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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왕자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혼혈 왕자-(2)
릴리아나는 약속장소인 런던의 한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세바스찬에게 큰 거짓말을 해서 하루 종일 가슴 어딘가가 쿡쿡 찔리는 느낌이었지만 막상 스네이프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 느낌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설렘만이 남았다. 소매가 없는 딱 달라붙은 검은 원피스는 그녀의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몸매를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흘끗거리며 릴리아나의 얼굴과 몸매를 감상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찾느라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요!"
릴리아나가 반가운 듯이 스네이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검은 망토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평소와 차림이 거의 비슷한 스네이프는 릴리아나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그녀를 발견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가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
스네이프의 시선이 못마땅한 듯 훤히 드러난 릴리아나의 새하얀 다리와 쇄골 주변에 닿았다.
"오랜만에 봤는데 보자마자 그러기에요?"
릴리아나가 서운하다는 듯 장난스럽게 말하자 연신 다리와 드러난 가슴 부근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스네이프가 조금 표정을 풀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저야 잘 지냈어요. 교수님은요?"
"나야 뭐……"
스네이프가 말꼬리를 흐렸다.
"……무난했다."
그의 얼굴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어두워졌으나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어디부터 갈까요?"
릴리아나가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글쎄…….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스네이프의 물음에 세바스찬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남자와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던 릴리아나는 "어……."하는 소리와 함께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요……. 별로 생각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릴리아나가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자 스네이프가 말했다.
"그럼 일단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하고 싶은 것이 생각나면 하도록 하지."
그래서 그들은 일단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흔치 않은 햇빛이 따사로운 날인데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보폭을 맞춰 걷던 릴리아나는 사람들이 많아 떨어질 것 같다는 핑계를 마음속으로 대며 은근슬쩍 스네이프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날씨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그렇군."
"이렇게 햇빛좋은 날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렇군."
"사람들 정말 많네요."
"……그렇군."
릴리아나가 팔짱을 낀 이후로 스네이프의 말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어떻게 물어도 단답형인 스네이프에 릴리아나가 물었다.
"오늘 피곤하세요?"
"그런 게 아니라……."
언뜻 보인 그의 귀가 붉었다. 그의 반응에 릴리아나가 걱정스러운 듯이 스네이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 탓에 이미 스네이프의 팔에 닿고 있던 여인의 부드럽고 푹신한 가슴의 감촉이 더욱 커졌다.
"그만……."
"네?"
릴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목마르지 않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햇살이 따뜻하고 날도 더워서 그런지 금세 목이 탔다. 릴리아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스네이프는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머글 돈에 익숙한 듯 능숙하게 계산을 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입 마신 스네이프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머글들은 왜 이런 것을 먹는지 모르겠군. 별 다른 효능 같은 것도 없는데 이런 맛을 돈 주고 사먹다니……."
"그래도 마시다보면 꽤 괜찮아요."
커피를 좋아하는 릴리아나가 많이 목이 말랐는지 벌컥벌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둘은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딱히 정해놓은 것은 없었지만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 것도 즐거웠다.
"그리고 보니 오늘은 몇 시까지 돌아가야 하지?"
"아, 저 오늘 론의 집으로 가요."
"위즐리?"
스네이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의 표정은 남자의 집에 놀러가서 묵고 온다는 것과 그들이 절친한 친구사이라는 것 같은 여러 생각으로 복잡해 보였다.
"그럼 짐들은 모두 어디 있는 거냐? 집에 들렀다가 가는 거냐?"
"어……. 그게……."
릴리아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곤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며 스네이프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키 콜드런에 있어요."
"리키 콜드런?"
"네, 아무래도 집에서 런던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리고 오늘 론의 집으로 가야 하니까……."
릴리아나가 말을 흐리며 스네이프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그녀는 세바스찬에게 어제 론의 집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리키 콜드런에 묵었던 것이었기에 잠시 사라졌던 마음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스네이프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할 말을 찾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 릴리아나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교수님, 배고프지 않으세요?"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시간이군."
스네이프가 관심을 돌리자 릴리아나는 다행이라는 듯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네이프는 근처에 어느 식당이 있었는지 고민하는 릴리아나를 이끌고 어느 근사한 식당으로 향했다. 릴리아나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는 매니저의 말에 놀라며 새삼스러운 얼굴로 스네이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스토랑의 창밖으로는 어둠이 찾아온 템스 강이 보였다. 경치에 감탄하던 릴리아나는 스네이프와 단 둘이 앉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음식을 서빙 하러 온 종업원이 상대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릴리아나와, 그녀와 적어도 15살은 차이날 것 같은 스네이프를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릴리아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로 릴리아나가 얘기하면 스네이프가 답하는 식이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템스 강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은 옅은 남색으로 변하고 희미한 달의 형체가 나타났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 신었던 높은 굽의 구두 때문에 욱신거리는 발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때마침 강 근처의 벤치를 발견한 릴리아나가 말했다.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요."
스네이프는 릴리아나가 신고 있는 구두를 보고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벤치에 앉았다. 옅은 남색의 하늘에 옅은 보랏빛이 섞여 까맣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만나려면 학교에서 봐야겠죠?"
"그렇겠지."
담담한 듯 말하는 스네이프에 릴리아나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힘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스네이프가 살며시 릴리아나의 손을 잡아왔다.
"아쉬워요."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이 앉은 벤치 주변에 시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공연장이 있어서 그런지 마이크 소리를 타고 노랫소리가 들려왔지만 쿵쿵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 했다.
"……날 생각해 봐요, 사랑을 떠올리며 우리 이별하던 그때 잠깐 동안만이라도 나를 기억해 준다고 부디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맑고 청아한 여자의 목소리가 유명한 뮤지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강 근처에 놀러온 아이들이 와-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을 뛰어 지나갔다.
"……날 생각해 봐요, 늘 말없이 체념하며 지내던 나를. 날 떠올려 봐요, 당신을 내 마음에서 지우고자 너무도 힘겨운 노력을 하던 나를. 지난 날을 회상해 봐요 지난 모든 시간들을 돌아봐요 우리가 결코 하지 않은 일들도 생각해 봐요 내가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을 거예요……"
"저 노래 좋아해요."
스네이프의 어깨에 기대 마이크 소리를 타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던 릴리아나가 중얼거렸다.
"세바스찬이 오페라랑 뮤지컬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으러 다녔거든요."
"……지는 꽃과 여름 과일처럼 사랑도 때가 있다지만 제발 약속해줘요. 가끔은 당신은 생각해 줄 거라고……"
조용한 그들의 사이로 청아한 목소리의 여자가 맑은 음색의 카덴차를 선보였다. 밑으로 내려갔다가 순식간에 옥타브로 높은 음을 내는 여자의 기교에 릴리아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이 술에 취했을 때 가끔씩 선보였던 재주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마지막 음을 길게 끌며 노래가 마무리되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들렸다. 스네이프는 여자의 노래를 묵묵히 들으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잡고 있던 릴리아나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힘을 풀었다.
"꽃 사세요. 아름다운 아가씨를 위해 꽃 사세요."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바구니에 싱싱한 꽃들을 한바구니 가득 넣은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멀리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수레에 꽃을 가득 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 공연에 온 사람들을 상대로 꽃을 팔려는 것 같았다. 그때, 다른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마침내 그대 이곳에 왔어. 그대 가슴 속 가장 깊은 욕망을 찾아……"
"꽃 사세요."
아이가 스네이프와 릴리아나의 앞에 멈춰 서서 바구니를 들어보았다. 무거울 텐데 낑낑거리며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아이를 보자 귀여워 저절로 웃음이 입에 걸렸다.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거니?"
릴리아나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 송이만 주겠니? 저기 있는 노란 장미로."
"……나, 당신 이곳에 데려왔네. 이제 우리의 열정 녹아 하나가 될 것이기에 그대 마음은 이미 내게 굴복했지,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 완전히 굴복했지. 나와 하나 될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은 필요 없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란 장미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하나 세며 꺼냈다. 열 송이를 꺼낸 아이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릴리아나에게 꽃을 건넸다.
"2파운드 주세요."
"내가 내지."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경계는 지났어.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우리의 속고 속이는 모습들은 이제 끝났다네……"
계산을 하려 지갑을 꺼내는 릴리아나의 손을 막으며 스네이프가 돈을 건넸다.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다른 사람에게 꽃을 팔기 위해 떠났다.
"제가 내도되는데……."
"괜찮다."
"고맙습니다."
릴리아나가 열 송이의 노란 장미꽃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꽃에는 마치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이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이크 소리로 들려오는 남자의 파트가 끝나고 아까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당신에게 끌려 이곳으로 왔네. 이미 난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왔는데. 우리 서로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리의 몸이 하나 되는 걸, 이제 여긴 우리 둘 뿐……"
"너무 예뻐요."
릴리아나는 달빛과 가로등 빛에 은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 노란 장미에 정신이 팔린 듯 보였지만 스네이프는 계속해서 노래가사를 신경 쓰고 있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무 귀엽지 않아요? 부모님을 도와서 일을 하는 것 같던데."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경계는 지났어. 돌아갈 수도 없네. 우리의 욕망의 노래는 이제 시작하였네……"
"……그래."
스네이프가 대답을 하며 노래가사를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지만 그렇게 성공적인 시도는 아닌 듯 했다. 릴리아나가 무어라 입을 열어 말을 했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마지막 질문 하나, 우리 둘 하나가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우리 피는 과연 언제쯤 들끓게 되는 건지. 잠들어 있는 싹은 언제쯤 그 꽃을 피울 건지. 피어오른 정열의 불꽃은 언제쯤 우릴 태울 건지……"
"……아이 갖고 싶어요, 교수님."
스네이프가 사레가 걸린 듯 쿨럭 거리며 기침을 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이 기침을 하는 스네이프에 릴리아나가 의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