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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왕자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혼혈 왕자-(1)
싸늘한 안개가 더러운 강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 강은 덤불이 무성하고 쓰레기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강둑 사이를 구불구불 흘러갔다. 저 멀리 버려진 공장의 잔재인 거대한 굴뚝 하나가 어둡고 음산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거대한 손가락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시커먼 강물의 속삭임 외에는 다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둑 아래로 살금살금 기어 내려가는 말라깽이 여우 한 마리 외에는 그 어떤 생물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가로등에 매달려 끼익 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칠이 벗겨진 낡은 간판에는 '스피너즈 엔드'라고 쓰여 있었다.
바로 그곳, 스피너즈 엔드에 살고 있는 스네이프는 안락의자에 앉아 새까만 부엉이가 방금 건네준 편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가지런하면서도 톡톡 튀는 것 같은 글씨체는 마치 그 글씨체의 주인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희미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양피지 위에 답장을 써내려간 스네이프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새까만 부엉이에게 편지를 물려주었다. 그러자 그 부엉이는 날개를 쫙 펼쳐 마치 인사를 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한 후 새까맣고 안개가 낀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부엉이가 새까만 점이 되어 하늘과 섞일 때 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네이프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재빠르게 서랍 속에 감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삐걱하는 소리가 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망토를 쓴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망토를 쓴 사람 중 하나가 망토의 모자를 뒤로 젖혔다.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어찌나 창백한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등 뒤로 길게 흘러내린 금발 머리카락 때문에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시사!"
스네이프가 이렇게 말하며 문을 좀 더 열자 불빛이 그녀와 그녀의 언니에게로 쏟아졌다.
"이런, 뜻밖의 반가운 손님이 오셨군요!"
"세베루스."
그녀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주 급한 일이에요."
"물론이죠."
그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아직도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녀의 언니가 초대도 받지 않고 냉큼 뒤따라 들어왔다.
"스네이프."
그녀는 그의 앞을 지나면서 무뚝뚝하게 이름을 불렀다.
"벨라트릭스."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로 문을 찰칵 닫을 때, 그의 입술은 약간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위로 말려 올라갔다. 벨라트릭스는 천천히 모자를 벗어 내렸다. 여동생의 흰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검은 피부에 눈꺼풀이 무겁게 드리워진 눈과 억센 턱을 가진 그녀의 왼 얼굴에는 최근에 생긴 것 같이 보이는 기다란 흉터가 나 있었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더욱 매력적으로 변했군."
스네이프가 비꼬듯 말했다. 벨라트릭스가 무어라 성을 냈으나 그는 그런 그녀를 완벽하게 무시하며 조그만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곳은 마치 을씨년스런 감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벽은 완전히 책들로 덮여 있었는데, 책들 대부분은 검은색이나 갈색의 오래된 가죽이 씌워져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양초 등잔의 희미한 불빛 아래 낡아 빠진 소파 하나와 오래된 안락의자, 그리고 곧 무너질 것 같은 탁자 하나가 몰려 있었다. 그곳은 평소에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집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스네이프는 나시사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망토를 벗어 한쪽 옆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서 꼭 맞잡은 자신의 하얗고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벨라트릭스는 스네이프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며 나시사의 등 뒤로 다가가 섰다.
"그래, 내가 뭘 도와줄까요?"
스네이프는 두 자매 맞은편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우리……우리뿐이겠죠, 그렇죠?"
나시사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요, 물론이죠. 아, 웜테일이 여기 있긴 하지만, 그런 쥐새끼 따위는 상관없죠, 안 그런가요?"
스네이프가 지팡이를 등 뒤에 있는 책장을 가리키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감추어진 문이 활짝 열리고 좁은 계단 위에 왜소한 남자가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자네가 확실히 알아차린 것처럼, 웜테일, 손님이 오셨네."
스네이프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 남자는 등을 잔뜩 웅크린 채 몇 계단을 기어 내려오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은 작고 물에 젖은 듯 축축했으며, 코는 뾰족했고, 입가에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연신 쓰다듬고 있었는데, 오른손은 마치 반짝이는 은색 장갑을 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시사!"
그가 쉰 목소리로 꽥꽥거렸다.
"그리고 벨라트릭스! 매력적이기도 하지……."
"원한다면, 웜테일이 우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줄 거요. 그런 다음 자기 침실로 돌아가겠지요."
웜테일은 마치 스네이프가 자신을 향해 뭔가를 던지기라도 한 듯이 움찔했다.
"난 당신의 하인이 아니야!"
그는 스네이프의 눈길을 슬슬 피하면서 찍찍거렸다.
"그래? 어둠의 마왕께서 나를 도와주라고 널 이곳에 두신 걸로 알고 있는데."
"도와주라고 하신 건 맞지. 하지만 너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주고……집을 청소하라고 하신 건 아니었어!"
"웜테일, 자네가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임무를 맡고 싶어 안달하는 줄 미처 몰랐군."
스네이프가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아주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지. 내가 어둠의 마왕께 말씀만 드리면……."
"내가 원한다면 나도 직접 말씀드릴 수 있어!"
"물론 그러시겠지."
스네이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우리에게 마실 것을 가져와. 요정이 만든 포도주가 좋을 것 같군."
웜테일은 뭔가 더 따질 듯한 기세로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더니, 결국 돌아서서 두 번째 감추어진 문으로 들어갔다. 유리잔이 탕 부딪히고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몇 초 만에 그는 쟁반 위에 유리잔 세 개와 먼지 낀 술병 하나를 담아서 가져왔다. 그리고 쓰러질 듯한 탁자 위에 그것들을 탁 내려놓더니, 책으로 감춰진 문을 쾅 닫고 그들 눈앞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스네이프는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세 잔 따르더니 자매들에게 가각 한 잔씩 권했다. 나시사는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벨라트릭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스네이프를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그 눈길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즐기는 표정이었다.
"어둠의 마왕을 위하여!"
스네이프는 이렇게 말하며 잔을 높이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자매들도 그를 따라 포도주를 마셨다. 스네이프는 그들의 잔을 다시 채웠다. 그리고 두 번째 잔을 받아 든 나시사가 서둘러 말했다.
"세베루스, 이렇게 여길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을 꼭 만나야만 했어요. 내 생각에는 당신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스네이프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감추어진 계단 문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나더니, 웜테일이 계단 위로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는 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스네이프가 말했다.
"요즘에 엿듣는 버릇이 좀 생겨서요.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통 모르겠지만…….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 말았죠, 나시사?"
"세베루스, 내가 여기 와서는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죠. 하지만……."
"그렇다면 입 다물어!"
벨라트릭스가 호통을 쳤다.
"특히 여기 이 사람 앞에서는 말이야!"
"여기 이 사람이라니요?"
스네이프가 비아냥거리듯이 되풀이했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죠, 벨라트릭스?"
"난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지, 스네이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당신이 믿건 말건 그건 내가 알 바 아닙니다."
스네이프의 말에 벨라트릭스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커다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내가!"
스네이프는 벨라트릭스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분노로 씩씩거리며 할 말을 찾는 동안 재빠르게 나시사에게 물었다.
"자…….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셨다고요, 나시사?"
나시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세베루스. 저……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달리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요. 루시우스는 감옥에 있고……."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어둠의 마왕께서는 저에게 이 야이기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죠."
나시사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그분은 이 계획에 대해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시죠……. 이건……아주 커다란 비밀이니까요. 하지만……."
"그분께서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말해서는 안 되죠."
스네이프가 즉시 딱 잘라 말했다.
"어둠의 마왕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 법이니까요."
나시사는 마치 스네이프가 그녀에게 찬물이라도 쫙 끼얹은 것처럼 멍하니 입만 딱 벌렸다. 벨라트릭스는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거 봐라!"
벨라트릭스가 의기양양하게 동생을 향해 소리쳤다.
"스네이프까지도 저렇게 말하잖니. 말하지 말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스네이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작은 창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 사이로 인적이 끊긴 거리를 힐끗 한번 내다보고는 후다닥 다시 커튼을 닫았다.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나시사를 향해 돌아섰다.
"공교롭게도 나 또한 그 계획을 알고 있소."
스네이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의 마왕께 말씀을 들은 몇 사람 중 하나요. 그렇지만 나시사, 만약 내가 그 비밀을 몰랐다면, 당신은 어둠의 마왕께 크나큰 반역죄를 저지를 뻔했소."
"당신도 알고 있을 줄 알았어요!"
나시사가 훨씬 홀가분해졌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그토록 믿으시는군요, 세베루스……."
"당신이 그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벨라트릭스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 떠올랐던 만족스런 표정은 이제 분노의 표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당신이 안다고?"
"물론이요."
스네이프가 말했다.
"하지만 나시사, 도대체 뭘 도와달라고 하는 거요? 만약 어둠의 마왕께서 마음을 바꾸시도록 내가 그분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전혀 가망이 없는 일이오. 절대 안 돼요."
"세베루스……."
나시사가 속삭였다.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제 아들이……제 하나뿐인 아들이……."
"드레이코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벨라트릭스가 냉담하게 말했다.
"어둠의 마왕께서 그 애에게 크나큰 영광을 베푸시는 거라고. 드레이코를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 아이는 자기가 맡은 임무에 대해 겁먹고 꽁무니를 빼지 않아. 오히려 자기를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며 무척 기뻐하는 기색이었다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잔뜩 흥분해서……."
나시사는 진짜로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으로 줄곧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제발요 세베루스……부디 어둠의 마왕의 뜻을 돌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둠의 마왕께서는 절대 설득당할 분이 아니오. 나 또한 그런 짓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고 말이오."
스네이프가 딱 잘라 말했다. 그의 말에 나시사는 더욱 크게 목 놓아 울며 스네이프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스네이프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싹 갖다 댄 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가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세베루스.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요. 드레이코 대신 말이죠. 당신이 성공한다면, 물론 당신은 성공하겠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가 받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을 당신에게 내릴 거예요."
스네이프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더니, 꽉 잡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분께서는 결국 그 일을 나에게 맡기시겠지. 하지만 먼저 드레이코가 시도해 보도록 결정하셨소. 만에 하나라도 드레이코가 성공을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좀 더 오래 호그와트에 남아서 첩자로서 유용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오."
"달리 말해서, 드레이코가 죽든 말든 그분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단 말이군요!"
"어둠의 마왕께서는 몹시 진노하셨소."
스네이프가 조용히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분은 예언을 듣지 못하셨소, 나시사. 당신도 나만큼 잘 알고 있겠지만 그분은 쉽게 용서하시지 않소."
나시사는 그의 발밑에 쓰러진 채, 마루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단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
"넌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벨라트릭스가 무자비하게 말했다.
"만약 나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어둠의 마왕을 섬기는 일에 아이들을 바쳤을 거야!"
나시사는 금빛 나는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절망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스네이프는 허리를 숙여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따르더니, 그녀의 손에 강제로 잔을 쥐어 주었다.
"나시사, 그만 해요. 이걸 좀 마시도록 해요. 그리고 내 말을 들어봐요."
그녀는 다소 진정을 하고 포도주 잔을 자기 쪽으로 기울인 다음, 부들부들 떨며 한 모금 들이켰다.
"어쩌면 말이오……내가 드레이코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나시사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고, 두 눈은 부릅뜬 채였다.
"세베루스……오, 세베루스……. 그 아이를 도와주실 건가요? 당신이 그 아이를 지켜보고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돌봐 주실 건가요?"
"한번 노력해 보겠소."
나시사는 얼른 자기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파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스네이프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바람에 유리잔이 탁자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스네이프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그 아이를 지켜 주시기만 한다면……. 세베루스, 맹세하실 수 있겠어요? 깨뜨릴 수 없는 맹세를 하실 수 있나요?"
"깨트릴 수 없는 맹세?"
스네이프의 표정은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담담했다. 하지만 벨라트릭스는 의기양양하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나시사, 너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니? 노력해 볼 거라고 하잖아. 내 장담하지……. 그건 그냥 빈말일 뿐이야.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핑계란 말이지. 어둠의 마왕의 명령? 쳇!"
벨라트릭스가 스네이프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왼 얼굴에 난 기다란 상처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그저 말로 너를 구워삶아 빠져나가려는 것이라고. 마치 뱀처럼 말이야."
벨라트릭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어둠의 마왕께서 쓰러지셨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지? 그분이 사라지셨을 때, 왜 그분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거야? 덤블도어의 품 안에서 지낸 그 몇 년 동안 당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지? 어둠의 마왕께서 마법사의 돌을 손에 넣으려고 하실 때, 왜 당신은 그걸 막았던 거지? 어둠의 마왕께서 다시 부활하셨을 때에도 왜 당신은 즉시 돌아오지 않았던 거야? 게다가 불과 몇 주일 전 우리가 어둠의 마왕을 위해서 예언을 되찾으려고 싸움을 벌였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어? 게다가 스네이프, 해리 포터는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 5년 동안이나 당신 손아귀에 그 녀석을 쥐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당신이 어떻게 그 뱀 같은 혀로 어둠의 마왕님을 속이고 덤블도어를 속였을지는 몰라도 난 당신의 본질을 꿰고 있어. 그저 남들의 귀에 듣기 좋고 그럴듯한 이야기만 속살거리는 비겁한 겁쟁이!"
말을 마친 벨라트릭스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 탓에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소, 나시사. 깨뜨릴 수 없는 맹세를 하도록 하겠소."
스네이프가 조용히 말했다.
"아마 당신의 언니가 기꺼이 우리의 증인이 되어 줄 거요."
벨라트릭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스네이프는 몸을 숙여서 나시사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벨라트릭스가 깜짝 놀란 눈으로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의 오른손을 꼭 붙잡았다.
"벨라트릭스, 당신의 지팡이가 필요할 거요."
스네이프가 냉정하게 말했다. 벨라트릭스는 얼빠진 표정으로 지팡이를 꺼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오시오."
스네이프가 말했다. 벨라트릭스는 앞으로 걸어 나와서 두 사람을 굽어보고 섰다. 그리고 지팡이 끝을 굳게 잡은 그들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나시사가 입을 열었다.
"세베루스, 당신은 나의 아들 드레이코가 어둠의 마왕의 소망을 달성하는 동안, 그 아이를 지켜 주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소."
스네이프가 말했다.
지팡이 끝에서 환한 불길이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피어나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열선처럼 두 사람의 손 주위를 빙빙 감쌌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소."
스네이프가 대답했다.
지팡이 끝에서 두 번째 불길이 길게 뻗어 나오더니, 첫 번째 불길과 뒤엉켰다. 그리고 아름답게 빛나는 사슬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약 필요한 경우에……그러니까 만약 드레이코가 실패할 것 같으면……"
나시사가 속삭였다. 스네이프의 손이 나시사의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하지만 빼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어둠의 마왕이 드레이코에게 시키신 바로 그 일을 대신 완수하겠습니까?"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벨라트릭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맞잡은 두 사람의 손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은 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하겠소."
스네이프가 말했다. 세 번째로 피어난 불길이 다른 불길과 뒤엉켰다. 나시사가 만족스러운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못마땅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벨라트릭스의 얼굴에 잔인한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맹세가 마무리 되는것 같이 보이자 재빨리 끼어들었다.
"씨시, 이것도 맹세시키는게 좋을거야."
벨라트릭스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 얼굴에 이 흉터를 낸 그 계집 있잖아. 그 계집이 어둠의 마왕께서 내리신 이 위대한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것 같으면 그의 손으로 직접 죽이라고 말이야."
벨라트릭스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말했다.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것이 깨트릴 수 없는 맹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 벨라트릭스."
"상관이 없어?"
벨라트릭스가 여전히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은 채로 비웃었다.
"그년 얼굴이 젖비린내 나는 포터의 죽은 잡종 어미랑 똑같이 생겼던데? 깜짝 놀랐어.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
벨라트릭스가 깔깔거리며 냉소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왼 얼굴에 난 기다란 흉터가 경련하듯 씰룩거렸다.
"왜, 죽어버린 원래의 것을 갖지 못하니 똑같이 생긴 대용품을 갖으려고? 발정난 개 마냥 그년을 탐하느라 이 일에 방해가 되면 어쩔 것이지? 포터의 친구인 것 같던데 그 계집이 당신 앞을 가로막으면 냉정하게 해치울 수 있냔 말이야. 못할걸? 아무리 대용품이어도 똑같이 생겼으니 죽어버린 당신의 잡종 계집이 얼마나 많이 생각날까……."
벨라트릭스가 스네이프를 비웃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렸다.
"참으로 순수혈통에 걸맞은 고상한 말투로군."
스네이프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벨라트릭스가 비죽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스네이프가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그렇다면 죽든말든 별 상관은 없겠지. 좋아, 씨시. 맹세시켜. 그 계집때문에 드레이코가 실패하길 원하는건 아니지?"
벨라트릭스가 만족스러운 듯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크게 심호흡을 한 나시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베루스, 당신은 벨라트릭스가 말한 그 여자가 어둠의 마왕께서 내리신 이 일에 방해가 될 것 같다면 당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겠습니까?"
긴 침묵이 흘렀다. 벨라트릭스는 딱딱한 스네이프의 얼굴을 감상하며 뚫어질듯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겠소."
벨라트릭스의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같이 번뜩이는 얼굴이 네 번째로 피어난 불길의 환한 불빛 속에서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팡이 끝에서 솟아난 불길은 다른 세 개의 불길과 뒤엉켜서, 꼭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칭칭 동여맸다. 마치 굵은 동아줄처럼, 사나운 한 마리의 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