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한적한 도시
폴이 열 감지 카메라로 바닥을 스캔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윤에게 보여 주었다.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흙 아래에 옹기종기 달라붙은 인영 몇 개가 보였다. 시윤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흙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흙이 잘게 경련한다 싶더니, 시윤의 손으로 휙휙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땅은 깊었다. 흙이 모두 사라진 후에는 돌들이 나왔다. 그 돌 역시 시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알렌의 예상대로, 산속에 있던 동굴을 흙으로 틀어막아 만든 땅굴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무더기도 사라졌다. 깊은 구멍이 나타나고, 그 틈으로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악취가 흘러왔다. 배설물부터 썩은 음식물, 땀 냄새까지 온갖 것들이 뒤섞인 냄새였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시윤이 팔을 크게 휘저었다. 돌이 사라지면서 구멍이 가로세로 1미터 폭 정도로 커졌다. 그 순간,
탕!
난데없는 총소리가 구멍 속에서 울렸다. 발사된 총알은 시윤의 얼굴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놀란 시윤이 그대로 굳은 채 목만 움츠리는데, 총알이 한 뼘 앞에서 멈췄다.
“……아, 씨발. 놀라라.”
낮은 목소리가 으르대며 허공에 잡힌 총알을 손가락으로 튕겨 버렸다. 방향을 튼 총알이 지척에 있던 나무에 가 퍽! 하고 박혔다. 시윤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일어나.”
청호였다. 그가 시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윤이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청호가 뒤에 서 있던 에로아스 병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구멍 속에서 사람들을 끄집어냈다.
오물이란 오물은 죄 뒤집어쓰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꽥꽥 오리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잡아당기는 존재가 인간인지 클롭스인지, 그것도 아니면 악마인지 구분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방랑자였다. 클롭스와 방사선을 피해 땅 아래에 숨어 사는 방랑자.
고위 클롭스가 발견되어 그것을 죽이고 돌아가는 길에, 알렌이 인간의 흔적을 발견해 주위를 수색했다. 그리고 저 방랑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딜런이 방랑자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총을 빼앗았다. 척 보기에도 오래된 총이었다. 여태 작동하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딜런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살피고 있으니, 방랑자가 경기를 일으키며 총을 되찾으려 했다.
그때. 폴이 방랑자에게 빵과 물을 내밀었다. 그러자 방랑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땟국물이 가득한 몸이라 흰자위가 더욱 도드라졌다. 검은 밤하늘에 뜬 달처럼 번뜩거리는 눈알이 빵과 폴을 바쁘게 번갈아 봤다.
방랑자들은 뒤늦게 에로아스 병사들의 생김새를 확인했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그리고 멀쩡히 붙은 사지 같은 것들을. 멀끔히 입은 옷과 반짝이는 총기 같은 것들도 봤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들과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다. 방랑자들이 괴성 같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빵과 물을 게걸스레 입에 쑤셔 넣었다.
시윤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에로아스에 속하게 된 지 벌써 3년이 흘렀다. 그 3년 동안 제법 많은 방랑자를 구했지만, 볼 때마다 입 안이 떫었다. 아직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싶어서. 아직 구할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서.
“다친 곳은 없어?”
손수 시윤의 무릎을 털어 주던 청호가 물었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대장님이 총알 막아 주셨잖아요. 다칠 일이 뭐 있나요.”
“그래도.”
더러워진 장갑을 벗은 청호가 시윤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청호는 시윤이 에로아스에 속한 건 좋았으나, 이렇게 출정마다 함께해서 별 시답잖은 일을 처리해 주는 건 영 싫었다.
시윤이 없었다면 흙과 돌을 직접 파냈어야 했겠지만,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어차피 힘이 남아도는 애들인데. 굳이 시윤이 나섰다가 총을 맞을 뻔하지 않았나.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점점 굳어 가는 청호의 얼굴에 시윤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고는 청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양팔로 그의 허리를 껴안고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아……. 힘을 너무 많이 썼나 봐요. 막 대장님이 고프네.”
시윤이 자못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능청맞은 연기였다. 그러다 고개를 올리고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 모습에 청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두 팔로 한 아름 그를 마주 안았다.
시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죽여 웃었다.
시윤은 요즘, 청호를 다루는 법을 통달해 가는 중이다.
에로아스 부대는 방랑자들을 데리고 포스로 복귀했다. 하지만 청호와 시윤은 복귀하지 않고 중간에 떨어져 나왔다. 바깥에 나온 김에 ‘놀러’ 가기 위해서였다.
클롭스는 한 해 한 해 그 수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보통 일이 아니고서야 에로아스가 먼 곳까지 출정 나올 일이 없었다. 예전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이었다면, 요즘엔 한 달에 한두 번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 없이 군용기나 헬기를 타고 먼 곳까지 나올 수도 없고. 그래서 청호와 시윤은 이렇게 가끔 출정이 있을 때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이곳저곳을 들르며 빙빙 돌다가 복귀하곤 했다.
오늘 청호와 시윤이 정한 목적지는 작은 소도시였다. 모건이 핵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가서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 좀 가져오라며 떠밀다시피 추천해 준 곳이었다.
소도시는 열 블록이 채 안 되는 크기였는데, 그래도 제법 도시다웠다. 전쟁의 여파 대신 비와 바람만이 다녀가서 건물들도 꽤 제 모습을 갖춘 상태였다.
베이지색, 회색, 붉은 벽돌색 등의 네모난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생명력 강한 풀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여기저기 아무렇게 자라 있긴 했으나 밀림 수준은 아니었다.
지프에서 내린 시윤이 우와- 짧게 감탄했다. 여태 여러 전장을 다녔지만 이렇게 온전한 도시를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대개 도시보다는 폐허라 부르는 게 어울렸지.
시윤이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뽑아 주위를 스캔했다. 곧 여러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방사선 수치가 엄청 낮아요.”
“클롭스도 없겠네.”
“그러게요.”
시윤의 눈이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꼭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온전히 살아 있는 과거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매우 궁금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윤이 편의점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견했다. 그가 다급하게 청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기 가 봐요, 대장님. 저기.”
청호가 피식 웃으며 시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의 유리문은 대찬 바람을 이기지 못해 가루처럼 부서진 상태였다. 군화로 밟으니 유리가 으스러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편의점은 꽤 넓었다. 스무 개가량의 진열대가 있었고, 그 사이는 서너 명의 사람이 동시에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편의점임과 동시에 마트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음식물은 전쟁 당시 사람들이 가져간 모양이었고, 생필품 역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장바구니와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남은 게 없네요…….”
시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게 당시처럼 온전히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경할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텅 빈 진열대에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앉았다.
“편의점이라 그래. 꼭 필요하고, 자주 쓰는 걸 골라다 파는 곳이니까.”
청호가 시윤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주위를 다시 훑었다. 그래도 처음엔 앙상한 진열대만 보이더니, 다음엔 가격표가 보였다.
사각 치즈 2.60$, 초콜릿 샌드 2.99$, 쿠키 1.99$, 치즈볼 4.99$, 누들 1.75$, 햄 1.69$, 음료 3 for 5$…….
단지 글자였지만 그마저도 신기했다. 가끔 제품이 인쇄된 가격표도 있었다. 돈의 단위가 포스와 달라 알아볼 순 없었으나, 아무튼 신기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사사로운 것들을 둘러보다 보니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먼지를 자욱하게 뒤집어쓴 채 구석에 박혀 있던 작은 상자 따위가.
시윤이 엄지와 검지로 상자를 잡아 살살 흔들었다. 그러자 먼지가 날아가고 하얀 바탕에 붉은색 글씨가 쓰인 상자가 온전히 드러났다. 눈을 가늘게 뜬 시윤이 더듬더듬 글씨를 읽었다.
“……딸기…… 맛 치약?”
딸기 맛이라고? 치약이? 왜? 그럼 양치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지지 않나? 옛날 인간들은 어째서 이런 거로 양치를 했을까.
시윤이 심오한 연구 주제를 만난 학자처럼 진중한 표정을 짓는데, 옆에 있던 청호가 넌지시 말을 얹었다.
“어린애용이겠지.”
그 말에 시윤이 헛숨을 잔뜩 들이켰다. 그러더니 광대를 한껏 올리며 웃었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가지고 갈까요?”
“뭐…… 그러든가.”
청호는 굳이? 싶었으나 그러라 했다. 딸기 맛 치약이 신기할 수도 있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니 그러려니, 싶었다.
시윤이 신난 얼굴로 치약을 백팩에 집어넣었다. 뭐 그리 소중하다고 백팩 가장 깊숙한 주머니에 넣고 지퍼도 꼼꼼히 잠갔다. 겨울 준비 하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는 것 같았다.
청호가 스미는 웃음을 숨기려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역시, 놀러 나오길 잘한 것 같다.
딸기 맛 치약을 성공적으로 발견한 시윤은 그 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것저것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이번엔 회색 튜브 하나를 발견했다. 시윤이 제품명과 설명서를 찬찬히 읽어 가다 곧 정체를 알아냈다.
“이건 본드인가 봐요. 모건 대령님이 좋아할까요?”
“……본드?”
청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본드와 모건이라. 괜찮은 것 같았다. 저걸로 그의 입술을 딱 붙일 수 있지 않을까. 목젖을 자르는 것보다야 본드가 편할 것 같았다. 입이 철썩 붙은 모건을 상상하던 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할 거야.”
시윤이 신난 얼굴로 본드까지 가방에 챙겼다. 그 후로 별별 것들이 나왔다. 락스, 매니큐어, 라이터, 우산 등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시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청호는 나뒹구는 의자 하나를 찾아 시윤의 지척에 앉았다. 그리고 할인 전단지를 공중에 띄워 종이접기를 했다. 행여 시윤이 아무거나 잡아다 입에 넣을까, 5초에 한 번씩 그를 곁눈질하며 비행기를 접었다가 토끼를 접고 있을 때였다. 시윤이 종알종알 혼잣말하는 게 들려왔다.
“이건 또 뭐지?”
시윤의 손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비닐이 들려 있었다. 각진 네모 모양에 아주 얇았다.
“Durex?”
시윤이 영 어색한 단어를 더듬더듬 읽었다.
그러고는 제품명 다음으로 큼지막하게 적힌 단어들도 읽었다.
“XL? Extra Sensitive? 옷일까요?”
옛날 인간들은 옷을 이렇게 작은 곳에다 수납했나? 진공 포장, 뭐 그런 거? 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닐을 좌우로 살폈다. 시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청호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때, 시윤이 또 다른 단어를 찾아냈다.
condom.
“콘……돔. 콘돔이 뭔지 아세요, 대장님?”
그 말에 청호가 쿨럭, 기침하며 상체를 들썩였다. 콘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장님. 이거 하나 가지십시오.’
‘뭔데?’
‘콘돔이요.’
‘그게 뭔데?’
‘아, 이게 옛날 인간들한테 필수품이었던 거지 말입니다. 섹-스할 때 쓰는 겁니다. 건전한 성행위를 위해서.’
‘……뭐?’
딜런의 목소리였다. 청호도 몰랐으나 먼 옛날 딜런이 신난 얼굴로 한 박스나 찾아와서는 병사들에게 한두 개씩 나눠 주며 입을 놀린 탓에 알고 있었다.
요즘은 피임이라는 개념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번식만큼 중요한 게 없기도 했고, 그런 걸 따질 만큼 성행위가 건전하지도, 청결하지도 않았다. 온갖 오물이 득실거리는 땅굴 속에서 섹스하고 출산하는데 콘돔 따위가 웬 말이겠나.
그때 딜런에게 받은 콘돔은 어쨌더라. 아마 막사 어디에 던져두고 잊어버렸던 것 같은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청호가 다시 시윤을 쳐다봤다. 시윤은 여전히 청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호라면 알겠지, 라는 믿음이 가득한 눈이었다.
청호는 잠시 고민했다. 곧이곧대로 진실을 말해 줄까. 아니면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깃든 순수함을 지켜 줄까. 그러다 그냥 말해 주기로 했다. 시윤이 애도 아니고. 알아서 나쁠 것도 없고.
“섹스할 때 쓰는 거야.”
“예?”
“삽입하는 남자가 성기에 그걸 씌우고 삽입해.”
“성기에요? XL에 Extra Sensitive인 이걸요?”
“응.”
“……왜요?”
“피임 도구야. 임신도 막고, 청결을 위해서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 말에 시윤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엄지와 검지로 비닐의 양면을 잡고 비비적거렸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며 안에 있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동그란 동전 같은데, 딱딱하진 않았다. 성기에 씌운다, 라. 조금 음흉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음…… 이것도 챙겨 갈까요?”
“왜? 쓰게?”
예상치 못한 시윤의 반응에 청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폭탄이라도 든 것처럼 냅다 뒤로 집어 던질 줄 알았더니. 청호가 다리를 꼬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시윤이 콘돔을 쓰겠다면 못 쓸 것도 없지. 콘돔의 원래 쓰임새가 어떠하든, 퍽 새로운 섹스가 되긴 할 터였다.
청호가 낯 뜨거운 상상을 하는데, 시윤이 그 상상이 미안해질 정도로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편의점은 꼭 필요하고 자주 쓰는 걸 파는 곳이라고. 여기 있는 거라면, 언젠가 포스에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청호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제 음탕한 상상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말로 뱉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던 찰나였다. 가방에 콘돔을 집어넣던 시윤이 나직이 청호를 불렀다.
“대장님.”
“응.”
“근데 대장님은 콘돔 쓰시려면 XXL는 되어야겠네요.”
“…….”
청호가 다시 쿨럭, 기침했다. 먼지를 한 주먹이나 삼킨 듯 폐부가 텁텁해졌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골이 띵하기도 했다. 그런 청호에 시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청호와 시윤은 편의점을 나온 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잡화점에서도 한참을 있었고, 빵집에 붙은 사진도 구경했으며, 옷가게에서 신기하게 생긴 모자들을 썼다 벗으며 놀기도 했다. 은행도 들렀는데, 가장 재미있었다.
청호가 힘으로 문을 구기듯 따고, 시윤은 능력으로 금고의 두꺼운 문을 죄 흡수해 버렸다. 금고 주위에는 이런저런 흔적들이 있었는데, 몇몇 이들이 돈을 빼내려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금고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돈다발은 죄 삭아서 손을 대자마자 가루처럼 으스러졌다. 사실 필요도 없었다. 포스에서 통용되는 돈은 현물이 아니라 전자 화폐이기 때문이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금고 이곳저곳을 들추다 작은 금고들이 여러 개 줄지어 있는 걸 발견했다. 시윤이 손으로 잠금장치를 쥐었다. 그러자 팽이처럼 돌아가는 잠금장치가 바스러지며 시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철컥, 문이 저절로 열렸다.
시윤이 그 안에다 손전등을 비췄다. 헌데 쨍한 빛이 반사되어 되레 시윤의 눈을 따갑게 때렸다. 눈살을 찌푸리던 시윤이 가늘게 뜬 눈으로 안을 살폈다.
“와……. 대장님. 이것 보세요.”
그 말에 청호가 시윤의 옆에 쪼그려 앉아 금고 안을 살폈다.
“금이야?”
금이었다. 금괴 수십 개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금고 속의 금고에 보관된 덕인지 하나같이 반질반질한 모습 그대로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챙길까요? 시윤의 눈에 어울리지 않게 탐욕이 번들거렸다. 금은 포스 안에서도 귀했다. 개인적으로 쓰이기보다는 계급장이나 배지, 또는 엠블럼 따위에 쓰였다. 가져가 포스에 기증하면 또 이런저런 쓰임새로 쓰일 터였다.
청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금괴들을 가방에 담았다. 근데 시윤의 가방에는 이미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해서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청호는 별다른 말 없이 금고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100킬로그램이 훌쩍 넘을 텐데 마치 케이크 박스를 든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청호와 시윤은 가득한 짐을 지프에 실어 두고 다시 돌아다니기로 했다. 시윤이 트렁크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시답잖은 게 대부분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풍족해졌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다음 탐색지를 찾았다. 신나게 노느라 시간의 흐름도 잊었는데. 어느새 하늘이 붉은 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누가 새빨간 벨벳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늦은 오후 특유의 잔잔한 바람이 머리칼 사이사이를 쓸고 지나갔다.
참 한적하고 조용한 도시라고 생각하던 시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에 청호가 눈썹을 들썩였다.
“왜 웃어?”
“방금 무심코 한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청호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흘렸다. 한적한 게 왜? 그러다 뒤늦게 이해하고, 설핏 웃음을 흘렸다. 인간이 사라진 지 100년이 넘은 도시인데. 한적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시윤이 청호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 청호는 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걸었다. 애정 넘치는 연인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데이트였다. 청호와 시윤이 아니고서야 포스 바깥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청호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소담한 그릇 가게 앞에서였다.
“왜요, 대장님?”
“차 담으면 예쁠 것 같아서.”
시윤이 청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먼지가 눅눅하게 낀 유리 너머로 각양각색의 그릇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깨진 것도 있긴 했으나, 여태 지나 왔던 가게들에 비하면 아주 멀끔한 축에 속했다. 아무래도 전쟁 통에 예쁜 그릇은 짐에 불과하니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은 듯했다.
“들어가 봐요.”
시윤 역시 그릇에 흥미가 있었다. 포스에 있는 그릇들은 대부분 플라스틱이다. 유리그릇을 만들 만큼 여유롭지도 않고, 단가도 비싸고,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쁜 그릇이 없진 않지만 보통 그런 건 부자들이 이런저런 루트로 바깥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가게 문은 잠겨 있었다. 하지만 청호가 조금 힘주어 밀어 여는 것으로 문고리 전체가 뜯겨 나갔다. 그런 광경에 익숙한 시윤은 별다른 반응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긴 시간 동안 갇혀 있던 공기들이 꿉꿉하고 퀴퀴했다. 그릇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 역시 엄청났다.
시윤이 콜록, 잔기침을 하며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런다고 시윤의 기관지로 들어가는 먼지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절로 그리됐다.
“폴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청호가 쯧 혀를 찼다. 바람을 다룰 줄 아는 폴이 있었다면 그릇을 탈탈 털어 낸 것처럼 먼지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나가자.”
시윤의 손을 쥔 청호가 뒤를 도는데, 시윤이 다시 손을 당겼다. 그러더니 가까운 곳에 있던 접시를 양손으로 쥐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대장님. 그릇들을 막, 이렇게, 막 흔들어 주세요.”
먼지가 풀풀 날렸다. 난데없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청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빨리요.”
시윤이 뒤꿈치를 들썩이며 졸랐다. 청호가 마지못해 그릇들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그릇들이 경련하는 것처럼 흔들리더니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 그러곤 시윤이 그릇을 쥐고 흔들 때처럼 아래위로 마구 움직였다. 그릇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먼지가 자욱하게 흩날렸다.
그때, 시윤이 쑥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동자에 연둣빛이 감돌았다. 곧 먼지가 시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꼭 성능 좋은 청소기 같았다.
가게 안이 한층 맑아졌다. 시윤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릇들을 제자리에 놓아둔 청호가 기특하다는 듯 시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시윤의 입술을 쪽 물었다가 놓기도 했다.
두 사람은 좁은 가게 안을 여유롭게 탐방했다. 둘 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그릇을 살폈다. 이전까지는 그저 유흥이었지만, 이건 곱게 가져가 실제로 사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가게를 살피며 어떻게 뒤져야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터득한 시윤은 뽁뽁이도 찾아내고, 비닐도 찾아냈다.
시윤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그릇을 포장하는데, 높게 달린 찬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시윤이 발뒤꿈치를 들고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장님!”
곱게 놓인 와인 한 병을 발견했다.
와인은 코르크는 물론 주둥이의 포일도 뜯겨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시윤이 손전등으로 와인을 비추며 유심히 훑어보았다. 침전물도 보이지 않고, 덩어리 없이 찰랑찰랑 움직이는 게 상한 것 같진 않은데…….
그쯤, 청호가 시윤의 옆에 다가와 섰다. 시윤이 와인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먹어도 될까요?”
“글쎄…….”
청호가 와인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포일을 뜯어냈다. 그러고는 손으로 코르크를 뻥, 뽑아 버렸다. 와인 특유의 은은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냄새를 맡던 청호가 그대로 한 모금 삼켰다.
그가 혀를 굴리며 맛을 가늠하는 동안 시윤이 뒤꿈치를 들썩였다. 저도 맛이 궁금했다.
곧 청호가 와인을 다시 시윤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요?”
“응.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건 대체로 괜찮아. 방사선에 피폭된 게 아니고서야 먹어도 돼.”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쌉싸래하면서도 적당히 달큰한 게 맛이 좋았다.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좋아는 하는지라 예상치 못한 발견이 몹시 반가웠다.
시윤은 진열대에서 와인 잔 두 개도 찾아냈다. 때마침 배도 출출하고. 당장 마실 심산이었다. 앉을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지프에서 마실까요? 거기에 치즈랑 빵도 있잖아요.”
“음…….”
시윤의 신난 얼굴을 구경하던 청호가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다가,
“이리 와 봐.”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시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청호는 시윤이 와인 잔을 씻을 동안 혼자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건물 옥상에 작은 와인 바를 만들어 놨다. 의자는 잡화점에서 가져오고, 테이블은 그릇 가게에 그릇이 진열되어 있던 그 통째로 가져왔다.
그리고 램프도 가져다 두고, 시윤을 위해 지프에 항상 싣고 다니는 도톰한 담요까지 두니 제법 그럴싸했다. 사실 한적한 도시에, 머리 위로 아득하게 떨어지는 짙은 노을만으로도 너무 멋져서 달리 할 게 없었다.
청호가 빵과 치즈, 햄 같은 걸 접시 위에 두는 동안 시윤은 전경을 이리 찍고 저리 찍어 댔다. 그리고 자랑을 잔뜩 담아 형들에게 전송했다. 아무리 전장 경험이 많은 시훈과 시준이라지만, 이런 경험은 분명 못 해 봤을 터였다.
청호가 그만 이리 오라며 시윤을 불렀다. 쪼르르 달려간 시윤이 마주 보게 놓여 있던 의자를 질질 끌어 청호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청호가 설핏 웃으며 그의 볼에 입술을 비볐다.
청호와 시윤은 예쁜 와인 잔에다 와인을 따라 건배도 하고, 소박한 안주들로 바지런히 배를 채웠다.
그렇게 와인이 반쯤 동났을 무렵이었다.
시윤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청호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홍빛 노을이 일렁거렸었는데, 지금은 온전히 밤하늘이었다.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시윤이 그새 굳어 버린 빵을 바라보다 그냥 와인만 홀짝였다. 지금은 전장도 아니고, 놀러 나온 건데. 맛없는 음식은 썩 먹고 싶지 않았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과일이 없어서 아쉽네.”
“대장님 과일 잘 안 드시잖아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네가 좋아하잖아. 복숭아. 청포도. 딸기. 그런 거.”
청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이렇게 청호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때마다 너무 좋아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시윤이 참지 못하고 청호의 턱 끝에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아닌데요?”
“응?”
“저는 과일 말고 대장님 좋아해요.”
“…….”
청호가 헤실헤실 웃고 있는 시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싱그럽게 웃는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치미는 사랑을 참지 못한 그가 시윤의 뒤통수를 쥐고 자신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와인으로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좋았다. 말랑하고 폭신한 서로의 입술에 손바닥이 간질간질해졌다.
시윤이 가볍게 눈을 감았다. 청호는 옆으로 고개를 비틀며 시윤의 입술을 살살 핥아 댔다. 그러다 이따금 그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통째로 빨기도 했다.
혀를 넣진 않았다. 그런 진득한 키스보다는 설레고 간지러운 키스가 어울리는 순간이라서.
그래도 벌어진 입술 틈으로 숨결이 넘나들고, 씁쓸한 와인 맛도 섞였다. 가이딩 효과야 말할 것도 없었다. 시윤의 숨자락이 그 어떠한 와인보다 품격 있고 황홀했다.
수 분 동안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을 땐, 시윤의 광대에 술기운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열이 발갛게 올라왔다. 청호가 나직이 웃으며 시윤의 광대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시윤이 수줍게 웃으며 청호의 팔뚝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청호 몰래 열을 식혀 보려 숨을 크게 몰아쉬는데, 청호가 검지로 톡톡 시윤의 귓바퀴를 두드렸다.
시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청호의 손에는 아까 은행에서 찾았던 금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걸 왜…….”
시윤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청호가 이렇다 할 말 없이 금을 공중에 띄웠다.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몇 바퀴 돌던 금이 화르륵 불탔다. 열기가 엄청났다. 뜨끈한 열이 얼굴을 간질일 정도였다.
화염 같은 온도에 금이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녹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액체가 되었을 무렵, 금이 실타래처럼 늘어났다가 뭉쳐짐을 반복했다.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청호가 또 예쁜 걸 만들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턱을 괸 시윤이 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가느다란 바늘처럼 쭉쭉 늘어난 금이 검지 길이 정도씩 뚝뚝 잘렸다. 그렇게 수십 개의 금바늘이 생겨났다. 줄 맞춰 선 그것들이 곧 네 개의 직선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뭉쳐진 덩어리는 아니었고, 꼭 알파벳 A와 닮았다.
그쯤, 시윤은 청호가 무엇을 만드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에펠 탑이구나.
비록 휴 때문에 좋지 않은 기억이 묻어 버렸지만, 그래도 에펠 탑은 여전히 청호와 시윤에게 뜻깊었다. H 구역에 있는 그 300미터짜리 에펠 탑이 아니라, 청호가 만들어 주는 손바닥만 한 에펠 탑이 뜻깊은 거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금괴가 에펠 탑으로 탈바꿈했다.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금 에펠 탑은 청호가 예전에 만들어 준 유리 에펠 탑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에펠 탑이 천천히 시윤의 앞으로 하강했다. 시윤이 그것을 거머쥐었다. 아직 열기가 완전히 식지 않아 따끈따끈한 온도가 좋았다.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시윤이 에펠 탑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뾰족한 모서리가 피부를 콕콕 찔러 왔다. 유리 에펠 탑의 그 느낌 그대로였다.
“다음엔 은으로 만들어 줄게. 그것도 예쁠 거야.”
청호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시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으로 만든 에펠 탑은 또 다를 터였다. 책상에 둬야지. 가지런히 세워 두면 참 예쁠 것이다. 햇볕을 쬘 때마다 반짝이며 방 안 가득 빛 그림자를 만들겠지.
시윤이 엄지로 오돌토돌한 에펠 탑의 겉면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일단 은부터 찾아야겠네요. 다음엔 보석점을 털어야겠어요.”
그 말에 청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시윤과 청호는 이렇게 먼 거리에 ‘놀러’ 나왔을 땐 지프에서 잠을 잤다. 짧은 여행이 잦아지면서 큼지막한 지프 하나를 통째로 개조했다. 좌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청호와 시윤의 것 딱 두 자리만 만들고 뒤는 싹 밀어서 짐을 둘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있게 만들었다.
그곳에다가 캠핑용 매트리스를 깔고, 두툼한 청호의 코트를 덮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자면 숙소의 푹신한 침대와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다. 비록 청호는 커다란 키 때문에 무릎을 굽히고 자야 했지만, 딱히 불편을 느끼진 않는 듯했다.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청호가 시윤의 가슴을 천천히 도닥거렸다. 나름대로 얼른 자라고 한 행동인데, 시윤은 눈을 빤히 뜬 채 청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술기운에 발갛게 익었던 볼이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잠이 안 와?”
청호가 시윤의 볼을 살살 간질이듯 쓰다듬었다. 행여 추운가, 싶어 두 겹으로 덮어 둔 코트와 담요를 추슬러 주기도 했다.
“졸리는데……. 그냥 다 너무 좋아서…… 그래서 자기가 아쉬워요.”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꼬물꼬물 청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모습에 청호가 옅게 웃음을 흘렸다.
“너 처음 전장에 나왔을 때도 그 말 했었어.”
“어……. 제가요?”
“응. 사화산에서. 작전 끝나고 돌아가기 전날.”
청호의 말에 시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에 힘을 줬다. 당시를 떠올리려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예민한 고양이 같은 모습에 청호가 나직이 웃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 무렵,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모닥불 앞에서 고기 먹었던 날. 맞죠?”
“응.”
“와……. 맞아요. 그랬었어요. 첫 전장이 너무 설레서 끝나는 게 아쉬웠죠. 대장님 가이드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기도 하고.”
시윤이 먼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시간이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한동안 꺼내 보질 않아서 케케묵었다는 게 맞겠다.
오랜만에 상기하니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널따란 대장 막사, 막사 천막을 흔드는 바람 소리, 여기저기 붙어 있는 포스와 에로아스 부대의 깃발, 제 곁에 누운 청호, 그와 입을 맞춘 탓에 지끈거리던 근육과 핏줄, 난로가 뿜어내는 후끈한 열기, 그리고 그 모든 게 새로워서 행복하고 또 행복했던 자신.
새삼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 후에 나갔던 전투들과 아버지 정원, 종우, 그리고 휴가 갑자기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최근은 몹시 여유롭고 즐겁기만 해서, 문제도 사건도 없는 나날들이라 당시의 고통과 슬픔이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시윤이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과거를 훑고 있는데, 청호가 뺨에 입술을 비벼 왔다.
“네가 많이 아팠지.”
“음……. 그랬던가요? 전 모르겠는데.”
시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능청스레 말했다.
물론, 청호를 가이딩할 때의 고통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제가 겪은 고통이 아닌 것 같을 뿐이다.
하지만 청호는 그게 아닌가 보다. 착 가라앉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아직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손잡는 거로도 아팠고, 입 맞추는 거로는 코피를 흘렸었잖아.”
“……대장님.”
“근데도 널 놓을 수가 없었어. 네 가이딩이 너무 좋았거든. 널 안고 있으면 품에서 꽃이 피는 것 같았어. 내 머리 위로만 봄이 쏟아졌지.”
“…….”
“그전엔 늘 지옥 불에서 불타는 기분이었거든. 그것도 아니면 황량한 빙하에 갇혀 얼음송곳에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는데.”
청호가 주먹을 꽉 세게 움켜쥐었다가 폈다. 제 곁에 시윤이 없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제가 그에게 부렸던 패악 역시 잊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 그가 제 곁을 떠나는 악몽을 꾸곤 한다.
저를 내팽개치고,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시윤을.
너무 놀라 찬물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나면 다행히 시윤이 제 옆에 누워 자고 있다. 가끔은 제 푸덕거림에 놀라 덩달아 일어나기도 했는데, 제가 무슨 꿈을 꿨는지도 모르면서 걱정을 하곤 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손으로 등이나 팔뚝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청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시윤이 씨익 웃으며 몸을 찰싹 붙여 왔다. 그러곤 은밀한 밀어를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안 아파요, 저.”
“그런 말 위험해.”
“뭐가 위험해요. 대장님이 제 곁에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제일 위험한데,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청호가 시윤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튕겼다. 시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겁도 없이 청호의 몸을 올라탔다. 그러곤 훌떡 윗옷을 벗는 것이다.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볼까요?”
호기로운 발언에 청호의 눈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시윤이 혀를 빼꼼 내어 청호의 귀두를 핥았다. 불끈불끈 맥동하며 끝없이 커지고, 또 단단해지는 성기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시윤은 입술을 모아 귀두 끝만 쪽쪽 젖병 문 아이처럼 빨았다가, 핏줄이 올라온 기둥을 야금야금 아프지 않게 깨물기도 했다. 그러다 청호의 성기가 완전히 발기했다고 생각했을 때, 입을 크게 벌려 그것을 한껏 머금었다. 단숨에 입 안이 가득 찼다. 그로 모자라 목구멍이 꽉 막혔다.
만약 콘돔을 쓴다면, XXL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개뿔. XXXL는 필요할 듯했다.
익숙한 부피감이지만 여전히 버거웠다. 시윤은 입 안을 한껏 조여 가며 머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입천장을 긁는 귀두와 목젖을 때리는 단단함에 이상하게도 아랫도리에 열이 몰렸다.
그 야릇한 느낌이 좋아서 청호의 것을 부러 더 깊이, 더 힘차게 빨아 댔다.
“하아……. 시윤아.”
청호가 자욱한 한숨을 내쉬며 시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부름에 시윤이 눈을 위로 치켜뜨고 청호를 바라봤다.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물과 옅은 구역질로 붉어진 코끝, 마찰에 빨개진 입술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청호의 성기가 갑자기 풍선처럼 훅 부풀었다. 더 발기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윤이 깜짝 놀라 머리를 뒤로 물렸다. 콜록콜록, 잔기침을 하다가 제가 너무 소스라치게 놀란 게 미안해서 다시 그의 것을 머금으려 입을 벌렸을 때였다.
겨드랑이 아래로 손이 쑥 들어오더니 몸이 들렸다. 종착지는 청호의 무릎 위였다. 차 안이라 시윤의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코앞에 있던 청호의 성기가 이제는 엉덩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시윤이 멀어진 성기가 괜히 아쉬워져 찹찹 입맛을 다시는데, 청호가 턱을 잡아 올렸다.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으응…….”
청호는 시윤의 입술을 세차게 빨아 당겼다. 그러면서 시윤을 천천히 밀어 눕혔다. 시윤이 버릇처럼 청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손으로는 매끄러운 근육이 붙어 있는 팔뚝이나 허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청호도 쉬지 않고 시윤을 매만졌다. 오목하게 들어간 배나 부드러운 가슴팍 또는 도드라진 유두를 엄지로 꾹꾹 눌러 댔다. 물론, 제 허리를 감싼 허벅지를 가장 공들여 매만졌다.
예전엔 그저 말랑말랑하기만 했는데, 요즘엔 운동을 열심히 하더니 제법 그럴싸한 근육이 잡혀 갔다. 그래서 어쩐지 더 쫀득하게 느껴졌다.
시윤은 청호가 허벅지를 주무르고, 매만지고, 손바닥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허리를 흠칫흠칫 떨었다. 발기한 아래를 청호의 배에다 문지르기도 했다.
한참 시윤과 질척하게 혀를 섞던 청호가 갑작스레 물러났다. 그러고는 시윤의 허벅지 아래를 움켜쥐고 휙 위로 올려붙였다. 시윤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어찌나 옴팡지게 접혔는지, 양 무릎이 귓가를 스칠 정도였다. 엉덩이는 자연히 하늘을 향해 쳐들렸다.
“어, 어…… 대장님…….”
이어질 청호의 행동을 예상한 시윤이 그를 말리려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뒤집힌 개구리처럼 버둥거리기만 할 뿐 청호의 몸엔 닿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호가 시윤의 엉덩이 골 사이로 곧장 얼굴을 처박았다.
“아흐응, 아! 대, 대장니임……. 저 이거 싫, 으응, 싫어요…….”
치미는 부끄러움에 시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숱한 잠자리로 이제 성기를 보이고, 또 보는 것에 적응했다. 하지만 뒷구멍은 아니었다. 도대체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청호가 손가락으로 매만지기만 해도 광대가 화끈거리는데, 얼굴이, 입술이, 혀가 닿으면 정말 딱 죽고 싶어졌다.
그런 시윤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청호는 날름날름 멋대로 뒷구멍을 핥아 댔다. 입술을 통째로 비비기도 하고, 혀를 내어 꽉 아물린 주름을 샅샅이 헤집기도 했다.
가끔 시윤을 통째로 잡아먹고 싶은 욕구를 나타내듯, 얼굴을 꽈악 파묻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높다란 콧대가 회음부와 고환을 찔렀다. 후끈한 숨결이 예민한 피부 위로 흩어지면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하응, 아, 흐윽…….”
시윤이 허리를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수차례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 민망한 애무는 청호가 만족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터였다. 시윤은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청호가 잠깐 입을 뗐다. 열심히 핥고 빤 덕에 통통해진 주름을 쳐다보던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붉게 충혈된 구멍이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손끝으로 구멍을 살살 문지르던 청호가 다시 입을 가져다 댔다.
이번엔 혀에 힘을 잔뜩 주고는 구멍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입술로는 주름 주위를 쪽쪽 빨았다. 그로 모자라 허벅지까지 살살 주물렀다.
“아으응, 읏……. 대, 대장……니-임…….”
시윤은 딱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민망해 죽겠는데 눈치 없는 몸뚱이는 좋다고 난리였다. 근데 조금, 아주 조금 모자랐다. 하나같이 간질간질한 쾌락들이라 절정에서 딱 두 걸음 떨어져 있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갈등하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자신의 성기를 거머쥐었다. 그러곤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흐읏, 윽, 응……. 아읏, 조, 좋아요, 대장님…….”
실로 기분 좋은 쾌락이었다. 물론 삽입도 좋지만, 이렇게 뭉근하면서도 간질간질하고 또 찌릿찌릿한 쾌락이 딱 시윤의 취향이었다.
“아흐윽, 응, 아으응!”
시윤의 손이 빨라졌다. 청호의 혀 역시 더 예리하고 적극적으로 뒤를 쑤셔 댔다. 허벅지를 주무르는 아귀에 힘도 들어갔다. 그 자극을 버티지 못한 시윤이 속절없이 픽 정액을 싸질렀다. 뜨끈뜨끈하고 걸쭉한 정액이 배를 적시고, 턱 끝에도 튀었다.
“하으으…….”
시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에 청호도 고개를 들었다. 시윤이 색색 가쁜 숨을 내쉬며 제 가랑이 사이에 있는 청호를 쳐다봤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몸을 뒤척여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하는데, 청호가 혓바닥을 납작하게 편 채 시윤의 뒷구멍부터 회음부, 그리고 고환에 성기 끝까지 한 번에 삭 핥았다.
깜짝 놀란 시윤이 엉덩이를 위로 튕겼다.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는 시윤의 모습에 청호가 킥킥 장난스레 웃었다.
“으…… 우, 웃지 마세요.”
시윤이 눈을 가늘게 째고 청호를 노려봤다. 제법 날카로운 눈빛이었으나 청호는 웃음을 쉽게 사그라트리지 못했다. 웃는 와중에도 시윤의 배꼽에 고인 정액을 핥아 먹었는데, 어째선지 그래서 더 얄미웠다.
참다못한 시윤이 다리를 파닥거리며 청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청호를 깔아뭉갰다. 청호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의 아래에 깔려 주었다.
청호의 골반 위에 자리를 잡은 시윤이 무릎으로 섰다. 그러고는 꺼떡거리는 청호의 성기를 잡고 그것을 자신의 뒷구멍으로 가져갔다.
“벌써?”
웃고 있던 청호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아직 더 풀어 줘야 할 듯한데. 이대로 삽입하면 분명 시윤이 아플 터였다.
“괜찮아요.”
시윤이 성의 없이 그 걱정을 거절했다. 청호가 열과 성을 다해 물고 빨아 준 덕에 안달이 난 뒷구멍은 더 풀어 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서늘한 공기가 차갑다고, 텅 빈 배 속이 허하다고 방정맞게 벌름거리고 있었다.
구멍과 귀두를 맞춘 시윤이 천천히 아래로 주저앉았다. 청호가 그의 허리를 잡아 중심을 잡아 주었다.
“으읏…….”
점점 벌어지는 뒷구멍에 시윤의 눈썹 위로 홈이 파였다. 아프진 않으나 버거웠다. 밥을 잔뜩 먹었는데 거기에 과일도 먹고 케이크도 먹고 와플까지 먹은 기분이랄까.
그래도 시윤은 꾸역꾸역 엉덩이를 내렸다. 이것을 감내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끙끙거리면서도 착실히 성기를 삼켜 가는 시윤에 청호가 그의 성기를 살살 흔들어 주었다. 덕분에 축 처져 있던 살덩이가 조금씩 발기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긴장으로 뻑뻑해졌던 뒷구멍 역시 한층 느슨해졌다.
청호의 성기가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만 남겨 놓고 모두 시윤의 속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아래로 늘어트린 시윤이 색색 잠시 숨을 골랐다. 바쁘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이 한결 평온해졌을 때쯤, 슬쩍슬쩍 몸을 흔들었다. 어느새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그의 머리칼이 둔탁하게 팔랑거렸다.
그런 시윤을 방관만 하고 있던 청호가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청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시윤의 귓불을 쭙 빨았다가 놓은 청호가 그의 양쪽 엉덩이를 부여잡았다.
청호는 오로지 팔 힘만으로 시윤을 들었다가 놨다. 그럴 때마다 그의 굵직한 성기가 시윤의 작은 엉덩이 사이로 쑥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후우…… 시윤아…….”
“흐응, 읏, 아! 아흐윽…….”
북북 긁히는 내벽에 시윤이 청호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힘 좋은 흉기가 전립선을 콱콱 짓누르는데, 어찌나 자극적인지 전신의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 달뜬 신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가히 해일 같은 쾌락이었다. 몸이 막 삽입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뒷구멍 역시 조여들었다. 청호의 눈가가 한껏 어그러졌다. 성기를 문 채 요동치는 내벽에 머리가 뜨끈했다.
청호가 짙은 한숨을 흘리며 시윤의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면서 시윤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다.
그러나 시윤에게는 매우 크게 다가왔다. 배꼽까지 차 있던 성기가 단번에 명치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눈을 부릅뜬 시윤이 청호의 등을 벅벅 긁어 댔다.
“아앙! 아! 너무 깊, 깊어요, 대장, 아흑! 니임…….”
시윤은 행여 청호가 더 깊이 삽입할까, 무릎을 땅에 짚고 몸을 곧추세웠다. 본능적인 회피였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허리를 위로 당겼다. 배 속 깊숙이 들어와 있던 청호의 것이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청호는 그런 시윤의 행동을 가로막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덜덜 떨며 허리를 움직이는 시윤이 너무 야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에 넋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청호의 성기가 반절쯤 빠져나왔다. 그래도 시윤은 멈추지 않고 허리를 세웠다. 행위를 그만두려는 건 아니었고, 아릿한 뒷구멍과 배 속에 잠깐 여유를 주고 싶었다. 그 후에 다시 삽입할 생각이었다. 청호는 물론, 저 역시 발기한 성기가 지끈거렸기 때문에.
그렇게 청호의 성기가 귀두만 남겨 두고 나왔을 때였다. 시윤의 머리가 쿵, 지프 천장에 처박혔다.
“아!”
눈물이 핑하고 돌 정도로 아팠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란 시윤이 머리를 감싸 쥐며 훅 아래로 주저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는데, 끄트머리만 박혀 있던 청호의 성기가 일격에 뿌리 끝까지 파고들어 왔다.
“흐잇…….”
시윤이 고개를 뒤로 휙 젖혔다. 지끈거리던 정수리 통증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느껴지는 건 팽팽하게 당겨진 내벽과 목구멍까지 솟구친 듯한 청호의 성기뿐이었다.
납작하게 찌부러진 전립선에 시윤이 속절없이 픽픽 정액을 싸질렀다. 귀가 먹먹했다. 누가 우유를 쏟아부은 듯 시야가 탁해졌다.
“큭…….”
청호가 받은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성기를 쥐어뜯을 듯 조여 오는 내벽에 등골이 오싹했다. 아랫배와 고환이 단단해졌다. 절정에 다다르는 게 아니라, 정액을 짜내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윤이 버거워하는 것 같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성욕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앞에서 목을 꺾고 헐떡이는 시윤에, 꿈틀거리며 성기를 주무르는 구멍에, 화창하면서도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가이딩까지.
청호가 잠깐 숨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거친 콧김을 내뿜은 그가 시윤을 뒤로 밀어 눕혔다.
안타깝게도 시윤은 여전히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중이라 청호가 어떠한 상태인지 전혀 가늠을 못 하고 있었다. 쾌락을 떨쳐 내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파드득파드득 몸만 떨어 댔다.
청호가 깊숙이 꽂혀 있던 성기를 단숨에 잡아 뺐다.
“아으응…….”
그것마저도 시윤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그가 허리와 가슴을 야하게 뒤틀며 신음하는데 몸이 휙 뒤집혔다. 납작 엎드리게 된 시윤이 색색 숨을 골랐다. 차가운 차체 바닥에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그때였다. 청호가 양 엄지로 시윤의 엉덩이를 쩍 벌렸다. 방금까지도 두꺼운 것을 물고 있던 구멍이 부드럽게 옆으로 벌어졌다. 시윤이 주름을 스치는 찬 공기에 놀라 몸을 흠칫 떠는데, 곧장 단단하고 두껍고 또 뜨거운 살덩이가 맞물려 왔다.
그러고는 푸우욱 단번에 뿌리 끝까지 들어왔다. 기겁한 시윤이 상체를 들썩였다.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대, 대장님, 잠깐만, 잠깐…… 큭, 배가 터질 것 같…….”
시윤이 바닥을 벅벅 긁으며 앞으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청호가 한 손으로는 시윤의 어깨를 감싸 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쥔 채 등 뒤로 몸을 딱 붙여 오는 바람에 오히려 더 가까워지기만 했다.
“하아…… 시윤아, 너무 좋아……. 응? 너무 좋아.”
청호가 시윤의 귓바퀴와 귓불을 쭉쭉 빨며 허리를 쳐올렸다. 시윤의 만면이 붉으락푸르락 깜빡거렸다.
엉덩이가 납작해질 정도로 깊은 삽입에, 청호의 고환 역시 구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깊은 삽입에 헛구역질이 다 올라왔다.
시윤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청호의 손등을 박박 긁어 댔다.
“우흑…… 안, 안 돼요, 대장……님……. 제발…….”
정말 배가 찢어질 것 같았다. 뱃가죽은 아니더라도 속은 이미 멀쩡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시윤의 애절한 애원에도 청호의 몸짓은 멈추지 않았다. 시윤의 구멍 깊은 곳을 파내듯 움직였다가, 또 짓누르듯 꾸욱, 꾹 움직였다가, 정신이 아찔할 만큼 거칠고 세차게 움직이기도 했다.
청호는 매우 오랫동안 시윤의 뒤를 들쑤셨다.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자극을 견디다 못한 시윤이 찔끔찔끔 정액을 싸질렀는데, 그게 바닥을 온통 축축하게 적실 정도였다.
지프 안이 후끈해지다 못해 습해졌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로 공기가 갑갑해지기까지 했다.
그쯤엔 청호도 두 번쯤 사정했다. 확실하진 않다. 잦은 마찰로 뒷구멍의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시윤은 그저 숨 쉬는 것에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호흡으로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그때, 청호가 좌우로 허리를 비틀며 깊숙이, 더욱 깊숙이 성기를 삽입했다. 시윤이 허벅지와 허리를 덜덜 떨며 신음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세 번째로 사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기를 거둬 갔다. 힘없이 널브러진 시윤이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은은한 새벽빛이 몰려오고 있었다. 청호와 섹스만 하면 늘 이렇게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곤 한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인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제가 먼저 청호의 위에 올라타 있는 일이 허다했다.
“시윤아. 괜찮아?”
시윤의 등줄기를 따라 쪽쪽 입을 맞추던 청호가 넌지시 물었다. 시윤이 근육이 죄 녹은 듯한 몸을 간신히 뒤집어 그를 쳐다보았다. 청호가 입술 끝에 꾹 힘을 주고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시윤을 응시했다. 격렬했던 행위에 나름대로 미안함을 표하고 있는 것이리라.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에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대장님이 제일 위험하다는 거…… 이제 잘 알겠네요.”
그 말에 청호가 덩달아 웃음을 흘렸다. 한가득 쌓여 있는 생수 옆에서 물티슈를 찾아낸 그가 시윤의 몸을 살살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으니 시윤의 눈이 자연히 노곤하게 풀렸다.
“졸려요.”
“자. 나는 마저 정리하고 잘…….”
“싫어요. 대장님이 안아 주셔야 자죠.”
“…….”
청호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넋을 뺐다. 시윤이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킥킥 웃으며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물티슈를 아무렇게나 뒤로 던진 청호가 시윤을 한 아름 껴안았다.
* * *
다음 날. 두 사람은 전날 못다 둘러본 도시를 조금 더 돌아다니다 오후쯤 돌아가기로 했다. 너무 먼 곳에 있는 터라 차로 돌아갈 순 없고, 현재 출정 중인 부대가 돌아가는 길에 랑데부에서 만나 얹혀 가기로 했다.
지프 바깥으로 다리를 내놓고 걸터앉은 시윤이 끙,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청호가 그런 시윤에게 물을 내밀었다. 시윤이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것을 받아 삼켰다. 어제 술도 마시고, 신음도 한껏 내질렀더니 목구멍이 텁텁했다.
선화가 해 준 포슬포슬하고 따끈따끈한 달걀찜이 먹고 싶었다. 포스로 돌아가는 길에 해 달라고 메시지를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을 때였다.
“얼굴이 부었어.”
청호가 붕 뜬 시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윤이 얼른 자신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거울을 보지 않았음에도 볼이 묵직해진 게 느껴졌다. 야식도 먹었고, 섹스하며 울기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물었다.
“못생겼어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청호가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다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귀여워. 얼굴이 이만해져도 귀여울 거야.”
그가 호박만큼 커다란 원을 그려 보였다.
“에이…….”
시윤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몸서리를 쳤다. 거짓말. 머리는 까치집에 얼굴은 퉁퉁 부었는데 귀여울 리가 있나. 근데 기분은 좋았다. 뭐…… 청호가 까치집에 퉁퉁 부은 얼굴로 있으면 저 역시 귀엽다고 느낄 것 같기도 하고…….
표정이 휙휙 바뀌는 시윤에 청호가 설핏 미소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게 몹시 사랑스러웠다. 입가에 미소를 띤 그가 지프를 뒤져 원두 가루를 찾아냈다.
“커피 마실래?”
“좋아요!”
지프에서 폴짝 뛰어내린 시윤이 짐 더미를 마구 헤집었다. 이왕이면 예쁜 찻잔에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제 찾은 찻잔에다가 마셔요. 청록색 찻잔이 여기 있을 텐데.”
신난 시윤이 종알종알 말하는데, 갑자기 팔꿈치가 휙 당겨졌다. 엄청난 힘에 시윤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어어…….”
시윤이 둔탁한 감탄사를 내놓는데,
“쉬…….”
청호가 나직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윤이 흘깃 눈만 들어 청호를 올려다봤다. 미소가 범람하던 그의 만면이 어느새 차게 식어 있었다. 눈썹은 가파른 오르막을 그렸고, 입술은 한일자로 다물렸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클롭스가 득실거리는 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얼굴.
시윤이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가 나타났나, 싶어 주위를 훑어보는데 딱히 다른 게 없었다. 그러나 청호는 마치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아스팔트가 듬성듬성 갈라진 도로 끝을 응시했다. 시윤 역시 그곳을 바라봤다.
곧 자동차 세 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