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드리우는 시간
청호를 보낸 시윤은 곧장 모건에게 목덜미가 잡혀 질질 끌려가야 했다. 목적지는 연구센터였다. 뭘 하려나, 했더니 가이드 없는 에스퍼들이 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윤은 거리낌 없이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청문회 때문에 혹여 저를 미워하면 어쩌나, 혐오스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느낌은 못 받았다. 사실 가이딩을 받으러 온 입장이라 숨긴 것일 수도 있었으나, 어쨌든 피부로 느끼지 않으니 다행스럽기만 했다.
기부 같은 가이딩은 네 시간 정도 이어졌다. 에스퍼들은 한층 밝은 낯으로 돌아갔다. 시윤이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들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평생을 죄책감과 낮은 자존감에 짓눌려 살아온 제게는 더더욱 좋았고.
시윤이 길게 기지개를 켜는데, 모건이 또 팔목을 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시윤은 어디에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청호가 없는 틈을 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모건의 활활 불타는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때요?”
시윤이 난데없이 물었다.
“응?”
모건이 홀로그램 패드를 바쁘게 두드리며 성의 없이 되물었다.
“뭘 연구하시는진 모르겠지만, 제 상태를 기록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예상하시는 대로예요, 아니면 부족해요?”
그 말에 모건이 뚝 걸음을 멈췄다. 시윤이 보기 좋게 웃으며 그런 모건을 쳐다봤다. 모건이 손끝을 세워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 올렸다. 그러곤 애매한 미소를 띤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 이해해라. 재미있어서 그래. SS급 가이드라니. 원래는 퓨어였는데, C급 가이드였다가, 지금은 SS급 가이드가 됐잖아.”
“그랬죠.”
“거기다 ‘블랙홀’이라는 절대적인 어빌리티까지. 내가 요즘 아주 신이 나.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라니까.”
“뭐…… 그럴 수 있죠. 근데 제가 듣고 싶은 건 사과가 아니었는데요. 그래서, 제 능력이 어떤데요?”
“음…… 청호랑 비슷해. 뭘 하든 측정 불가라고 뜨지. 아, 그리고 네 가이드 능력. 이제 완전히 고착됐어. 전처럼 떨어지지 않아. 피에 무슨 짓을 해도 변화가 없거든. 휴 머리카락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해 봤는데 반응이 없더라고.”
그 말에 시윤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휴. 그래, 아직 휴가 남았지. 요 며칠 정신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였다.
언제 나타나려나. 언제 나타나서 제게 죽음을 받아 가려나. 이번에는 좀 조용히 나타나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죽이지 말고, 어느 것도 망가트리지 말고.
시윤이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잠긴 사이, 모건이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려 왔다. 시윤이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능력자 훈련실. 근데 훈련실 한가운데에 친근한 인영 둘이 서 있었다.
시훈과 시준이었다.
“물만 없애는 거야. 물만.”
시훈의 말에 시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탁자에 올려진 물 잔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모건은 시윤에게 어빌리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만큼 훈련할 것을 권했다. 아무래도 다룰 줄 모르는 힘은 득보다는 실이 많았으니까. 항상 청호가 붙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시윤은 미래를 대비해 자신의 능력에 통달할 필요가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 몸 전체로 힘을 발산하는 게 아니고, 네가 편하게 생각하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만 힘을 뿜어내는 거야. 손이나 눈짓 같은 거로.”
시준이 말을 덧붙였다. 시윤이 후우, 후우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물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힘을 뿜어. 말로는 더할 나위 없이 이해했으나 몸으로 실행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근육을 써야 하나, 피가 도는 느낌에 집중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물 잔을 무작정 노려볼까.
시윤이 흡 숨까지 참고는 손에 힘을 줬다. 그러면서 물 잔을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봤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수십 초가 지나니 관자놀이가 다 지끈거렸다.
“아니야, 다시 해.”
시훈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이씨…….”
시윤이 짜증스레 발을 굴렀다. 저는 고작 물 한 잔도 없애지 못하는데 청호는 대체 어떻게 수백 개의 불똥을 틔우고 크고 작은 물건들을 옮기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를 따라잡을 생각일랑 없지만, 발끝 정도는 따라가야지. 시윤이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꼬박 두 시간이 지났다. 아무 소득도 없었다. 물 잔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고 애꿎은 시윤만 앞머리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평생 힘이 있어 봤어야 말이지. 힘을 쓰는 게 도통 뭔지 모르겠다. 차라리 무거운 덤벨 따위를 들라 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몰랐다.
시윤이 으음, 목으로 신음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심장이 꿰뚫려서 폭주했을 때 어땠더라. 무슨 느낌이었더라. 어떻게 주변을 끌어당겼더라.
당시엔 눈만 뜬 시체였던지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근데 어렴풋이 몸이 타는 듯한 느낌이 났던 것도 같다. 피가 아주아주 빨리 도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가이딩하며 청호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는데.
시윤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폭주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와 동시에 시윤의 눈동자에 연둣빛이 사르륵 올라왔다.
그 변화를 본 시훈과 시준, 그리고 모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정적 속에서 수 초가 지났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건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가려 발을 뗐을 때였다.
물 잔이 마치 증발하듯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시윤의 손으로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시윤을 구경하던 세 사람이 함박웃음을 틔웠다. 비록 물만 없애진 못했지만 일단 자의로 힘을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다.
신난 시준과 시훈이 시윤에게 다가가는데, 어째 시윤이 너무 조용했다. 이상함을 느낀 시준이 시훈을 가로막았다.
“왜?”
시훈이 물었다. 시준은 대답 대신 시윤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시윤의 주위로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단단한 바닥이, 여기저기 놓여 있던 무기들이, 물 잔을 올려 두었던 테이블이 거센 바람을 맞닥트린 사막의 모래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윤아!”
“채시윤!”
놀란 시훈과 시준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몸을 들썩였다. 태풍처럼 소용돌이치는 기류의 가운데에 나른한 자세로 서 있는 시윤에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증발해 사라져 버릴 듯했다.
“안 돼!”
이번엔 모건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지금 시윤에게 다가갔다간 두 사람 역시 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터였다. 모건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권총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시윤에게 겨눴다.
시훈과 시준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누구한테 총을 겨누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나와, 좀!”
모건이 곧장 전투태세에 들어간 두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흘겼다. 막냇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건 안다만, 저렇게 두면 이 훈련실은 물론 부대 전체를 집어삼킬지도 몰랐다.
모건의 총에 장전된 총알은 살육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숱하게 뽑아 놓은 청호의 피가 든 총알이었지. 맞으면 병사들이 훈련할 때 흔히 쓰는 페인트탄처럼 터질 터였다.
핵탄두 같은 시윤에게 힘을 방출하라고 종용하면서 그에 따른 대비도 안 해 놓진 않았다. 청호의 피가 시윤에게 진정제와 다름없으니 아마 효과가 있을 터였다.
모건이 시윤의 목덜미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였다.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모건과 쌍둥이 형제 사이를 가로질러 저벅저벅 시윤을 향해 다가갔다. 놀란 모건이 그림자의 주인을 말리려 했으나, 먹빛 머리칼에 유달리 듬직한 어깨를 보곤 입을 다물고 총구를 내렸다.
그림자의 주인은 소용돌이치는 시윤의 힘을 뚫고 들어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 후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시윤과 입을 맞췄다.
느슨하게 다물린 시윤의 입은 침범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저 턱을 살짝 누르는 것만으로도 뻐끔 입술이 벌어졌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두어 번 빨다가 벌어진 잇새로 후우…… 길게 힘을 흘려보냈다.
시윤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반짝반짝 오로라처럼 발광하던 그의 연두색 눈동자가 한층 차분해졌다. 흩어져 있던 초점이 또렷하게 모였다. 사위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굴던 소용돌이 역시 사라졌다.
청호가 입술을 뗐다.
“……대장님?”
시윤이 꿈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청호를 불렀다.
“응. 나야.”
청호가 시윤의 귓불을 살살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땀에 젖은 머리칼도 쓰다듬어 주고, 따끈따끈한 볼도 매만졌다. 시윤이 그런 청호의 손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어, 왜 벌써…… 오셨어요?”
“벌써 아니야. 저녁 먹을 시간인데.”
“그래요? 그래도…… 일찍 오셨네요.”
“그럼. 누구랑 한 약속인데.”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멋들어지게 웃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러다 돌연, 거센 바람에 치인 것처럼 휘청거렸다. 청호가 얼른 그의 허리를 잡아챘다.
“갑자기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요.”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청호의 가슴에 기댔다. 가이드 없는 에스퍼들을 가이딩했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쓸 줄도 모르는 힘을 써 보겠다고 몇 시간 동안 악을 쓴 게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숙소로 돌아가자. 가서 씻고, 저녁 먹자.”
청호가 자신의 코트로 시윤을 감쌌다.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청호의 품에다 얼굴을 비볐다. 은은하게 스며 오는 청호의 힘에 꼭 따뜻한 샹그릴라를 마시고 있는 듯 나른해졌다.
청호가 시윤을 가볍게 들어 안았다. 그리고 흘끔흘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모건에게 눈을 부라렸다.
“진짜…… 일찍 왔네.”
모건이 시윤의 잔잔한 말투를 흉내 내며 웃었다. 그러나 청호는 그 웃음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뒤질래?”
“그냥 훈련 좀 한 것 가지고 예민하게 굴지 마.”
그 말에 청호가 슬쩍 자신의 품을 내려다봤다. 시윤은 그새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사실 좋게 말해 잠든 거지 기절한 것과 다름없었다. 청호의 눈썹이 비죽 무섭게 솟구쳤다.
“내가 오늘 뭐 하고 왔는지 알지?”
“알……지.”
“피를 많이 봤어. 멀미가 날 지경이야.”
청호가 단어 하나를 말할 때마다 모건과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공포 영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건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청호의 그림자는 빠르게 모건을 집어삼켜 갔다.
“근데 이왕 본 거 조금 더 본다 한들,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기도 하네.”
청호가 낮게 으르댔다. 잠깐 굳었던 모건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하, 하, 하! 농담을 참- 진심처럼 하는 친구야. 하, 하!”
손뼉을 치며 웃던 모건이 갑자기 뚝 웃음을 멈췄다. 그러곤 툭툭 청호의 팔뚝을 두드렸다.
“그럼, 피곤할 텐데 쉬어.”
패대기치듯 말한 그가 훌떡 뒤를 돌더니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훈련실을 빠져나갔다. 청호가 멀어지는 그를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어쩐지 며칠 조용하더라니. 제가 없는 틈을 타 시윤을 기니피그처럼 굴렸단 말이지.
청호가 분노 어린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던 시훈과 시준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청호가 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차마 무어라 엄포를 놓지 못했다. 아무래도 시윤을 아끼고, 시윤이 아끼는 형들이라. 보나 마나 모건의 간악한 회유에 감겨 왔으리라.
청호가 치받는 호흡을 애써 억누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시윤이는…….”
“…….”
“제가 잘, 달래고 먹여서, 재우겠습니다.”
그리 말한 청호가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 곧장 뒤를 돌았다.
* * *
잠에 빠져 있던 시윤이 꾸물꾸물, 무심코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럼 이불이 사그락거리며 몸에 엉켜 와야 하는데, 어째 찰박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왔다. 찰박이라니. 침대에서는 영 듣기 힘든 소리였다.
거기다 숨이 묘하게 갑갑한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듯하면서도 편한 느낌에 시윤이 마지못해 눈을 떴다. 쨍한 빛이 망막을 따갑게 할퀴었다.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아침인가, 싶어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따뜻한 손바닥이 눈을 가려 왔다.
“아직 밤이야. 여긴 욕실이고.”
“……대장님?”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밤, 그리고 욕실. 그것을 알고 나자 몸을 감싼 온수가 느껴졌다. 등 뒤로는 청호의 단단한 몸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시윤이 자신의 양 허벅지 옆에 서 있는 청호의 무릎을 더듬더듬 쓰다듬었다. 대충 그의 자세와 자신의 자세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시윤이 청호에게 느슨히 기댔다. 그러자 청호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뒀다.
“제가 또 폭주했어요?”
시윤이 시무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응.”
청호가 그의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나직이 긍정했다. 시윤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없다. 물 잔이 어떻게 됐는지,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그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청호가 저를 데리러 왔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누가 다쳤나요?”
“아니.”
반가운 부정이었다. 시윤이 이번엔 한결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힘을 쓸 때마다 폭주할 바엔, 누군가 다치면 어쩌나 걱정해야 할 바엔 무능력한 게 나은 것 같았다. 시윤이 짜증스레 눈을 비비는데, 청호가 그 손을 앗아가 손바닥에다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내일부턴 내가 도와줄게.”
“대장님이요?”
“그래. 그럼 누가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제가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을 거야. 원래 네 힘인데 못 할 리 없지.”
퍽 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이었음에도 침울한 시윤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머리를 쓰는 건 자신 있는데, 몸을 쓰는 건 영 어렵다. 그래도 사격 연습을 하는 건 프로세스라도 간결했거늘. 보고, 겨누고, 쏜다. 쉽지 않은가. 근데 무형물의 힘을 컨트롤하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호되게 혼난 일곱 살 아이 같은 시윤의 표정에 청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검지를 거꾸로 세워 물을 콕 찍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그의 손끝을 따라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왔다.
시윤이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처음엔 못 했어. 말했잖아. 열두 살 땐 부대 전체를 태웠다니까.”
“…….”
“몇 번만 하면 금방 적응해. 어쨌든 오늘은 힘을 빼냈잖아. 그것만으로도 잘한 거야.”
청호는 연신 다정한 목소리로 시윤을 달랬다. 시윤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가 다치고 찢기는 건 괜찮은데 남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게 영 께름칙했다.
시윤이 몽글몽글하게 움직이는 물방울을 톡톡 건드리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청호가 솟아오른 물줄기를 찰흙처럼 한데 모아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물방울을 만들었다. 씰룩거리며 움직이던 그것이 동그래졌다가 뾰족해짐을 반복하더니 연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더니 일순, 그대로 하얗게 얼어 버렸다.
동화에서나 볼 법한 꽃이었다. 솜씨 좋은 유리 공예사가 만든 값비싼 장식품 같기도 했다.
“와…… 예뻐요.”
시윤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그것이 시윤의 눈앞에 멈췄다.
“녹여 봐.”
청호가 말했다.
“네? 그걸 제가 어떻게…….”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청호처럼 불을 다룰 줄 모르는데 이걸 어찌 녹이나. 그러자 청호가 옅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손바닥에 쥐고 있으면 되잖아.”
“아……. 네.”
바보 같은 표정을 한 시윤이 두 손으로 연꽃을 감쌌다. 잠깐은 그저 매끈하고 묵직한 것만 느껴졌는데, 곧 짜릿할 정도로 찬 냉기가 손바닥을 찌르듯 스며 왔다. 연꽃 역시 시윤의 체온을 느낀 건지 축축하게 녹기 시작했다.
“차갑지?”
“네.”
“얼음이 녹는 게 느껴져?”
“네. 미끄러워지고 있어요.”
“네 체온이 녹이는 거야.”
“그렇……겠죠?”
시답잖은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과학 시간에나 배울 법한 것들이었다. 도무지 청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청호가 시윤의 손등을 감쌌다.
“이제 얼음의 차가운 느낌 말고, 네 손바닥 안에 있는 열에 집중해 봐.”
“열……이요?”
“응. 그 열로 얼음을 더 빨리 녹인다고 생각해.”
시윤이 제 손에 있는 연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제 손바닥의 열을 느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데 더 빠르게 녹이라는 건 어려웠다. 시윤의 손가락 끝이 저절로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청호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세게 쥐지 말고. 그냥 손바닥의 체온만 더 올리는 거야.”
“아…… 체온만 더.”
시윤이 청호의 말을 곱씹었다. 오므라들던 손가락이 다시 느슨해졌다. 시윤이 미동 없이 가만히 연꽃을 쳐다봤다. 움직이는 거라곤 색색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얕게 들썩이는 어깨뿐이었다. 그 모습이 꼭 금붕어를 구경하는 고양이 같았다. 청호가 시윤 몰래 웃음을 삼켰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연꽃이 뿜어내는 냉기에 시윤의 손바닥이 빨갛게 얼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물이 시윤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게 어쩐지 아파 보였다. 청호가 이만하면 됐으니 내일 다시 하자고 말하려 할 때였다.
하얀 연꽃이 가루눈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시윤의 손바닥으로 확 빨려 들어갔다. 시윤의 손바닥을 축축이 적시던 물마저 사라졌다.
시윤은 자신이 해 놓고도 놀란 모양인지 숨을 멈췄다. 손 역시 연꽃을 쥐고 있던 모양 그대로 굳었다. 그러다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없어졌어요!”
해맑게 외치는 소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사르르 휜 눈이며, 동그랗게 올라온 광대며, 예쁘게 벌어진 입술까지. 그저 마주했을 뿐인데 청호의 입이 덩달아 호선을 그렸다. 그가 시윤의 턱을 들고 쪼오옵 입술을 세게 빨았다가 놨다.
“축하해.”
“감사해요!”
시윤이 신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낮에는 몇 시간 기를 써도 안 되더니. 이번엔 5분 만에 됐다.
성취감에 부르르 몸을 떨던 시윤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 흐릿하게 남은 연꽃의 차가움이 뒤늦게 그리워졌다. 하얗고, 매끈매끈하고 토실토실한 꽃이 참 아리따웠는데.
“그래도 아쉽네요. 연꽃 되게 예뻤는데.”
“또 만들어 줄게. 백 개쯤.”
청호가 시윤의 마른 어깨에 꾹꾹 입술을 찍으며 여상스레 말했다. 그 말에 시윤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남들이 들으면 장난이겠거니, 하겠지만 시윤은 청호가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백 개에 다다르는 연꽃을 만들 거라는 걸 알았다.
저를 위해서 하나하나 예쁘게, 공들여 만들어 주겠지.
시윤이 몸을 돌리기 위해 허리를 들썩였다. 그걸 눈치챈 청호가 그의 허리와 허벅지를 잡아 휙 몸을 돌려 주었다. 시윤이 청호의 골반 위에 다리를 걸치고 마주 앉은 자세가 됐다. 두 사람의 얼굴이 오롯이 정면에 자리했다.
시윤이 청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등을 단단히 받쳤다.
“오늘 힘 많이 쓰셨겠네요.”
“뭐, 그다지…….”
청호가 무심히 대꾸했다. 원수들은 S급이라기엔 지나치게 허약했다. 에로아스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라 이른 게 민망할 정도였다. 청호가 낮에 있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는데, 시윤이 검지로 청호의 목울대부터 가슴을 가로질러 명치까지 길게 쓸어내렸다.
“정말요? 많이 쓰셨을 것 같은데…….”
“…….”
“저는 그냥, 가이딩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묘하게 야릇한 손길에 청호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시윤이 곱게 눈을 접으며 엉덩이를 슬쩍 아래로 내리눌렀다.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우람한 청호의 성기가 느껴졌다. 그것을 엉덩이 사이에 끼운 시윤이 몸을 더 바짝 붙였다.
청호의 숨이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성기가 풍선처럼 훅훅 빠르게 부풀기 시작했다. 몸을 감싼 온수보다도 뜨거운 열기는 덤이었다.
반응 좋은 청호의 성기에 괜히 신난 시윤이 킥킥 웃으며 허리를 앞뒤로 흔드는데, 청호가 큼지막한 손으로 시윤의 뒤통수를 통째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눌렀다.
입술이 맞물렸다.
“아, 으응…… 대장……님…….”
뒤를 빠듯하게 채우는 부피감에 시윤이 어깨와 목을 한껏 움츠렸다. 그러자 다정한 입술이 온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아파?”
“흐…… 아니, 아니요…….”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과거였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청호가 이미 수십 분간 뒤를 공들여 풀어 준 상태라 정말 아프지 않았다. 다만 그의 거대한 성기가 버거웠을 뿐이다. 뭐랄까. 밥 세 끼를 한 번에 먹은 느낌이랄까.
청호가 3분의 2쯤 들어간 제 성기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러곤 다시 시윤의 안색을 살폈다. 일그러진 시윤의 눈가가 펴질 줄을 몰랐다.
청호는 한발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물론, 이 행위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터질 듯 발기한 아랫도리가 정신 사나울 정도로 농성을 부리는 탓에 눈앞이 다 시뻘겠다. 허나 그렇다고 시윤을 아프게 할 순 없었다. 여태 아프게 해 온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조금 더 풀어 주지 뭐. 조금 더 달래 주고 보듬어 주지 뭐.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청호가 시윤의 엉덩이를 살살 주무르며 허리를 뒤로 물리는데, 시윤이 눈을 크게 뜨며 답삭 청호의 목을 껴안았다.
“싫어요!”
“시윤아?”
“나가지 마세요……. 흣, 좋단 말이에요…….”
시윤이 허리를 흔들며 조금 빠져나간 청호의 성기를 더 머금으려 했다. 청호가 뒤통수라도 맞은 듯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섹스에 이렇게 적극적인 시윤에는 면역이 안 되는지라.
꾸역꾸역 청호의 성기를 머금은 시윤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족의 한숨이었다.
사실 시윤도 자신이 낯설었다. 최근 청호와 매일같이 입술을 비비고 사랑을 속삭인다지만, 여태 그와 함께해 온 정사는 대부분 고통에 점철되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피를 쏟았었지. 그래서 오늘도 제가 분위기 없이 겁에 질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청호와 닿는 순간, 그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뭉근하게, 은은하게 흘러오는 청호의 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유 모를 충만함이 느껴졌다. 허기진 위에 따뜻한 수프가 들어오는 것 같기도 했고, 피곤에 찌들어 있다가 열두 시간 양질의 수면을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뭐, 청호의 성기가 뒤를 가득 채워서 느끼는 충만함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성적 쾌락이나 육욕과는 조금 다른 기쁨이었다.
시윤은 양껏 청호의 성기를 삼키더니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지듯 누워 버렸다. 그냥 이대로 자도 좋을 듯했다. 물론, 청호의 상태는 전혀 고려해 주지 않은 행동이었다.
“…….”
어금니를 아득 짓씹은 채 시윤의 낯을 살피던 청호가 슬슬 움직임을 준비했다. 시윤의 다리를 양쪽 어깨에 하나씩 걸치고, 허리를 슬금슬금 뒤틀며 수월히 움직일 수 있는 위치를 찾았다.
그러고는 쑤욱 성기를 반쯤 뽑아냈다.
“으응…….”
시윤이 불만 어린 눈으로 청호를 쳐다보는데, 청호가 곧장 다시 성기를 내리꽂아 버렸다. 단단한 귀두가 빈 곳을 채우고자 오물오물 모이던 내벽을 힘차게 갈랐다.
“아흐윽!”
시윤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청호가 눈을 번뜩이며 드러난 목선을 개처럼 핥았다. 그러면서 작고 동그란 엉덩이 사이를 마구 쑤셔 댔다. 굵직한 기둥이 좁은 구멍 안으로 쑥쑥 잘도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아…… 시윤아…….”
청호가 짙은 신음을 흘리며 시윤의 목덜미에 코를 처박았다. 성기를 옴팡지게 조이는 내벽, 시윤의 보송보송하고 보드라운 체취, 그리고 핏줄을 씻어 내는 듯한 청량함과 몸이 따뜻해지는 안온함까지.
청호가 상체를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자연히 시윤의 몸이 더 깊게 접혔다. 엉덩이가 하늘을 향해 솟을 정도였다. 그 채로 청호의 성기가 깊고 빠르게 드나들었다.
“으흑, 아, 으흐읏……. 대장, 대장니임…….”
깊어진 삽입에 시윤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짓눌린 전립선과 팽팽하게 벌어진 내벽, 퍽퍽 때려 맞는 듯한 배 속이 좋으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정사가 진행되면서 청호는 말이 없어졌다. 그럴 시간도, 틈도 아깝다는 듯 부지런히 시윤의 뒤만 쑤셔 댔다. 가끔 시윤의 가슴을 만지거나 키스를 해 주기도 했으나,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찰박찰박, 살과 살이 붙었다가 떨어지며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신음이 난무했고, 주변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청호의 몸짓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시윤의 엉덩이를 옆으로 벌린 후 붉게 뻐끔거리는 구멍을 응시하며 집요하게 성기를 치받았다. 넣으면 넣는 대로 꽉꽉 조여 대는 구멍에 뇌가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앙, 아! 대장님, 좋, 아요……. 아흣, 아!”
시윤의 속눈썹에 눈물이 동글동글 맺혔다. 배 속이 찌릿찌릿했다. 아랫배는 요의라도 온 것처럼 시큰거렸다. 사정하기 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 요의인지 구분이 안 되어서 저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게 됐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어쩐지 청호의 검은색 눈동자가 더 새카맣게 탔다. 마치 화염 같은 열에 타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코앞에서 본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아니, 흣, 아니에요, 방금은 그냥, 아니에요, 그런 거…….”
라며 주절주절 변명을 내 놓는데. 청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큰 손으로 시윤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통째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피해 꾸물꾸물 위로 기어가는 시윤을 훅 끌어당겨 퍼억 성기를 욱여넣었다.
“아, 아아…….”
바짝 서 있던 시윤의 성기에서 하얀 탁액이 튀어 올랐다. 그 정액은 시윤의 판판한 배를 적시고, 귀엽기 그지없는 배꼽에도 찰랑찰랑하니 고였다.
갑작스러운 절정의 충격에 시윤의 입이 뻐끔 크게 벌어졌다. 청호가 고개를 숙이고 그 입에다 혀를 밀어 넣었다. 시윤이 헐떡헐떡 내뱉는 숨마저 죄 집어삼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후 재차 퍽퍽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시윤은 절정의 여운에서 헤어 나올 틈조차 없이 또 다른 쾌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져야 했다.
몸이 마구 흔들렸다. 엉덩이는 손바닥으로 호되게 얻어맞는 듯 따끔따끔했고, 배는 저릿저릿했다. 오싹한 느낌에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으며 사정 후 가라앉지도, 그렇다고 다시 발기하지도 못한 성기가 꿈틀거렸다.
“우으, 흐, 잠깐, 잠깐……만……. 읍, 흐으…….”
입이 막힌 시윤이 말 대신 청호의 팔뚝을 벅벅 긁어 댔다. 나름대로 손톱을 한껏 세운 공격이었는데, 얄밉게도 청호의 피부엔 붉은 선 하나 생기지 않았다.
“후우…….”
시윤의 입술을 놓아준 청호가 길게 신음했다. 그러곤 한쪽 팔로 시윤의 머리 위를 감싸듯 안고 골반에 체중을 실었다. 사정을 준비하는 거였다. 엄지손가락만큼 남아 있던 청호의 성기가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들어왔다.
“하윽…….”
시윤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부르르 경련했다. 속눈썹은 위로 치솟았고, 시선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천장 한 귀퉁이로 흘러갔다. 짓눌리다 못해 뭉개질 것 같은 전립선이 괴로웠다. 전신을 관통하는 쾌락에 혼이 다 빠졌다.
그때, 청호가 귀두까지 성기를 빼더니 단번에 콱 뿌리까지 쑤셔 넣었다. 그로 모자라 체중을 실으며 시윤의 안으로 부득부득 더 들어오려 했다.
“…….”
시윤이 입을 벌린 채 호흡을 멈췄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냥 청호의 성기가 들어오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오는데, 무게와 힘으로 짓누르기까지 하니 정말 목구멍으로 그의 성기가 나오는 게 아닌가 두렵기까지 했다.
긴장한 근육들이 빠르게 수축했다. 목은 자라처럼 움츠러들었고, 등은 말렸고, 발가락은 곱았다. 물론 청호의 성기를 문 뒷구멍 역시 한껏 조여들었다.
그것을 느낀 청호가 시윤의 엉덩이를 양껏 움켜쥔 채 절정에 다다랐다.
붉게 물든 시윤의 구멍이 얕은 개폐를 반복하며 찔끔찔끔 정액을 쏟아 냈다. 청호가 무려 세 번이나 싸지른 정액이었다. 하얀 순두부 같던 엉덩이와 사타구니는 온통 발갛게 익어 있었다.
남세스러운 액체로 끈적해진 시윤의 가랑이를 닦던 청호가 눈썹을 구겼다.
“부었어.”
“괜찮아요. 아프진 않아요.”
축 늘어진 시윤이 힘없이 대답했다. 사실 아래 전체가 얼얼해서 하나하나의 통각이 느껴지지 않는 거였지만. 굳이 청호가 알 필요는 없을 듯해 말하지 않았다.
청호가 입술을 움칠거렸다. 살갗이 쓸려서 붉어질 정도인데 아프지 않다니. 말이 되나. 그러나 그 역시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거짓말, 아프면서, 라고 한들 시윤의 몸이 말끔하게 낫는 것도 아니니.
좀 천천히, 느긋하게, 애정과 사랑이 듬뿍 담긴 대화를 나누며 정사를 이어 가고 싶은데 시윤과 몸만 닿으면 정신이 홀라당 날아가 버려서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온수에 적신 수건으로 시윤의 몸을 꼼꼼히 닦아 준 청호는 시윤에게 물까지 먹인 후에야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시윤에게 이불을 덮어 주려는데, 시윤이 꾸물꾸물 청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껴안고 체온을 높였다.
청호가 숨을 쉴 때마다 시윤이 함께 오르내렸다. 맞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힘이 은은하게 넘나들었다.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의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청호가 시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데, 시윤이 청호의 왼쪽 가슴 위로 턱을 괴고 눈을 맞춰 왔다. 그 얼굴이 어찌나 예쁜지.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오늘 다치진 않으셨어요?”
시윤이 뒤늦은 안부를 물었다.
“응.”
청호가 단조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 처리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셨고요?”
“응.”
그 말에 시윤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모두 죽었구나. 나쁜 사람들이니 벌을 받는 게 마땅한데 어쩐지 기분이 장마철에 운동화가 젖은 것처럼 꿉꿉하고 불편했다.
그런 시윤을 보던 청호가 덩달아 심각해졌다. 시윤의 심정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저야 평생을 죽음과 함께 지냈지만, 시윤은 최근, 짧은 시간에 매우 많은 사람을 잃었다.
꼭 잘 붙어 있던 손가락 하나가, 발목 한쪽이, 고막 하나가 사라진 듯한 기분일 것이다. 죽을 만큼 괴롭진 않더라도 허전하고 가끔 이유 없이 멍해지겠지.
청호 역시 겪었던 감정이고, 순간들이었다.
“다들 죽길 바라는 것 같았어.”
그가 시윤과 그윽하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
“원수들 말이야. 반항도 안 했고, 살려 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아마 청문회를 봤겠지. 더는 떠받들어지며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거야. 산다 한들 포스에서 쫓겨날 거라는 것도 알았을 거고.”
“…….”
“그들도 한때는 방랑자였으니까,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갈 바엔 죽는 게 낫다 싶었겠지.”
아무리 강한 능력자라도 결국은 인간이고 늙는다. 나쁜 인간 역시 인간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원수들은 청문회의 동영상처럼 활기차지도, 야망에 눈을 번들거리지도 않았다. 근래의 인생 역시 예전만큼 화려하거나 다채롭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행복하고, 적당히 평화롭고, 꽤 지루했겠지.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낭떠러지에는 극복하거나 싸울 의지조차 들지 않는다. 피가 터지는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면 더더욱.
청호가 몇 시간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같이 죽음을 기다리는 얼굴들이라 잔인하게 죽이리라, 찢어 죽이라, 세웠던 계획을 실행할 맛도 안 났다. 그래서 모두 깔끔하게 미간에 총알을 박아 줬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이었다.
시윤이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 톡톡 청호의 입술을 두드려 왔다. 청호의 시선이 다시 시윤에게로 옮겨 갔다.
“그럼 이제 포스는 누가 통치하나요?”
“글쎄.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대장님이 안 하시고요?”
“내가? 내가 왜? 그 귀찮고 짜증 나는 걸 뭐 하러.”
청호가 상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반면에 시윤은 누가 얼굴에서 표정을 닦아 내기라도 한 것처럼 굳었다. 당연히 청호가 포스를 이끌어 갈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 포스를 이끌어 가나. 작은 무리이든 큰 무리이든 리더가 필요한 법이다. 목표를 결정하고 그 목표로 모두를 이끌어 가야 했다. 특히나 이런 세상에, 리더 없는 무리는 쉽게 와해하고 파멸될 터였다.
어딘가 충격을 받은 듯한 시윤에 청호가 그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쉬운 사람이 방법을 강구해 내겠지.”
“…….”
“나는 하기 싫어. 전장에서 부대를 지휘하는 거랑, 수백만의 사람을 아우르는 건 전혀 다른 거야.”
“…….”
“전장은 쉬워.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 좋은 거고. 누가 다쳐야 한다면 그 인원을 최소화하는 게 맞는 거고. 목표는 항상 승리지.”
“…….”
“근데 통치나 정치는 달라.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악을 쓴대도 나나, 또 너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
“더군다나 나는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피를 몰고 다니고, 도덕적이지도 못해.”
시윤은 청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진 못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군사와 국민을 이끄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또, 청호는 정의롭지만 자비롭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항시 유순하고 너그럽다고 좋은 통치자인가?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그 말고 적임자가 있나? 청호만큼 강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적당히 영웅화되어 신뢰를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는데.
시윤이 아쉬운 마음에 다시금 입을 뗐다.
“그래도 대장님이라면…….”
“나는 하고 싶지 않아.”
청호가 단호히 말했다. 시윤의 입술이 쭈삣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청호가 나직이 웃으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시윤이 자연히 청호의 팔뚝을 베고 그의 가슴팍에 코를 묻게 됐다. 청호가 그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시윤아. 나는 지쳤어.”
“…….”
그 말에 시윤이 소리 없이 숨을 멈췄다. 갑자기, 에펠 탑에서 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윤아. 나는 죽고 싶어. 너무 오래 살아왔어. 이제는 사는 게 버겁다. 시간이 끔찍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겁이 났다. 설마 청호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절 두고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시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신 걸 삼킨 듯 어금니 사이로 침이 배어 나왔다. 그런 시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호의 낮은 목소리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인간들끼리 싸우고 헐뜯고 속이고 죽이는 것에 신물이 나.”
청호의 시선이 시간을 넘어 먼 곳을 향했다. 정원이 죽던 날. 제게 찾아온 종우가 이리 말했었다.
‘어머니를 따라 농사일을 하고 싶습니다. 비가 오면 어쩌나, 비가 안 오면 어쩌나, 그런 것만 걱정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매일 누군가를 원망하고, 복수를 계획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참 괜찮은 삶일 것 같았다. 날씨 걱정이 하루 최고의 걱정인 삶. 누구를 원망하고,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고달파 하고, 피를 보는 삶이 아니라 그저 해가 뜨고 밤이 오는 것만을 생각하는 삶. 이 혼돈의 세상에서 최고로 평화로운 삶이었다.
청호가 고개를 숙이고 시윤과 진득이 시선을 맞췄다.
“일이 정리되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 거야.”
“네?”
시윤이 탄성처럼 되물었다. 논다니. 아주 특이한 말도 아닌데 청호의 입으로 들으니 새로웠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볼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방사능이 사라지고 있어. 클롭스는 빨아 먹을 방사선이 없으니 서로 잡아먹을 거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자연히 평화가 오겠지. 인간 최대의 적이 사라지는 거야.”
“……그렇……겠죠.”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사능과 클롭스가 없는 지구. 너무 현실성이 없어 상상도 되지 않았다. 클롭스가 없으면 장벽도 필요가 없겠지. 방사능이 없으니 이제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터였다.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방사선 수치를 확인하거나, 물이나 음식이 피폭된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도 없어질 거고.
시윤이 멍하니 얼마 남지 않은 평화를 상상했다. 그러고 있으니 정원과, 그를 비롯한 원수들이 아니었다면 그 평화가 이미 도래했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정말 평화로워지겠네요.”
“그렇지. 나는 이따금 고위 클롭스만 처리해 주면 될 테고, 남는 시간은 그냥 놀 거야.”
“…….”
“너랑.”
청호가 시윤의 입술을 살짝 빨았다가 놨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생기는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가득했고, 내쉬는 숨이 입술 위를 살랑살랑 간질였다.
청호가 시윤의 담갈색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늘어지라 자다가 늦은 오전에 브런치를 먹고, 새가 지저귀는 풀밭에서 산책하고, 노을이 지는 잔디 아래에서 책을 읽고, 오래된 LP판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때로는 낡은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고, 어둠이 지배한 밤엔 은하수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지나치게 감미로운 문장의 연속이었다. 시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이다지도 애정이 담뿍 담긴 말이라니. 꼭 청혼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시윤이 감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숨만 끊어 쉬는데, 청호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달리기에서 1등이라도 한 듯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시윤의 눈가와 뺨을 연약한 꽃잎이라도 만지듯 조심히 쓰다듬었다.
“꽤 멋진 말이지? 오래 준비했어. 교도소에 있는 내내 책 읽으면서.”
“…….”
“종일 네 생각만 했거든.”
그 말에 시윤은 하마터면 무드 없이 딸꾹질을 할 뻔했다. 심장 언저리에서 꽃이 움트는 것 같았다. 봄바람이 핏줄을 타고 나도는 듯 몸이 따끈해졌다.
‘종일 네 생각만’. 앞말보다 뒷말이 더 설렌다면 제가 이상한 걸까.
시윤이 조용히 청호의 말을 되뇌고 있는데 청호가 쑥스러운 낯으로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걸 다 하려면 바쁘겠지?”
“푸흐……. 네. 바쁘겠네요.”
시윤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늦잠도 자고, 브런치도 먹고, 산책도 해야 하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그러다 밤엔 은하수도 보고. 아주 한가로운 바쁨이 될 터였다.
시윤이 금빛과 주홍빛이 넘실거리는 미래를 상상하며 미소를 띠는데, 청호가 그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너도 아무것도 하지 마.”
“아?”
“가끔 강의하는 건 봐줄 수 있어. 근데 다른 건 안 돼.”
난데없는 실직 예고에 놀란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청호가 그를 한 아름 껴안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웅얼거렸다.
“내가 언제 어디서 폭주할지 모르잖아.”
“…….”
“밥 먹다가 폭주할 수도 있고, 책 읽다가 폭주할 수도 있고, 낮잠 자다가 폭주할 수도 있고. 응?”
정말 생떼였다. 그래, 뭐. 백번 양보해서 실제로 그가 책을 읽다가 폭주할 수도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 만에 하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붙어 있으라니. 어딘가 무섭기도 하고, 묘하게 기대되기도 했다.
시윤이 쉽게 답을 내지 못하고 으음, 신음하고 있으니 청호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시윤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두툼하고 단단한 팔뚝이 시윤을 옭아맸다.
“내 곁엔 네가 있어야 해, 시윤아.”
“……대장님.”
“난 너밖에 없어.”
“…….”
“그리고 너만 있으면 돼.”
“…….”
절절함 가득한 청호의 문장에 시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실, 과거를 돌아보면 시윤은 강의가 아니고서야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주된 업무는 클롭스 분석이었지만 머지않은 미래엔 클롭스가 사라질 텐데. 그럼 분석은 물론이거니와 강의도 그다지 중요치 않아질 터였다. 공룡이나 인간의 진화 따위를 알려 주는 지루한 생물학 수업과 다름이 없어지겠지.
그럼 시윤이 할 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청호의 반려 가이드로서 그를 가이딩하는 것. 답은 정해졌다.
“좋아요. 우리 같이 놀아요.”
평화로운 미래에서. 우리 둘이.
시윤은 자신의 능력에 차근차근 적응해 갔다. 청호가 어찌나 찰떡같이 가르쳐 주는지, 이제 마음만 먹으면 뭐든 없앨 수 있었다.
물 잔 안의 물만 없애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흩트려 놓은 붉은 구슬과 파란 구슬 중 파란 구슬만 없애는 것도 가능했고, 모래나 밀가루만큼 작은 입자도 없앨 수 있었다.
힘을 쓰는 게 점점 재미있어졌다. 모건은 시윤만큼이나 신이 났고, 청호는 이것저것 다채로운 훈련들을 시켜 주었다. 가만히 있는 물체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것, 예를 들면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공이나 화살, 총알 따위를 삼키는 것도 연습시켰다.
그 후에는 에스퍼의 공격을 막아 내는 연습을 했다. 청호가 헐겁게 쏴 주는 불덩어리나, 폴이 만들어 내는 바람 같은 것들 말이다. 모건은 이때 가장 신나 했다. 먼 과거에 시윤이 정원의 힘을 깨고 나왔던 게 요술이 아니었다며 방방 뛰기까지 했다. 청호는 기특하다며 진하게 키스해 주었다.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원수들 이야기로 잠깐 왁자지껄하던 포스는 금세 일상으로 돌아갔고, 통치자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나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언가 조정할 게 생기면 농업 전문 담당자, 장벽 담당자, 공업이나 무기 전문 담당자 등이 모여서 토론하고 결론을 냈다.
클롭스들은 이따금 먹이를 찾아 포스 주위를 어슬렁거리긴 했으나, 에로아스가 나서야 할 만큼 강한 것들은 아니었다.
덕분에 청호와 시윤은 부대 안을 한가로이 산책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앞다투어 청호에게 경례했다. 가끔 시윤이 가이딩해 준 가이드 없는 에스퍼와도 마주쳤다.
물론,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이도 없진 않았다. 시윤은 애써 고개를 숙였고, 청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보란 듯이 시윤의 손을 더 세게 쥐곤 했다.
“저녁으론 미트볼을 먹을까.”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손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좋아요. 저는 크림소스 얹어 먹을래요.”
시윤이 옅게 웃으며 턱을 주억였다. 샐러드랑 매시포테이토도 먹어요, 라며 팔랑팔랑 아이처럼 손을 흔들기도 했다. 청호가 쿡쿡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곤 폴에게 명령하기 위해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냈다.
그때였다.
청호의 홀로그램 가득 붉은 사인이 떠올랐다.
긴급 출정 명령.
장벽 전투 이후 처음 보는 사인이었다.
다행히 목적지는 포스 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스와 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에로아스는 지프로 이동하지 않고 군용기를 탔다. 클롭스 하나가 급작스레 하늘에 나타났는데, 어찌나 흉측하고 거대한지, 장벽 너머로 훤히 보일 정도라는 거다.
급하게 전투복을 입은 청호와 시윤이 군용기에 몸을 실었을 때, 클롭스의 사진과 동영상이 두 사람에게 전송되었다.
그것을 확인한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클롭스야 수도 없이 봤다. 빙하로 덮여 있던 Z 구역에서는 산만큼이나 커다란 것도 있었다. 근데 사진 속의 클롭스는 그저 크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늘에 떠 있는데, 구름에 가려 그 몸체 전체가 온전히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충 가늠하면 빌딩을 열 채쯤 붙여 놓은 크기가 아닌가 싶었다.
생김새도 묘했다. 클롭스들은 대부분 ‘징그럽다’고 묘사하기에 부족함 없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여타 인간이나 동물처럼 좌우가 대칭되지도 않았고 눈알은 세 개였다가 하나였다가, 콧구멍이 있다가 없다가, 혀는 있는데 턱은 없다든가, 등등 방사선 피폭으로 인해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헌데 사진 안의 클롭스는 더할 나위 없이 대칭이었다. 눈 두 개, 코 하나, 콧구멍 두 개. 구름 사이로 나온 발을 보면 그 역시 두 쌍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묘사하자면 몸뚱이는 구렁이 같았는데, 아주 길고 굵직했다. 그러나 구렁이 피부와 달리 비늘이 훨씬 크고 두껍고 각져 있었다. 그리고 은은히 빛이 났다. 흐린 구름 사이가 아니라 햇살 아래에서 보면 마치 자개처럼 반짝일 것 같았다.
또 정수리부터 꼬리까지 붉은색 갈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물결처럼 흔들렸다.
얼굴은 악어와 닮았다. 주둥이가 길고 입이 크게 찢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는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이빨이 나와 있었고, 언뜻 보이는 혀는 검은색이었다.
다리는 짤뚱했고, 몸체에 비해 가늘었다. 그러나 그 끝에 달린 발은 아주 크고 마디가 도드라져 있었다. 발톱은 또 어찌나 굵고 날카로운지. 한번 휘두르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이 천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물방울 모양으로 길게 찢어진 눈은 삼백안이었는데, 호랑이의 것처럼 형형했고, 뱀처럼 미끈하기도 했다. 그리고 눈동자가 붉었다. 아주, 아주 맑은 붉은색이었다. 마치 루비처럼.
사진 속의 붉은 눈알과 마주치는 순간, 시윤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반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 온 클롭스 중, 이런 종은 없었는데. 왜 익숙할까. 어떻게 익숙할 수 있을까.
시윤이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사진을 응시하고 있는데, 옆에서 곁눈질하던 딜런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이랑 똑 닮았네.”
“용……이요?”
생경한 단어에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딜런이 “아니야, 아니야.”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시윤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아시는 클롭스입니까?”
“뭐……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그게 진짜 용이면 내가 아는 게 맞지만, 그럴 리가 없어서…….”
다리 사이에 끼운 스나이퍼건 위로 턱을 괸 딜런이 모호하게 대꾸했다. 듣고 있던 청호가 짜증스레 명령했다.
“제대로 말해.”
그에 딜런이 번뜩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 예. 만약 저게 용이라면, 용은 클롭스가 아닙니다. 동물도 아니고, 물론 인간도 아니지 말입니다.”
“그럼?”
영 모호한 대답에 청호의 미간이 세모꼴로 구겨졌다. 딜런은 행동하는 것과 달리 말하는 것은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았다. 아는 게 없는 건 아닌데, 그게 썩 효율이 높지 않았다. 이를테면 기본 상식은 모르나 현세엔 없는 좀비를 죽일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마 이번에도 시답잖은 개소리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들어 보자 싶었다.
딜런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가 펴며 옛날 만화책 따위에서 본 기억을 되뇌었다.
“용은…… 굳이 따지면 신에 가깝습니다. 신수라고도 하고 영물이라고도 하고…….”
“뭐야, 그게.”
“저도 실존하는 거라곤 생각 못 했지 말입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아는 걸 말하자면 용은 하늘을 날 수 있고, 날씨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농사짓는 사람들, 뭐더라, 그…… 아! 농경 시대, 그때는 용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제사를 지내고 빌기도 했답니다.”
“…….”
“인간으로 모습을 바꿀 수도 있고, 용에 따라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도 하는데 그것까지는 못 외웠습니다.”
딜런이 끝이라는 듯 고개를 안으로 말았다. 시윤이 딜런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클롭스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며, 인간도 아니다. 신과 가까운 존재다. 기후를 바꾸기도 하고 특이한 능력도 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할 수도 있다.
순간, 시윤이 호흡을 멈췄다.
모습은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존재. 농경 시대에도 있었을 만큼 나이가 많은 존재. 검은색 혀.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휴예요.”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말에 청호가 퍼뜩 다시 사진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시윤의 말 때문일까, 생경한 용의 생김새 위로 휴의 신비로우면서도 얄미운 얼굴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청호와 시윤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을 때였다.
“목적지 도달 2분 전입니다!”
폴이 크게 소리쳤다.
“내리지 마.”
청호가 자신을 따라 내릴 준비를 하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예?”
병사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리지 마. 위험해.”
청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저 정체 모를 존재가 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차라리 그저 클롭스이면 다행일 텐데 만약 정말 휴라면 위험할 터였다. 저나 시윤이 아니라 병사들이.
안개가 자욱한 산꼭대기에 피어 있던 끔찍한 꽃밭이 오늘이라고 피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수틀린 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시윤에게도 숱하게 목숨을 가지고 협박해 왔던데. 하물며 시윤을 정말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길고 험난했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평화가 도래하고 있거늘, 인제 와서 병사들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가겠습니다.”
폴이 자못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저를 빼놓고 가려 하냐, 화라도 내는 것 같았다. 그런 폴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청호가 거절을 내 놓으려는데,
“예. 당연히 같이 가는 거 아닙니까?”
“위험하다고 하면서 왜 혼자 가려 하십니까?”
알렌과 딜런이 폴을 따라 나왔다. 그들의 뒤로 병사들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총기를 들었다. 청호가 난감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마음은 안다만, 정말 위험했다. 만약 딜런의 말마따나 진짜 신이면 어쩌나. 보통 때라면 제가 나서서 구해 줄 수 있겠지만 휴는 그게 불가능했다.
청호가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병사들을 쳐다봤다.
“명령이야. 여기 있어.”
“하지만…….”
폴이 불만을 가득 담고 다가오려 했다. 헌데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폴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 역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청호가 염력으로 그들의 몸을 옥죄어 두어 그랬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리면, 죽어. 진짜.”
“…….”
묵직한 위압감에 병사들이 버석하니 굳었다. 그런 병사들을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던 청호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제 곁에 서 있던 시윤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자, 시윤아.”
“네.”
시윤이 청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대장님!”
“대장님!”
병사들이 고함치듯 청호를 불렀다. 하지만 청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시윤 역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청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서였다.
결국 청호와 시윤 두 사람만이 군용기에서 내렸다.
먼지 냄새로 뒤덮인 텁텁한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간질였다.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건물 뼈대가 비죽비죽, 여기저기 솟아 있고, 크고 작은 돌과 시멘트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도시, 폐허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하늘에 떠 있는 용을 향해 다가갔다.
용은 아주 느릿하고 여유롭게 하늘을 날았다. 굵직한 몸뚱이가 뱀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하늘이 울고, 땅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신기하게도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용은 청호와 시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한자리에 있었다. 가끔 트럭만 한 발로 기울어진 건물들을 툭툭 건드려 모래바람이 일게 하는 장난도 쳤다.
“휴가…… 맞을까요?”
시윤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선은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용에게 박혀 있었다.
“가 보면 알겠지.”
청호는 늘 그렇듯, 감흥일랑 없는 얼굴이었다. 두려움도 없었고, 호기심도 없었다. 흔한 전장이었다면 무심한 청호의 낯에 그래, 그가 있는데 무어가 걱정이랴, 생각했을 텐데. 오늘은 그게 안 됐다.
심장이 펄떡펄떡 세차게 뛰고, 혀뿌리는 황무지처럼 말랐으며 속이 메슥거렸다. 아무래도 시윤에게 휴는 자신을 살해했던 존재인지라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쑤셔 댔던 가슴팍이 따끔따끔했다. 그 차갑고 미끈한 뿔이 아직 제 가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자꾸 뻑뻑하게 마르는 안구에 시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는데, 청호가 씨익 웃으며 속삭여 왔다.
“시윤아.”
“네?”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야.”
“…….”
“이번엔 혼자 안 둬.”
“대장님…….”
“만약에 죽더라도 같이 죽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시윤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당황이었다. 같이 죽겠다니.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지, 같이 죽겠다니. 아직은 포스에 청호가 없으면 안 되는데. 제 죽음이야 가족들이나 슬퍼하겠지만 청호의 죽음은 포스의 국민 전부가 슬퍼할 터였다.
시윤이 무심코 안 돼요, 대장님은 사셔야 해요, 그리 말하려 입술을 벙긋거리는데 청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을 운운하면서 참…… 즐거워 보였다. 죽음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왜. 청호는 어머니의 죽음도 경험했고 거기다 반려 가이드인 제 죽음도 경험했는데. 어찌하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나.
시윤은 청호를 이해하려 열심히 고뇌했다. 그러다 문득 청호와 함께 죽는 걸 상상했는데, 생각만큼 지독하거나 끔찍하지 않았다. 어떻게 죽는다 한들, 청호와 함께 죽으면 퍽 괜찮을 것 같았다.
청호는 끝까지 저를 지키려 노력할 것이고, 그러다 무너진다 하더라도 저를 안고 있을 것이다. 저는 그의 품에서, 천천히 식어 가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죽게 되겠지.
설사 대화를 하거나, 입을 맞추거나, 시선을 교환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 같았다. 아마 그마저도 낭만적이라 느끼지 않을까.
시윤이 청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느슨하고 나른한 표정의 청호가 좋았다. 제 발걸음에 맞춰 걸어 주는 것도 좋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같이 죽어 주겠노라 말해 주는 것도 좋았다.
그냥, 청호라서 다 좋았다.
“네.”
시윤이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그 화사한 웃음을 마주한 청호가 참지 못하고 시윤의 볼을 감싸 쥐고 짧게 키스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이었음에도 시윤의 만면에서 웃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청호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윤이 웃는 걸 보고 있으면 두드러기라도 난 것처럼 몸이 간지러워진다. 심장 아래엔 벼룩인지 개미인지 모를 것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고, 목젖 아래에는 간질간질한 꽃이 피었다.
턱과 혀가 얼얼할 때까지 시윤을 물고 빨아야 그 간지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거센 콧김을 뿜은 청호가 시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용이 부유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호의 생각을 눈치챈 시윤이 뒤꿈치를 쳐들고 그의 목을 껴안았다.
시윤을 조금 더 단단히 안은 청호가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곤 한 손과 두 다리로 성큼성큼 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갔다. 으스러진 시멘트 벽과 툭툭 튀어나온 철근들을 마치 계단처럼 밟았다.
옥상까지 다다르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옥상에는 질긴 덩굴나무와 녹슨 실외기, 물탱크 따위가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다른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청호가 조심히 시윤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윤이 버릇처럼 청호의 손을 잡았다. 그 후 한층 가까워진 용을 올려다봤다.
느긋하게 하늘을 비행하던 용은 언제부터인지 시윤과 청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쭉 찢어진 동공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늘한 바람만이 그 정적 위를 맴돌았다. 먼저 입을 뗀 건 시윤이었다.
“……휴? 휴예요?”
그다지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멀찌감치 있는 용에게 흘러가다가 바람에 묻혀 버릴 목소리였다. 근데 용은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기다란 몸이 고운 곡선을 그리며 파도처럼 다가왔다. 붉은 갈기가 값비싼 실크처럼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쉭쉭 거리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 신비로웠다.
시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용을 바라봤다. 반평생 동안 클롭스를 연구해오며 온갖 생김새는 다 봤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만큼 ‘신’처럼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발을 내딛는데, 청호가 그런 시윤을 잡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용이 그런 청호와 시윤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몸을 크게 꿈틀거리며 낙하하듯 두 사람이 있는 건물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에 용이 숨을 내쉴 때마다 청호와 시윤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푸르릉, 푸르릉, 맹수가 잠을 잘 때 날 법한 소리가 났다.
청호의 팔뚝 뒤로 고개만 빼꼼 내민 시윤이 재차 정체를 물으려는 찰나였다.
「약속한 걸 받으러 왔어.」
익숙한 목소리가 웅웅 울리듯 들려왔다. 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 용의 것이기도 했다.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냥 본능적으로 그가 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휴예요.”
시윤이 신기하다는 듯 청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청호는 대답 대신 용을 노려보기만 했다. 인간이 아닌 건 진즉 알고 있었다만. 본 모습이 이런, 이런 모습일 거라곤 전혀 상상치 못했다. 어쩐지 얄미웠다.
“…….”
“…….”
청호도 시윤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휴의 다른 모습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에 휴가 짜증스레 숨을 내쉬었다. 돌풍 같은 바람이 두 사람을 꾸짖듯 몰아쳤다.
「시윤아. 약속을 지켜.」
휴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댔다.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렸다. 더는 시간을 버티고 싶은 마음도, 자신도 없었다.
시윤이 휴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약속. 그래, 지켜야지. 언젠가 그를 만나면 꼭 단번에 죽이리라 다짐해 왔다. 근데 이런 모습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의 휴를 마주하니 어쩐지 망설여졌다. 이렇게 멋진 존재이면서, 더군다나 불멸이기까지 하면서 왜 죽으려 하나. 안타깝기도 했다.
시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청호가 대신 나섰다.
“진짜 죽으러 왔다고?”
「그래.」
“……온갖 유난은 다 떨면서 죽을 줄 알았더니.”
청호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안개 위에 피어 있던 붉은 꽃밭도 그렇고, 시윤을 매달아 놓은 에펠 탑을 장미로 온통 뒤덮어 놓은 것도 그렇고. 고상한 예술을 흉내 내는 사이코 같은 취미가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자신은 이렇게 시답잖고 삭막한 곳에서 죽겠단다.
뭐…… 그만큼 죽음이 간절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사실 청호는 휴가 무슨 짓을 하든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음…….」
청호의 시비에 휴가 머리를 크게 한 바퀴 굴렸다. 갈기가 차르르 흩어지고, 큼지막한 비늘은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그러다 번쩍 눈을 홉떴다. 자동차만큼 커다란 눈알에 붉은빛이 산란했다.
혹여 공격이라도 할까, 청호가 꾹 주먹을 말아 쥐는데, 하늘에서 난데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굵고 기다란 게 장대비였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청호가 비를 피하려 무심코 염력을 썼다. 휴의 앞에서는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잊은 행위였다. 아차, 싶어서 코트 안으로 시윤을 숨기려는데, 어째서인지 비가 멈췄다. 그러니까 청호의 주위로만 비가 멈췄다. 염력이 통한 것이다.
청호가 손바닥을 위로 올려 불을 틔웠다. 붉은 화염이 화르륵 올라왔다. 오늘은 휴가 능력을 막는 요술 같은 걸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비는 왜. 청호가 휴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무슨 꿍꿍이인가, 고민하는데 비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쳤다.
청호와 시윤이 축축하게 젖은 땅과 휴를 번갈아 봤다. 일순, 갑자기 하얀 것들이 여기저기서 움트기 시작했다. 처음엔 곰팡이인 줄 알았다. 그만큼 작고 볼품없었다. 허나 5초 정도 지나니 하나같이 온전한 모습을 띠었다.
국화꽃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꽃송이가 땅에, 시멘트 사이사이에, 녹슨 철근을 비집고, 흙더미 틈에서 피어나 맑은 빛을 뿜었다. 하늘에서도 꽃잎이 떨어졌다. 펑펑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국화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듯 요동쳤다.
굳이 따지자면 아름다운 광경이었는데, 이상하게 울적했다. 아무래도 국화라는 꽃은 쓰임새가 남다른지라. 세상이 누군가를 추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걸 기대했니?」
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청호도, 시윤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막상 휴의 기이한 능력을 마주하고 나니 어쩐지 몸이 굳었다.
휴는 두 사람의 반응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은은한 파도를 타고 오듯 다가온 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자, 이제 나를 죽여 주렴.」
“…….”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청호를 쳐다봤다. 어찌해야 하는지 묻는 거였다. 청호는 그저 시윤의 손을 꽉 쥐기만 했다. 그러곤 천천히 놓아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 같았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시윤이 쭈뼛쭈뼛 휴를 향해 다가갔다. 휴는 가까워지는 시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깜빡이거나 옅은 숨을 내쉬기만 했다. 죽음을 바라는 존재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시윤이 조심히 손을 뻗었다.
휴를 죽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태 청호와 해 왔던 것처럼, 얼음으로 만든 연꽃을 삼키고, 물 잔의 물을 없앴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하면 될 터였다.
근데 너무 께름칙했다. 여태 제 능력으로 생명체를 삼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클롭스 조차 죽여 보질 않아서. 그래서 휴를 죽이는 게 달갑지 않았다.
휴는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에게도, 저에게도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그러니 죽고 싶다고 할 때 없애는 게 맞는데. 쉽사리 힘을 방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시윤의 망설임을 알았을까. 휴가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시윤의 손바닥에 텁, 그의 콧잔등이 닿았다. 차갑고 단단한 비늘에 소스라치게 놀란 시윤이 어깨를 튕겼다. 그러자 휴의 붉은 눈동자가 짙은 핏빛을 띠었다.
「약속을 지켜.」
“…….”
「아니면 네 가족도, 청호도, 포스의 인간들도 다 죽여 버릴 거야.」
잔인한 협박이었다. 청호가 으득 이를 갈며 붙어 섰다. 하지만 시윤이 반대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시윤은 겁을 집어먹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에 있을 때도 들었던 협박인지라 크게 무섭지도 않았다.
시윤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방사능이…… 사라질 거래요.”
「뭐?」
갑작스러운 방사능 타령에 휴의 눈두덩이 확 구겨졌다. 큼지막한 눈동자 역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시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럼 클롭스들도 자연히 사라진대요.”
「…….」
“시간이,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지금보다 나아질 거예요.”
「…….」
“사람들은 죽지 않을 거고, 동물들도 방사선에 피폭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찾을 거예요. 산도, 바다도 그렇겠죠.”
「……하고 싶은 말이 뭐니?」
휴가 그윽하게 시윤을 쳐다봤다. 시윤 역시 휴를 직시했다. 사실 그러면서도 겁이 나 청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수십 년 뒤엔 꽤…… 멋진 세상이 될 거예요. 당장 내일만 되어도 조금은 달라질 텐데…….”
「…….」
“아니, 아니. 당신이 여태 봐 왔던 그 세상만큼 활기차고 멋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꽤, 꽤 평화롭고 아름다워질 텐데…….”
「그래서?」
“그런데도 꼭…… 죽어야겠어요?”
마지막 문장은 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로 흘러갔다. 잠자코 듣던 청호가 묘한 눈빛으로 시윤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시윤은 휴의 자살을 막고 싶어 하는 듯했다. 자신의 가슴팍에 흉기를 찔러 넣은 파렴치한의 죽음을 막는 것이다.
잔정도 많고, 자비롭고, 모질지 못한 시윤이 답답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뭐, 시윤이 못 죽이겠다면 제가 죽이면 되지. 칼을 들고 총을 쏘고 피를 보는 건 청호에게 하등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휴 역시 시윤의 말을 예상치 못했던 듯 잠시 침묵했다. 흩날리는 꽃잎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시윤을 바라봤을 때였다. 시윤이 다급하게 입을 뗐다.
“사람처럼 살면 되잖아요. 친구도 만들고, 연인도 만들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것도 보고 그러면…… 되잖아요.”
시윤이라고 휴가 좋을 리 없었다. 죽여 달라면 언제든 죽여 주겠노라고 제 입으로 그랬다. 근데 이제 와 생각하니, 휴가 제게 부탁한 건 말만 죽음이지 사실 죽음이 아니었다. 제 능력으로 그를 삼켜 버리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소멸이다.
피가 나지도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그냥 증발하는 듯한 소멸. 시체조차 없는 죽음. 그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을 삭막한 마지막.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온갖 파렴치한 짓을 한 정원도 가족들의 눈물과 함께 묻혔는데. 그의 시체는 땅속에 잠들어 있고, 조촐한 묘비까지 있는데.
이렇게 죽어 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신이라며. 한때는 사람들이 소원도 빌고 그랬다며. 여태 인간의 모습만 했던 걸 보면 인간을 미워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좀, 어떻게든 좀, 살면 안 되나. 그럴 순 없나.
시윤이 어찌해야 휴를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휴가 웃는 것처럼 자욱한 숨을 내뱉었다. 뜨끈한 바람이 부드럽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시윤아.」
“네.”
「그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에도.」
“…….”
「시간은 흐르잖니.」
그 말에 시윤이 잠깐 숨을 멈췄다. 아차, 싶었다. 휴는 너무 많은 시간을 견뎌 와서 시간 자체가 고통인 존재였는데. 예쁜 곳에 있든, 지옥의 불구덩이에 있든 그에겐 상관없었는데. 그걸 간과했다.
시윤의 눈알이 데구루루 바쁘게 굴러갔다. 하지만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제가 뭐라고 그를 설득하겠나. 그것도 지나친 참견이고, 오지랖이다. 휴는 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아왔고 아주 많은 것을 봤을 터였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부터, 눈이 질끈 감길 정도로 끔찍한 것들까지 수도 없이 마주해 왔겠지.
앞으로 더 긴 시간을 산다 한들 그와 크게 다른 걸 볼 순 없을 터였다. 저야 30년도 채 안 살아온 애송이라 앞으로 올 평화가 기대되는 것이지.
시윤이 마지못해 손바닥에 꾹 힘을 줬다. 뜨거운 피가 핏줄을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시윤의 눈동자가 녹색 빛으로 은은히 발광하기 시작했다.
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드는 것처럼 고요한 정적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완전히 가려지는 순간, 그의 거대한 몸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윤기 나던 비늘도, 곱게 일렁거리던 갈기도, 위협적이던 발톱도 바스러졌다.
그렇게 신비롭고 강했던 휴라도 사라지는 건 여타 물건들과 다르지 않았다. 고운 가루처럼 흩어져서는 시윤의 손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을 만큼 거대했음에도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늘이 텅 비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늘 그랬듯 드높고 광활했다.
하얀 국화꽃잎들만이 나른하게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