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핏빛 열차
자동차라니. 시윤이 알기론 자동차 안에 몸이 들어갈 만큼 작은 클롭스는 몇 없었다. 하물며 운전까지 할 수 있는 클롭스는 아예 없었고.
그 말인즉슨, 인간이 타고 있다는 말인데. 포스에서 온 사람들인가. 아니면 여태 용케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방랑자인가.
시윤과 청호는 자동차가 다가오는 걸 뻔히 보면서도 몸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나타난다 한들, 청호와 시윤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이내 자동차가 청호와 시윤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관찰하듯 가만히 있었다. 청호와 시윤도 자동차를 관찰했다.
자동차 세 대는 하나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다. 녹슨 듯 칠이 죄 벗겨진 차체. 맞지 않는 엔진이나 부품을 집어넣은 듯 비죽 들려 있는 보닛. 덜덜거리는 괴이한 소음과 폴폴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분명 포스에서 나온 차는 아니었다.
“방랑자들일까요?”
시윤이 앞을 응시하며 물었다.
“글쎄. 차를 가지고 다니는 방랑자는 처음 보네.”
청호 역시 앞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때, 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덟 명. 남자와 여자가 골고루 섞여 있고 나이도 적게는 10대 후반에서 많게는 40대 정도까지 있었다.
옷은…… 꽤 멀끔하게 입고 있었다. 물론, 포스 국민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설프게나마 빨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터진 곳은 깁기까지 했다. 그래도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이라 색이 죄 부옇게 날아가 있었다.
개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고, 목부터 볼까지 손톱자국인지 칼자국인지 모를 흉터가 난 남자 하나가 선두로 다가왔다. 느낌으로 보아하니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너흰 뭐야?”
그가 청호와 시윤에게 물었다. 들고 있던 총을 두 사람에게 겨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청호와 시윤은 굳이 입을 여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단번에 이해할 것 같지가 않아서. 포스라는 나라에서 왔고, 그곳의 군인이고, 둘 다 SS급이라는 아주 대단한 능력자들에 하나는 나라의 영웅이며, 또 하나는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의 가이드라고 줄줄이 말하는 것도 웃겼다.
그런 청호와 시윤을 본 칼자국의 입가에 시커먼 웃음이 올라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 있던 무리 역시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청호와 시윤의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겁을 집어먹고 말까지 잃은 것이라 오해한 듯했다.
금발의 여자 하나가 청호와 시윤을 지나 지프로 향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차는 방금 공장에서 찍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빛났다. 실로 새것이기도 했고, 청호의 것이라 부하 병사들이 신경 써서 관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장! 얘들 차 죽인다!”
금발이 걸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에 몇몇이 눈을 번뜩이며 지프로 다가왔다. 그러곤 엄청난 절경을 마주한 듯 거나한 감탄사를 흘렸다.
“이거 진짜 차 맞냐?”
“바퀴 달린 거 보니까 차겠지. 설마 마차겠냐.”
“와……. 나 이런 차 태어나서 처음 봐. 이런 게 여태 있을 수 있나?”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까지 있지? 근방에 자동차 공장이라도 있던가?”
“이 새끼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밥도 안 처먹고 맨날 차 부품만 찾아다니는 거 아니야?”
“와, 씨발. 아무튼 쩐다. 어? 쩔어.”
“대장. 이 차 대장이 탈 거지?”
“나 옆자리에 태워 주라. 응?”
매우 시끄럽고 경박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청호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에로아스 병사들도 썩 입이 깨끗한 편은 아니나 묘하게 달랐다. 비속어에 급을 나누는 것도 웃긴다만, 실로 그렇게 느껴졌다. 아무튼 듣기 거북했다. 저 대화를 시윤이 고스란히 듣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호가 슬쩍 몸을 돌려 그들을 쳐다봤다. 일종의 준비였다. 저들의 목을 단번에 꺾어 버릴 준비 말이다. 그런 청호를 알았을까. 시윤이 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윤은 이 방랑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부터 알고 싶었다. 무자비한 살인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지라.
그런 두 사람의 머릿속은 추호도 모를 방랑자들은 이제 지프 안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와, 씨발 이 새끼들 뭐야? 별걸 다 가지고 있네.”
“노다지야, 노다지.”
반질반질한 램프, 온갖 종류의 전투 식량, 차곡차곡 쌓인 물병, 선화가 손수 만들어 준 쿠키, 잘 포장된 치즈, 그리고 총구에 붉은 테두리가 그려진 번쩍번쩍한 총기들까지. 방랑자들의 시선에선 보물 상자와 다름없었다.
그들은 금덩이엔 흥미가 없는 듯 옆으로 밀어 치웠다. 물론 곱게 포장해 둔 찻잔과 그릇에도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거슬린다는 듯 아무렇게나 밀어 치우다가 바닥으로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시윤이 찾던 청록색 찻잔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걸 본 청호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죽일까?”
그가 시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아직요.”
시윤이 재차 그를 말렸다. 찻잔이 깨진 건 실로 짜증이 났지만, 아직 확인할 게 있었다.
시윤은 그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하나같이 낡은 총을 들고 있다. 포스에서는 쓰지도 않는 옛날 총에 손질도 엉망이었다. 손잡이가 손가락 모양으로 닳아 있기까지 했다. 잘 때도 쥐고 자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허리춤에는 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군용 나이프도 있었고, 사냥용은 물론 주방용으로 추정되는 것까지 있었다.
무기를 보아하니 능력자는 없는 것 같은데. 만약 있었다면 등장하는 그 순간, 시윤과 청호를 위협하는 용으로 힘을 보였을 터였다. 왁자지껄하게 대화하는 걸 봐선 뭔갈 의도적으로 숨기고 은폐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그들이 능력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보나 마나 조잡한 능력일 테고, 그것은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까.
시윤이 신경 쓰이는 건, 오른쪽 차 뒷좌석에 있는 아이였다.
수더분한 머리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진 모르겠다. 나이는 기껏 해 봐야 열네 살 정도. 포스에 있었으면 도어 검사를 받을 나이였다.
아이는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거기다 맞기라도 한 듯 이마에서는 피가 났고, 입가도 찢어져 있었으며, 눈 하나도 실핏줄이 죄 터져 붉었다.
분명 대찬 폭력 사이에서 구른 것이다. 인간이 행한 폭력이 분명했다. 클롭스와 싸우다 다쳤다기엔 상처가 너무 작았다. 그랬으면 머리 한쪽이 함몰되거나, 팔이나 다리가 잘렸겠지. 아이는 인간의 주먹과 발에 맞은 게 분명했다.
거기다 차 내부의 천장 손잡이에 팔목이 둘둘 묶여 있는 걸 봐선, 이 방랑자들과 썩 친한 사이도 아니다. 폭력의 주인이 이 방랑자들이라는 가설에 힘이 실렸다.
시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기 이들을 몰살하고, 저 아이를 구해서 포스로 돌아가는 건 하등 어렵지 않았다.
다만, 혹시 저 아이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가 어딘가에 더 있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윤은 이들의 본거지를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려면 저들을 따라가야 하는데. 협박해서 알아내는 건 위험하다.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럼 적당히 겁먹은 척도 해 주고, 약한 척도 해 주어서 그들이 손수 끌고 가게 만들어야 했다.
시윤이 청호에게 속삭였다.
“대장님.”
“응.”
“능력 쓰지 마세요.”
“……그래.”
청호는 굳이 왜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시윤에게 생각이 있겠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 역시 뒷좌석에 묶여 있는 아이를 보기도 했고.
“우리 저 사람들 따라가요.”
“응?”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
시윤이 손목시계 오른쪽 아래에 있는 버튼을 꾹꾹꾹 연달아 세 번 누르며 말했다. SOS 코드였다. 그리고 6시 방향에 있는 버튼도 눌렀다. 전장용 무음이었다. 전화나 메시지가 와도 알람이 뜨거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시윤과 청호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지만, 저런 아이가 몇이나 더 있을지 모르니 병력은 많을수록 좋았다.
에로아스 병사들이 포스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으면 열 시간, 적으면 여덟 시간이 걸린다. 그 안에 방랑자들의 본거지를 파악해야 했다.
시윤이 손목시계에서 GPS 칩을 빼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을 때였다.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까무잡잡하고 삐쩍 마른 데다가 뻐드렁니가 도드라진 남자가 시윤의 얼굴 앞으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기름 냄새와 화약 냄새가 풀풀 나는 총구에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 이것 봐라! 너 지금 얼굴 구겼어? 엉?”
뻐드렁니가 눈을 부라리며 총구를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시윤을 쏴 버릴 기세였다. 청호가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걸 참아 줘야 하나. 참고 있어야 하나. 그냥 팔다리를 죄 잘라다가 본거지가 어딘지 불라고 협박하면 안 되나, 싶었다.
그러나 정작 시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순응한다는 듯 눈을 슬쩍 깔기까지 했다. 풍성한 속눈썹이 아래로 착 내려앉았다. 그러자 뻐드렁니가 전쟁에서 이긴 군인처럼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돌연 시윤의 옷에 흥미를 보였다. 정확히는 시윤이 걸치고 있던 청호의 코트에.
뻐드렁니가 총구로 코트를 툭툭 두드렸다. 주름 하나 없이 새카만 코트가 참으로 멋졌다. 붉은색 견장도, 별 모양의 번쩍이는 배지도 멋졌다. 옷 가게나 마트를 웬만큼 뒤져도 찾아볼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뻐드렁니가 찹찹 입맛을 다셨다.
“이 옷은 뭐야. 어디서 주웠어? 간지 나는데?”
총을 어깨에 멘 그가 시윤에게 손을 뻗었다. 목적지는 코트 깃이었다. 길쭉한 손톱에 때가 잔뜩 낀 손이 시윤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보다 못한 청호가 뻐드렁니의 손을 막았다. 정확히는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아귀에 꽈아아악 힘을 줬다.
“아아악!”
뻐드렁니가 괴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꼭 누가 무릎 뒤라도 걷어찬 것처럼 단번에 폭삭.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점처럼 작아진 동공에 공포가 득실거렸다.
모두가 청호와 뻐드렁니를 쳐다봤다. 근데 총구를 겨누진 않았다. 고작 손목 잡힌 거로 뭐 저리 호들갑을 떠냐는 표정이었다.
청호가 뻐드렁니를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거뒀다.
뻐드렁니가 자신의 손목을 쳐다봤다. 손목이 으스러져 있었다. 뼈가 유리처럼 잘게 조각나며 피부를 비죽비죽 뚫고 나오기까지 했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광경에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청호를 흘겨봤다. 그러자 청호가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능력 안 썼어. 그런 표정이었다. 보통 인간은 아귀힘으로 건장한 성인 남성의 뼈를 부러트릴 수 없다는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뭐, 뭐야. 네 손목 왜 그래?”
금발의 여자가 경악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몰라, 씨발! 저 새끼가 그랬어!”
뻐드렁니가 눈물까지 그렁그렁 찬 눈으로 청호를 노려봤다. 그러자 한쪽에 모여 빼앗은 쿠키를 씹던 칼자국이 총구를 추켜들며 다가왔다.
“너, 특수 인간이야?”
“특수 인간?”
영 낯선 단어에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윤 역시 처음 듣는 단어였다.
“이상한 능력 같은 거 가지고 있냐고!”
칼자국이 빽 고함을 질렀다. 청호와 시윤은 그제야 그가 말하는 ‘특수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에스퍼를 특수 인간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청호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특수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칼자국을 비롯한 방랑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한쪽에선 금발이 뻐드렁니의 손목을 치료해 주고 있었다. 사실 그냥 붕대를 둘둘 감는 거였지만, 그래도 제법 숙련된 솜씨였다.
그 일로 방랑자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세 명은 청호와 시윤에게 총을 겨누며 견제했고, 나머지는 지프에 있는 물건과 음식을 자신들의 차로 옮겨 실었다. 음식을 앗아가는 게 마치 약속된 거래인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다른 방랑자들을 이렇게 강탈하면서 살아온 거란 말이지. 이토록 당연하고 익숙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한두 번이 아닌 것 같고.
화가 났다. 포스에선 늘 방랑자들을 품어 주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 왜 이들은 공생할 줄을 모르나 싶었다.
그렇게 청호와 시윤의 지프는 텅 비고, 방랑자들의 트렁크는 가득 찼을 때였다.
이번엔 가장 어려 보이는 청년이 다가와 무딘 나이프로 시윤의 손목을 노렸다.
“야. 시계도 내놔.”
시윤은 순순히 시계를 풀었다. 코르덴 바지 위로 채워진 청년의 벨트에 시계가 주렁주렁 꿰어진 걸 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GPS를 따로 빼놓았다.
그런 시윤에 청호도 별말 없이 시계를 풀어 주었다. 스크래치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시계에 청년이 샐쭉 웃었다. 누런 이가 훤히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시계를 켜 볼 생각일랑 않고 곧장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시계에 다른 기능이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시계까지 빼앗기고 나자, 방랑자들이 하나같이 방아쇠에 검지를 올렸다. 절반은 살인이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고, 또 절반은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청호가 시윤의 곁에 조금 더 바짝 붙어 섰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시윤의 부탁이고 뭐고 여기 있는 전부를 거꾸로 땅에 처박아 줄 생각이었다.
시윤은 그런 청호의 생각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그저 겁을 집어먹은 건지 그의 손을 꽉 잡아 왔다.
총구를 바짝 쳐든 방랑자들이 칼자국의 명령을 기다렸다.
“대장, 죽일까?”
“대장, 지금 당겨?”
그러나 칼자국은 말이 없었다. 그저 발치에 놓인 청호의 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지도 못하는 총. 기름때는커녕 손자국도 없이 깨끗한 총. 듣도 보도 못한 총알이 든 총을 말이다.
“대장?”
“대장, 왜 대답을 안 해?”
기다리다 못한 방랑자들이 흘끔흘끔 칼자국을 쳐다봤다. 그에 칼자국이 자신의 볼에 있는 흉터를 벅벅 긁었다.
“죽이지 마. ‘집’으로 데리고 간다.”
“뭐? 왜!”
칼자국의 결정에 금발이 짜증스레 소리쳤다.
“입 늘리지 말고 그냥 죽이자.”
“…….”
“뭐 하러 데리고 가.”
그녀는 청호와 시윤의 존재가 매우 못마땅한 듯했다. 또한, 칼자국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 역시 드문 일인 것 같았다.
칼자국이 금발의 팔뚝을 쥐고 확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청호와 시윤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소곤거렸다.
“쟤들 상태를 봐.”
“어?”
“분명 둘이서 돌아다니는 놈들은 아니야.”
“무리가 있단 말이야? 대장이 그걸 어떻게 알아?”
“쿠키도 그렇고. 치즈도 그렇고. 이 총도 그렇고. 이런 걸 길바닥에서 만들진 않았을 거 아니야. 숨어 사는 곳이 있을 거란 뜻이지.”
칼자국의 말에 금발의 눈동자가 휙휙 빠르게 돌아갔다. 지나치게 멀끔한 행색의 청호와 시윤을 바라봤다가, 총을 바라봤다가, 내용물을 금세 다 먹어 치워서 텅 빈 쿠키 통도 바라봤다. 분명 여태 봐 왔던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긴 했다.
“데리고 가서 본거지를 알아내. 그리고…….”
“거기를 우리가 먹어?”
“그렇지.”
칼자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의 입가에 탐욕 가득한 미소가 올라왔다. 칼자국의 계획이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야! 쟤들 태워!”
금발이 명령했다. 하는 짓이나 말투를 보아 칼자국 다음으로 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말에 방랑자 두엇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힙 색에서 벨크로 타이를 꺼내며 다가왔다.
청호가 그들을 노려봤다. 아까 뻐드렁니의 손목을 으스러트린 것처럼, 그들의 머리통 역시 으스러트릴 기세였다. 시윤이 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며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청호와 시윤의 손목에 검은색 벨크로 타이가 묶였다. 질기고 억센 타이였다. 청호는 오로지 힘으로만 타이를 뜯어낼 수 있었고, 시윤은 능력으로 타이를 없애 버릴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칼자국과 금발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동차 뒷좌석에 타 있던 아이가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궜기 때문이다.
방랑자들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가장 필두로 달리는 것은 청호의 지프였다. 물론, 운전자는 칼자국이었다. 시윤과 청호는 지프 뒷좌석에 탔다. 맞은편에는 뻐드렁니와 금발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뻐드렁니는 지프에서 찾은 소시지를 쩝쩝, 으적으적, 온갖 소음을 다 내며 추잡스레 먹었다. 시윤이 살아오면서 본 ‘밥을 가장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딜런이었는데. 뻐드렁니와 비교하면 딜런은 교양 높은 신사 수준이었다.
시윤이 찌푸려지는 인상을 꾸역꾸역 참았다. 또 얼굴을 구겼다가 뻐드렁니가 화라도 나면, 또 제게 손대려 하면, 그는 이번엔 손목이 아니라 팔 전체가 뒤틀릴지도 몰랐다.
시윤이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근데 자꾸 엉덩이가 배겼다. 구부정하게 앉은 터라 허리도 아팠고. 벌써 세 시간째 이동 중이었다.
시윤은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 영 면역이 없었다. 항시 곱게 자라 오기도 했고, 전장에 나와서도 늘 청호가 온갖 편의를 다 봐주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상황은 거의 없었다.
시윤이 몸을 뒤틀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청호가 벨크로 타이에 묶인 손으로 시윤의 손을 잡아 왔다.
“나한테 기대. 아니면 누울래?”
그 말에 금발은 코웃음을 쳤고, 뻐드렁니는 입 안에 든 것이 훤히 보일 정도로 떡 입을 벌렸다. 납치되어 손까지 묶인 주제에 참으로 태평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윤이 청호의 팔뚝에 기댔다. 조금 편안해졌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머리칼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둘만 따사롭고 평화로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너희 어디서 왔어?”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보던 금발이 물었다.
“먼 곳에서요.”
시윤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
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포스는 방랑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물론, 이곳은 아주아주 먼 곳이니 모를 수도 있지만, 행여 알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포스에 들어가기 위해 갑자기 천사처럼 착하고 친절해질 수도 있고, 잡아 둔 인질의 입을 막기 위해 해를 가할 수도 있었다.
시윤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뻐드렁니가 먹던 소시지를 단번에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첩첩 씹으면서 칼을 빼내 들었다.
“답할 생각이 없다? 재미있네.”
그가 고개를 옆으로 한껏 뒤틀며 시윤을 노려봤다.
“입술이 무거워? 잘라 줄까? 엉? 그럼 말하기 쉽겠지?”
그의 칼끝이 시윤의 입술 언저리로 다가왔다.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고, 손잡이쯤엔 녹도 슬어 있는 칼이었다. 찔리면 출혈이 아니라 파상풍이나 감염으로 죽을 것 같았다.
시윤이 불쾌한 낯으로 턱을 안으로 당기는데, 곧은 검지가 나이프 등을 슥 밀어 냈다. 청호였다.
“손대지 마.”
“뭐?”
“그런 말도 안 돼.”
“…….”
낮은 목소리가 말하는 경고에 뻐드렁니가 흡, 숨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거였다. 뒤늦게 눈을 부릅뜨고 청호의 검은 눈동자를 노려봤으나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뻐드렁니는 무어라 욕을 퍼부어 주려다가 손목의 아픔을 상기한 듯 잠자코 물러났다.
그 모습에 금발이 눈을 꿈틀거렸다. 종말이 온 세상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저렇게 느긋한 음성으로, 비속어 하나 없이 점잖게 협박하는 이는 처음 봤다.
그런 협박 주제에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것도 이상하고, 손목까지 묶여 목적지도 모른 채 끌려가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가 신경 쓰는 건 오로지 시윤밖에 없었다. 총구가 자신의 머리통을 겨누고 있든 말든, 전혀 괘념치 않았다.
금발이 고개를 돌려 차 정면을 응시했다. 칼자국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예상치 못하게 얻은 좋은 차에 신이 난 듯, 엉덩이와 어깨를 동시에 들썩이고 있었다. 뒷좌석 상황일랑 하등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옅은 한숨을 내쉰 금발이 다시 청호와 시윤을 쳐다봤다. 아니, 관찰했다.
지나치게 여유롭고, 몇 마디로 사람을 억누르고, 두려움도 모르는 청호가.
몸집은 작으면서 칼도, 총도 무서워하지 않고, 고작 차로 몇 시간 이동한 거로 피곤을 호소하는 시윤이 영 께름칙했다.
그냥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집’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꼭 불붙은 폭탄을 가지고 가는 기분이란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창밖으로는 이미 익숙한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윤이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출발했던 소도시와 달리 훨씬 큰 도시가 시야에 들어왔다. 뼈대만 남은 건물과 빼곡하게 들어차 녹슬어 가는 차들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왕성한 도시였겠거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전한 건물이 없었다. 핵 피해를 고스란히 입어 온통 무너지고, 가라앉은 상태였다. 방랑자들이 왜 긴 시간을 달려 청호와 시윤이 있던 소도시까지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 풍경이었다.
그때, 차창 밖이 갑자기 새카맣게 물들었다. 기척 없는 어둠의 침범에 놀란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청호가 긴장하지 말라는 듯, 손등을 살살 문질러 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쪼그라들었던 폐부가 느슨해졌다.
자동차는 몇 분 동안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존해 달렸다. 그러더니 곧 은은한 빛이 스며 왔다. 그쯤, 차가 멈췄다.
바짝 곤두서 있던 금발과 뻐드렁니의 승모근이 한층 풀어졌다. 아무래도 바깥보다는 집이 편한지라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청호와 시윤의 허리는 곧추섰다. 차 문이 열리면 어떠한 광경이 펼쳐질지 몰라 긴장하는 거였다.
뻐드렁니가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쿰쿰한 악취였다. 익숙한 냄새다. 방랑자들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악취 속에서 살았으니까.
시윤이 찡한 코끝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금발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내려.”
청호와 시윤이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청호가 먼저 내렸다. 그 후 시윤이 따라 내렸다. 청호가 타이가 채워진 손으로 그를 부축했다.
땅에 두 발을 디딘 시윤은 앞에 펼쳐진 전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방랑자들의 ‘집’은 지하철이었다. 정확히는 지하철역. 플랫폼이나 승차장으로 불리는 그곳 말이다.
시윤은 에로아스에 3년간 속해 있으면서 제법 많은 방랑자를 구했다. 그들은 땅굴에 숨어 있기도 했고, 산속에 움집 같은 걸 만들어 살기도 했고,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진 별장이나 오두막, 또는 공장 창고에 살았다.
근데 지하철에 사는 이들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에로아스는 고위 클롭스만 상대하고,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도시보다는 핵 발전소가 있던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하철에 숨어 사는 방랑자는 처음 봤다. 땅굴보다 훨씬 쾌적하고 넓은 환경이었다.
이들은 철도 위로 나무판자 따위를 깔고 살았다. 그밖에 일그러진 냄비, 둘둘 말린 천막, 빨랫줄에 걸린 꾀죄죄한 옷가지, 드럼통에서 타오르는 장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사실 포스에는 지하철이라는 게 없는지라 그냥 지하철 자체가 신기했다. 책에서만 봤던 것이니 당연했다.
땅속을 달리는 기차. 큰 도시라면 몇 개씩이나 있다는 것. 수백, 수천 명을 한 번에 싣고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것. 설계할 때부터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서 전쟁 시 대피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
시윤이 바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왕이면 진짜 지하철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철도 저 끝에 문드러져 가는 은색 기차가 하나 있었다. 시윤이 와…… 순진한 감탄을 내놓았다.
그에 청호가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시윤이 바깥을 신기해할 때마다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시윤은 늘 하찮은 것에 감탄했다. 이를테면 해진 만화책이나, 손바닥보다 작은 팽이나, 각양각색의 풍선이나, 딸기 맛 치약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도 오늘 지하철은 꽤나 대단한 편에 속했다. 마음 같아선 지하철을 통째로 포스로 가져가 모건에게 똑같이 만들어 내라고 하고 싶다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해 아쉽기 그지없었다.
시윤이 바쁘게 주위를 구경할 동안 ‘집’에 있던 방랑자들 역시 우르르 몰려와선 청호의 지프를 구경했다. 다가온 자들은 열댓 명이었는데, 지하철역 전체에 있는 인원을 가늠하면 대충 서른에서 마흔 명 정도가 될 것 같았다.
“와, 대장. 무슨 차가 이렇게 생겼어?”
“어디서 난 거야?”
“진짜 존나 멋있다. 나도 태워 주라. 어?”
몰려온 자들 중엔 팔이 없는 자도 있었고, 발목이 없는 자도 있었다. 간신히 잘 아물어 민둥민둥한 살을 내놓은 자도 있었으며,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고름과 진물을 뚝뚝 흘려 대는 이도 있었다. 아마 클롭스의 흔적이리라.
“씨발, 오늘 완전 노다지야, 노다지!”
뻐드렁니가 어깨를 한껏 펴고 으스대듯 말했다. 그에 칼자국이 보란 듯이 낡은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아이가 타고 있던 그 차였다. 청호와 시윤의 낯이 대번에 서늘하게 굳었다.
빵과 치즈, 소시지, 그리고 물이 가득한 트렁크에 방랑자들이 괴성을 질렀다. 칼자국이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그들을 만류하며 곧 나누어 주겠다고 소리쳤다. 행여 누가 빼돌리기라도 할까, 얼른 트렁크를 다시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파이프로 만든 목발을 짚은 채 절뚝절뚝 다가왔다.
“애새끼는?”
그가 물었다.
“찾아왔지. 존나 멀리도 가 있더라고.”
칼자국이 차 뒷좌석에서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 아무렇게나 던졌다. 마치 짐짝처럼. 아이의 작고 마른 몸뚱이가 더러운 바닥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시윤이 확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서 봤을 땐 열넷쯤 된 듯했는데. 이리 보니 열 살을 간신히 넘긴 것 같았다. 어쩌면 못 먹고 못 자서 덜 자란 것일 수도 있고.
“으…….”
아이가 눈가를 구기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광대도 발긋했고, 숨도 가쁘게 내쉬었다. 그저 미열이 오른 것이면 다행이랴만. 상처로 인한 염증이나 전염 같은 거면 얼른 치료해야 했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향해 다가가려는데, 청호가 팔꿈치를 쥐어 왔다. 시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때였다.
목발이 아이의 멱살을 움켜쥐고 휙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아이가 메고 있던 가방을 벗겨 냈다. 헐겁게 닫혀 있던 주둥이가 벌어지며 안에 든 것들을 와르르 쏟아 냈다.
수통 하나와, 영 먹을 게 못 되어 보이는 정체 모를 고깃덩이에, 역시나 정체 모를 풀 따위에, 밀가루 반죽인지 혹은 돌인지 구분이 안 되는 빵이 하나 들어 있었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아이가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난 모양이었다. 얼마나 대차게 도망쳤는지, 허공에 동동 뜬 발바닥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시윤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챙긴 것으로 버텨 봐야 일주일이 고작일 듯한데. 아이는 왜 이 보금자리를 마다하고 도망쳤을까. 저 나이면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바깥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텐데.
차라리 길바닥에서 죽는 게 낫다 싶을 만큼 학대라도 당한 걸까.
그때, 목발이 아이를 휙 아무렇게나 던졌다. 작고 마른 몸뚱이가 붕 날아갔다. 그냥 뒀다간 지하철에 흔히 있는 철제 의자에 처박힐 기세였다. 잘못해서 목이 꺾이면 그대로 죽을 것이고, 다리가 접질려도 절름발이로 살아가야 할 터였다.
청호가 떨어지는 아이를 슬쩍 바라봤다. 그러자 아이가 누군가가 민 것처럼 훅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의자 대신, 그 아래에 누워 자던 남자 위로 떨어졌다. 두툼하니 살집이 있는 깔개라 충격이 크지 않을 것 같았다.
“억!”
허나 자던 남자에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맡에 두고 있던 총기를 거꾸로 집어 들었다.
“뭐, 뭐야! 뭐야!”
총구를 움켜쥔 그가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렸다. 발로는 쿵쿵 바닥을 두드려 댔다. 제법 큰 소란이었는데, 툭하면 저리 호들갑을 떠는 듯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 남자가 뒤늦게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발치에 널브러진 아이를 발견했다. 코를 크게 훌쩍인 남자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옆구리에 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어디론가 향했다.
청호와 시윤의 눈이 그를 바쁘게 좇았다. 남자는 긴 복도를 가로지르다 철도 아래 놓여 있던 소파로 훌쩍 점프했다. 다 해진 소파는 발 받침 대용 정도로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아까 시윤이 보며 감탄했던 녹슨 지하철로 향했다. 창밖에서 보이는 안이 어두컴컴하니 불 한 점 없기에 그저 버려진 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남자가 막 지하철 앞에 도착했다. 청호와 시윤의 눈동자 역시 그의 등에 박혔을 때였다.
“얘들은 ‘거기’에 가둬 놔.”
칼자국이 청호와 시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그에 방랑자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확 몰려들었다. 그들이 고개를 마구 갸웃거리며 청호와 시윤을 관찰했다.
“뭔데? 왜 끌고 왔어?”
“누군데? 신입이야?”
“옷 존나 좋은 거 입고 있다. 어디서 구했대?”
“설마 이 차 얘들 거야?”
“어디서 왔는데?”
온갖 질문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에 칼자국이 귀찮음이 만연한 표정으로 손을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그냥 끌고 가서 묶어 놔.”
“잘라?”
“……아직. 이따 손볼 거야.”
“‘미끼’로 쓰게? 우리 미끼 아직 많은데?”
“아직 모른다고.”
칼자국은 더는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뒤를 돌았다. 방랑자들은 더 묻지 않고 청호와 시윤에게 총을 겨눴다. 한 명은 앞장서서 걸었고, 두 명은 뒤에서 총구로 등을 쿡쿡 찔러 댔다.
“빨리빨리 걸어.”
“허튼 생각하지 마. 너희 어차피 도망 못 쳐.”
“그래. 괜히 몸에 구멍 난다.”
“나는 대가리에 낼 거야. 머리통에 든 뇌가 콸콸 쏟아지게. 엉?”
청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총구도 기분이 뭐 같을 판에 더러운 총구가 닿으니 그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윤의 등에도 똑같은 게 닿는다 생각하니 더 끔찍했다.
청호가 흘끔 시윤을 쳐다봤다. 이만하면 본거지도 알아냈고, 대충이나마 인원수도 파악했고, 아이의 행방도 알았으니 같잖은 인질극은 그만해도 되지 않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하지만 시윤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곧 둘이 있게 될 텐데. 그때 물어보지 뭐. 지금 겁 없이 저와 시윤의 등을 찔러 대는 이것들은 그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방랑자들은 청호와 시윤을 지하철 깊숙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계단을 내려갔다가, 밟을 때마다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는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가, 또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철역은 가늠하던 것보다 훨씬, 훨씬 컸다. 지하철이 하나만 들어오던 곳이 아닌 듯했다. 아래엔 별별 용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방랑자들이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찾아 놓은 것들을 죄 모아 둔 듯했다.
자동차 부품들, 썩거나 뒤틀린 가구들, 온갖 옷가지들, 부품이 하나씩 모자라 작동하지 않는 총기들, 빈 연료통이 하나하나 산처럼 거대하게 모여 있었다. 정말 조금의 거짓도 보태지 않고, 클롭스도 저걸 뚫고 올라오진 못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그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다니는 열댓 명의 아이들이었다.
좋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악할 장면도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지. 포스야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방과 후엔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논다지만 이런 곳에서라고 못 놀 게 무어가 있겠나. 쓰레기 더미를 헤집는 것이 가장 재미난 유흥거리일 터였다.
근데 문제는 그다지 유흥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상박이나 엉덩이를 훤히 내놓은 아이들이 퀭한 눈으로 이리저리 배회했다. 몇몇은 자동차 부품이나 연료통에서 맨손으로 기름을 삭삭 끌어다 한곳에 모으고 있었고, 또 몇몇은 고철이나 플라스틱 같은 걸 입에 넣고 쭉쭉 빨아 댔다.
근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아무리 먹을 게 없다지만 고철이나 플라스틱은 먹는 것도 아닐뿐더러 먹으면 배앓이는 물론 큰 병까지 생길 텐데. 이런 곳에서 개복 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거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시윤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아이 하나가 석유가 찰랑거리는 생수통을 냅다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멀찌감치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손에 잡히는 쓰레기 하나를 아이에게 냅다 내리꽂았다. 일그러진 페인트 통이었다.
페인트 통은 곧장 아이의 머리와 충돌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매가리 없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야! 그걸 왜 처먹어! 기름이 얼마나 귀한데!”
폭력적이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클롭스가 사람을 과자처럼 씹어 먹는 전장에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 어떠한 장면보다 징그럽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시윤이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는데,
“야. 안 가고 뭐 해.”
뭉툭한 총구가 등을 콱콱 짓이기듯 찔러 댔다. 그런데도 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윤아.”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시윤을 불렀다. 시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잠시 청호를 올려다보다, 다시 발을 옮겼다.
방랑자들은 청호와 시윤을 구석진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에는 짝이 맞지 않는 손잡이 두 개가 달려 있었다. 납땜해 붙인 듯한 모양새였다.
방랑자들이 손잡이를 잡고 낑낑거리며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안은 어두웠다. 그래도 좁진 않았다. 망가진 버튼 옆에 25인승이라 적혀 있던 것도 같았다.
방랑자들이 청호와 시윤을 툭툭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
“얌전히 있어라. 엉?”
그들은 짧은 말 두어 마디를 던진 후 곧장 문을 닫았다. 끼긱, 끽, 듣기 싫은 소음 뒤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슬 따위로 손잡이를 칭칭 감는 듯했다.
문을 종이처럼 구길 수 있는 청호에게도, 통째로 없애 버릴 수 있는 시윤에게도 그다지 효과가 없는 잠금이었지만, 그들 딴에는 더할 나위 없는 감금이었고, 아마 절대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할 터였다.
“…….”
“…….”
시윤과 청호는 바깥이 조용해질 때까지 움직이지도,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수 초 후 사위가 고요해졌을 무렵. 어둠 속에서 투둑, 툭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손바닥이 시윤의 뺨을 감쌌다.
청호였다. 힘으로 가볍게 타이를 끊어 버린 그가 한 손으로는 시윤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은은한 불을 틔워 냈다. 그리 큰불도 아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환해졌다. 사방이 반사되는 재질이라 불을 동시에 네 개쯤 켠 것 같았다.
시윤이 얼굴 위로 불그림자가 일렁이는 청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나 청호를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눈동자가 탁한 게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듯했다.
“시윤아.”
청호가 시윤을 불렀다.
“네.”
시윤이 나직이 대답했다. 비로소 그의 망막에 청호가 온전히 맺혔다.
“무슨 생각 해.”
“……그냥, 그냥요.”
“응?”
“어…… 저도 제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어요.”
시윤답지 않은 말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에 청호는 덜컥 겁이 났다. 눈썹을 팔(八)자로 떨어트린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 아니면 어디가 아파?”
그러면서 손을 내려 시윤의 손목을 옥죄고 있는 타이를 엄지와 검지로 집었다. 청호의 손이 닿은 타이가 줄줄 녹더니 그대로 뚝 하고 끊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유로워진 손에 시윤이 빙빙 손목을 돌렸다. 오래 묶여 있었더니 뻐근했다. 청호가 그 손을 채 가 손목부터 손가락 끝까지 조물조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멍하니 바라보며 읊조렸다.
“제가 전장에 본격적으로 나온 지는 몇 년 안 됐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근데……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건…… 그것도 어른이 아이를 착취하는 건 처음 봐서……. 물론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으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기분이 이상해요.”
여태 구한 방랑자들은 ‘클롭스에게서 구한 사람들’ 또는 ‘방사능에서 구한 사람들’이었다. 근데 만약 이곳의 아이들을 구한다면, ‘어른에게서 구한 아이들’이 된다.
시윤은 그 차이가 너무 괴로웠다. 두 눈으로 봐 놓고도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원의 추악한 민낯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얼굴이 죄 쥐어 터져서는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이와,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말라서 석유를 마시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점점 일그러지는 시윤의 낯에 청호가 볼 안쪽 살을 꽉 씹었다가 놨다. 정원이 죽고, 그의 죄를 뒤집어쓴 채 어둑하게 살던 시윤을 빛 아래로 내놓는 데 1년이 꼬박 걸렸다. 근데 또, 또 이런 표정이다.
청호는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당연히 시윤을 대상으로 한 화는 아니었다. 하필 그 순간에, 하필 그곳에 나타난 방랑자들을 향한 화였지.
물론 착취당하는 아이들이 불쌍하긴 하다. 그러나 청호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거나 울적해할 만큼 감성적이지도, 온화하지도 않았다.
“시윤아.”
청호가 시윤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시윤에 제 가슴이 다 미어졌다. 그가 청호의 셔츠를 꾹 움켜쥐며 고해하듯 말했다.
“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바깥에선 통조림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모아 놨다가 클롭스를 유인하는 미끼로도 쓴다고.”
“…….”
“저는 그걸 귀담아듣지 않았었나 봐요.”
오늘이 이렇게 충격적인 걸 보면…….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시윤에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청호와 시윤 전에 이미 몇 사람이 다녀간 모양인지 바닥에 눅눅한 핏자국도 들러붙어 있고, 말라붙은 토사물도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클롭스의 시체 더미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잔 적도 있는데,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리 와.”
청호가 툭툭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시윤이 익숙한 몸짓으로 그의 품에 들어가 안겼다. 널찍하고 따뜻한 품에 온몸으로 안겨 있으니 시큰거리던 가슴 통증이 한층 무뎌졌다.
시윤이 청호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그의 손바닥에서 타오르는 불을 멍하니 응시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등을 다정히 도닥였다.
“괜찮아. 우리가 구하면 돼. 돌아가서 씻기고, 치료하고, 먹이고, 학교도 보내고, 그러면 되지.”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요?”
“죽일 거야.”
“…….”
“한 번에 안 죽이고, 하나하나 죽일 거야. 자기가 죽을 차례가 오는 걸 보면서 벌벌 떨게 만들 거야.”
시윤이 잠시 숨을 멈췄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속눈썹도 멈췄다. 청호는 그런 시윤을 물끄러미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돼. 평생을 착취하면서 살아온 인간들이야. 포스로 데리고 간다 한들 사형감이라고. 못 봤으면 모를까. 우리가 다 봤잖아.”
“…….”
“저 어린애들의 부모를 죽였을지도 몰라. 어쩌면 애만 빼앗아 왔을 수도 있고.”
“왜, 왜 아이들일까요? 종처럼 부릴 거면 힘센 성인이 좋지 않나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작고 느려. 클롭스가 나타나면 미끼로 쓰기 좋지. 그냥 두고 도망치면 되거든.”
“…….”
“그리고 어른보다 길들이기도 쉬워. 어두운 걸 무서워하고, 매를 무서워하고, 큰 소리에도 겁을 집어먹으니까. 거기다 덜 먹고, 덜 마시니 식량을 크게 축내지도 않아.”
청호는 신기하리만큼 이 방랑자들에 대해 잘 알았다. 마치 며칠을 함께 살아온 것처럼. 또는 이미 경험한 것처럼. 청호의 말을 차근차근 되뇌던 시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이런 방랑자들을 보신 적이 있는 거죠?”
“……그래.”
청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먹빛 눈동자가 한층 차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시윤의 눈이 그렁그렁 젖어 들었다.
“혹시 대장님이 어렸을 때…….”
“아니야. 내가 방랑자로 있던 곳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했어. 먹을 걸 찾아다니지도 않았고, 싸우지도 않았고, 죽을 날만 기다렸지. 그냥 오늘 같은 방랑자들을 만난 적이 있을 뿐이야.”
그 말에 시윤이 다행이라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청호의 목을 꽉 껴안기도 했다. 제가 아는 청호의 상처만 해도 한 아름이다. 근데 방랑자였을 때도 착취를 당했다면 마음이 문드러졌을 터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러다 시윤이 깊은 한숨과 함께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분명 나쁜 사람들인데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아이들을 때리고 막 다루는 걸 보면서 혼내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은 했는데……. 그게 살의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
“클롭스나 방사능을 삼킬 때는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꼭…… 꼭…….”
“휴를 죽일 때처럼.”
“맞아요. 그때처럼. 기분이 이상해요. 저 사람들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싶고. 저 사람들도 이런 땅 밑이 아니라 포스에서 태어났으면 달랐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시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듯,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그에 청호가 시윤의 관자놀이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당연한 것으로 고민하는 시윤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시윤은 여태 사람을 죽여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당장에 분노가 치민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피가 난무하는 세상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밥 먹듯 흔한 건 아니란 말이다. 포스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 왔다면 더더욱.
그가 시윤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윤아. 아무도 너한테 저 인간들 죽이라고 안 해.”
“…….”
“네가 할 수 있는 일과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을 혼동하지 마.”
“…….”
“넌 아이들만 구하면 돼. 저 인간들을 죽이고 벌하는 건 네 의무가 아니야.”
그 말에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청호는 참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염력이나, 불 같은 능력이 아니라, 저를 위로하고 타이르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넌지시 고민만 털어놓으면 그 고민의 무엇이 틀렸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결국 그것은 너의 죄도,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곤 했다.
그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해 봐서 아는 건지, 아니면 일단 편부터 들고 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의 조언 하나하나가 몹시 간절했다.
시윤이 청호를 소중히 껴안았다. 그가 제 반려라서, 제가 그의 반려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청호가 덩달아 시윤을 마주 안았다. 품 안에서 이른 봄이 만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엔 종일 그와 떨어지질 않아서 딱히 가이딩이 필요 없는데도 그와 닿으면 그저 좋기만 했다. 입이 실없이 샐쭉 벌어지고 어디든, 무슨 상황이든 무장 해제가 되어 버렸다. 근육이 사르르 녹고 깨끗하게 정화된 피가 팽팽 빠르게 핏줄 속을 달렸다.
한참 동안 시윤을 안고 놔주지 않던 청호가 아쉽게 그를 놓았다. 이곳을 얼른 처리하고 포스로 돌아가야 했다. 뜨끈한 물로 길게 샤워한 후, 시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그를 껴안은 채 침대를 뒹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그의 속살에다 코와 입술을 비비고 싶기도 했다.
청호가 시윤을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시윤을 바로 세웠다. 시윤이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호흡을 고르는 듯 숨을 짧게 끊어 내쉬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그럼 이제 저 새끼들 혼내 주러 갈까?”
“……네.”
시윤이 간결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몸을 훌쩍 날려 엘리베이터 내부의 손잡이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천장을 잡아당겼다. 오랜 세월에 얇은 판자와 다름없어진 철제 천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묵혀 있던 먼지들이 모래처럼 쏟아졌다. 시윤이 짜증이 서린 얼굴로 손을 휙 휘저었다. 그러자 먼지가 그의 손으로 훅 빨려 들어가더니 단숨에 사라졌다.
청호는 성큼성큼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볍게 천장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시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윤이 그 손을 잡으려 팔을 드는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시윤은 청호의 능력 덕에 사뿐히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문으로 나왔다면 훨씬 쉬웠겠지만 그랬다간 아마 문짝 전체가 날아갔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가장 아래층부터 시작해 지하철역의 구조를 익히고, 아이들의 행방을 찾을 동안은 조심히 다니기로 했다. 방랑자들이 도망갈 곳도 막아야 하고,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어디에 감금되어 있진 않은지 또는 숨어 있진 않은지도 파악해야 했다.
엘리베이터까지 올라오는 길에 살펴본 결과, 방랑자들은 대부분 위층에 터를 잡은 듯했다. 아무래도 적당히 아래에 있는 게 클롭스에게서 도망가기 쉽기 때문이리라. 뭉쳐 있는 게 방어에 좋기도 하고. 그래서 깊은 지하는 인적이라곤 없었다.
화장실, 승차장, 의자 아래, 고장 난 자판기 등엔 온통 쓰레기만 가득했다.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소득이 없어서 다행인 탐색이었다.
아. 청호는 좋은 걸 하나 발견했다. 자판기 아래에 처박혀 있던 도끼였는데, 머리가 묵직한 게 청호의 힘으로 휘두르면 건물 하나쯤이야 대번에 부서질 것 같았다. 청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도끼를 이리 쥐었다가, 저리 쥐었다가 또는 붕붕 돌렸다.
청호와 시윤은 기척을 죽인 채 한 층을 더 올라갔다. 그곳에는 내려오면서 봤던 쓰레기 더미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잡다한 물건들을 헤집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어찌나 작고 말랐는지. 꼭 물건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는 사내는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손에는 유리로 된 음료수병을 쥐고 있었는데, 마시던 건 아닌 것 같고. 페인트 통을 던졌듯 아이들을 위협하려는 용인 듯했다.
시윤이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페인트 통에 맞고 고꾸라진 아이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디로 떨어졌더라. 저기 부서진 붉은 소파가 있던 언저리였는데.
빠르게 굴러가던 시윤의 눈동자가 한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일그러진 냄비와 바구니 사이에 비죽 솟은 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밀조밀한 발가락에 시윤의 손바닥보다 작은 발. 분명 아이의 발이었다.
시윤이 망설임 없이 철길 아래로 몸을 날렸다. 쓰레기 더미 특유의 쿰쿰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기절한 아이는 입가엔 기름이 검게 묻어 있었고, 관자놀이는 길게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으며 몸이 차가웠다. 시윤이 얼른 맥을 짚었다. 미약하지만 움직임이 있었다. 코에 귀도 가져갔다. 색색, 약한 숨이 느껴졌다.
붕대라도, 아니, 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랴만. 주머니가 텅 빈 상태라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시윤이 아쉬운 대로 입고 있던 청호의 코트를 벗어 아이를 둘둘 싸맸다.
청호는 다른 아이들을 갈무리했다. 염력으로 당근 뽑듯 쑥쑥 뽑아 모으면 편하겠지만, 행여 놀라서 까무러치기라도 할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휙휙 빠르게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아이들은 낯선 이가 두렵지도 않은지, 아니면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없는지 들면 드는 대로 가만히 들려 있었다. 인간인지 인형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청호와 시윤이 열댓 명의 아이들을 모을 동안 매트리스 위의 사내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꿈에서 뭐 그리 맛있는 걸 먹는지 이따금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청호가 탁하게 번뜩이는 도끼를 들고서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나중에 방랑자들을 모아서 차례를 제비뽑기한 다음에 순서대로 죽일 생각이었는데. 이 사내는 그 재미있는 걸 못 할 듯싶었다.
청호가 묵직한 도끼를 연필처럼 가볍게 위로 쳐들었을 때였다.
“대장님.”
정신을 잃은 아이를 껴안은 시윤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청호가 얼른 뒤를 돌아봤다. 시윤이 눈짓으로 모아 놓은 아이들을 가리켰다. 적으면 다섯 살에서 많으면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다. 그들의 동글동글한 눈이 하나같이 청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윤의 낯에 난처함이 떠올랐다.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며 온갖 못 볼 것들을 본 아이들임을 안다. 근데, 그래도. 그래도 굳이 ‘못 볼 것’을 하나 더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 시윤의 의중을 알아챈 청호가 허공에 불덩이 하나를 쐈다. 동그란 불덩이가 허공을 가르며 쭉 뻗더니 불꽃놀이처럼 현란하게 터졌다. 소리는 없었으나 그 화려함은 대단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 불꽃으로 몰려갔다.
그것을 확인한 청호가 도끼를 쳐들었다. 그러다 대뜸 다시 시윤을 뒤돌아봤다. 시윤은 여전히 청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아름답긴 했지만, 청호가 으레 보여 주던 터라 크게 놀랍진 않았던 거다.
“시윤아.”
“네.”
“너도 뒤돌아.”
그 말에 시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네.”
시윤이 아이들을 따라 불꽃놀이로 눈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청호가 도끼를 허공에 맡겼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친히 사내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덩치 좋은 사내가 쑤욱 굵직한 무 뽑히듯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코앞의 청호를 발견한 그가 놀라서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다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뭐, 뭐…….”
사내가 어버버 말을 절었다.
“쉬…….”
청호가 입술을 모아 침묵을 강요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던 사내가 뒤늦게 고함을 지르려 할 때였다. 청호가 그대로 머리를 뒤틀어 버렸다. 뚜둑.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젖은 빨래처럼 늘어졌다.
청호가 시체가 된 사내를 쓰레기 더미로 휙 내던졌다. 그리고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쓰레기로 남자를 묻어 버렸다.
사실 도끼로 머리를 찍어 주고 싶었는데. 그럼 피가 튀니까. 피가 튀면 아무래도 좀…… 무서우니까.
청호가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시윤은 분명 포스에 가서도 이곳에서 구한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만날 듯했다.
잘 먹고 잘 자는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겠지. 그럼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자주 마주해야 할 텐데. 그들에게 무서운 형이나 아저씨로 인식되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애들이 대장님을 무서워해요. 앞으론 저 혼자 갈게요.’
시윤이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면 죽고 싶어질 터였다. 청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드는데,
“대장님.”
시윤이 청호를 불렀다. 이제 끝났냐는 물음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불꽃놀이에 박힌 채였다.
“응. 끝났어.”
“그, 시…… 시체는요?”
“치웠어.”
그 말에 시윤이 안심하고 청호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슬쩍 엄지를 추켜올려 주었다. 배려심에 고맙다는 뜻임과 동시에 칭찬이었다.
청호가 씨익 기분 좋게 웃었다.
“혹시 말할 줄 아니?”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의 앞에 꿇어앉은 시윤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끄덕.
아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시윤이 기특하다는 듯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리가 저기 위에 있는 나쁜 사람들을 혼낼 거야. 그동안 너희들은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숨기 좋은 곳이 있을까?”
시윤의 말에 여자아이의 눈이 끔뻑끔뻑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침묵이 이어졌다. 시윤이 혹 제가 말을 너무 빨리해서 못 알아들었나, 싶어 천천히 다시 말하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어떻게 혼낼 건데요?”
아이가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번엔 시윤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떻게 혼내냐고? 글쎄. 그것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청호가 알아서 할 일이라. 아마 산 채로 태우거나 얼리거나, 아니면 도끼로 찍거나 하지 않을까. 근데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에게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순 없었다.
시윤이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둘이서?”
여자아이가 작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청호와 시윤을 뜻하는 듯했다.
“어? 어…….”
시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아스 부대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할 터였다. 그것도 시계를 빼앗긴 탓에 확신할 순 없었다. 일찍 도착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청호와 시윤 둘이서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시윤의 긍정에 여자아이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러더니 조막만 한 입술로 빠르게 말했다.
“저 사람들 무서워요. 총도 많아요. 오빠들 죽어요. 죽으면 괴물이 먹어요. 피가 많이 나요.”
“…….”
경고이면서도 걱정인 말에 시윤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체 여태 뭘 봐 왔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차마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시윤이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데, 이번엔 청호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숫자 알아?”
“네.”
“아는 숫자 중에 제일 큰 게 뭐야.”
“……열 개.”
여자아이가 단풍잎 같은 손을 쫙 펼쳐 보였다. 짤뚱한 손가락 열 개가 온전히 드러났다.
청호가 아이의 앞에 뒤꿈치를 들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여자아이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나는 한 번에 열 명을 죽일 수 있어.”
“…….”
“여기 이 오빠는 한 번에 열 명씩 없앨 수 있고.”
청호가 턱짓으로 시윤을 가리켰다. 시윤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일격에 열 명씩 죽일 수 있다는 소리를 아이한테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만, 어쩐지 아이의 눈이 순간 반짝인 듯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거짓말. 총도 없으면서.”
여자아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만 입은 청호나, 보들보들한 니트에 청바지만 입은 시윤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굴에 칼자국을 달고 다니고, 팔목이나 발목 하나 없이도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방랑자들에 비하면 그럴 만도 했다.
시윤이 이 오해를 어찌 풀어 가야 하나 턱 아래를 긁적이는데, 돌연 청호가 쓰레기 더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어깻죽지에서 화염이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더니, 굵직한 불덩이가 훅 밀려 나갔다.
그것은 곧장 쓰레기 더미를 쳤다. 산처럼 쌓여 있던 쓰레기들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 커다란 더미가 통째로 불타는 데에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불길은 활활, 아주 세차게 타올랐다.
여자아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동글동글한 눈들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질 기세였다. 그만큼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금세 공포가 됐다. 얼굴을 홧홧하게 스치는 열기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불길은 쓰레기 더미를 태우며 가무잡잡한 연기를 뿜어냈고, 초가 다르게 몸집을 키워 갔다.
아이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데, 이번엔 시윤이 쓰레기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눈에 예쁜 연둣빛이 스몄다. 그와 동시에 타오르던 쓰레기 더미가 파스스 작은 입자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던 불 역시 그대로 붉은 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시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쓰레기로 천장까지 꽉 막혀 있던 철길이 실로 오랜만에 본모습을 드러냈다. 대청소를 한 듯 깔끔해진 기분에 시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곤 나 잘했죠? 라는 표정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청호가 나직이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시윤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넋 빠진 표정으로 청호와 시윤을 보고 있었다. 시윤이 살풋 눈을 접으며 말했다.
“우리는…….”
“…….”
“총 같은 거 필요 없어.”
그것보다 강한 무기가 있거든.
여자아이는 청호와 시윤을 지하철역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으스러진 계단 몇 개를 지났고, 전차의 도착 시각을 알리던 전광판이 나동그라진 복도를 지나, 스피커가 떨어진 모퉁이를 돌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정확히는 무너진 화장실 바닥 아래.
움푹 파인 구덩이 같은 그곳엔 또 다른 아이들 다섯 명이 있었다. 어디서 흘러오는지 모를 지하수가 발목까지 찰랑거렸는데, 그곳에서 퍼질러 앉아 고사리손으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입술은 새파랬고 손은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녹물로 빨래를 해 봐야 의미가 없을 듯한데 열심히 주무르고, 빨랫비누를 비비고, 다시 치댔다. 그럼 한 명이 그것을 받아다가 온몸으로 껴안아 물기를 짰다. 몸이 젖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또 한 명은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받아다가 구덩이를 기어 올라왔다.
그러다 우두커니 선 청호와 시윤을 발견하곤 놀란 듯, 헉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청호가 그런 아이를 염력으로 끌어 올렸다.
“여기는 안 와요. 냄새난다고.”
여자아이가 시윤에게 속삭였다. 뿌듯한 얼굴이었는데, 시윤은 잘했다고 칭찬해 주지도, 웃어 주지도 못했다. 그냥 씁쓸한 낯으로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기만 했다.
청호가 훌쩍 구덩이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곤 여기저기를 살피며 숨을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벽이 무너지고, 지하수가 끊임없이 새어 나온 탓에 이곳저곳 구멍은 많았다.
아이들을 퍼즐 끼워 넣듯 넣으면 다 숨길 수야 있겠지만 따로 두기가 영 마뜩잖았다. 거기다 그다지 깊지 않아서 위에서 보면 훤히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잠시 고민하던 청호가 구덩이 위를 쳐다봤다. 시윤과 아이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번뜩 좋은 생각이 들었다.
청호는 화장실 입구, 시윤과 아이들이 서 있는 그 바로 아래를 쾅 도끼로 내리찍었다. 여기다 구멍을 파서 아이들을 숨기면 위에서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여자아이의 말마따나, 냄새나서 오지도 않는 곳의 지하수에 친히 발을 담가 이곳을 헤집을 것 같지도 않고.
청호는 염력과 아귀힘을 이용해 금세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주위에 나뒹구는 철근을 이용해 구멍이 무너지지 않게 지지대를 세웠다. 행여 나중에 전투를 하다 폭발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바닥에는 화장실 문짝을 깔았다.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지하수에 아이들이 젖지 않도록.
그 후 시윤에게 눈짓하자 시윤이 아이들을 하나하나 내려 보냈다. 마지막으로 청호의 코트에 둘둘 말린 채 정신을 잃은 아이까지 여자아이의 품에 안겼다.
“여기 숨어 있어. 누가 오거든 없는 척해.”
청호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훌쩍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시윤에게 이만 가자고 하려는데, 구덩이 위에 있던 시윤이 무릎을 꿇고 아래로 쑥 얼굴을 내렸다. 그리고 조곤조곤 듣기 좋은 음성으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혹시 나쁜 사람들이 너희들을 찾으면, 갇힌 거라고 해. 무서운 오빠들이 여기 가둬 놨다고. 알았지?”
아이들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이 그런 아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곤 이만 자리를 뜨려는데, 여자아이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친구가…… 있어요.”
“어디에?”
“위에. 지하철에.”
“알았어. 조금 이따가 볼 수 있을 거야. 한 시간쯤 뒤에.”
“…….”
시윤의 말에 여자아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반응에 시윤은 그녀가 아직 시간을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 시간을 어찌 설명한다. 60분이라고 한들 아는 숫자가 10까지뿐이라 이해하지 못할 텐데. 시윤이 으음, 목으로 신음하는데 청호가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곰 인형 모양의 얼음 덩어리였다. 비록 녹물이 섞여 멀끔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귀여웠다. 근데 이걸 뜬금없이 이 순간에 왜…….
“…….”
시윤이 눈짓으로 이것이 무엇이냐, 청호에게 물었다. 그러자 청호가 검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시윤이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시윤이 곰 인형 아닌 곰 인형을 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여자아이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아이들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몰려들었다. 손가락으로 곰의 코나 배를 쿡쿡 찔러 보기도 했다.
“이거 얼음이야.”
“알아요.”
“이게 다 녹기 전에 다시 올게. 친구랑.”
시윤의 말에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은 아이들을 몇 초간 응시하다 몸을 올리려 했다. 그러자 청호가 그의 허리를 잡고 휙 단번에 일으켰다. 그 후엔 특유의 무심한 낯으로 시윤의 무릎께에 묻은 시멘트 부스러기들을 툭툭 털어 냈다.
그런 청호를 빤히 보던 시윤이 물었다.
“진짜…… 곰 인형 만들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청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스레 대꾸했다.
“내가 원래 그런 쪽으로 센스가 좋잖아.”
그 모습이 어찌나 능청맞으면서도 사랑스러운지. 시윤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치솟는 애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청호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쪽 물었다가 놨다.
청호와 시윤은 지하 2층까지 올라왔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던 그곳이었다. 방랑자들은 둥그렇게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먼 거리라 무엇을 먹는지는 모르겠으나 낄낄거리며 입으로 무언가를 마구 쑤셔 넣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불이 이글거리는 커다란 드럼통이 있었고, 그 주변엔 총구가 붉게 표시된 청호의 총을 비롯해 그의 차에서 빼낸 물품들이 있었다. 청호의 지프는 그새 어디에 가져다 놨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때 문득, 한 남자가 일어났다. 새총 머리를 한 남자는 팔뚝이 굵직한 게 힘깨나 쓸 것 같았다.
그는 청호의 총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그것을 번쩍 들었다. 역기라도 드는 모양새였다. 팔 근육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방랑자들이 제각각 다른 소리를 질렀다. 비아냥도 있었고 격려와 응원도 있었다.
새총 머리는 총을 옆구리에 끼더니 총구를 어렵사리 한곳으로 조준했다. 목표는 지하철 안에 있는 기둥 중 하나였다. 페인트로 크고 작은 원들을 겹쳐 그려 놓은 게, 과녁 따위로 쓰는 듯했다.
총구를 퍽 진지하게 조준한 새총 머리가 검지를 방아쇠에 걸었다. 묵직한 무게를 오로지 팔과 손목으로만 지탱하게 되면서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룩 올라왔다.
이를 악문 새총 머리가 간신히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가 달린 탓에 총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슉, 하고 작은 총알이 허공을 베는 소리만 났을 뿐이다.
그러나 총알에 맞은 벽은 그렇지 않았다. 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과녁으로 그려져 있던 원은 물론, 기둥 전체가 부서졌다. 무너진 꼴만 보면 누가 대포라도 쏜 듯한 모양새였다.
“…….”
“…….”
방랑자들이 입을 쩍 벌렸다. 몇몇은 들고 있던 음식을 놓치기까지 했다.
그냥 총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에로아스만을 위해 모건이 직접 만든 총이다.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게 아니라 클롭스, 그것도 고위 레벨 클롭스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저 정도 파급력은 나와야 했다.
멍하니 굳어 있던 새총 머리가 총을 놓쳤다. 투닥, 탁. 총이 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철길 아래에 몸을 낮추고 있던 청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저거 한 손으로 들고 쏠 수 있어.”
“…….”
뜬금없는 소리에 시윤이 눈을 끔뻑거렸다. 청호가 저 총을 한 손으로 다룰 줄 안다는 건 지극히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와 함께 전장에 나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조금의 거짓을 보태면 그가 총을 쏘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훈장이라도 받은 듯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청호에 시윤은 뒤늦게 그가 무슨 의도였는지 알아차렸다. 시윤이 큭큭 소리 죽여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여우실 필요는 없어요.”
그 말에 청호가 덩달아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맞춘 채 웃음을 공유하다가 다시 방랑자들에게 집중했다. 총의 파괴력에 말을 잃었던 방랑자들은 저마다 다른 환호성을 지르며 총으로 몰려들었다. 칼자국이 그들을 밀치곤 총을 끙끙 들어 올렸다.
방랑자들이 순서 없이 말을 내뱉었다.
“이거면 괴물 새끼들도 죽일 수 있겠는데?”
“이런 총은 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냐?”
“몰라. 나도 처음 봐. 여태 무기 가게를 백 개는 돌아다녔는데. 이런 건 구경도 못 해 봤다.”
“애당초 말이 안 돼. 이 무게를 어떻게 들고 쏴.”
“그래. 차에 묶어다가 기관총처럼 쓰는 거면 모를까.”
“오, 씨발. 그거 존나 좋은 생각이다. 대장, 우리도 그렇게 쓰자.”
“총알은 충분하고?”
“개-많아. 아까 그놈들 차에 박스째로 실려 있었어.”
“……근데, 아까 그놈들은 이걸 들고 쏜 거야?”
“키가 큰 놈이야 그렇다 쳐도, 작은 놈은 탄창도 못 들 것처럼 생겼던데.”
문득 방랑자들의 대화 주제가 청호와 시윤에게로 넘어왔다. 칼자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있던 금발이 그의 귀에 무어라 한참을 속삭였다. 곧 칼자국의 얼굴도 단단하게 굳었다.
그가 청호의 총을 둘러싸고 있던 방랑자 중 두 명의 옷깃을 잡고 뒤로 휙 당겼다. 그러곤 무엇을 명령했다. 냉큼 고개를 끄덕인 방랑자 둘은 각자의 것으로 보이는 총기를 챙겨 아래 계단으로 내려갔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아마 청호와 시윤을 찾으러 가는 것이리라.
그 모습을 본 청호와 시윤은 잠깐 시선을 교환하고 가까운 지하철로 향했다. 시윤의 키만큼이나 깊은 선로 벽에 몸을 딱 붙이고 발소리를 숙이며 조심조심 이동했다.
물론 당장 이곳에서 저들을 처리할 수도 있지만 아직 안 된다. 여자아이가 언급했던 친구를 찾아야 했다. 무슨 구조 작전이든 간에, 인질의 위치와 상태 확인을 최우선으로 둬야 했다.
선로를 이탈해 옆으로 기울어진 지하철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시윤이 안을 들여다보려 슬쩍 발을 쳐들었다. 그러나 차체가 어찌나 높은지, 형광등이 죄 부서진 천장만 보였다. 청호만이 간신히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
근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안에 아이들이 있다 없다, 또는 무엇이 있다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일단 어두컴컴한 게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것도 없어요?”
시윤이 물었다.
“…….”
청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 너무 작아 들리지 않은 걸까? 시윤이 차마 들킬까 소리는 치지 못하고 청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그러자 청호가 시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잘생긴 얼굴이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화가 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의 얼굴.
“뭔데요?”
시윤이 재차 물었다. 청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두 음절을 간결히 내뱉었다.
“시체.”
“…….”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시체라 하면 누구의 시체? 클롭스? 아니면 설마 인간? 혹, 아이도 있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저 시체라는 두 음절만 들었을 뿐인데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기름통이라도 삼킨 듯 속이 메슥거렸다.
“보지 마. 굳이 볼 필요 없어.”
청호가 시윤의 손을 이끌었다. 지하철을 지나치려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그에게 끌려가던 시윤이 뒤꿈치에 꾹 힘을 줬다.
“저도 볼래요.”
“시윤아.”
“잠깐만…… 볼게요.”
“왜.”
청호가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굳이 안 봐도 될 걸, 봐서 좋을 게 하등 없는 걸 보겠다는 시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뭘 봐도 무던히 넘기는 성격이면 모를까. 계속해서 괴로워할 게 뻔한데.
“얼마나…… 얼마나 못된 사람들인지 저도 봐야겠어요.”
“……애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래도 살인이랑은 다르잖아요. 혹시 아니면, 아니면 저 사람들이 죽인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는 장례나 무덤 같은 게 없을 테니까 가족이나 친구가 죽으면 그냥 이곳에 두는 게 아닐까요?”
답답하면서도 안쓰러운 시윤의 사고에 청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내 결심한 듯 지하철을 빙 둘러 지하철과 벽 사이로 들어갔다. 그 후 지하철 문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어슴푸레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손끝이 문 안을 파고들어 갔다. 꼭 볼링공에 손가락이 끼인 것처럼. 너무 위에 달린 손잡이를 대신해 직접 손잡이를 만든 거였다.
문을 열기 직전, 청호가 시윤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봐도 돼. 근데 이걸로 울거나 힘들어하면 화낼 거야.”
“……네.”
시윤이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죽는 건 저도 제법 많이 봤다. 장벽 전투 때만 해도 시체와 피를 멀미가 날 정도로 봤었단 말이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청호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벽 쪽으로 난 문은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모양인지 매우 뻑뻑했다. 끼이익, 끽 듣기 싫은 쇳소리도 났다.
방랑자들에게 들키면 어쩌나,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발등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시윤이 별생각 없이 아래로 눈을 내렸다.
쥐였다. 검붉은 쥐가 시윤의 신발 위로 떨어져서 파드득 몸을 뒤틀더니 재빠르게 사라졌다.
시윤이 그것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봤다. 별별 생김새의 클롭스를 십수 년 동안 연구했는데, 고작 쥐로 놀랄 리 없었다.
근데 갑자기 쥐가 어디서…….
시윤이 고개를 쳐들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뼘. 한 뼘 열린 지하철 틈으로 쥐가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청호가 짜증스레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쥐들이 두 사람을 향해 떨어지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뒤로 나뒹굴었다.
수십 초가 지나자 쥐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하철 내부의 컴컴한 어둠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문으로 다가갔다. 고약한 악취가 났다.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청호가 동전 크기만 한 불씨를 지하철 문틈으로 흘려보냈다. 불이 날 정도는 아니고, 공중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지면 알아서 사그라질 정도로 작은 불씨를.
그래도 그 덕에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시윤의 눈동자가 불씨를 따라 움직였다.
시체 더미는, 말 그대로 시체 더미였다. 부패가 많이 된 탓에 얼굴이나 정체를 알아볼 순 없었지만 지하철 한 칸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인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른은 물론 아이로 보이는 사체도 있었고, 모두 온전치가 않았다.
썩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발목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잘라 낸 것처럼. 그 말인즉슨, 하나같이 다른 목적으로 말미암은 살인이란 말이었다. 강탈을 일삼다 죽였다면 이런 짓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아예 토막 난 시체도 가득했다. 아마 클롭스를 유인하는 ‘미끼’로 쓰였던 게 아닐까 싶었다.
시윤은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냥, 아, 여기 이곳에 있는 시체들은 저 방랑자들의 가족이 아니었구나, 그들의 유흥거리로 쓰였거나, 또 다른 도구로 쓰였었구나,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다 봤어?”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러다 찰나, 시야를 스친 무언가에 지하철 문틈으로 들어갈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이,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였다. 청호와 시윤이 끌려올 당시, 차에 타고 있던 그 아이. 조잡한 식량을 훔쳐 달아났다가 다시 잡혀 온 그 아이 말이다.
아이를 데리고 가던 남자가 지하철 쪽으로 향하는 건 봤다만. 설마 지하철 안에 던져두었을 줄은 몰랐는데. 죽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죽으라고 방치한 걸까.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살아 있을 것이다. 상태가 좋진 않아 보였지만, 한두 시간 사이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체들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의 상태는 꽤 온전했다. 목이 뒤틀린 것 같지도 않았고, 팔다리도 멀끔히 붙어 있었다.
시윤이 지하철 문을 잡고 훌쩍 점프했을 때였다.
“됐어.”
청호가 그의 허리를 감싸고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을 조금 더 연 후, 염력으로 아이를 끌어왔다. 이윽고 축 늘어진 아이가 청호의 품에 안착했다.
시윤이 얼른 아이를 살폈다. 다행히 머리에서 나던 피는 멎은 상태였다. 하지만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청호가 손바닥 체온을 차게 내려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시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여자아이가 말하던 친구가 이 아이일까요?”
“아니. 걔는 계속 쓰레기 더미에 있었잖아. 얘는 우리랑 같이 온 애고. 여자아이는 얘가 다시 잡혀 왔다는 걸 모를 거야. 지하철에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을 거고.”
“그럼…….”
시윤이 뒤에 소시지처럼 줄줄이 딸린 열차들을 바라봤다. 끝도 없이 이어진 열차에 목구멍이 텁텁해졌다. 저 긴 열차 어딘가에 또 다른 아이가, 혹은 아이들이 있을 터였다.
저걸 어떻게 다 살피나, 고민하는데 청호가 아이를 시윤에게 내밀었다. 시윤이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 들었다. 무엇을 하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청호가 훌쩍 몸을 날려 시체가 쌓인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시체가 없는 의자 위를 성큼성큼 밟아 다음 열차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 문은 바깥문과 달리 제법 매끄럽게 열렸다. 열차 안을 확인한 청호가 시윤에게 눈짓했다. 시윤이 그를 따라가기 위해 발뒤꿈치를 드는데, 몸이 먼저 붕 떠올랐다.
시윤은 피터 팬을 따라가는 웬디가 된 듯, 둥둥 풍선처럼 날아서 청호 옆에 안착했다.
다음 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와 시멘트 조각, 비닐 따위의 쓰레기만 곳곳에 뭉쳐 있었다. 시체 옆 칸이라 비워 둔 건지, 아니면 이 칸 역시 시체로 채울 생각으로 비워 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청호는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다음 열차로 들어가고, 또 다음 열차로 들어가는 데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딱히 무언가가 있진 않았으나, 너무 조심성이 없는 행동이었다. 안에 뭐가, 혹은 누가 있을 줄 알고.
아이를 꼭 껴안은 시윤이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먼지와 얼룩이 가득한 창 너머로 방랑자들이 뭉툭하게 번져 보였다. 평온한 걸 보니 청호와 시윤을 찾으러 갔던 방랑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지금 청호의 행동은 너무 위험했다. 청호가 막 다음 칸의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시윤이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방랑자가 있을지도 몰라요.”
“없어.”
청호가 단호히 부정했다. 시윤이 눈썹을 들썩였다. 아니, 제가 모르는 사이 청호에게 투시 능력이라도 생겼나.
“그걸 대장님이 어떻게…….”
“쓸데없이 깔끔 떠는 놈들이야. 지하수가 넘치는 화장실은 냄새 나서 안 가고, 애들한테 빨래도 시키지. 근데 시체를 모아 두는 지하철 안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을 리 없어. 여기는 그냥 쓰레기통이자 창고야.”
“아…….”
시윤이 입을 뻐끔 벌렸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가 청호의 팔꿈치를 놓아줬다. 청호가 씨익 웃으며 시윤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가 놨다.
“무슨 일을 하든, 네가 위험할 상황은 안 만들어. 걱정하지 마.”
시윤이 이해했다는 듯 연달아 세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와 시윤은 그렇게 또 열차 네 개를 지나쳤다. 지구본과 지도, 망원경, 나침반 따위가 가득한 칸도 있었고 휴지와 수건이 가득한 칸도 있었다. 총기와 총알이 빼곡한 칸도 발견했다. 제법 쓸 만했지만, 포스 내에서 쓰는 총과 비교하면 쓰레기에 불과했다.
청호가 이딴 것으론 멧돼지 하나 잡지 못할 거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염력으로 총기의 총구들을 반으로 죄 구부려 버렸다. 그래도 나이프와 수류탄 같은 건 몇 개 챙겼다. 시윤이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청호가 막 여섯 번째 칸에 섰을 때였다. 거침없이 이어지던 청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시윤의 발이 덩달아 멈췄다.
“왜요? 방랑자예요?”
긴장한 시윤이 소곤소곤 물었다.
“……아니.”
청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시윤이 볼 안쪽 살을 꾹 씹었다가 놨다.
“그럼요? 또 시체예요?”
“아니.”
청호가 다시 부정했다. 그에 시윤이 눈을 감고 청호의 등에 이마를 묻었다. 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에요?”
“응.”
마침내 맞이한 청호의 긍정에 시윤이 숨을 크게 마셨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가 청호의 팔뚝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흡, 숨을 멈춰야 했다.
아이들이 있었다. 적어도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나이는 적으면 세 살에서 많으면 열두 살쯤 된 것 같았다. 누구 하나 멀쩡히 서 있질 못했다. 다들 널브러지다시피, 혹은 누가 구겨 놓은 것처럼 누워 있었는데,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속옷만 입고 있었고, 어찌나 말랐는지 그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진 갈비뼈와 오돌토돌하게 올라온 척추가 보였다. 거기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온갖 배설물까지.
시체가 가득했던 칸만큼이나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또 다른 시체 칸이라고 해도 어폐가 없었다. 몇몇 아이들은 생사를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두어 둔 게 아니라 일을 시킬 수 없는 상태라 이곳에 둔 거였다.
시윤은 아래층에 있던 아이들은 매우,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발견한 즉시 다른 아이들이 숨어 있는 지하로 내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 없을 듯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서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그저 어디에 갇혀 있겠거니, 생각한 저의 아둔함에 짜증이 치밀었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품에 안은 아이를 상기하곤 힘을 풀었다. 대신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눈알이 홧홧할 정도로 화가 났다. 여태 아주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지만 이토록 분노한 적은 손에 꼽았다.
차라리 말이다, 차라리 아이들을 먹었다면, 그랬다면, 아, 정말 지독히도 배가 고팠구나, 인간임을 포기하고 짐승이 되었구나, 또는 클롭스와 다름없는 괴물이 됐구나, 그리 생각했을 터였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끔찍하고 혹독한 상황을 상상이나마 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다.
근데 이건, 이건 그냥 착취고 유흥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헤집게 하고, 빨래를 시키고, 때리고, 학대하고, 세상에서 받은 모멸을 아이들에게 푸는 거.
인간이라서 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거였다.
시윤이 자신의 품에서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얼굴 반절이 피에 젖은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대장님.”
시윤이 공허한 음성으로 청호를 불렀다. 청호가 대답 대신 시윤을 뒤돌아봤다.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맞췄다.
“죽여 주세요.”
“…….”
“저 방랑자들 꼭…… 죽여 주세요, 대장님.”
“그래.”
청호가 단조로이 그러겠노라 말했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시윤이 한 발자국 더 청호에게 붙어 섰다. 그러고는 마치 영악한 계략을 꾸미는 악마처럼 감미로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잔인하게 죽여 주셔야 해요.”
“…….”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뭔지, 고통이 뭔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잔인하게요.”
“……그래.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
청호가 시윤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띠었다가 지운 시윤이 열차 문을 열었다. 아이들은 누가 들어오든 말든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어쩌면 정신의 반절 이상이 이미 이승에 없는 것도 같았다.
시윤이 안고 있던 아이를 조심히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불편하게 누워 있는 아이들도 바로 눕혔다.
“아이들이 더 있을까요?”
“글쎄…….”
확신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방랑자 하나하나의 시중을 들고 있을 수도 있고.
시윤이 그럼 다음 칸으로 가 보자고 말하려 할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렁이는 빛 너머로 방랑자들의 그림자가 바쁘게 산란했다. 청호와 시윤을 찾으러 갔던 방랑자 두 명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인질이 있던 엘리베이터가 텅 비었다! 아래층에 있던 아이들이 없어졌다! 그런 소식을 가지고 왔겠지.
아마 청호와 시윤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여기는 저들의 집이었고, 지금 있는 열차는 그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니까.
시윤이 청호를 쳐다봤다. 명령을 기다리는 거였다. 이제는 구조가 아니라 전투였다. 전투에선 청호의 말을 따라야 했다. 그게 맞았고, 옳았다.
청호가 얼룩진 창문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고 바깥을 살폈다. 방랑자들이 각자의 총을 찾아 들고 있었다. 아마 곧 총기가 쌓여 있던 열차 문을 열겠지. 망가진 총기들을 보고 청호와 시윤이 그곳을 다녀갔음을 알 것이다.
“여기 있어.”
청호가 말했다.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명령이었다.
청호는 전장에선 웬만하면 시윤과 함께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시윤은 안전한 곳에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청호를 가이딩했다.
물론, 시윤은 독보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가 치유력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두면 행여 그가 다칠까, 아플까, 잡힐까, 청호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분명 총알을 갈겨 댈 텐데, 대부분은 청호가 막을 수 있을 테지만 단 하나라도, 하나라도 놓치면 큰일이었다. 그 총알이 시윤의 미간을 꿰뚫을지, 심장을 꿰뚫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시윤이 그 총알을 삼키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청호는 불안했다.
시윤의 옆에 쪼그려 앉은 청호가 수류탄 몇 개와 나이프를 건넸다. 시윤은 수류탄을 비롯한 폭발물을 능통히 다룰 줄 알았다. 청호가 몇 년 동안 열심히 훈련시킨 덕이었다. 폭발이 일어나면, 자신에게 달려드는 불을 손으로 삼켜 버릴 수 있었다.
적은 죽이되, 자신은 보호하게 훈련한 거였다.
훈련 성과는 좋았고 시윤은 청호가 이런 상황에서 그를 혼자 둘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시윤이 수류탄 하나는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바닥에 조심히 세워 뒀다. 누군가가 들어오면 곧장 핀을 뽑아서 던질 수 있도록. 그리고 나이프는 칼날이 자신의 팔꿈치 안쪽을 향해 가도록 쥐었다. 휘두르긴 쉽되, 주변에 있는 이는 다치지 않도록.
익숙하게 전투를 준비하는 시윤에 청호는 치솟는 웃음을 삼키지 못했다. 시윤의 성장이 왜 이리 기꺼운지 모르겠다. 결국 참지 못하고 시윤의 뺨을 쥐고 진하게 입을 맞추어 줬다.
그리고 아쉽게 몸을 일으켰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이따가 봐.”
두 사람은 단조로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청호는 벽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나왔다. 그 후 문을 꼼꼼히 닫고 문손잡이를 녹여 버렸다. 그로 모자라 문틈도 녹여 납땜이라도 한 것처럼 붙였다. 문을 부수지 않고는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열지 못하게.
추후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청호가, 혹은 청호가 아니더라도 시윤이 그의 능력으로, 또는 힘 좋은 에로아스 병사 중 하나가 뜯어내면 될 터였다.
문을 재차 확인한 청호가 도끼를 들었다. 날이 뭉툭한 도끼가 탁하게 번뜩였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시윤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듯 들려왔다.
‘죽여 주세요.’
‘저 방랑자들 꼭…… 죽여 주세요, 대장님.’
‘잔인하게 죽여 주셔야 해요.’
그에 제가 답한 말도 상기했다.
‘그래.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
청호가 도낏자루를 꽉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씨발, 그러니까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칼자국과 금발은 분실물 보관 센터였던 곳에 있었다. 여기저기 뜯어진 소파에 앉은 금발이 덜덜 다리를 떨었다. 잡아 온 인간 두 명이 사라졌다. 그냥 사라졌다면 도망갔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강탈했고 몸뚱이뿐인 인간들은 필요 없었다.
행여 그들의 행방을 쫓더라도 그건 그냥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흥거리에 불과했다. 누가 먼저 잡냐는 내기를 해서 승자에게 동물 가죽 같은 걸 주었겠지.
근데 이번엔 달랐다. 엘리베이터 문은 건드리지도 않고 천장으로 탈출했단다. 벨크로 타이는 찢어진 것처럼 끊겨 있고, 천장은 괴물이 손톱으로 뜯어낸 듯 구겨져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면 그럴 수 있었다. 그들이 힘이 아주 세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기나 폭탄으로 탈출했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단 말이다.
근데 애새끼들이 모두 사라졌단다. 빨래터에도 없고, 살림 더미에도 없단다. 하물며 행여 필요할까, 어디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십수 년 동안 모은 살림 더미 수십 톤이 멀끔하게 사라졌단다.
그건 트럭으로 실어 날라도 일주일은 꼬박 걸릴 양이었다. 근데 한두 시간 만에 증발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체로 귀신에 홀린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분명 특수 인간이다. 그것도 볼품없고 하찮은 능력이 아니라,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가진 특수 인간.
지나치게 멀쩡한 차림새에 번지르르한 차를 끌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총도 두려워하지 않고, 위협이나 협박에도 동요하지 않는 걸 보고 알아차려야 했는데.
“아오, 그 새끼들이 특수 인간인 걸 내가 알았냐고!”
“…….”
“그냥, 그냥 씨발 족쳐서 본거지를 알아내면, 거기 있는 음식이나 빼앗을 생각이었다고. 너도 쟤들 음식 신나게 처먹었잖아!”
칼자국이 쿵쿵 짜증스레 발을 굴렀다. 녹슨 나이프로 벽을 박박 긁어 대기도 했다. 뺨이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매우 놀란 것 같았다.
“뭐, 뭐……. 뭐, 그래도 죽긴 하겠지. 총을 존나 갈기면 되지 않겠어?”
칼자국이 금발을 쳐다보며 말을 던지듯 날렸다. 그에 금발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자국은 무리의 대장이지만, 그다지 대장 직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이 지하철역에 가장 처음 자리를 잡은 사람이고, 나이가 많은 남자인 데다가, 천성이 잔인해서 어쩌다 보니 대장이 된 자였다.
계획을 세우고 무리를 이끄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괴물이 나타나도 미끼를 던지고 마구잡이로 총알을 갈기는 게 다였다. 그것도 안 먹힐 땐 동료를 던져 주고 도망치곤 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방랑자들은 그의 단순한 방식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잖아도 엉망진창인 세상이라며 골 아프게 이것저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혐오했다. 먹을 게 있으면 먹고, 먹을 게 없으면 자고, 괴물이 오면 도망치고, 아무 일도 없을 땐 온갖 자극을 찾으며 놀았다.
칼자국은 청호의 총을 들어 올리려 낑낑거렸다. 강한 무기이니만큼 어떻게든 자신이 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걸쭉하게 욕설을 지껄인 칼자국이 이내 포기하고는 자주 쓰는 산탄총을 챙겼다. 굵직한 총알도 주머니에 욱여넣고 또 욱여넣었다. 그의 카고 바지가 불룩하게 커졌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옆에서 워커를 닦고 있던 아이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며,
“야! 총알 가져와. 총알! 많이!”
라고 소리쳤다. 철퍼덕 엎어지며 이마를 찧은 아이가 부르르 몸을 떨다가 꿈틀꿈틀 일어났다. 그러곤 타박타박 맨발로 시멘트 바닥을 달려 사라졌다.
금발이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왜 왔을까?”
“엉?”
“우리를 왜 따라왔을까?”
영 시답잖은 금발의 질문에 칼자국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는데 아까부터 종알거리는 금발이 거슬려 죽을 것 같았다.
“그냥…… 그냥 씨발, 살인에 눈깔이 뒤집혔나 보지.”
“우리를 죽이려고 따라왔다고?”
“그래. 우리 무리는 몸집이 크니까. 죽일 인간들이 득실거리니까. 한두 번 보냐. 인간 사냥 하는 새끼들 널리고 널렸어. 우리도 똑같고.”
“……근데 왜 여태 가만히 있었지?”
“뭐?”
칼자국이 짜증스레 되물었다. 그러자 금발이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으며 말했다.
“아니, 죽이러 왔다며. 그럼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죽였으면 될 거 아냐.”
“우리가 방심할 때를 기다렸겠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금발은 홀로 의문의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그녀를 포기한 칼자국이 아이가 닦다 만 워커에 발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바쁘게 끈을 동여매는데, 금발이 또 질문을 던졌다.
“애들은 왜 데리고 갔을까?”
“그 벌레 같은 것들을 데리고 갔겠냐. 죽였겠지.”
“시체는?”
“우리 살림 더미랑 같이 없앴겠지. 혹시 걔 중 하나가 능력이 먹는 건 거 아냐? 막, 씨발, 막 쓰레기랑 애새끼들이랑 그냥 다 처먹은 거지.”
칼자국이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양손으로 수저질을 하는 듯한 흉내를 냈다. 게걸스럽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금발이 멍하니 상상했다. 인질들이 쓰레기와 다름없는 살림 더미와 아이들을 집어삼키는 걸.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말도 안 되지. 그런 인간들이 차에 쿠키나 와인, 찻잔 따위를 가지고 다닐 리가.
대체 무슨 의도로 따라온 것일까.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와서, 갇혀 주기까지 했나. 그리고 사라진 이후로 지금까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걸까. 여태 뭘 했지? 뭘 했기에 조용하지…….
금발이 손톱으로 소파 팔걸이를 벅벅 세게 긁어 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칼자국이 워커를 신고, 총을 정비하고, 이제는 걸레짝이 된 방탄조끼까지 껴입었을 무렵이었다.
금발이 고개를 삐뚜름히 뒤틀었다.
“……왜 애가 안 와?”
“무슨 애?”
“총알 가지러 간 애.”
“어…… 그러게. 이 새끼는 뭐 하는 거야. 병신같이 총알 처먹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배때기를 갈라 줄 테다! 칼자국이 걸걸한 목소리로 으르댔다. 그러더니 당차게 분실물 센터의 문을 발로 찼다. 그때였다. 쾅! 엄청난 소리가 들리더니 세상이 파르르 흔들렸다.
기겁한 칼자국이 얼른 바깥으로 얼굴을 뺐다. 그리고, 승차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청호와 마주했다.
청호는 쥐새끼처럼 규칙 없이 움직이는 방랑자들 틈을 아무렇지 않게 거닐었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허둥지둥거리는 방랑자들은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가 누구인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따위니 아이들이나 종으로 부리고 있지. 청호가 쯧쯧 혀를 찼다.
방랑자들은 청호와 시윤을 찾아 이곳저곳을 나름대로 열심히 헤집었다. 공공장소 특유의 커다란 쓰레기통을 뒤지고, 선로 아래를 살피고, 의자 밑을 뒤적이고, 계단 아래를 훑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청호가 쥐고 있던 도끼로 전 역과 다음 역의 이름이 쓰여 있던 벽을 쾅 내리찍었다. 타일이 콕콕 박힌 벽이 그대로 으스러지며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모든 방랑자가 어깨를 귓불까지 추켜올렸다. 그러더니 굉음의 출발지를 향해 눈알을 움직였다. 비로소 제게 집중된 시선에 청호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여, 여기 있다!”
“대장! 찾았어!”
방랑자들이 청호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너, 너 이 새끼! 도끼 내놔!”
그중 하나는 호기롭게도, 주춤주춤 게처럼 다가오며 청호를 무장 해제 시키려 했다.
“이거?”
청호가 벽에 박힌 도끼를 우드득 뜯어내듯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순순히 방랑자에게 내밀었다.
“그, 그래! 그거!”
방랑자가 손을 뻗어 도끼를 쥐려 했다. 청호는 친절히도 도끼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묵직한 무게에 방랑자의 팔이 휘청거렸다. 그래도 방랑자는 청호의 손에서 도끼를 앗았다는 것에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샐쭉 입꼬리를 올린 그가 동료들을 향해 도끼를 들어 보였다. 내가 해냈어! 그런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청호의 눈이 설핏 구겨지더니, 별안간 방랑자가 든 도끼가 훅 반 바퀴 돌아 머리부터 하늘로 솟구쳤다. 손잡이를 쥐고 있던 방랑자의 뒤꿈치가 들릴 정도였다.
저절로 움직이는 도끼에 기겁한 방랑자가 막 손을 놓으려 하는 순간, 도끼가 후웅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도끼날이 그대로 방랑자의 팔꿈치 안쪽을 썰었다.
“아아악!”
아니, 썰진 못했다. 이가 드문드문 나간 도끼가 제 쓰임새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끼는 방랑자의 팔꿈치에 깊숙이 박혀 꿈틀거렸다. 청호가 쯧 혀를 차며 사과를 전했다.
“미안해라……. 날이 많이 무디네.”
그러더니 도끼가 다시 머리를 쑥 위로 올렸다. 방랑자의 팔꿈치에 박혀 있던 도끼가 빠지며 피가 촥- 호선을 그리며 튀었다. 방랑자가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경악과 공포가 범람하고 있었다.
괴이한 광경에 뇌가 녹은 듯 멍하니 있던 방랑자들이 한발 늦게 방아쇠를 당겼다.
“죽여!”
“죽여 버려!”
타탕, 타다당! 타다다다다! 온갖 종류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탄피가 바닥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쩔그렁쩔그렁 소리가 소나기처럼 들렸다.
무분별한 총소리는 매우 거칠고 요란했으나 1분이 채 이어지질 못했다. 시큼한 탄약 냄새가 역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내 소음이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말을 잃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수천 개의 총알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청호에게 가다 말고 언 것처럼, 또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분명 청호를 향해 있는데, 더 나아가질 않았다. 결국 그에게 다다른 총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미친, 미친, 뭐 저런 게 있어.”
방랑자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몇 명은 들고 있던 총을 떨어트리기도 했다. 초자연적인 광경에 겁을 집어먹은 본능적인 도피였다. 산기슭에서 맹수를 만난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근육은 시멘트라도 바른 것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청호는 그들의 공포심을 여유롭게 만끽했다. 그러다 슬쩍 검지를 올렸다. 그 검지가 가볍게 원 한 바퀴를 그렸다. 그러자 청호를 향해 있던 총알들이 빙그르르 돌아 방랑자들을 겨눴다. 총알이 꼭 말 잘 듣는 개처럼 보였다. 실로 청호가 짖으라 명령하면 숨기고 있던 이를 드러낼 것 같았다.
그때, 멀찌감치서 상황을 방관하던 칼자국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야! 뭐 해! 다시 쏴!”
그 말에 방랑자들이 허겁지겁 탄창을 갈았다. 등신 같은 짓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수천 개의 총알이 누구를 겨누고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청호는 너그럽게도 그들이 탄창을 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검지가 방아쇠에 걸리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날아갈 자리를 찾아 파르르 경련하던 총알들이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튕겨 나갔다.
목적지는 제각각 달랐다. 방랑자들의 쇄골, 팔뚝, 손목, 손등, 손가락, 정강이, 종아리, 발목, 발등 또는 귓불까지. 한 사람당 적으면 다섯 군데에서 많으면 열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아아악!”
“크악!”
“허억…….”
방랑자들이 볼링공에 맞은 볼링 핀처럼 쓰러졌다. 거무튀튀하던 시멘트 바닥이 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근데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총알이 기가 막히게도 급소는 모두 피해 갔기 때문이다. 얼굴이나 심장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방랑자들은 그래서 괴로웠고, 고통스러웠고, 두려웠다. 청호가 자신들을 쉽게 죽이려 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 있던 총알이 이제 고작 반이 준 것도 그 공포에 한몫했다.
청호가 뚜벅뚜벅 반쯤 시체가 된 방랑자들 사이를 거닐었다. 일단 하나같이 못 쓰는 몸뚱이로 만들어 놓긴 했는데. 이후가 문제다.
청호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인간을 죽인 경험이 없었다. 대부분은 폭주로 일어난 사고였고, 의도적이었다 하더라도 일격에 끝냈지 지금처럼 공포를 조장하며 괴롭힌 적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고민 중이다. 잔인하게 죽여야 하니까. 그들이 지독한 공포를 맛봐야 하니까. 시윤이 그걸 바랐으니까.
얼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할 텐데. 과다 출혈로 죽어 버리면 영 아쉽지 않은가.
청호가 어떻게든 도망쳐 보겠다고 바닥을 기는 방랑자 하나의 발목을 지르밟았다.
“으아아악!”
총알구멍이 난 발목이 부드러운 고깃덩이처럼 뭉개졌다. 그 순간, 번뜩 좋은 생각이 났다. 총알구멍을 아주아주 크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
청호가 지하철역 특유의 납작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총알을 가만히 응시했다. 꼭 숙소 소파에 앉아 에펠 탑을 만들고, 큐브를 가지고 놀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총알의 뒷부분이 터졌다. 화약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더니 끄트머리가 여러 갈래로 길게 조각나며 바깥으로 말렸다. 꼭 문어 모양으로 자른 소시지 같은 모습이었다.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기도 했다.
영, 총알 같지 않았다. 실로 탄약이 없는 탓에 더는 총알로 쓰일 수 없게 됐기도 했고. 그래도 괜찮았다. 총알이나, 총알일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청호는 돌멩이나 유리 조각도 총알의 쓰임새로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총알을 보던 청호가 가까이에 떠 있는 것 하나를 집었다. 손끝에서 빙글빙글 굴려 보다 중지 손톱 위에 올려 두고 엄지로 슬쩍 눌렀다가 튕겼다. 마치 딱밤을 때리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핑- 총알이 세차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것은 저 멀리 있던 드럼통을 꿰뚫었다. 드럼통 안에서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물이 튀기는 것처럼 들썩였다.
드럼통엔 작은 구멍이 났다. 그러나 반대쪽은 축구공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청호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반면 방랑자들은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저런 총알이 몸에 박히면 자신의 몸뚱이에도 축구공만 한 구멍이 날 거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청호는 그들의 비명을 배경 음악 삼아 총알을 하나하나, 천천히 검수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나 그리하고 싶었다. 언제 올지 모를 죽음. 그러나 턱 끝에서 깔짝이는 죽음. 그것만큼 무서울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 없는 에스퍼였던 시절에 제가 그랬으니까.
방랑자 중 반은 악착같이 구석으로 기어갔다. 그러다 철로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의자 밑이나 계단 뒤에 숨기도 했다. 또 반은 청호에게 자비를 빌었다. 살려 달라고. 잘못했다고. 또는 우리에게 왜 이러냐며 원망을 쏟기도 했다.
청호는 그 모든 것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건 방랑자들이 과다 출혈로 죽을 때까지의 시간을 가늠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문득 찢어지는 비명 하나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청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다 죽어 가는 방랑자 중 하나가 지른 소리는 아니었다. 훨씬 앳되고 가녀린 목소리였다.
아이다.
시윤과 함께 있는 아이는 아닐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 지른 소리가 이렇게 또렷이 들릴 리 없었다. 설마 지하 화장실에 숨겨 놓은 아이 중 하나일까.
청호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비명이 들렸던 곳으로 바쁘게 걸어갔다. 아이는 다치면 안 된다. 분명 시윤이 괴로워할 터였다.
다행히 청호는 아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두툼한 덩치의 남자가 아이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심상찮은 상황에 겹겹이 쌓인 천막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남자가 쓰러지면서 그 위를 덮친 모양이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시윤과 함께 있던 아이도 아니었고, 숨겨 놓은 아이도 아니었다.
청호가 한 손으로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아이가 또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아마 빛을 등진 청호의 모습이 악마처럼 보인 게 아닐까, 싶다.
“쉬……. 괜찮아.”
청호가 아이를 향해 조심히 두 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청호는 잠자코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 괜히 얼른 오라고 소리치고 윽박질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렇게 일이 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꿈지럭꿈지럭 몸을 뒤틀더니 청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청호가 어스름히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탕!
총소리가 울렸다. 여태껏 방랑자들이 갈기던 총소리에 비해 훨씬 굵직하고 큰 소리였다. 익숙한 소리이기도 했다. 청호 자신의 총이었으니 당연했다.
청호가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옆구리가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찢긴 옷 너머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살덩이는 움푹 파여서 내장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청호가 다급하게 아이를 쳐다봤다. 행여 몸을 관통한 총알이 아이에게 날아갔을까 봐. 다행히 아이는 멀쩡했다. 총알은 벽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에 피가 온통 튀어 있었다.
청호가 난처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아이는 커다래진 눈으로 청호를, 정확히는 청호의 옆구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호가 쯧 혀를 찼다. 이런 건 봐 봐야 좋을 게 없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청호가 급한 대로 가까이에 있던 천으로 아이를 덮었다. 피를 닦아 주고 싶다만, 일단 처리해야 할 것부터 처리하고.
청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곳엔 칼자국이 사지 멀쩡히 서 있었다. 그의 앞엔 마트 카트가 있었는데, 청호의 총이 실려 있었다. 차마 손으로 들고 쏠 자신이 없으니 카트에 실어 조준한 듯했다. 그것은 오롯이 청호의 옆구리를 관통했고.
청호의 얼굴과, 피로 범벅된 그의 옆구리를 번갈아 보던 칼자국이 누런 이를 한껏 드러내며 웃었다. 이른 승리의 미소였다.
“이 병신 같은 새끼!”
“…….”
“네가 이긴 줄 알았지? 어? 병신!”
칼자국이 오두방정을 떨며 청호를 비웃었다. 청호가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칼자국이 총알 폭격에서도 멀쩡한 건, 청호가 부러 그리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더 공들여 죽일 생각이었는데. 괜히 상처만 하나 달게 됐다.
시윤이 걱정할 텐데. 아니, 이깟 것들과 싸우다 다쳤다고 실망하면 어쩌나.
청호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이를 신경 쓰느라 제게 겨누어진 총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청호가 짜증스레 와이셔츠 밑단을 잡아 뺐다. 그러고는 옷을 훌떡 젖혔다.
흉측한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광경에 칼자국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이제 곧 볼품없이 쓰러질 것이다. 제 발치에 엎어져 차게 식어 갈 청호를 상상하니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울룩불룩하게 파여 있던 상처가 매우 부드럽게, 또 빠르게 아물었기 때문이다. 꼭 물에다 물감 한 방울을 떨어트린 것처럼 미끈한 살결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
칼자국은 이 혼란의 세상에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살아왔다. 근데 저런 건 처음 본다. 상처가 낫는 특수 인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빠를 수가 있나. 아니, 저 특수 인간은 대체 능력이 몇 개란 말인가.
청호가 금세 매끄러워진 제 옆구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다치는 건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이럴 걸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어제 시윤의 가이딩을 지극히 받아 놓은 터라 힘이 넘쳤다. 이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한 발, 한 발 칼자국을 향해 다가갔다. 칼자국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청호는 파랗게 질린 칼자국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해야 시윤이 만족할 만큼 잔인하게 죽일 수 있나 고민했다.
창의적인 편은 아닌지라 영 좋은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다. 일단 시답잖은 버둥거림을 막기 위해 사지 중 하나를 자르기로 했다. 행여 또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아이가 휩쓸리면 안 되니까.
공중에 있던 총알 중 하나를 집은 청호가 칼자국의 정강이를 향해 날렸다.
“흐아아악!”
칼자국의 다리 하나가 그대로 잘렸다. 뒤로 발라당 넘어간 그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널브러진 자신의 발목을 보며 왕왕 소리를 질러 댔다. 그 어떠한 방랑자보다 큰 목소리였다. 혹 목소리가 커서 우두머리인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청호가 칼자국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칼자국이 실핏줄이 잔뜩 올라온 눈으로 악을 내질렀다.
“왜, 왜 이래! 원하는 게 뭐야!”
“…….”
“으, 음식? 줄게. 다 가져가.”
“…….”
“서, 석유도 들고 가든가. 네 차는 저기, 저기 끝으로 가면 있어.”
음식. 석유. 방랑자에게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지 청호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거였다. 포스는 악마 같은 정원이 세운 곳이나 먹을 게 부족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석유도 매립지에서 직접 캐고 있었고.
하지만 청호는 흥미롭다는 듯 흐음,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본 칼자국이 더욱 빠르게 입을 놀려 댔다.
“저기, 저기 분실물 센터, 어? 저기 가면 더 좋은 게 많아. 통조림 같은 거. 그거 너 다 가져.”
“…….”
“그러니까 좀…… 꺼져. 어? 다 들고 가 버리란 말이야!”
칼자국이 어린아이처럼 팔다리를 마구 굴렀다. 한쪽 다리가 없는 주제에 퍽 경박스러운 오두방정이었다.
청호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칼자국의 공포가 정점에 다다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를 보다 멋지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런 고민.
그러다 청호는 일단 그의 무리부터 죽이기로 결심했다. 죽음이 다가오는 걸 두 눈으로 보게 해 주고 싶었다.
청호가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총알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총알들이 반 바퀴 돌아 바닥을 겨눴다. 바닥에는 널브러진 방랑자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들의 사지가 아니라, 머리통을 꿰뚫을 터였다.
그 움직임을 본 방랑자들이 미친 듯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꼭 수프가 끓는 것 같았다. 바글바글, 꿈틀꿈틀.
청호가 막 총알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칼자국이 겁도 없이 청호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헐떡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쟤, 쟤들 다 죽여도 돼.”
“…….”
“나는 살려 줘. 어?”
“…….”
“솔직히 잘못한 거 없잖아. 어? 내가 너희들을 패길 했어, 뭘 했어?”
청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의로울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만, 동료까지 팔아넘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럴싸하게, 마음이 당기게 제안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쟤들은 죽이고 나는 살려 달라니.
이런 놈팡이가 어찌 여태껏 살아남았나,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놈팡이라서 살아남을 수 있던 건가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청호가 짜증스레 칼자국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귀에 꽈아악 힘을 줬다.
그 순간, 미묘한 진동이 역내를 흔들었다. 청호의 능력은 아니었다. 독특한 진동에 방랑자들도, 칼자국도 눈을 부릅떴다. 청호만으로도 벅찬데 혹 클롭스가 나타난 건 아닌가, 또는 청호와 같은 특수 인간이 더 있는 건 아닌가 두려움에 떠는 듯한 모양새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묵직한 소음이 들려왔다. 역 특유의 두꺼운 벽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올 만큼 큰 소음이었다.
투투투, 투투투투.
그 소리를 들은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칼자국의 손목을 놨다. 프로펠러 소리였다. 에로아스가 도착한 모양이다.
프로펠러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땅의 울림 역시 강해졌다. 그쯤 되자 방랑자들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몸을 꿈틀거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몇몇은 청호에게 얼른 죽여 달라 빌기도 했다.
영 이상한 모습이었다. 천둥소리도 아니고 고작 프로펠러 소리에.
하긴. 살아생전 프로펠러가 움직이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 했을 테니 두려울 만도 했다.
곧 천장 위로 묵직한 폭격음이 들렸다. 평소라면 출입구를 먼저 파악하고 몰래 들어왔을 텐데. 냅다 미사일부터 날린 걸 보아하니 마음이 급한 듯했다.
오래된 역내 벽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큼지막한 돌무더기와 자욱한 먼지가 날리더니, 이내 쨍한 빛이 드리웠다. 햇볕은 아니었고, 군용기에서 쏘는 헤드라이트였다. 옷이 퍼덕거리고 몸이 좌우로 흔들릴 만큼 거센 바람도 몰아쳤다.
덕분에 온갖 악취로 쿰쿰하던 공간이 한결 화창해졌다. 청호가 갑갑한 폐부를 정화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하에 고작 반나절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갑갑함을 느꼈었나 보다.
눈 부신 빛 너머로 로프 몇 개가 내려왔다. 익숙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로프를 쥐고 빠르게 낙하했다. 마음 급한 몇몇 병사는 낮은 고도용의 작은 낙하산을 메고 그냥 뛰어내리기도 했다.
하강한 병사들 반은 총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총구를 바짝 추켜올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또 반은 청호에게로 모여들었다.
“대장님!”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대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채 준위님이랑 놀러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청호가 귀찮은 답은 생략하겠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청호를 바라보는 병사들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 두 개가 청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윤의 형인 시훈과 시준이었다.
두 사람은 피부가 시윤처럼 희멀건데, 오늘은 유독 더 창백했다. SOS 사인을 보낸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며 여기까지 함께 온 듯했다.
“채 준위는 어디 있습니까?”
시준이 물었다.
“저기. 열차 다섯 번째 칸.”
청호가 열차를 가리켰다.
“무사합니까?”
이번엔 시훈이 물었다. 청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두 사람은 얼른 열차를 향해 뛰어갔다. 청호가 병사 몇 명에게 그들을 따라가라 명령했다. 아이들이 많으니 손이 필요할 터였다.
에로아스는 노련한 부대답게 시키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움직였다. 이미 반 시체인 방랑자들의 무장 여부를 확인하고 행여 위협이 되진 않을지 판단했다.
그동안 청호는 넋 빠진 얼굴로 누워 있는 칼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자국은 당황보다는 환희에 가까운 표정으로 에로아스를 쳐다봤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에, 번쩍이는 총에, 멀끔한 옷차림에. 아마 그들이 천국에서 내려오는 천사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역내를 대충 한 바퀴 돈 딜런과 알렌이 청호에게 다가왔다. 고작 사흘 떨어져 있었는데, 며칠 못 봤다고 반가운 듯했다. 딜런이 바쁘게 입술을 달싹였다.
“채 준위가 SOS 사인을 보냈다기에 대장님이랑 떨어진 줄 알았지 뭡니까?”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오면서도 긴가민가했습니다. 대장님이랑 채 준위가 떨어질 리가 없는데. 근데 또 대장님이 SOS 사인을 치실 리는 더더욱 없고, 채 준위도 이제 웬만한 일에는 위험하지도 않고……. 잘못 눌렀나, 싶었는데 메시지도 답을 안 하시고……. 근데 용케 GPS는 움직이고…….”
“저희는 어디서 핵 발전소 같은 게 터진 줄 알았지 말입니다. 고위 클롭스들이 득실거리는 줄 알았습니다.”
“딜런 대위님 쫄아서 군용기에서 오줌을 다섯 번이나 쌌지 말입니다. 대장님이 통신이 안 될 정도면 엄청난 클롭스일 거라고.”
“닥쳐, 인마. 솔직히 대장님이랑 십수 년 같이 구르면서 SOS 사인은 처음 봤으니까 지릴 만도 하지 않냐? 아, 아무튼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늘 한결같은 두 사람에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리 오라 가볍게 손짓했다. 딜런과 알렌이 청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청호가 나직이 말했다.
“애들이 있어.”
“애들이요?”
“어. 지하 화장실에. 거기 말고도 여기저기 숨어 있을 거야.”
“몇 명입니까? 다섯 명? 여섯 명?”
“시윤이랑 같이 있는 애들까지 하면 한…… 서른 명쯤.”
청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 말에 딜런과 알렌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청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방랑자들이 왜 저 꼴로 누워 있는지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구조하겠습니다.”
“의무병 데리고 가. 물도 넉넉히 챙겨 가고.”
“예.”
알렌과 딜런이 병사들 몇 명을 이끌고 계단 아래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후엔 폴이 다가왔다. 그가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랑자들을 훑으며 물었다. 개중 몇 명은 이미 영혼이 이곳에 없는 것 같았다.
“방랑자들은 어찌합니까? 꼴을 보아하니…… 대장님이 그러신 것 같은데…….”
“글쎄. 아직 모르겠어.”
“포스로 데려갈 놈들이 아닌 거지요?”
“왜? 데리고 갈까?”
“그럴 생각 없으신 거 알지 말입니다. 총알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만 봐도 뭐…….”
폴이 아직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총알 하나를 집었다. 뒤가 뚱뚱하게 말려 있는 것으로 보아, 청호는 이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었나 보다. 평소였다면 정확히 미간을 조준했을 텐데 애꿎은 팔다리에 죄 구멍을 내 놓은 것만 봐도 그랬다.
이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청호가 이리 화가 났나. 혹 시윤에게 해를 가하기라도 한 걸까.
폴이 청호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심하는데, 누군가가 군화를 쥐어뜯듯 당겨 왔다. 폴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칼자국이 애절한 낯으로 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희들…… 어디서 왔어? 여기서 멀어? 거기는 어때? 먹을 게 많아? 괴물은 없고?”
“…….”
“나도, 나도 데리고 가 줘!”
“…….”
“제발. 제발…… 데리고 가라. 시키는 건 다 할게. 어? 뭐든 할게. 뭐든…….”
퍽 불쌍한 모습이었다. 폴이 청호를 쳐다봤다. 어찌하면 좋겠냐는 무음의 질문이었다. 청호가 대답 대신 폴의 손에 들려 있던 총알을 거둬 갔다. 그 행동에서 뜻을 읽은 폴이 발을 털어 칼자국을 떼어 냈다.
그러나 칼자국은 질기게 들러붙었다. 청호가 그런 칼자국의 미간을 향해 총알을 겨눴을 때였다.
하얀 손 하나가 청호의 손목을 감싸 왔다. 부드러운 손바닥, 따뜻한 체온, 그리고 은은하게 밀려오는 가이딩 효과. 닿는 그 순간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있었다.
시윤이었다.
입가로 곧장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한 청호가 시윤을 돌아봤다.
“시윤아.”
“대장님.”
“왜 이리로 왔어.”
청호가 슬쩍 시윤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아무래도 그가 보기엔 영 마뜩잖은 것들이라. 비록 시윤이 잔인하게 죽여 달라 하긴 했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굳이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그때 문득, 시윤의 미간이 구겨졌다. 피에 젖은 청호의 와이셔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셔츠 밑단을 살살 문질렀다.
“다치셨어요?”
“아니. 다쳤었어. 지금은 괜찮아.”
청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보란 듯이 셔츠를 들쳐 보였다. 핏자국이 남긴 했지만, 상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시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누가 그랬어요?”
시윤이 서늘한 얼굴로 물었다. 제법 음산한 표정이었는데, 어째선지 청호는 비죽 웃음이 올라왔다. 뭐랄까, ‘쟤가 나 괴롭혔어, 혼내 줘’ 따위의 유치한 말을 할 사람이 생긴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청호가 턱짓으로 칼자국을 가리켰다. 그러자 시윤의 낯이 더욱 차게 식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칼자국이 멀쩡한 다리 하나로 꾸역꾸역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 실수였어. 오발, 어? 오발. 그런 거였다고. 씨발, 어차피 죽지도 않았잖아. 한 번만 봐줘라. 어?”
그 말에 시윤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그가 칼자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청호에게 말했다.
“열차 안에서요.”
“응.”
“애들을 살피는데요.”
“응.”
“팔이든 다리든 뼈가 안 부러진 애들이 하나도 없었어요.”
“…….”
“몇 명은 뼈가 부러졌다가 아무렇게나 붙어 버려서 앞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예요.”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열차를 흘깃 바라봤다. 시훈과 시준을 비롯한 병사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아이들을 꺼내고 있었다. 의무병들은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물을 먹이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항생제를 비롯한 약물을 주사하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아이도 있었고, 멍하니 있는 아이도 있었고, 지금까지의 서러움을 알리듯 엉엉 우는 아이도 있었다. 기분이 꿉꿉해지는 광경이었다.
청호가 내가 처리하겠다며 시윤을 뒤로 물리려 할 때였다. 시윤이 별안간 칼자국의 머리채를 쥐고 휙 뒤로 꺾었다.
“왜, 왜 이래!”
칼자국이 시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시윤은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머니에서 수류탄 하나를 꺼내 그것을 칼자국의 입 안에다가 욱여넣었다.
“어억…….”
기겁한 칼자국이 손으로 수류탄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굳은 것 같았다. 딱딱한 시멘트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청호의 능력이었다.
시윤이 칼자국의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칼자국이 눈을 부릅떴다. 눈알 위로 거미줄처럼 올라온 실핏줄이 불룩불룩 요동치는 게 또렷이 보였다. 막힌 입술 사이로 질척한 침과 함께 억눌린 비명이 올라왔다.
시윤이 그런 칼자국을 위로하는 것처럼 양손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감쌌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에 칼자국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수류탄을 입에 처넣어 놓고 머리를 감싸니 그럴 만도 했다.
폭발이 일어나면 제 머리통은 물론 머리를 감싼 손까지 날아갈 게 분명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시윤의 팔과 얼굴까지 폭발의 피해를 볼 터였다.
칼자국이 혹 겁만 주고 말 생각인가, 하고 희망을 품었다. 그 순간, 시윤이 무릎으로 칼자국의 아래턱을 퍼억 쳐올렸다. 작지 않은 충격에 수류탄이 그대로 폭발했다.
칼자국이 느낀 건 시윤의 타격으로 입천장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후끈한 열감이 다였다.
시뻘건 화염이 칼자국의 머리통을 사방으로 뚫고 나왔다. 그 순간, 시윤의 눈동자에 연두색이 연기처럼 일렁거렸다.
아주 찰나, 칼자국의 괴이하게 뒤틀린 얼굴과 화염이 일시 정지라도 한 것처럼 멈췄다. 그 후 모든 게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시윤의 손바닥이 그 가루를 빠르게 삼켜 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칼자국은 머리 없는 시체가 되었다. 흉한 몸뚱이가 철퍼덕 바닥으로 엎어졌다.
사위가 고요했다. 신음을 흘리던 방랑자들도, 에로아스 병사들도 말을 잃고 시윤을 응시했다. 그들의 안면에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신기함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오로지 청호만 어스름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가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윤이는 참…….”
“달라졌네요.”
폴이 멋대로 뒷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피 보는 것도 싫어했었는데. 사이먼이 죽은 걸 보고 파랗게 질렸었지 않습니까. 장벽 전투 때도 그랬…….”
“똑똑해.”
“네?”
뜬금없는 말에 폴이 눈썹을 들썩였다. 청호는 칼자국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시윤의 옆모습을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몸이 간지럽다. 시윤을 한껏 껴안고 싶었다.
“너 사람 저렇게 창의적으로 죽이는 거 본 적 있냐.”
수류탄인데 피도 안 튀기고, 총이나 칼도 안 쓰고, 시끄럽지도 않고. 청호가 다시 되뇌어도 놀랍다는 듯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폴의 얼굴만 괴이하게 구겨졌다.
“……예?”
“우리 시윤이…… 살인은 이번이 처음일 텐데 어떻게 저렇지.”
청호가 뒤꿈치를 슬쩍 들었다가 바닥으로 꾹 내리눌렀다. 꼭 자식의 백 점짜리 성적표를 본 부모 같은 표정이었다. 그만큼 시윤이 자랑스럽고 기특한 듯했다.
폴이 떨떠름한 낯으로 물러났다. 청호는 시윤과 관련된 것이라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예민하다. 수년 동안 지켜봐 온 결과 이해하려고 한들 이해할 수 없는 분야였다. 그냥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한참 칼자국의 시체를 쳐다보던 시윤이 다른 방랑자들을 쳐다봤다. 그들 역시 가만히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청호가 뒤에서 시윤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저렇게 잡다한 것들의 숨까지 시윤이 직접 거두게 할 생각일랑 없었다.
“시윤아. 돌아가자.”
“하지만…….”
“애들 치료해야지. 여기서는 한계가 있어. 돌아가서 정밀 검사도 받아야 할 거고.”
그 말에 시윤이 뒤돌아 청호를 바라봤다. 맞는 말이다. 여기서 포스로 돌아가는 데에 또 반나절이다.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아이들도 허다하니 얼른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그래도 이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은데. 저들이 아주 고약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혼란한 시윤의 마음을 알았을까. 청호가 그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그를 달랬다.
“모건이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대. 가서 애들 입원시키고, 우리도 좀 쉬어야지. 응?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청호가 보란 듯이 공중에 매달려 있던 총알들을 떨어트렸다. 이미 반쯤 죽었고, 그냥 둬도 알아서 죽을 이들이다. 굳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허망하게 죽어 가는 것도 그 나름대로 벌이 되리라.
“……네.”
청호의 지극한 타이름에 시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기특하다는 듯 그의 등줄기를 살살 쓸어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몇 발 뒤로 물러나 있는 폴에게 눈짓했다.
그에 눈치 좋은 폴이 병사들에게 복귀 명령을 전달했다. 병사들은 구출한 아이들을 조심히 군용기로 올려 보냈다. 발에 거치적거리는 방랑자들을 짜증스레 차기도 했다.
청호와 손을 잡은 시윤이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방랑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청호에게 손목이 잡혔던 뻐드렁니와 시계를 빼앗아 갔던 어려 보이는 청년까지. 칼자국은 발치에 있었고.
근데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제가 이 방랑자들을 얼마나 오래 봐 왔다고 얼굴까지 외웠겠느냐마는. 분명 찝찝했다.
그러다 번뜩 잊고 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금발. 칼자국의 옆에 있던 무리의 이인자. 지프에서 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대장님. 그 사람 없어요.”
“응?”
“금발 방랑자요. 지프에서 우리 맞은편에 있던 사람.”
시윤의 말에 청호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시체가 없으니 살아 있단 말인데. 어디 숨어 있다 해도 이쯤이면 병사들의 탐색에 걸려 와야 하거늘.
어디 있나. 어디로 도망갔나. 혹 아이들 몇을 빼돌리기라도 했을까.
청호와 시윤의 낯이 시시각각 굳어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청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청호가 고개를 내렸다. 지하 화장실에 숨겨 두었던 여자아이가 담요를 두른 채 서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시윤이 냉큼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그러자 아이가 문득 먼 철도를 가리켰다. 열차가 없는 반대편 철도였다.
“저기로 가는 거 봤는데.”
“……어?”
“그 사람. 오빠가 찾는 사람. 저기로 갔어.”
시윤의 눈동자가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다. 청호 역시 그곳을 바라봤다. 철길 끝이 어둠에 가려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다녀올게.”
청호가 시윤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시윤이 다시 잡았다.
“아니요, 같이 가요.”
철길에는 자동차들이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장작이 든 드럼통이 여기저기 가로등 대신 놓여 있긴 했는데, 불씨가 작아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청호가 길게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끝에서 퍼져 나간 불똥이 드럼통을 다시 활활 태웠다. 사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청호와 시윤은 천천히 자동차 사이를 걸었다. 자동차는 제법 많았는데, 안쪽에 있는 건 대부분 고장 나서 사용하지 않은 지 한참 되어 보였고, 멀리 있는 게 실제로 타고 다니는 것인 듯했다.
눈에 익은 것도 보였다. 청호와 시윤이 가장 처음 방랑자들을 맞닥트렸을 때 그들이 타고 있던 거였다.
시윤이 차내를 살폈다. 그러나 어느 것에도 금발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청호가 잡고 있던 시윤의 손에 꾹 힘을 실어 왔다. 시윤이 휙 청호를 쳐다봤다. 청호가 어둠 속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윤이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자욱하진 않았고, 뭐랄까. 그래. 담배 연기 같았다. 그리고 연기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청호의 지프였다.
청호와 시윤은 다른 차들을 지나쳐 곧장 지프로 향했다. 그곳에서 금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차 문을 반쯤 열고 운전석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그녀를.
시윤이 헛숨을 들이켰다. 당연히 도망갔거나, 아니면 웬만해선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이 당당한 작태는 무엇인가.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도 나질 않았다.
금발은 청호와 시윤을 보고도 놀란 기색일랑 없었다. 꼭 그들이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금발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휙 빠져나오더니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그러자 금발이 비로소 청호와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차에서 내리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뗐다. 그러나 금발이 선수를 쳤다.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온 게 애들 때문이었구나?”
“뭐라고요?”
“아무리 봐도 인간 사냥 할 종자처럼은 안 보이는데. 왜 여기까지 따라왔나,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 근데 애들 구하러 왔다니.”
“…….”
“와- 진짜 상상도 못 한 이유다.”
금발이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비아냥인지 순수한 감탄인지 분간이 안 됐다.
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발이 이상하다. 시답잖은 대화는 이 순간과 영 어울리지 않았다. 당연히 살려 달라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지 않나. 그리고 차가 있으면서도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체념인가? 아닐 텐데. 그럴 리 없는데.
시윤이 학교에서 배웠던 바에 의하면, 또 지금까지 구한 방랑자들을 보면 그들은 목숨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다. 물론, 그러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방랑자들은 그게 심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살아온 모든 시간이 위협이었으니 당연했다.
근데 금발은 어찌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일까. 여태 이 무리에서 꿋꿋이 살아온 것만 봐도 쉽게 죽을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시윤이 꼭 잡아 쥔 청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데, 금발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애들을 구해서 너희들이 얻는 게 뭔데?”
“그런 건 생각 안 해 봤는데요. 그냥…… 같은 사람이니까. 어린아이들이니까. 당연한 거니까.”
그 말에 금발이 잠깐 숨을 멈췄다. 그러다 바람이 많이 섞인 웃음을 토해 냈다.
“……좋은 곳에서 살았구나, 넌.”
그녀가 고급스러운 운전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사람이니까.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그따위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금발이 손등으로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곤 뾰족한 눈으로 시윤을 노려봤다. 질투가 났다. 그런 말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시윤이 얄미웠다. 대체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았길래. 무슨 운을 어떻게 타고났길래. 좋은 곳에서 살다 못해 특수 인간이기까지 할까, 싶었다.
“이 등신 같은 세상은 괴물보다 사람이 더 위험해. 그렇게 착하게 살면 딱 뒤통수 맞기 좋다고.”
“그게 애들을 괴롭힐 이유는 안 되지.”
청호가 코웃음을 쳤다.
방랑자도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있냐에 따라 성격이 매우 다르다. 깊은 동굴 속에서 원시인처럼 생활하는 곳도 있고, 샤머니즘 등의 종교에 목숨을 걸거나 하다못해 클롭스를 찬양하는 곳도 있고, 이곳처럼 인간이 인간을 강탈하는 곳도 있다.
청호는 대체로 그 모든 방랑자를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 그렇게 살아야만 살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죽이고, 때리고, 괴롭히고, 착취하는 건 생존 그 어느 부분과도 연관 지을 수 없었다.
“…….”
청호의 말에 금발이 꾹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었으나, 긍정이었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궁금한 게 아주 많은 듯했다.
“원래 아이들만 구해?”
“아니요. 방랑자라면 누구든, 그러니까 위험한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구해요.”
“많이 구했어?”
“네.”
“다 같이 살고?”
“네.”
“저렇게 간지 나는 군인들이 지키는 곳에서?”
“네.”
시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긍정을 거듭했다. 포스는 비록 몇 년 전 원수들의 모략으로 잠깐 혼돈이 있긴 했지만, 요즘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또 평화로웠다. 클롭스는 줄고,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미래를 준비했다.
시윤은 포스가, 그리고 국민이, 또 그들을 지키는 군인들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당당한 시윤의 표정에 금발이 쌉싸름한 미소를 지었다.
“멋지네.”
“…….”
“여기도 좀…… 일찍 와 주지 그랬어.”
그 말에 시윤의 속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순간, 그녀가 왜 도망가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박탈감이었다. 치졸하지 않은 질투이기도 하고, 광활한 허탈함과 허무함이기도 했다.
그녀는 청호와 시윤을 마주하는 바람에, 프로펠러가 세차게 돌아가는 군용기와 번지르르한 차림새의 병사들을 마주하는 바람에, 항생제 하나가 없어 감염으로 죽는 사람들이 허다하거늘 가방 가득 약을 들고 다니는 의무병을 마주하는 바람에,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한 거였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날 죽일 거야?”
금발이 물었다.
“아마도요.”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금발이 쑥 권총을 들이밀었다. 청호가 흠칫, 했으나 그녀를 제압하진 않았다. 그녀가 총구를 쥐고, 손잡이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자.”
시윤이 무심코 그것을 받으려는데, 청호가 대신 잡아챘다. 그러고는 철컥 장전해 바로 금발을 겨눴다. 금발이 운전석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나도 살기 위해 방관할 수밖에 없었어.”
나직이 흘러온 말에 청호가 코웃음을 쳤다. 그에 금발이 그를 따라 조소했다.
“변명 맞아. 이해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고. 여태 해 온 방관을 그렇게 후회하지도 않지.”
“…….”
“음식도 훔쳐 봤고, 살인도 해 봤어. 근데 그것도 후회 안 해.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진즉 죽었을 거거든.”
감흥 없는 고해였다. 떨리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근데 시윤은 어째서인지, 그게 매우 크게 다가왔다.
금발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청호가 슬쩍 시윤과 눈을 맞췄다. 평소였다면 곧장 쏴 버렸을 테지만, 어쩐지 시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윤이 조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청호가 총을 한 바퀴 빙 돌리며 아래로 내렸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윤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그에 금발이 눈을 번쩍 떴다.
“뭐?”
금발은 갑작스러운 이해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시윤을 쳐다보는데, 시윤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꺼냈다. 몇 분 전, 병사 하나가 방랑자 소지품에서 찾았다며 준 거였다.
시윤이 시계의 잠금을 해제하고, 여타 군과 관련한 기능을 삭제하고, 지도만 덩그러니 띄웠다. 붉은 점이 일정하게 깜빡이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포스였다.
“이곳을 찾아오세요. 우리가 사는 곳이에요.”
“시윤아.”
전혀 예상치 못한 흐름에 청호가 눈썹을 구겼다. 그러자 시윤이 슬쩍 청호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청호의 눈매가 대번에 유순해졌다.
시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 이 지프에 다른 사람들을 가득 채워 오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나쁜 사람들은 안 돼요. 좋은 사람들만. 아이도 괜찮고, 노인도 괜찮아요. 누구든, ‘사람’인 사람들만.”
“……그럼 나도 너희들이 사는 곳에서 살 수 있어?”
금발의 물음에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에 시계를 들려 주었다.
선택은 그녀의 몫이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어차피 홀몸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그녀의 무리가 모두 죽은 지금, 그녀는 청호와 시윤이 당장 죽이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일로 죽거나 또는 자살할 확률이 높았다.
시윤은 그저 선택지를 하나 늘려 줬을 뿐이다.
물끄러미 시계를 보는 금발에 시윤이 뒤를 돌았다. 청호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못 올 거야. 차로 오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릴지도 몰라.”
청호가 말했다.
“그렇겠죠. 힘들 거예요.”
클롭스도 있을 거고, 나쁜 사람도 있을 거고. 시윤이 턱을 주억였다. 그리고 으음…… 목으로 신음하는데 문득, 자동차 바퀴 아래에 반짝이는 물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청호가 만들어 준 금 에펠 탑이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방랑자들이 지프에서 물건을 꺼내다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시윤이 얼른 그것을 주워 들었다. 딱딱하고, 차갑고, 또 날카로운 에펠 탑이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시윤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청호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청호가 오묘한 시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시윤이 그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잠시 침묵하던 청호가 그를 따라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가느다란 목선에 슬쩍 입술을 비볐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두 사람은 바짝 붙어서서 철길을 걸어갔다. 군용기의 쨍한 헤드라이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