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타임-88화 (88/142)

0088 / 0142 ----------------------------------------------

혼혈 왕자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혼혈 왕자-(16)

"릴리? 괜찮아?"

화장실에서 나온 해리가 걱정스러운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릴리아나에게 물었다.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해리가 릴리아나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열이 있는데……."

"……미안해. 내가 좀 놀랐었나봐."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은 릴리아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역질이 나던 것은 멈췄지만 속은 여전히 미식 거렸다. 화장실 안에서 스네이프가 말포이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동으로 가야겠다. 흉터가 많이 남을 것 같긴 하지만, 빨리 디터니를 먹으면 그것도 피할 수 있을 게다……. 어서……."

말포이를 부축한 채 화장실을 나가던 스네이프는 화장실 근처에 주저앉아 있는 해리와 릴리아나에게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포터, 퀸. 여기서 꼼짝 말고 날 기다려라."

화장실 안에서 모우닝 머틀이 줄기차게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려왔다. 머릿속은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쓰러져 피를 흘리는 말포이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해리가 그녀를 위로하듯 손을 꼭 잡아주었지만 떨리는 몸은 진정되지 않았다.

10분 후에 스네이프가 돌아왔다. 그는 머리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머틀의 울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해리와 릴리아나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해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전히 떨고 있는 릴리아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모두 빠진 것처럼 창백했다. 스네이프는 그런 릴리아나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해리가 릴리아나를 부축하며 그를 따랐다.

지하 감옥에 있는 스네이프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는 문을 열고 해리와 릴리아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스네이프가 자리에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자리에 앉은 릴리아나가 고개를 반쯤 숙이고 몸을 덜덜 떨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옆에서 해리가 변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포이가 무장 해제된 저를 공격하려고 하자 릴리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 주문을 날린 것뿐입니다."

스네이프의 시선이 릴리아나에게 닿았다.

"릴리는 그 주문이 어떤 건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하거라, 포터."

스네이프는 조용히 말했다.

"누가 네게 그 주문을 가르쳐 주었지?"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릴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해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해리가 희미하게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그……그게……."

릴리아나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어디선가 읽었어요."

"어디서?"

"그러니까……도……도서관에 있는 책에서……."

릴리아나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해리가 목이 타는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스네이프의 시선이 해리에게 닿았다. 잠시 말이 없던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포터, 네 가방을 가져와라."

스네이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가방 안에 든 책도 전부 다. 빠짐없이 다 가져 오거라. 여기 내게로 말이다. 지금 당장!"

해리는 즉시 일어서 사무실을 나갔다. 해리의 다급하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사무실에 내려앉자 스네이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릴리아나, 그 주문을 누가 네게 가르쳐 주었지?"

"도서관에 있는……채……책에서……."

스네이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듯 몇 번 입을 벙긋거리던 스네이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사무실에 자리했다.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똑똑 두드린 발소리의 주인공은 헉헉거리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스네이프에게 가방을 건넸다.

스네이프는 해리의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았다. 마침내 마법약 책 하나만이 남았다. 스네이프는 그 책을 유독 유심히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게 자네 책인가, 포터?"

"네."

해리는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정말인가, 포터?"

"그런데요."

해리는 좀 더 반항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게 네가 플러리시와 블러트 서점에서 구입한 <<상급 마법약 만들기>> 책이란 말이지?"

"네."

해리가 딱 잡아뗐다.

"그렇다면 왜 이 책 표지 안쪽에 '루닐 웨즐립'이란 이름이 적혀 있지?"

"……그건 제 별명입니다."

"네 별명이라고……."

스네이프가 따라 말했다.

"네……. 제 친구들이 절 그렇게 부르거든요."

해리가 말했다.

"나도 별명이 무슨 뜻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스네이프가 쏘아붙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나, 포터?"

스네이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넌 이학기가 끝날 때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내 방에서 징계를 받아 마땅하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포터?"

"저……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해리가 스네이프의 눈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징계를 받은 후에 네 기분이 어떨지 두고 보자."

스네이프가 말했다.

"토요일 아침 10시에 내 사무실로 오도록 해라, 포터."

"하지만 교수님……."

해리는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퀴디치 경기가……마지막 시합인데요……."

"아침 10시다."

스네이프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가엾은 그리핀도르……올해에는 꼴찌 신세를 면치 못하겠군……."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합장을 하듯 손을 모은 스네이프가 차갑게 말했다.

"포터, 넌 이제 그만 나가거라."

해리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스네이프를 바라보다 죽은 시체처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해리가 방을 나가자마자 방문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른 스네이프는 해리의 불규칙적인 발소리가 사라지자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릴리아나."

릴리아나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들자 한숨을 쉰 스네이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와라."

달달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릴리아나가 스네이프에게 다가갔다. 그가 팔을 벌리자 무너지듯 그에게 안긴 릴리아나가 스네이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은은한 비누향이 났다. 그에게 안기자마자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흔들거리던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릴리아나가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리자 스네이프는 그녀의 자세를 고쳐 안았다. 릴리아나를 허벅지 위에 앉혀 놓고 등을 토닥거려주던 스네이프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 주문은 어둠의 마법이었다."

코를 훌쩍이며 펑펑 울던 릴리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저는 정말 그게……그런……"

"알겠다. 괜찮다."

그의 목소리에는 마음을 안심시켜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말포이가 갑자기……"

릴리아나가 훌쩍거리며 말하자 스네이프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진정해라."

"말포이는……말포이는 어떤가요?"

"괜찮을 거다. 디터니도 먹었고 응급처치도 되었으니 생명에 지장이 있진 않을 거다."

그가 여전히 훌쩍거리는 릴리아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흐트러지고 눈물에 의해 얼굴에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떼어주던 스네이프가 그의 서늘한 손을 릴리아나의 이마에 댔다.

"미열이 있는 것 같구나."

"요새 몸살기운이 있어서 그래요."

릴리아나가 그의 옷자락을 꼭 쥐며 말했다.

"약을 만들어 주겠다."

"괜찮아요. 이런 건 푹 자면 나아요."

"잠깐만 기다려라."

"괜찮은데……."

안고 있는 모양 그대로 릴리아나를 들어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혀준 스네이프는 천장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꺼내 순식간에 하늘색의 약물을 만들어냈다.

"마셔라."

"고맙습니다."

작게 감사의 인사를 중얼거린 릴리아나가 하늘색 약물을 받았다. 코끝을 찌르는 약초 향이 역했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릴리아나가 속이 울렁이는 것을 느끼며 스네이프와 약물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입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역해지는 약초 향에 겨우 삼킨 릴리아나가 만들어준 성의를 생각해 몇 번 마셨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속은 더욱더 매스꺼워졌다. 결국 릴리아나는 반도 마시지 못한 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해리 포터가 지니 위즐리와 사귄다는 소식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주로 여학생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스네이프의 징계 때문에 퀴디치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던 해리가 450대 140으로 그리핀도르가 이겼다는 말을 듣고 지니에게 키스를 했던 것이다.

많은 여학생들은 해리와 지니가 사귀는 것이 정말인지 그의 주위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물어보았고, 그것은 릴리아나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만 좀 물어봐!"

릴리아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해리와 지니가 정말로 사귀냐고 물어보러 온 후플푸프의 5학년 여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약까지 먹었지만 미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몸살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게다가 말포이에게 저주를 날렸던 날 이후로 계속 속이 매스꺼워 거의 먹은 것이 없다시피 한지라 저절로 까칠한 목소리가 나왔다. 두 여학생은 항상 상냥하고 친절해 보였던 릴리아나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비치자 놀란 것 같았다. 릴리아나 스스로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무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릴리아나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5학년 여학생들을 지나쳐 원래 목적이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릴리아나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무시했다. 요즘 따라 감정기복이 너무 심한 것은 알고 있었고,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뾰족한 감정들은 어쩔 수 없었다.

지하 감옥으로 내려와 스네이프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려던 릴리아나는 버럭 화를 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는 말포이와  마주쳤다. 순식간에 복도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말포이 역시 그녀를 발견했는지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게 누구야."

말포이가 속삭였다.

"그리핀도르의 '어둠의 마법' 양이 아니신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말포이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리핀도르의 잡종이 어둠의 마법에 손을 댈지는 몰랐는데 말이지. 그렇게 명예롭고 정의롭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그리핀도르가 말이야."

말포이가 특정 단어에 강세를 넣으며 그녀를 비웃었다.

"네 '세브'를 만나러 온 모양이지? 오, 걱정하지 마. 내 뒤에 있으니까."

말포이의 말대로 스네이프는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릴리아나를 괴롭히는 꾸준한 미열 때문에 잠시 행동이 느려진 동안, 말포이는 가볍게 릴리아나 손에 들린 양피지 조각을 낚아채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포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어둠의 마법에 손을 대려고 하는지는 몰랐는데. 제한 구역의 책은 왜 읽으려고?"

"……네가 상관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릴리아나 역시 차가운 목소리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양피지를 내려다보던 말포이는 거만하게 턱을 들더니 대답대신 잔뜩 비꼬는듯한 커다란 목소리로 스네이프에게 말했다.

"'세브' 교수님! 여기 당신의 '어둠의 마왕의 명령을 따르느라 억지로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아무것도 아닌 대용품'이 왔어요!"

말포이의 말을 들은 스네이프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피지를 쥐고 있지 않은 릴리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포이는 한쪽 입 꼬리를 쭉 올려 심술궂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내가 너무 크게 말했나?"

폭풍전야 같은 스네이프와 릴리아나의 사이를 빠져나온 말포이는 순수혈통의 면모를 보여주듯 우아하게 절을 하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비웃음을 가득 담고 있던 말포이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얼음 폭풍이 내리칠 것만 같이 차가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