가 하나도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항상 편안하게 걷던 길이었으니까.

결국엔 제 오만방자함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어쩌면 청호의 말대로 제가 정말 멍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아버지?”

청호의 품에 안겨 있던 시윤이 눈을 떴다. 그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정원을 쳐다봤다. 정원이 흡 숨을 멈췄다.

“진짜 아버지세요?”

시윤이 탁한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 아버지가 맞나? 아버지가 왜 여기?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그의 손에 들린 저것은 설마 총인가?

시윤은 갑자기 등장한 정원에 눈을 몇 번이고 깜빡여야 했다. 그러다 제 등 뒤에 있는 청호의 체온을 느끼고서야,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와 비릿한 피비린내, 그리고 구석에 서 있는 종우의 존재를 인지하고서야 이것이 꿈이 아니라 실제임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를 안은 청호와,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정원과, 또 정원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종우라니.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혼란스러운 광경이었으나,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총구가 향해 있는 방향만 봐도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또 진행될 예정인지 알 수 있었다.

시윤이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일단은 청호를 겨누고 있는 총부터 없애야 했다.

“아버지, 총 내리세요.”

시윤이 상체를 일으키며 정원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청호가 그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품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기는 바람에 일어나지 못했다.

“대장님.”

당황한 시윤이 청호의 손을 풀어 보려 전전긍긍하는데,

“이놈……!”

정원이 으득 이를 짓씹으며 눈을 번뜩였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래. 저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이까짓 총상, 조금만 치료받으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청호만 죽이면, 청호만…….

정원이 자세가 흐트러지며 아래로 고꾸라졌던 총구를 다시 추켜올렸다. 거슬리는 종우의 발아래엔 보라색 원을 하나 만들어 뒀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는데,

퓩.

소음기를 통과한 총성이 다시금 울렸다. 붉은 피가 폭발하는 것처럼 허공에 흩뿌려졌다. 종우가 쏜 총알이 정원의 뒤통수를 뚫고, 오른쪽 눈을 관통했다. 뇌수와 피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채 튀어 올랐다.

“…….”

정원이 뻐끔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말은커녕 숨 한 자락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하나 남은 눈알이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아갔다. 잘생긴 콧잔등을 타고 진득한 피가 흘렀으며, 들고 있던 샷건은 투닥탁,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더니 누가 세게 떠민 것처럼 털썩 아래로 쓰러졌다. 여기저기 피어 있던 보라색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시윤이 텅 빈 눈동자로 정원이 서 있던 허공을 응시했다. 일순 심장이 멎었다. 갈비뼈가 확 안으로 조여들었고,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전신에 두드러기처럼 소름이 돋아났다.

시윤이 파르르 경련하는 눈동자로 바닥에 널브러진 정원을 쳐다봤다. 무서운 속도로 번지는 붉은 웅덩이 위에 누운 정원이 매우 비현실적이었다. 근데 또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기도 했다.

시윤은 정원을 따라 머리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많은 장면이, 시간이 그의 머릿속과 눈앞을 정복해서 그랬다.

‘시윤아.’

‘내 아들.’

‘능력자가 아니라도 괜찮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하게 해 주마.’

‘공부가 힘들진 않니?’

‘첫 출근은 어떻더냐?’

‘연구실은 마음에 들고?’

‘선화가 종일 네 걱정이야. 군대에는 아무래도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놈들이 많으니 말이다. 어젠 새벽까지 걱정을 어찌나 하는지. 내가 다 잠을 못 잤다니까.’

‘시훈이랑 시준이가 금요일에 복귀한단다. 주말에 놀러 갈까?’

‘시윤아. 자니?’

‘어쩌다 감기에 걸렸어.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니까. 먹고 싶은 건 없고?’

‘복숭아다. 네가 좋아하는 거. 질릴 만큼 먹고 나면 형들 주고, 응?’

더는 제 아버지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다정하고 친절했던 아버지는 사악한 악마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리도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시윤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차오르고 차오르던 눈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려 할 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눈을 가려 왔다.

청호였다. 그가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윤아.”

“…….”

“시윤아, 숨 쉬어.”

그 말에 시윤은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청호가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살살 쓸어 주었다. 그러자 꽉 뭉쳐 있던 숨이 구역질처럼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줄줄 비처럼 쏟아졌다.

시윤이 청호의 소매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끊임없이 청호를 불러 댔다.

“대, 대장님……. 대장님…….”

아버지가, 아버지가……. 머리에 피를…… 설마, 진짜 돌아가신 건 아니겠죠? 아버지는 강하니까, 치료하면 살 수 있겠죠? 차마 뒷말을 내뱉진 못했다. 청호의 앞에서 정원을 아버지라 칭하는 게 매우 부도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윤은 입술을 세게 깨문 채 몸만 덜덜 떨어 댔다.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는 슬픔을 감내하기 위해서였다. 슬퍼하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청호의 앞에선 그러면 안 된다. 나중에 혼자, 혼자 있을 때. 그때 슬퍼해야 했다.

“괜찮아. 울어도 돼.”

청호는 자비롭게도, 시윤이 우는 걸 허락해 주었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토해 냈다. 두통이 일었다. 눈이 홧홧할 정도로 서럽게 울어서인지, 코끝이 매캐할 정도로 강렬한 피 냄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청호가 시윤을 안은 채 종우를 바라봤다. 종우 역시 우직하니 서선 한 몸처럼 붙어 있는 청호와 시윤을 쳐다봤다.

몇 시간 전.

‘대장님.’

다급하게 뛰어온 알렌 뒤엔 종우가 서 있었다. 멀끔한 차림새로 어찌나 평온히 서 있는지. 청호는 잠깐 자신이 헛것을 보나, 종우가 죽어서 귀신이라도 됐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진짜 종우라는 걸 알고는 냅다 멱살부터 움켜쥐는데,

‘오늘 밤에 채정원이 올 겁니다.’

라고 종우가 말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청호가 눈썹을 들썩였다. 그가 종우의 멱살을 바짝 당겨 고압적으로 시선을 맞췄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는 포스에 존재하는 모든 기기와 정보를 해킹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채 원수 집에서 찾으셨던 칩도 제가 알려 드린 겁니다.’

‘…….’

‘채시윤을 본가에서 빼내 교도소로 갔던 날, 그 집에 있는 모든 차에 GPS를 붙여 놨습니다. 그리고 채시윤이 죽고 난 이후, 차 하나가 지나치게 멀리 이동했고요. 보나 마나 채 원수가 타고 있었겠죠.’

종우는 청호의 기백이 무섭지도 않은지 무감한 얼굴로 긴 문장들을 줄줄이 이어 갔다.

‘채 원수는 포스 외곽 별장에 숨어 있었습니다. 채 원수가 가족들을 위해 짓던 곳인데, 아직 공사가 덜 끝나서 그가 소유한 건물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죠. 그래서 대장님이 못 찾으셨을 겁니다.’

‘…….’

‘아무튼. 숨어 있던 채 원수가 이리로 오고 있어요.’

청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종우의 말을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 거였다. 종우는 이미 청호를 속인 전적이 있는 이였으니까. 그래서 시윤이 완전한 죽음을 경험했고, 저는 차갑게 식은 그를 껴안고 무거운 절망을 느껴야 했다.

붉게 물들어 있던 에펠 탑을 떠올린 청호가 종우의 멱살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발이 공중에 들린 종우가 쿨럭 기침했다.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와중에도 조곤조곤 입을 놀려 댔다.

‘아마 정신이 조금 몽롱한 상태일 겁니다. 판단력도 흐려졌을 거고, 조금만 자극해도 지나치게 흥분할 거예요. 각성제랑 이것저것을 섞어 투약했거든요.’

그 말에 놀란 청호가 종우의 멱살을 놨다.

‘뭐? 네가 채정원 목에다가 주삿바늘이라도 꽂았다는 거야?’

‘아니요. 당신들이 휴라고 부르는 그분이 도와주셨습니다.’

벽을 짚고 간신히 중심을 잡은 종우가 따끔따끔한 목을 더듬었다.

청호의 입술 끝이 꿈틀거렸다. 휴가 도와줬다, 라. 어쩐지 기분이 더러웠다. 그냥 휴나 종우가 관련된 일이면 하나부터 열까지 죄 짜증이 났다.

‘채시윤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이게 사과가 될진 모르지만, 청호 네가 원하는 대로 풀리길 바라, 라고도 하셨고요.’

‘……좋아. 용서해 줄 생각은 없지만, 주는 건 받지. 그래서 그 말 전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겁이 없네.’

청호가 다시 종우를 염력으로 끌어왔다. 그건 그거고, 종우는 저를 속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청호의 그림자에 잠긴 종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복수하러 왔습니다.’

‘……복수?’

청호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종우가 복수할 대상이라곤 시윤밖에 없었으니 당연했다.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 버릴 듯한 청호의 기세에 종우가 바람기가 많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십시오. 채시윤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채 원수를 죽일 겁니다.’

단조로운 목소리였으나 파급력은 대단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청호의 눈이 시리게 번뜩였다. 잠시 종우를 응시하던 청호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흘렸다.

‘채정원을 죽이겠다고?’

‘예. 대장님에겐 좋은 기회 아닙니까? 어쨌든 채 원수는 죽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대장님이 죽이실 순 없잖습니까. 채시윤이 슬퍼할 테니까요. 대장님 얼굴을 볼 때마다 죽은 채 원수를 떠올리겠죠.’

‘…….’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으시니 꾸역꾸역 시간을 끌고 계신 거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호는 정원을 언제든,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실행하는 건 차마 제 손으로 못 할 터였다. 제 병사들에게 떠넘기겠지. 살인을 떠넘긴다기보다는, 시윤의 원망을 떠넘기는 거였다.

근데 종우가 그것을 대신해 주겠다고 하는 거다. 청호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지.

‘그러니 제가 죽여 드리겠습니다. 저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지요. 제 생명의 은인인 대장님의 앓던 이를 빼 주고, 채시윤에겐 복수까지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요.’

청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실로 군침이 도는 제안이었다. 청호가 혀끝으로 자신의 입천장을 긁으며 득과 실을 저울질하는데, 종우가 제법 스산한 얼굴로 말했다.

‘대신, 더는 제 어머니를 감시하지 마십시오. 이 일이 끝난 후 다시는 대장님과 채시윤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제대도 할 겁니다. 애당초 군인이 체질에 맞지도 않았어요.’

‘…….’

‘어머니를 따라 농사일을 하고 싶습니다. 비가 오면 어쩌나, 비가 안 오면 어쩌나, 그런 것만 걱정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매일 누군가를 원망하고, 복수를 계획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종우의 눈썹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처연하면서도 서글픈 낯엔 거짓이라곤 없었다.

채정원을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 눈앞에서 사라져 주겠다, 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청호가 잃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청호는,

‘좋아.’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종우가 품 안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투닥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것은 사화산에 즐비하던 알의 껍데기였다. 능력자의 능력을 무력하게 만들던 그 알들 말이다. 종우가 정원의 보라색 원 위에서도 총을 쏠 수 있었던 건 이 껍질 덕분이었다.

종우가 뚜벅뚜벅 청호와 시윤을 향해 다가갔다. 청호가 눈을 부릅떴다. 할 일 다 했으면 수작 부리지 말고 꺼지라는 눈빛이었다. 종우가 아무 짓도 안 하겠다는 듯 두 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더니 시윤과 대화하고 싶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모든 몸짓은 시윤이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청호가 시윤을 추슬러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시윤이 눈물에 흠뻑 젖은 눈으로 종우를 쳐다봤다.

종우가 들고 있던 총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시윤이 그것을 허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익숙한 총이었다. 곡선을 그리고 있는 손잡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녹색빛. 그리고 깊이 박힌 ‘C.S.H’ 이니셜. 먼 옛날 정원이 시훈의 입대 선물로 주었던, 또 열여섯 살의 제가 잃어버렸던, 그 후엔 종우가 가지고 있던 그 총이었다.

종우가 차가운 눈으로 피를 질질 쏟아 내는 정원을 내려다봤다. 죽은 정원과 서럽게 우는 시윤. 꽤 통쾌한 광경이었다.

“내 복수는 끝났습니다. 준위님도 내 아버지를 죽였고, 나 역시 준위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까요.”

“…….”

“더 이상 내게 속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

종우는 할 말을 끝내자마자 뒤를 돌았다. 그러곤 퍽 가벼운 걸음걸이로 병실을 나섰다.

시윤은 눅눅하게 젖은 얼굴로 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죽은 정원을 향해 시선을 움직이는데, 청호가 그를 번쩍 들어 자신과 마주 보도록 무릎에 올렸다. 그가 엄지로 시윤의 눈가를 살살 쓸어내렸다. 뜨끈한 눈물에 가슴이 아팠다.

“네가 죽인 거 아니야.”

“흐윽, 하지만…….”

“네가 죽게 한 것도 아니야.”

“대장……님…….”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너는 그저 잘못된 인간에게서 태어났을 뿐이다. 너 역시 피해자일 뿐이다. 모든 잘못은 정원이 지었고, 그런 그를 창조한 신이 가장 큰 죄인이다.

청호의 나직한 목소리에 시윤이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청호가 시윤의 등을 다정하게 도닥였다.

그렇게 5분쯤 흘렀을 무렵이었다. 청호가 한쪽으로 손을 뻗자 곱게 걸려 있던 코트가 날아왔다. 그것으로 시윤을 덮고, 조심히 안아 들었다. 아무래도 병실을 옮기는 게 좋을 듯했다.

침대에서 내려온 청호가 죽은 정원을 잠시 내려다봤다.

참으로 볼품없는 말로였다. 그래서 정원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통쾌했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소리 없이 웃은 청호가 맨발로 병실을 가로질렀다. 그새 반쯤 굳어 질퍽해진 정원의 피가 발바닥을 적셨으나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 * *

비가 추적추적, 우울하게 오는 날. 정원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청호는 시윤이 제 눈치를 보며 장례식 참석을 허락받기 전에, 미리 다녀오라고 말해 주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연인인 척하기에 참으로 좋은 상황이었다.

시윤은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돌아왔다. 청호는 마음 같아선 가족들과 하룻밤 보내고 오라 하고 싶었으나, 행여 그의 쌍둥이 형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시윤을 빼돌릴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시윤이 혹 장례식에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으나 그것도 거절했다. 제가 가 봐야 불청객이지. 아마 가족들은 제 눈치를 보며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할 터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울고 들어올 줄이야.

시윤은 얼마나 운 건지,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 살갗이 죄 일어나 있었으며 눈알은 붉었다. 청호가 못마땅한 낯으로 시윤의 짓무른 눈가를 쳐다봤다. 아플까 봐 차마 만지진 못하겠고, 폴을 시켜서 모건에게 약을 받아 오라 일러야겠다, 생각했다.

청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윤답지 않게 거친 볼을 쓰다듬었다. 그런 청호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던 시윤이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울어서…… 죄송해요.”

“그게 왜 죄송해. 안 그래도 돼.”

“…….”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에 죄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호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본디 정이 많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시윤이다. 오히려 정원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으면 이상하다 생각했을 터였다.

어차피 정원은 죽었고,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윤이 아무리 슬퍼하다 한들, 그가 돌아올 리 없다는 거다. 그러니 시윤이 정원의 죽음을 애도하고 가끔 그를 그리워한대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 슬픔이 길지 않길 바랄 뿐.

청호가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밥은 먹었어?”

“아니요. 배가 안 고파서…….”

시윤이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영양제만 먹고 일찍 자자.”

청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만히 보던 시윤이 천천히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에 어쩐지 속이 편해졌다.

정원의 죽음 이후, 청호는 본격적으로 원수들을 단죄할 준비를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이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곳에 쳐들어가 단번에 처리하고 싶다만, 그러면 복수를 꿈꾸는 이가 또 생길 것이다. 종우나, 청호 자신처럼.

그러니 더할 나위 없이 정당하게 죽여야 했다. 응당한 벌을 받았다고, 다 본인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당연한 죽음이었다고 기록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청호는 바빴다. 준비할 것도 많았고, 대비해야 할 것도, 조심해야 할 것도 많았다. 대충, 흐지부지 처리했다간 무력으로 권력을 빼앗은 게 돼 버릴 터였다.

그렇게 원수들의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청문회에 포스 전체가 들썩거렸다. 원수들을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굴러가던 포스라 청문회라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기도 했고, 주최자가 청호라 관심이 대단했다.

물론, 원수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하나같이 그들다운 이유였다. 몸이 아프다, 감기에 걸렸다, 우울증이다, 날씨가 너무 춥다, 청문회를 열 이유가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갑작스러운 소환이라 응해야 할 의무가 없다, 등등.

청호는 물론, 일반 국민 역시 혀를 찼다.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즐비한 이 세상에, 부모나 아들딸이 죽는 걸 구경만 해야 했던 사람이 수두룩한 이 세상에 감기와 우울증은 ‘병’이라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청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어차피 원수들이 참여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굳이 참여시켜서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반복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댈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청호는 오랜만에 정복을 차려입었다. 넥타이까지 하고 구두를 신는데, 그와 같이 정복 차림을 한 시윤이 현관으로 나왔다.

“……왜?”

청호가 어딘가 께름칙한 얼굴로 물었다.

“저도 가고 싶어요.”

“안 와도 된다니까.”

“저도 참석할 자격 됩니다. 포스 국민이면 얼마든지 참석할 수 있다고 적혀 있던데요. 질의를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실제로 보고 싶어요.”

시윤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청호가 난처하다는 듯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윤이 봐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며칠 전에 죽은 제 아비의 또 다른 실체만 알게 될 텐데.

슬퍼할 게 뻔했다. 그러곤 또 제게 사죄하겠지. 그런 아비 아래에서 태어난 자식이라 미안하다고. 아무것도 몰라서 미안하다고.

청호는 시윤이 우울해하는 게 싫었다. 제게 사과하는 것도 싫었고, 우는 것도 싫었고, 자신이 저지른 죄도 아닌데 중죄를 저지른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것도 싫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 청문회가 끝나면 원수들의 가족이, 그러니까 시윤을 비롯한 그의 가족이 국민의 적이 될 텐데. 그 혐오를 굳이 현장에서 맞닥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청호가 어떻게 시윤을 말리나, 계급을 들먹이며 명령이라도 해 볼까, 고민하는 차였다.

“울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시윤이 제법 호기롭게 말했다. 두 눈은 크게 치켜떴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

청호가 들고 있던 모자를 꾹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시윤의 와이셔츠 칼라를 매만지며 말했다.

“네 어머니를 불러.”

“예?”

“어머니와 함께 참석한다면, 허락할게.”

“…….”

“네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큰 진실일 것 같아서 그래. 오늘은 내가 네 옆에서 손잡아 줄 수 없으니까. 어머니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어?”

청호가 빙긋 보기 좋게 웃었다. 그런 청호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시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칭찬하듯, 시윤의 턱을 감싸 쥐고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 * *

청문회는 참석자가 많았다. 대부분 군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먹고살기 바쁜 민간인들은 청문회가 뭔지, 왜 하는 건지도 모를 터였다. 그래도 제법 단정하게 입고 온 민간인 몇몇이 있긴 했다.

시윤과 선화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선화가 긴장한 표정으로 시윤의 손을 쥐었다. 시윤이 괜찮다는 듯, 그녀의 마른 손을 도닥였다.

사실 시윤이 청문회를 꼭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포스 전 지역으로 생중계되고 있었고, 누군가는 밥을 먹으면서 누군가는 소 젖을 짜면서, 또 누군가는 공장에서 청문회를 보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그 현장을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제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청호가 이리 구는 건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했다.

사실 걱정이 목까지 차서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정원이 청호의 어머니를 죽인 건 알았으나, 또 다른 죄까지 저질렀을 줄은 몰랐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가족을 죽여 병기를 만들자는 사고방식을 지닌 정원이, 다른 죄는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고 여긴 게 더 이상했다.

근데 당시의 현실이, 청호에 대한 미안함이,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커서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그래서 온 것이다. 제 아버지의 죄를 온전히 마주하려고.

장내가 촘촘히 채워졌다. 가장 상석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와 앉았다. 검은색 슈트에 붉은색 루비가 인상적인 브로치를 한 여자. 시윤도 아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아는 이는 아니었고, 이런저런 소문으로 뜬구름 잡듯 알았다.

올리비아 헬렌. 포스가 만들어질 때 개국 공신 원수들과 함께했지만 능력자가 아니라서 이렇다 할 직위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시윤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엔 장내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입을 꽉 다문 채 데구루루 눈알만 굴려 댔다.

청호였다. 청호가 부하 병사 몇몇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먼 거리인데도 굵직한 이목구비와 큰 키, 그리고 거대한 위압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붉은 견장과 반짝이는 계급 배지가 오늘따라 유독 멋졌다.

모든 이가 태산 같은 청호를 바라봤다. 아마 청문회고 뭐고 청호가 참석한다기에 혹 그를 볼 수 있을까 싶어 온 이들도 꽤 있을 터였다.

시윤이 어깨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청호를 보는 게 몹시 오랜만이라 신기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전에는 이렇게 먼 거리나마 그를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먼 거리가 어색하다. 매일 안고 자고, 손을 잡고 다녀서.

시윤이 주책맞게 치솟는 입꼬리에 힘을 주는데, 선화가 시윤의 손등을 두드렸다.

“청호 대장은 아침 먹었니?”

“네. 같이 먹었어요.”

“나중에 엄마가…… 엄마가 도시락 같은 거 싸 가면 청호가 싫어하려나?”

“어……. 아무래도 불편해하시지 않을까요.”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난색을 표했다. 선화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곧 옅은 한숨과 함께 턱을 주억였다.

“그렇지? 그럼 네가 집에 한 번 들러. 싸 줄 테니까 가져가서 같이 먹어.”

시윤이 알겠다는 듯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 청호가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헬렌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헬렌이 마이크를 앞으로 끌어당겨 왔다.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그녀의 말이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허리를 꼿꼿이 펴곤 그녀에게 집중했다.

“포스의 개국 공신이자 군 원수인 채정원, 해리 트래더, 릭 호프만, 마이클 크라우즈의 청문회를 상정합니다.”

헬렌이 의사봉을 탕, 탕, 탕 세 번 두드렸다. 그러곤 양손을 깍지 끼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카메라와 눈을 맞췄다.

“오늘 청문회에서는 포스의 전반적인 정치 및 정책을 책임지고, 클롭스의 위협 대비, 안전과 평화를 권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원수들의 계급 윤리와 국가를 수호함에 있어 차질 없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

“또한, 이 나라의 국민이자 국가의 안전에 막중한 기여를 하고 있는 대장, 청호가 확보한 증거물을 바탕으로 원수들의 능력, 자질, 도덕성이 해당 직위에 적합한지 역시 확인하고자 합니다.”

“…….”

“이 청문회는 원수들을 검증하는 장이라는 엄중한 자리임을 유념해 주시고, 앞서 말한 의무가 잘 수행되었는지, 또 앞으로 잘 수행될 수 있는지를 확인해 주길 바랍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귓구멍에 박히듯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보다가도 저절로 집중하게 되는 흡입력이 대단했다.

“청문회 진행 순서를 안내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원수가 청문회 선서를 해야 하나, 불참했으므로 이는 생략합니다. 다음으로는 주 질의와 답변이 진행되어야 하나, 답변할 원수가 없으므로 이 역시 생략합니다. 다음으로는…….”

그 후로 이어지는 순서도 죄 생략이었다. 말만 청문회지 청문회가 아니었다. 이건 원수들을 공개적으로 엿 먹이기 위한 연극 무대에 불과했다.

“앞서 모든 순서가 진행될 수 없으므로 청호 대장이 원수들의 자질과 능력, 도덕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 이유와 수집한 증거들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청호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카메라가 유명 연예인이라도 찍듯 청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끔 플래시가 터지기도 했는데, 그럴 땐 폴이 눈을 한껏 부라리며 카메라맨을 노려봤다.

청호의 곁에 서 있던 알렌이 네모난 상자 하나를 청호에게 내밀었다. 청호가 그것을 열어 사람들에게 보여 줬다. 시윤을 비롯한 사람들이 턱을 쳐들곤 상자 안을 들여다보려 했다. 대체 얼마나 끔찍한 것이 들어 있나, 궁금했다.

헌데 내용물이 영 실망스러웠다. 가지런히 정리된 수백 개의 칩. 작고 각진 칩은 구식의 것이라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청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칩 중 하나를 빼 재생을 명령했다.

“사흘 전 사망한 채정원 원수의 본가에서 발견한 증거물입니다.”

“…….”

“청문회 시간을 고려해 임의로 편집했으나, 어떠한 곡해와 조작도 없음을 밝힙니다.”

“편집 없는 전체 영상은 청문회가 끝나고 청문회 사이트에 접속해서 볼 수 있습니다.”

헬렌이 뒷말을 덧붙였다.

청문회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홀로그램이 사면으로 떠올랐다. 곧 검게 죽어 있던 화면이 익숙한 공간 하나를 비췄다.

시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원의 서재였다.

한 시간 남짓한 동영상에서 등장인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청문회에 소환된 네 명의 원수가 다였다. 그들은 영상 내내 움직이지 않고 입만 나불거렸다. 대개 차나 커피를 마셨고, 가끔은 맥주나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영상 아래에는 자막이 떠올랐고, 화자의 머리 위엔 화살표가 표시되었다.

첫 대화는 적당히 충격적이었다.

―도서관이라고 들어 봤습니까?

―도서관?

―네. 과거 인간들이 책을 모아 놓고 무료로 볼 수 있게 해 놓은 시설이라더군요. 학교에도 하나씩 있고, 직장에도 있고, 공원 같은 곳에도 만들어 뒀답니다.

―그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뭡니까? 국민에게 책을 보게 해 주자는 게요?

―그렇지요. 어차피 굴러 들어오는 책이 많으니까요. 잘 찾아보면 학교에서 써먹을 만한 것도 있을 테고. 지금은 들어오는 족족 태워 버리잖습니까. 종이도 귀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나는 반대요.

―왜지요?

―학교에 있는 교과서는 포스에 보다 잘 적응하고 스며들게 하려고 가르치는 건데. 수백 년 전 책을 던져 주면 그건 그냥 혼란만 가중할 것 같습니다만.

―음…… 그런가요?

―저도 동의합니다. 서정적, 감정적, 낭만적, 비판적, 비관적, 논리적. 이 세상에선 다 쓸모없는 것들이에요. 우리가 과거 인간들의 문화를 금기시하는 이유와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먹고사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야 해요. 노을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낄 시간에, 나는 누구인가, 하며 자아를 고민할 시간에, 쟁기질을 한 번 더 하는 게 낫지요.

―과거를 배워 봐야 사회주의니 민주주의니 결국 인류를 멸망시켰던 그 역사를 다시 반복할 뿐이라고 봅니다.

―적당히 우매하고 멍청해야 관리하기가 쉽죠.

―그렇지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시키는 대로 하는 개처럼.

누군가를 죽이거나, 죄를 은폐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사상과,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대화였다. ‘멍청’해야 ‘관리’하기가 쉽다, 라. ‘주인’과 ‘개’라. 원수들은 국민을 또 하나의 가축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가축.

사람들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동영상이 시작됐다.

―노인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 짜증이 납니다. 노인은 쓸모가 없어요. 에스퍼나 가이드가 아니면 더더욱.

―아무렴요. 지금은 연륜이나 삶의 지식 따위가 아니라 공장에서 기계를 조립하고 밭에서 곡식을 수확할 노동력이 필요하거늘.

―그럼요! 모름지기 아이는 키우되 노인은 버리는 게 맞는 법입니다.

―그들은 밥과 자원을 축내는 기생충일 뿐이에요.

―어쩌면 좋겠습니까? 누구 좋은 생각 없어요?

―노인들을 클롭스에게 유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누구보다 그 괴물들을 오래 겪어 온 자들입니다. 가까이 가겠습니까? 아마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더 빨리 도망갈 거예요.

―헌병을 풀어다 밤에 하나하나씩 사살하라고 할까요?

―그건 의심을 살 수가 있습니다. 포스 안에서 살인은 드무니 말입니다. 음…… 건강 검진이나 예방 주사 같은 건 어떻습니까?

―……지금 노인들을 건강하게 만들자는 말입니까?

―오, 그럴 리가요. 예방 주사에 뭘 조금 섞으면 되지 않겠나, 싶어서 말입니다.

―하! 그것참 좋은 생각입니다. 내 적당히 앓다가 알아서 끽- 해 주는 약물을 찾아보지요.

―투여량을 각각 다르게 해야 합니다. 가끔 다른 독약도 섞고. 다 동시에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요.

이번 동영상은 퍽 충격적이었다. 노인을 몰살했다는 말인가. 근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죽음만큼 흔한 게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갓 태어난 갓난쟁이도 죽고, 막 말문을 튼 어린아이도 죽고, 신나게 축구공을 차던 소년도 죽고, 공장에 첫 출근 한 건장한 성인도 죽는 세상에 나약한 노인이 죽는 거야 뭐 그리 놀라운 일이겠나.

그래서 사람들은 그 죽음을 공유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반려가, 부모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었대도 그건 그 몇몇 가족에게 국한된 슬픔일 뿐이었다. 만약 길거리에 노인들이 줄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해도 그게 누군가의 계획된 학살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시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고는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선화는 뇌를 도둑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원수들 사이에 떡 하니 앉아 있는 정원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화면이 약 5초간 이어지고, 또 다른 영상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동영상이었는데, 그만큼 길고 충격적이었다.

―클롭스가 급격하게 줄고 있어요.

―방사능이 줄어서 그래요. 빨아 먹을 방사능이 없으니 지들끼리 먹고 먹히면서 줄어드는 거지요.

―방사선 수치를 얼른 조절해야 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조금만 늦어도 멸종 수준으로 줄어들 겁니다. 늦게 뿌리면 효과가 없어요.

―하지만 방사선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

―이렇게 가다간 우리 계획이 무너지고 말 거예요.

―그럴 순 없지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900개가 전부 동났던가요?

―과거 인간들이 만든 핵 발전소 말하는 게지요? 설마. 우리가 아직 손대지 못한 곳이 있겠죠.

―조금 더 찾아봅시다.

동영상이 끊겼다. 반짝, 하더니 다른 날로 보이는 동영상이 이어졌다.

―구 러시아에서 매립된 핵 발전소를 발견했답니다.

―아아…….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요. 방사능은 충분한가요?

―아무렴요. 지금 쿤 부대가 가져오고 있습니다.

―쿤 부대. 참 기특해.

―내 아들이 수장으로 있는 곳이니 당연하지요.

―또또, 트래더가 아들 자랑 시작하기 전에 얼른 다음순으로 넘어갑시다.

―이번엔 어디에다 터트릴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포스 가까이가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합니다. 경각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어요.

―나도 그게 맞는다고 봅니다. 국민이 더는 삶을 기뻐하지 않아요. 춥다느니, 배가 고프다느니, 새로운 게 먹고 싶다느니, 휴가를 달라느니, 다들 살 만하니까 뭘 자꾸 요구해. 아주 돌아 버리기 직전이란 말입니다.

―그럼 내가 적당한 곳을 찾아보지요. 포스와 가깝고 인간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곳으로요.

그 말을 끝으로 또 5초간의 검은 화면이 떠올랐다. 시윤이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연신 핥았다. 구심점을 드러내지 않고 빙빙 도는 대화라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대충 그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런 짓을 하진 않았겠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곧 영상이 다시 이어졌다. 이번엔 전과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담배 연기 같은 것이 실내를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고, 원수들은 불콰하게 취한 주정뱅이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모두, 우리가 처음 포스를 만들자고 했을 때를 기억합니까?

―아무렴요. 꾀죄죄한 옷을 입고, 총알 없는 총을 둔기로 쓰며, 피 냄새가 자욱하던 전장에서 맹세했었지 않습니까.

―참 많은 걸 이루었어요. 포스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인간의 유토피아가 됐습니다.

―……좋아하긴 이릅니다. 앞으로가 중요하지요. 우리가 원수로 있는 한은 어찌어찌 버티겠지만,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 자리를 물려받고 나서가 문제예요.

―그렇지요. 그땐 방사능이 완전히 사라지고, 클롭스 역시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나도 종종 그 걱정을 합니다. 이제 매립된 방사능도 없어요.

―우리가 직접 만들면 어떻습니까. 모건 대령을 시켜서. 그라면 금방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반댑니다. 모건 그 친구. 똑똑하긴 한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뒤에서 우리 뒤통수를 칠 작당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거기다 청호랑 사적으로 지나치게 친해. 우리 계획을 알려 주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른단 말이오.

―방사능 말고 다른 채찍을 찾아야 합니다. 클롭스처럼 절대적인 악. 위험하고, 사악하고, 두렵고,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쳐서 국민이 포스를 떠날 생각일랑 못 하게 만들어야 해요.

―뭐든 절대적인 위협이 필요합니다. 평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결국 전쟁을 발발하는 도화선이 평화이니까요. 시간과 자유가 넘쳐나면 자기들끼리 미워하고, 싸우고, 편을 가르고…….

―그러다 또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과거 인간들이 치고받고 싸우다 못해 핵을 터트린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막을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들끼리 싸우지 않게, 인간과 다른 존재의 대립 구도를 계속해서 유지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확실히 클롭스 말고 다른 채찍이 필요하긴 하지요. 클롭스는 우리 말을 안 들으니……. 조절할 수 있는 건 방사선량일 뿐이잖습니까. 자꾸 예상치 못하게 고위 클롭스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청호도, 에로아스도 못 버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방사선을 번번이 몰래 들여오는 것도 영 번거로워요.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오, 무엇인가요?

―전염병 같은 건 어떻습니까?

―병?

―병이요?

―네. 과거 인간들을 가장 많이 죽인 게 뭔지 찾아봤습니다. 첫 번째는 전쟁이고, 두 번째는 전염병이더군요. 한번 창궐하면 적으면 수천에서, 많으면 억 단위로 죽었답니다.

―그게…… 관리하기 쉽습니까? 병인데?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럴 필요 없지요. 해독제나 백신만 맞으면 되니까.

―그 병이 에스퍼나 가이드에게도 효과가 있습니까?

―자가 치유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요. 어차피 능력자는 국민의 20프로도 안 되니 상관없어요. 나머지 80프로만 주무를 수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좋네, 좋아!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병은 어떻게 만들 겝니까?

―오, 만들 필요 없습니다. 그저 고르기만 하면 돼요.

―그게 무슨 말이오?

―Z 구역에 온갖 전염병과 백신을 모아 놓은 건물이 있는 거 압니까? 매립된 방사능을 찾다가 발견했는데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따로 관리해 뒀습니다. 이름이 뭐더라, 질병관리센턴가……. 아무튼 과거 인간들이 미래의 후손을 위해 만든 곳이라던데. 뭐, 우리도 그들의 후손이니 쓸 자격은 충분한 거 아니겠습니까?

장난스레 이죽거리는 목소리 뒤로 호탕한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동영상이 끝났다.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충격적이다 못해 끔찍한 사실이었다. 일부러 클롭스를 만들기 위해 방사능을 터트렸다니. 그 클롭스에 밟혀 죽고 먹혀 죽은 사람이 몇인데. 그로 모자라 전염병까지 퍼트릴 생각이었다니.

여러 개의 동영상에서 정원은 주인공이 됐다가, 들러리가 됐다가, 또 주인공이 되길 반복했다. 방관만으로도 눈이 뒤집힐 판에 주도까지 했다니. 시윤이 콱콱 가슴을 내리쳤다. 폐부에 가득 뭉친 호흡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선화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윤의 허벅지를 잡았다.

“아…… 시윤아……. 난 여태 괴물과 살았어…….”

파르르 경련하는 목소리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시윤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였다. 선화가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엄마!”

소스라치게 놀란 시윤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 소란에 주위 사람들이 두 모자를 향해 와르르 몰려들었다. 검은색 카메라가 인파를 뚫고 렌즈를 들이밀었다. 쓰러진 선화와 하얗게 질린 시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돼. 충격받으셔서 잠깐 쓰러진 거야. 최근에 식사를 제대로 안 하신 것 같고, 잠도 못 주무신 것 같은데……. 곁에서 좀 보듬어 드려.”

모건이 영 성의 없는 목소리로 선화의 상태를 진단했다. 파리하게 질린 시윤이 울음이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그럼 언제쯤 일어나실까요?”

“그냥 주무시는 거니까 어느 정도 회복하시면 일어나실 거야. 시윤이 너보다 자가 치유력이 높으신 거 알지?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에 시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시윤이 눈물을 훌쩍이며 청호에게 기댔다. 청호가 “괜찮으실 거야.”라며 시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그때,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폴이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청호가 나중에, 라고 입을 벙긋거렸으나 시윤이 괜찮다며 나가 보라 일렀다. 몇 분 후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시훈과 시준이 들이닥칠 테니 괜찮았다.

청호가 시윤의 뺨에 짧게 키스해 준 후, 병실을 나섰다.

“어때?”

폴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청호가 먼저 물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가족들도 까맣게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숨겼구나. 가면을 뒤집어쓴 악마였구나. 가족들은 충격이 얼마나 클까.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

“예. 또 채 준위 어머니께서 이전에 봉사를 많이 하셨던 모양입니다. 기부도 많이 하셨고요. 그래서 반응이 더 좋은 듯합니다. 카메라에 얼굴을 비춘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청호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시윤에게 선화와의 동행을 명령한 건 다 의도가 있었다.

청문회 영상을 본 선화가 분명 그에 반응을 할 거라 예상했고, 그걸 카메라로 잡아 청문회와 함께 송출하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허망한 표정을 짓거나, 우는 정도나 생각했는데. 파리하게 질려서 쓰러져 준 덕에 효과가 더 좋았다.

청호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비롯한 가족들이 정원의 정체를 하등 몰랐음을, 또 다른 피해자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야 비난이 줄어들 테니까.

그래서 선화를 이용한 것이다. 근데 그게 뭐 그리 나쁜 행동인가. 그녀도 자신의 불쌍한 아들들이 살인자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당하며 사는 걸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제게 사죄하며 뭐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 이용해 먹은 것으로 절 원망하진 않겠지. 더군다나 오롯이 시윤을 위해 한 행동인데.

청호가 수고했다는 듯 폴에게 이만 가 보라 손짓했다. 그리고 다시 병실에 들어가기 위해 뒤를 도는데, 모건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모건이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진짜…… 무서운 새끼야, 너.”

“……입 놀리지 마.”

청호가 먹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모건을 노려봤다. 모건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안 해. 시윤이가 알아 봐야 좋을 게 없잖아.”

“…….”

청호가 영 믿음이 안 간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모건을 흘겼다. 그에 모건이 짜증 내는 일곱 살처럼 쾅쾅 뒤꿈치를 굴렀다.

“아, 진짜 안 해! 여태 내가 채 원수한테 붙었다가 휴한테 붙었다가 그런 거 다 시윤이 살리려고 한 거야. 네 새끼가 애를 못 죽여서 안달이니까!”

그 말에 청호가 숨을 끊어 먹었다. 아무래도 그쪽으론 제가 할 말이 없는지라. 당시 모건이 그러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휴의 말을 듣고 제 숙소에 쳐들어와 시윤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미쳐 버린 제가 끝내 시윤을 죽여 버렸을지도 몰랐다.

청호가 벅벅 세게 얼굴을 문댔다. 그러고는 모기 같은 목소리로 흘리듯 말했다.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

모건이 누가 얼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눈동자만 뱅글뱅글 빠르게 돌아갔다. 자신이 어렴풋이 들은 말이 실제인지 환청인지를 판단하는 듯했다.

그러다 어딘가 수줍어 보이는 청호의 표정을 보곤 씨익 입을 째며 웃었다.

“뭐라고? 안 들렸어. 다시 말해 봐.”

모건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샐쭉 올라간 입꼬리와 솟아오른 광대에 장난기가 득실거렸다.

“…….”

청호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차게 식은 낯으로 모건을 응시했다. 아예 평생 실컷 웃을 수 있도록 입을 째 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래도 오늘은 좋은 날이니 봐주자, 싶어 말았다.

* * *

청호의 계획은 착착 진행됐다. 청문회 다음 날 곧장 재판이 열렸고, 원수들의 죄가 나열됨과 동시에 전원 사형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원수들이 청문회든 재판이든 참여했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들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자신들을 변호할 권리를 자유 의지로 박탈했다.

청호는 원수들이 S급인 걸 고려해 그들의 사형 집행을 명받았다. 청호는 씰룩거리는 입술을 누른 채 엄중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겠노라 선서했다.

에로아스 부대는 다음 날 바로 출정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의 출정이라며 부대원들 모두가 신나 있었다. 거기다 목표가 자신들을 교도소에 처박았던 원수들이라 더 신이 났다.

출정 직전, 청호가 병사들에게 이런저런 보고를 받고 있는데, 군복 차림의 시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너…….”

“대장님.”

종종걸음으로 청호의 앞에 선 시윤이 슬쩍 병사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눈치 좋은 병사들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청호의 곁에 더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고는 자못 애절한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저도 같이 갈래요.”

“안 돼. 위험해.”

“대장님도 위험하잖아요. 클롭스면 모를까, 다 S급 능력자들인데…….”

“시윤아.”

“저도 이제 SS급인걸요. 언제 어디서든지 가이딩할 수 있다고요.”

시윤이 눈썹을 축 떨어트리고 아랫입술은 퉁퉁하게 내밀었다. 예전에는 C급이고 B급이었지만, 지금은 어엿한 SS급이다. 거기다 꽤 쓸 만한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근데 청호 혼자만 보내려니 애가 달아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원수들은 정원과 동급의 에스퍼들이다. 다행히 정원의 ‘재창조’만큼 거슬리는 능력들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S급이니만큼 반항이 대단할 터였다.

청호가 혼자 갔다가 다쳐 오면 어쩌나. 혹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그들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면 어쩌나. 분명 청문회를 봤을 텐데. 청호가 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시윤의 얼굴에 청호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시윤의 뺨을 다정히 감싸 쥐었다.

“정말 괜찮아. 요즘 내내 너랑 붙어 있었잖아. 폭주할 일도 없고, 힘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

“그래도…….”

시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보여 주기 싫어서 그래.”

“네?”

“내가 클롭스를 죽이는 건 응당한 정의지만, 지금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거잖아.”

“…….”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 나는 살인을 하러 가는 건데, 그걸 네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시윤이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분노한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동그란 눈매가 제법 사나워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사람들이 죽는 것 역시 응당한 정의인걸요. 그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시윤아. 나는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아. 여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수많은 사람을 죽여서 크게 죄책감도 없어. 하물며 지금 죽이러 가는 이들은 내 원수들이니 설레기까지 해.”

“…….”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죽여야 고통스러울까. 어떻게 난도질해야 내 어머니가, 또 그들이 죽인 사람들이 편히 눈을 감을까 생각한다고.”

고저 없이 이어지는 청호의 음성에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청호가 시윤의 턱선을 따라 가느다란 목으로 손을 내렸다. 손바닥 아래로 힘차게 움직이는 시윤의 맥박이 느껴졌다.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근데 시윤이 넌 아니잖아. 내가 사람 목을 자르고, 그들의 시체를 불태우고, 쓰레기처럼 처리하는 걸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있어? 거기다 너와 적잖이 안면도 있는 이들인데?”

“…….”

“트라우마로 남을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괜……찮을 거예요. 저도 여태 대장님 따라 전장에 나갔잖아요. 장벽 전투 때도 시체는 많이 봤…….”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도, 결국 네 머릿속에 남아.”

“…….”

“그들을 죽이는 내가, 그들의 죽은 모습이. 멍하니 있다가도 떠오르고, 밥 먹다가도 떠오르고, 때로는 네 꿈에 나와 그 꿈을 악몽으로 만들기도 하겠지.”

“…….”

“그래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청호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시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거짓도 아니었다.

시윤은 이따금 장벽 전투에서 본 시체들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부상병들과, 제가 구한 병사가 클롭스의 발톱에 내리찍히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당시의 공기, 매캐한 먼지 냄새, 귓가를 울리던 이명 등이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고 생생했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아니, 아마 더할 것이다. 어릴 적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고, 장난을 받아 주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죽는 거니까.

바짝 곧추서 있던 시윤의 어깨가 느슨하게 내려앉았다. 그것을 느낀 청호가 시윤의 눈두덩에, 뺨에, 턱에 가볍게 키스했다.

“금방 다녀올게. 저녁 같이 먹자.”

시윤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청호가 기특하다는 듯 시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진득하니 그를 바라보다 아쉽게 등을 돌렸다. 그러면서 최대한 빨리 다녀오리라, 시윤이 절 한시라도 더 기다리지 않게 하리라, 다짐하는데.

“대장님.”

시윤이 다시금 청호를 불렀다.

“응?”

청호가 얼른 뒤를 돌아봤다.

“이, 입술에도 뽀뽀해 주고 가세요.”

볼을 수줍게 물들인 시윤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걸 멍하니 보던 청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예고 없는 시윤의 귀여움에 정신이 다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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