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26)

외전. 소풍

시윤이 집에 들어섰을 때, 온 집 안에 버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형들과 선화가 또 대차게 오븐을 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엌에는 시준과 시훈 그리고 선화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일랜드 식탁과 다이닝 룸 식탁에 식힘망이 가득했다. 그 식힘망 위에는 아기자기한 모양의 쿠키가 잔뜩이었고.

진저맨 모양, 하트 모양, 체스판 모양, 곰돌이 모양 등등. 아이싱 토핑도 다양했다. 초콜릿에 화이트초콜릿도 있고, 캐러멜도 있었다.

부엌에 들어선 시윤이 캐러멜 시럽이 올라간 쿠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게 다 뭐예요?”

“어, 시윤이 왔니?”

선화가 장갑 낀 손을 한껏 옆으로 벌리며 시윤을 반겼다. 시윤이 그녀의 품에 안겨 그녀의 냄새를 흐으읍 크게 들이마셨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냄새에 몸이 저절로 나른하게 풀렸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는 짤주머니를 든 시훈과 시준이 씨익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무슨 쿠키를 이렇게 많이 만들어요?”

“아아, 애들 가져다주려고. 주말인데 학교에서 글공부한대. 출출할 거야. 샌드위치도 쌌는데 모자라진 않을까 걱정이다.”

“아…….”

지하철역에서 구해 온 아이들이 포스에 온 지 근 3주가 지났다. 몇몇은 아직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으나 다행히 대부분은 퇴원해서 학교에 입학했다.

더할 나위 없는 해피 엔딩이긴 하다만, 돌봐 줄 이들이 부족해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다. 선화와 형들은 그런 아이들이 눈에 밟혀 샌드위치나 간식 따위를 자주 만들어 갔다. 물론, 시윤도 작전이 없을 땐 함께 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작전이 없긴 하다만, 그래도 함께는 못 갈 듯싶었다. 집에 온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시윤이 냄비에 물을 올리고, 부엌에 딸린 작은 창고에서 큼지막한 라탄 바구니를 찾아왔다. 그 모습에 선화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오늘 소풍 간다고?”

“네. 도시락 싸러 왔어요. 아니, 사실 싼다는 건 거짓말이고 음식 훔치러 왔어요.”

시윤이 비싯 웃으며 냉장고에서 선화가 만들어 둔 수프를 꺼냈다.

오늘은 청호와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다. 청호의 오전 군 간부 회의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동안 시윤은 소풍 가서 먹을 도시락을 싸기 위해 집에 들렀고.

시윤은 바지런히 집 냉장고를 털었다. 크림수프를 데워 보온병에 담고, 보드라운 식빵과 햄, 베이글과 잼도 챙겼다. 과일은 물론, 청호가 좋아하는 티도 잊지 않았다.

시윤이 제법 묵직해진 바구니를 보며 뿌듯해하는데, 선화가 오븐에서 큼지막한 파이 한 판을 꺼내 왔다. 호두 파이였다. 손으로 파이를 매만지며 온도를 가늠하던 그녀가 그것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애들이 먹기엔 너무 어른 입맛 아니에요?”

조금 더 부드럽고 단 게 좋을 텐데. 시윤의 의문에 선화가 응? 하고 반문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애들 거 아니야. 청호 거야.”

“……대장님요?”

“응. 청호 호두 파이 좋아해.”

그 말에 시윤의 속눈썹이 위로 바짝 올라갔다. 청호가 호두 파이를 좋아한다고?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시윤의 콧잔등이 살풋 찌푸려졌다.

“대장님이요? 어…… 디저트류는 안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야. 청호 파이 좋아해. 홍차나 커피랑 같이 먹는 거. 한 번 먹을 때 파이 한 판을 다 먹던데?”

“…….”

“단 파이 말고, 호두나 시나몬 파이 같은 거 있잖니. 무화과도 잘 먹었던 것 같아.”

“…….”

“저번에 둘이 집에서 자고 네가 늦게 일어났던 날. 그날도 아침에 구운 파이를 몇 분 만에 다 먹어 치웠다니까. 아무래도 부대 안에서는 이런 걸 잘 못 먹으니까 그러나, 싶었는데. 그 후로도 파이 종류는 내놓을 때마다 잘 먹더라고.”

선화가 종알종알 말했다. 시윤의 머리 위로 작은 벼락이 쳤다. 청호가 파이를 좋아했다니. 근데 전 그걸 몰랐다니.

“……왜 몰랐지?”

시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에 선화가 턱을 안으로 당기며 시윤을 쳐다봤다.

“네가 언제 청호 먹는 걸 챙겼다고. 청호가 너 먹는 걸 챙기지. 그리고 청호도 자기가 파이 좋아하는 거 모를걸?”

“아…….”

시윤이 바보 같은 탄성을 흘렸다. 그쯤, 선화는 파이 포장을 끝냈다. 그러고는 촉촉한 에그타르트도 몇 개 챙겼다.

“파이는 청호 주고, 너는 이거 먹어.”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바구니를 훑어보며 시윤이 못다 챙긴 찻잔이나 포크와 티스푼 따위를 함께 넣어 주었다.

그것을 보던 시윤은 시훈이 막 아이싱을 끝낸 초코 쿠키 몇 개를 슬쩍했다. 시훈이 눈을 새치름히 떴다. 시윤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자 시훈이 별다른 말 없이 쿠키를 종류별로 몇 개 더 챙겨 주었다.

* * *

청호와 시윤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매트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막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은 소풍이라는 단어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날씨였다. 화창한 하늘에, 쨍한 햇볕에, 싱그러운 푸른빛을 한껏 머금은 숲에.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티와 함께 디저트를 즐겼다. 청호는 책을 읽었고, 시윤은 그의 품에 안겨 나른하게 흘러가는 계절을 만끽했다. 오물오물 쿠키를 씹기도 했다. 그러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구름이 지루해져 청호를 바라보면, 청호가 입술이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해 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여유를 만끽하는데, 청호가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 누운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입을 뗐다.

“다음 주에.”

“네.”

“E 구역으로 출정 나갈 거야.”

“그래요?”

시윤이 별다른 놀라움 없이 대꾸했다. 예전이었으면 목적지 주위에 뭐가 있을까, 이번엔 어디로 ‘놀러’ 갈까, 하며 신났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분간은 ‘놀러’ 나가는 걸 조금 자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둘만 돌아다니는 걸 영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많아서. 뭐, 이렇게 포스 바깥에 있는 산으로 소풍을 나온 것도 크게 다르진 않았으나 어쨌든 먼 거리는 아니었으니까. SOS를 보내면 헬기로 삼사십 분 만에 도착할 거리이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E 구역도 그리 먼 곳은 아니다. 고위 클롭스가 있을 만한 곳도 아니고.

시윤이 슬쩍 고개를 올려 청호와 시선을 맞췄다.

“거긴 왜요? 클롭스가 나타났답니까?”

“아니. 물품 조달.”

“……그걸 에로아스가 합니까?”

시윤의 뽀얀 광대 위로 의문이 두둥실 올라왔다.

물품 조달은 말 그대로 물품 조달이다. 바깥에 있는 물건을 포스로 배달하는 것. 배달 물건은 각양각색이었다. 옛날 공장의 기계, 예를 들면 총 만드는 기계나 의료 기기, 또 농업에 쓰이는 기계 같은 것일 때도 있고, 또는 석유나 천연가스, 대리석 같은 것일 때도 있었다. 가끔은 젖소나 닭, 돼지 같은 가축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위험한 일도 아닌지라 보통은 C급 에스퍼들이 도맡았다. 즉, 굳이 에로아스가 할 필요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방랑자를 구하러 가지.

생각이 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시윤에 청호가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광대를 매만졌다.

“목적지가 도서관이래.”

“네?”

“꽤 유명했던 도서관이라 보존이 잘되어 있나 봐. 건질 게 많을 거라고 갔다 오라더군.”

“…….”

“이것저것 모아다가 포스 내에 도서관을 크게 지을 계획이래. 애들이 많아졌으니까. 읽기 쉬운 것부터 가져오라던데.”

왜 그런 거 있잖아. 요정들이 지팡이 휘두르고. 공룡이나 좀비 나오고. 공주님이랑 왕자님 나오고, 주인공이 악당 때려죽이는 그런 거.

청호의 설명에 시윤의 턱이 빠끔 벌어졌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말했다.

“도서관 주위에 미술관이랑 박물관도 있대. 거기 수장고에도 네가 좋아할 게 많지 않을까, 싶은데.”

“…….”

“갈레타 부대가 가겠다는 거 내가 가겠다고 했어.”

청호가 칭찬해 달라는 듯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시윤이 버릇처럼 청호의 귓바퀴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은 가시질 않았다.

“어…… 그럼, 놀러 가는 건 아닌데, 놀 수 있는 작전인 거네요.”

“그렇지. 느긋하게 다녀오자.”

가만히 청호의 말을 곱씹던 시윤이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너무 좋아요!”

꼭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시윤에 청호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웃었다. 대체 왜 물품 조달 같은 걸 하려 하냐고 폴이 툴툴거리는 걸 무시했는데. 역시나 잘한 일이었다.

청호와 시윤은 한동안 서로를 꽉 껴안고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설렘을 표현하던 시윤이 상기된 낯으로 물었다.

“대장님은 도서관 가 보셨어요?”

“응. 두어 번. 벽도 두껍고, 다 같이 모여 잘 수 있을 만큼 공간도 크고, 먹을 게 없으니까 클롭스는 없고, 베이스캠프로 쓰기 좋거든.”

“와, 두 번이나요?”

“근데 그땐 책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크게 기억에 남진 않았어. 딜런이 책으로 침대를 만들어 잤던 건 기억해.”

“책이 그만큼 많아요? 침대를 만들 만큼?”

“그럼. 내 숙소에 있는 양의 수백 배는 될걸. 아주 넓고 큰 공간이 온통 책이야.”

“…….”

“간간이 그림도 걸려 있고, 조각상 같은 것도 있던 것 같아.”

시윤이 도무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일 당장 출정 날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라도 할 기세였다. 책과 예술이 넘실거리는 공간을 상상하던 시윤이 청호의 목덜미에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포스 안에 도서관이 생기다니……. 나중에는 또 뭐가 생길까요?”

“글쎄. 뭐가 됐든 네가 바라는 건 다 지으라고 협박할게.”

청호가 시윤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진심 80프로에 장난 20프로가 섞인 말이었다. 평소의 시윤이라면 장난으로 넘겨듣고 웃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째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더니 슬쩍 말을 던졌다.

“영화관이요.”

“그래.”

“놀이동산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청호는 로봇처럼 긍정을 반복했다. 뭐든 못 만들 게 뭔가. 클롭스가 줄고 또 줄어 가다 멸종하면 싸울 적이 없다. 그럼 힘 넘치는 에스퍼들을 모아 놀이동산이나 하나 짓지 뭐, 싶었다. 하물며 시윤이 바다를 만들어 달랬어도 그래, 라고 대답했을 터였다.

“그런 게 다 생기면, 미래가 즐겁겠네요.”

“그렇겠지.”

“예전엔 미래가 까마득했는데. 이제는 아주 또렷하게 보여요. 머지않은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가 계속 할 수 있는 일을 해 가니까.”

“그게 미래가 되는 거네요.”

“그렇지.”

미래를 상상하는 시윤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누가 예쁘게 유리 공예를 해서 광을 내 놓은 것처럼. 늦은 봄 햇살을 받아 참 예쁘게도 반짝였다.

청호가 그의 이마와 콧잔등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턱과 목덜미에도 입술을 비볐다. 그 간지러움에 시윤이 목을 뒤틀며 웃었다. 그러다 청호의 품에 축 늘어져서 봄바람에 나른히 일렁이는 나뭇잎을 바라봤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드리우는 오후 특유의 뭉근한 햇살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시윤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래도 내일이 빨리 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대장님이랑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요. 그래서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요.”

시윤이 청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잘 익은 딸기처럼 붉은 입술이 예쁘게도 벌어졌다. 싱그럽게 빛나는 눈동자와 살랑살랑 흔들리는 담갈색 머리칼, 곱게 접힌 눈가가 몹시 아름다웠다.

청호가 잠깐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시윤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의 입술에 경건히 입을 맞추었다.

나도.

내일이 빨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이 순간의 네가 너무 소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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