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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왕자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혼혈 왕자-(11)
몸을 지탱하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아픔을 가장해 울음을 터트렸던지라 눈 주변이 아직도 붉었다. 힘없이 눈을 뜬 릴리아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아팠던 모든 것이 끝나고 기절하듯이 잠들었을 때는 밤이었는데 어느새 벽 위에 난 창문에서는 새벽과 아침 사이의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을 깜빡거리던 릴리아나의 속눈썹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자 조금씩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자세를 바꾸려던 릴리아나는 몸을 움직이기 무섭게 몰려오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심한 운동을 한 것같이 온몸에 근육통이 가득했다. 다리 사이 은밀한 곳까지 느껴지는 통증과 분명 씻은 기억이 없는데 깨끗하게 사라진 그의 흔적에 릴리아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저절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언제 입혀진 것인지 모를 얇은 샤워 가운만 입고 있어 추위를 많이 타는 릴리아나라면 분명 추위를 느끼고 있어야 했지만 몸 안에서 일어난 후끈후끈한 열기 때문에 추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 안의 열기를 식히려던 릴리아나가 옆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에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스네이프는 옅은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눈에 새기듯 찬찬히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룻밤 사이에 더욱 깊은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살을 섞으며 오로지 상대방에게만 집중하던 열정적인 시간.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알아가던 시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하면서도 사적이고 가장 뜨거운 시간을 겪었던 단 한 사람. 그와 은밀한 시간을 함께 했다는 것 때문인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소유감과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얌전히 누워있던 스네이프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그가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이 흘러내리며 팔목에 새겨져 있는 죽음을 먹는 자임을 나타내는 흉측한 문신이 드러났다. 어젯밤에는 어둠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따뜻했던 가슴 속에 갑자기 차가운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어젯밤 말포이와 스네이프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대용품, 어둠의 마왕의 명령, 아무것도 아닌 여자.
분명 스네이프는 자신에게 과거에는 죽음을 먹는 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분명 말포이와 나누던 대화에는 그가 여전히 죽음을 먹는 자이며 첩자로 덤블도어의 밑에 들어가 있다는 뉘앙스가 강했다.
과연 스네이프는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여자의 대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인처럼 굴고 사랑을 속삭이지만 그저 연기인 것은 아닐까. 잠시 사라졌었던 의문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 릴리아나를 잠식했다.
'하지만.'
릴리아나 머릿속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가 널 사랑하지 않아도,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죽어버린 첫사랑의 대용품으로 보고 있어도 넌 그를 떠날 수 있을까?'
스네이프를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두 눈을 감았다. 흐려져 있던 녹색 눈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못한다. 못할 것이었다. 그가 너무나도 좋았다. 사랑했다. 오랫동안 그를 짝사랑했고,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이 이루어졌다. 절대로 닿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이 잡혔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중했다. 그것이 연기이든 대용이든 명령이든 순수한 이끌림이 아닌 어떠한 이유로 잡힌 것이라도 릴리아나는 그것을 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브."
릴리아나가 작게 스네이프의 이름을 불렀다. 세베루스 교수님에서 세베루스로, 그리고 세브로 호칭이 변하는데 꼬박 6년이 걸렸다. 가슴 속에서 씁쓸한 감정이 일렁거리며 그녀의 심장을 두드렸다. 릴리아나의 부름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스네이프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멍한 초점으로 릴리아나를 바라보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릴리아나."
방금 잠에서 깨 가라앉은 목소리로 스네이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커다란 손이 릴리아나의 얼굴을 지나 붉은 머리카락에 내리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듯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자 릴리아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품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길이 잠시 멈추더니 밑으로 내려와 릴리아나를 품에 안았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두 눈을 깜빡이며 스네이프의 턱 선을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스네이프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좋은 아침."
가라앉은 목소리로 스네이프가 대답했다. 기대고 있는 가슴에서 그의 심장이 쿵쿵 뛰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몸은……좀 어떠냐."
스네이프가 조금 주저하며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창피해진 릴리아나가 붉어진 얼굴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품 안은 포근하고 다정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던 비누 냄새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그의 향을 품고 있자니 릴리아나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가 말했던 대로 스네이프는 죽음을 먹는 자가 아닐 거야. 분명 어떠한 이유 때문에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는 정말로 너를 사랑하고 있어. 어젯밤을 생각해 봐. 그게 정말 연기나 명령이나 대용품을 대하는 것 같이 보였니?'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보석을 다루듯 자신을 다루던 그의 모습, 자신의 몸에 취해 쾌락을 느끼던 그의 모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매달리던 그의 모습…….
말로는 대용품이고 어둠의 마왕의 명령이고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했지만 스네이프는 목마른 사람처럼 끊임없이 릴리아나를 원했고 바랬고 매달렸다. 일렁거리던 씁쓸함이 사라지고 비릿한 충족감이 온 몸을 채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마음 한편 어딘가는 사라진 것 같이 허전했다.
"세베루스."
릴리아나가 달콤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네이프의 검은 눈이 온전히 릴리아나만을 담았다. 머릿속에 '어둠의 마왕의 명령'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듯 했지만 릴리아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죽음을 먹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릴리 포터의 대용품으로 여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았다가는 자신의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외면할 것이었다. 잊을 것이었다. 그렇게 노력할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듯, 그가 사랑하는 유일한 여자로 남고 싶었다.
"사랑해요."
스네이프는 대답대신 릴리아나에게 달콤하게 입을 맞춰왔다. 소중하다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하게 입을 맞춰오는 스네이프에 릴리아나는 매달리듯 그 입맞춤에 답했다. 아직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
크리스마스 방학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새해의 첫 수업은 6학년 학생들에게 깜짝 놀랄 희소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밤새 휴게실 게시판에 순간이동 강의를 한다는 커다란 공고문이 나붙었던 것이다. 6학년 학생들 사이에는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설렘이 잔뜩 퍼져나갔다.
설렘과 함께 스네이프의 특별 수업 또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파티 날 이후 그녀는 계속해서 합리화를 했기에 호그와트에 도착한 이후로는 말포이와의 대화를 거의 잊은 듯 보였다. 하지만 토요일 7시가 되어 특별 수업을 들으러 복도를 걷는 내내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는 껄끄러운 마음과 그를 볼 때마다 기억나는 그날의 열기가 뒤섞여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뛰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머리를 정리한 릴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던 릴리아나는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로 처음 보는 스네이프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얼굴은 피곤해보였고 한눈에 보아도 크리스마스 때보다 야위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업 내내,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그리핀도르 기숙사 앞에서 오랫동안 릴리아나를 껴안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모습은 다른 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간간히 드러나는 피곤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한편 덤블도어와 개인 수업을 하고 돌아온 해리는 슬러그혼에게서 호크룩스에 대한 진실을 알아오라는 과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헤르미온느를 바라보았던 릴리아나는 그녀 역시 호크룩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오후에 있던 마법약 시간이 끝난 후 해리는 행동을 개시했지만 그는 곧 그리핀도르 학생 휴게실에서 참혹한 면담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론도 헤르미온느도 마법약 시간에 해독제를 제대로 만들지 않고 위석을 내밀었던 해리의 행동 때문에 전혀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헤르미온느는 아직도 해리가 정정당당하게 공부하지 않고서 일등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고 론은 해리가 자기에게도 위석을 나눠 주지 않은 것 때문에 꽁해 있었다. 해독약을 완성했던 릴리아나는 딱히 해리에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꾸준히 그녀를 괴롭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도움을 요청하듯 바라보고 있는 해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리에게 화가 났어도 호크룩스에 대한 정보를 찾던 헤르미온느는 생전 처음으로 호그와트 도서관에서 정보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녀는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위석을 가지고 속임수를 쓴 해리에게 화가 났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녀는 마치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호크룩스에 대해 별 진전이 없던 나날이 계속되고 2월이 되자, 학교 주변에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춥고 음산하고 축축한 날씨가 찾아왔다. 자줏빛이 감도는 회색 구름이 성 위에 낮게 드리웠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로 인해서 잔디밭은 온통 미끈거리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순간이동 수업의 장소는 운동장에서 대연회장으로 바뀌었고, 새해부터 학생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순간이동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업을 들으면 바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은 후플푸프의 수잔 본즈의 신체가 분리되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매우 실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