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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 기사단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불사조 기사단-(15)
릴리아나와 함께 몇 년 만에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자 세바스찬은 매우 기쁜 눈치였다. 릴리아나와 킹스 크로스 역에서 만난 순간부터 한순간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던 세바스찬은 어떻게든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 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주방에 틀어박혀 한참동안 나오지 않던 세바스찬은 그동안 얼마나 벼르고 벼렸는지 릴리아나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가득 만들어냈다.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했어?"
저녁식사 하라는 말에 주방으로 들어온 릴리아나는 금방이라도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이 가득 차린 음식들을 보고 놀라 물었다.
"그동안 저 혼자는 못 먹었던 음식들을 만들다 보니까……."
세바스찬도 자신이 차려낸 음식 양이 많다는 것을 느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많이 만들었다가 버리면 아깝지 않냐 잔소리 하려던 릴리아나는 혼자 있어서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음식을 그녀가 온 김에 만들었다는 세바스찬의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며 자리에 앉았다.
"잘 먹을게."
"맛있게 드십시오, 아가씨."
세바스찬이 싱긋 웃으며 릴리아나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새콤한 양념을 뿌린 통통한 새우를 우물거리던 릴리아나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표정의 세바스찬의 표정을 발견하고 음식을 꿀꺽 삼킨 뒤 칭찬의 말을 꺼냈다.
"맛있어."
"그렇죠?"
세바스찬의 얼굴이 환해졌다. 많이 드시라며 릴리아나가 좋아하는 것들을 앞으로 밀어준 세바스찬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아가씨가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세바스찬의 반응에 한 입 먹을 때마다 온갖 칭찬의 말을 쏟아내던 릴리아나는 결국 평소 먹던 양보다 훌쩍 넘은 양을 먹고 나서야 포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직도 식탁에 가득한 음식들을 더 먹으라며 권하는 세바스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릴리아나는 디저트를 먹으라는 세바스찬의 말에 기겁하며 잠시 산책이나 하고 오겠다며 주방을 벗어났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배가 살짝 아팠다. 반년 만에 다시 찾은 정원을 걷던 릴리아나는 눈이 덮여 새하얀 나무를 손끝으로 살짝 톡 쳤다. 금세 차가운 눈은 릴리아나의 손끝에서 녹았다. 두꺼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긴 했지만 역시 밤인데다가 눈도 있어서 그런지 조금 쌀쌀했다. 달빛이 릴리아나의 얼굴을 적셨다.
"교수님도……."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말을 하려던 릴리아나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두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가씨!"
세바스찬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릴리아나는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가시면 어떡해요. 코트 가지고 왔어요."
"고마워."
"추위도 많이 타시면서……. 벌써 얼굴 빨개지셨네요."
다른 의미로 붉어진 것이었지만 릴리아나는 입을 꾹 다물고 세바스찬이 입혀주는 코트를 입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어렸을 때 같네요."
세바스찬이 그리움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눈 내리면 밤에 나와서 마구 눈싸움하고 그랬었잖아. 눈사람도 만들고."
"아가씨가 눈 안에다가 돌을 넣고 던졌던 건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건 세바스찬이 먼저 눈 안에 흙을 넣었잖아!"
릴리아나가 발끈해서 소리치는 말에 세바스찬이 쿡쿡거리며 덧붙였다.
"그 전에 아가씨가 눈 안에 잔디를 넣었던 건 기억 안 나시고요?"
"오호, 그러면 세바스찬은 진흙 섞인 질퍽질퍽한 눈을 새하얀 눈뭉치로 위장해서 던졌던 건 생각 안나나 봐?"
"……거의 8년 전 일인데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세바스찬이 얼떨떨하게 말하자 릴리아나가 코를 찡긋거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티격태격 거리던 것을 멈추고 다시 조용해진 그들은 눈 내린 나무 위에 걸려 있는 달을 다시 구경했다.
"전에 아가씨와 눈 내린 정원에 서 있었을 때는 아가씨는 이만했었는데."
세바스찬이 자신의 허리정도에서 손을 흔들며 추억에 가득 잠긴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아가씨가 정말 아가씨가 되었네요. 마법사들 기준으로 열일곱 살이면 성인이 라죠?"
"응."
"내년 생일이면 성인이 되다니……."
세바스찬은 자신의 허리정도 왔던 아가씨가 어깨까지 자라난 것을 방금 깨달은 것 마냥 새삼스러운 듯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바스찬은 지금까지 여자도 못 만들었고."
"그건 넘어갑시다. 아가씨 결혼하고 아기 낳는 것 까지 보고 결혼할거니까요.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릴리아나가 흐응 하는 소리를 내자 세바스찬이 덧붙였다.
"진짭니다."
"알겠어."
릴리아나가 다시 달로 시선을 돌렸다. 세바스찬 역시 릴리아나를 따라 달로 시선을 돌렸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릴리아나는 조금 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있잖아 세바스찬……."
"왜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릴리아나가 말꼬리를 끌자 세바스찬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세바스찬은 내가 나이차이 많이 나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은은한 달빛에 적셔져 있던 세바스찬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어느 정도 말입니까?"
"글쎄……. 한 열 다섯에서 스물?"
세바스찬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떻다고 말할 것 같습니까?"
"음…….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어떻든 저는 아가씨의 행복을 빌어줄 겁니다……?"
릴리아나가 헤헤 웃으며 애써 분위기를 살리려고 하자 세바스찬이 릴리아나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정말 그렇게 말할 것 같나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세요."
"……아니야?"
"아니, 아가씨가 어디가 아쉬워서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나요?"
"그럼 어느 정도 나이차가 좋은데?"
"그거야……."
부루퉁한 릴리아나의 말에 입을 열려던 세바스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왜? 동갑? 아니면 연하?"
"……그냥 결혼 안하시면 안 됩니까? 남자도 데려오지 마세요."
"뭐야, 그럼 나 남자친구도 만들지 말고 결혼도 하지 말라고? 그럼 세바스찬은? 세바스찬은 항상 내가 결혼하고 애까지 낳으면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그건……."
세바스찬이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트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냥 저와 천년만년 영원히 이대로 같이 사실래요?"
"엑?"
릴리아나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세바스찬의 얼굴은 진지했다.
"결혼하지 마세요."
릴리아나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계속해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세바스찬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키워놨는데……."
"응?"
"아가씨가 벌써부터 결혼을 하시겠다고……."
"응?"
어쩐지 상황은 릴리아나가 내일 당장 스무 살쯤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흘러갔다. 세바스찬의 눈에서 언뜻 물기가 보였다. 릴리아나가 당황하고 있을 무렵 세바스찬은 힘없이 릴리아나의 어깨에서 손을 풀더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릴리아나만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