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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왕자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혼혈 왕자-(17)
말포이는 사라졌지만 둘 사이의 침묵은 여전했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릴리아나는 스네이프의 얼굴에서 무엇이라도 읽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말포이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할 것인가, 아님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물어볼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릴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서명해 주세요."
릴리아나가 양피지를 내밀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스네이프는 양피지에 쓰여 있는 글씨를 읽었다.
"……헤스쿠스 조나레던트의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마법에 대하여?"
천천히 책 제목을 읽은 스네이프가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말포이에게 썼던 저주 때문에요. 어둠의 마법 방어술을 배우긴 하지만 그 저주는……정말 어둠의 마법이었잖아요. 어둠의 마법 방어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빌리고 싶은데 그 책이 제한 구역에 있대요."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기색이던 스네이프는 몸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릴리아나가 뒤따라가자 책상 위에 있는 깃펜을 들어 촘촘하고 깨알 같은 글씨로 서명을 한 스네이프가 양피지 조각을 돌려줬다.
"고맙습니다."
한참동안 양피지 조각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릴리아나는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네이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포이는 왜 저런말을 할까요?"
재미있다는 듯, 말도 안 된다는 듯 미소를 지은 릴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대용품? 아무것도 아닌 여자?"
말포이의 말은 모두 거짓이고 정도가 지나친 농담이라는 태도였다. 태연함을 가장한 릴리아나가 불안한 눈으로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설마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말 좀 해봐요, 세브."
스네이프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작게 시작했던 떨림은 점점 커져갔다.
"아니죠? 아니잖아요."
릴리아나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확연한 떨림이 드러났다.
"대용품이란 말은 저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말하는 거예요? 해리의 어머니? 해리의 어머니를 사랑했어요? 저는 그 대신이고요?"
지난 몇 개월간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았던 의문과 생각들이 지진이 난 것 같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릴리아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 그녀의 대신으로 보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는 거예요? 빨리 대답해 봐요 세브."
눈물에 젖어 반짝거리는 녹색 눈과 어둠 같은 까만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울지 마라."
어느새 릴리아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네이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릴리아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빨리 얘기해요. 왜 말포이의 말이 사실인 것 같이 굴어요. 제가 그 말을 믿기를 바라는 거예요?"
눈물을 닦아주려던 손 모양 그대로 멈췄던 스네이프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릴리아나."
간절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릴리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네이프는 여전한 그 얼굴을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걸 말로 해야 알겠느냐."
스네이프가 다시 손을 뻗어 릴리아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말을 믿나, 나의 말을 믿나. 날 믿어라."
스네이프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이 멍한 얼굴의 릴리아나를 품에 안았다. 그가 힘없이 늘어진 릴리아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품에서 나는 익숙한 그의 향기에 초점이 나간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릴리아나가 정신을 차린 듯 흐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심장이 떨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는 자신의 말을 믿으라 한다. 얼핏보면 달래주고 확신을 주는 말 같았지만 실상은 대용품이고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는 것에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그제야 릴리아나는 말포이가 말했던 스네이프에 대한 벨라트릭스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의 귀에 듣기 좋고 그럴듯한 이야기만 속살거리는 인간. 흐느끼던 릴리아나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양새였다.
"그, 그랬구나."
거짓말쟁이.
속으로 스네이프를 향해 중얼거린 릴리아나가 억지로 숨을 들이켜 눈물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럼 저는 가볼게요."
스네이프의 품에서 떨어진 릴리아나가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 조각을 구기듯이 잡았다.
"말포이의 말에 흔들리기나 하고. 미안해요. 저는 세베루스를 믿어요."
거짓말쟁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그리핀도르 기숙사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기숙사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쓰러지듯 무너진 릴리아나가 숨죽여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시야는 흐려지고 얼굴로 열이 몰려 뜨거워졌다. 최근 들어 먹은 게 거의 없는지라 머리가 핑핑 돌았다.
릴리아나는 스네이프에게 갖고 있던 신뢰가 어정쩡하게 깨져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완벽하게 신뢰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어둠의 마왕의 명령과 자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 깊숙하고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남아있던 자그마한 신뢰는 미약하게나마 손에 쥘 수 있었으나 그것으로 인해 배로 상처나버린 마음은 이미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
그날 이후 릴리아나는 스네이프를 찾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스네이프에 대해 남아있던 신뢰와 믿음이 깨지지 않으려는 행동과,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합쳐진 결과였다.
하지만 릴리아나 그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 보다 받았던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5월에서 6월로 달이 바뀌었지만 나아지기는 커녕 이제는 거의 모든 음식 냄새가 역했다. 그나마 넘길 수 있는건 부드러운 흰 빵이나 과일 주스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많은 양은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화풀이를 하듯 별것 아닌 일에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지고 끈질기게 괴롭히는 미열과 지끈지끈한 두통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잠을 자다 헤르미온느가 가지고 올라온 샌드위치 냄새에 단번에 무언가 올라오자 릴리아나는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부여잡고 먹은 것이 없어 위액만 토해내던 릴리아나는 간단하게 입을 행구고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로 나왔다. 걱정스럽게 화장실 근처를 서성이고 있던 헤르미온느가 단번에 그녀에게 달려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릴리, 너 요즘 무슨 일 있니?"
"……별거 아니야."
어느새 샌드위치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헤르미온느가 무슨 마법을 썼는지 냄새 역시 사라져 있었다. 기진맥진한 릴리아나가 침대에 드러눕자 그 옆으로 온 헤르미온느가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던 헤르미온느가 그녀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왕자의 주문-머플리아토-를 기숙사 방문에 걸은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릴리, 저기……오해하지 말고 들어. 난 정말 궁금한 것뿐이야."
릴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헤르미온느를 바라보았다. 헤르미온느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너……마지막 생리는 언제였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 릴리아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헤르미온느가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봐. 내가 너무 나가는 걸 수도 있는데……. 너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고……. 계속 역하다고 음식을 못 먹는 거나……미열이 떨어지지도 않고 몸살 기운에다가 최근 들어 잠도 많아지고 별것 아닌 일에도 예민해지고……"
헤르미온느가 릴리아나의 눈치를 보며 말하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릴리아나는 뒤통수를 누군가 내리친 것 같은 충격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릴리아나가 불안한 얼굴로 침대시트를 꽉 쥐자 헤르미온느가 창백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혹시……."
"……헤르미온느."
릴리아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헤르미온느를 불렀다.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뜬 헤르미온느가 릴리아나를 꼭 껴안았다.
"나 어떡하지?"
그저 가정일 뿐이었는데도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막막하고 두려운 느낌에 릴리아나가 덜덜 떨며 묻자 헤르미온느가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그래…….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닐 거야."
릴리아나가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릴리아나가 알고 있는 방법은 머글들의 방법뿐이었고 그마저도 자세한 사용 방법은 몰랐다. 머글 태생인 헤르미온느도 마찬가지 일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헤르미온느는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거려주며 속삭였다.
"나도 마법세계의 방법은 모르겠어. 일단 스네이프에게 가서 말해 봐. 지금 이러이러한데 어떤 식으로 확인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교수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계시겠지."
헤르미온느의 말을 듣던 릴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릴리아나가 놀란 얼굴로 헤르미온느를 바라보자 그녀는 멋쩍은 듯 말했다.
"눈치 챈 지는 오래 됐어. 네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서 조용히 있었던거지."
헤르미온느가 파렴치한, 나쁜, 고블린, 멀린의 수염에 맹세컨대, 망할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 같았지만 릴리아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좀 누워 있어. 내가 지하 감옥에 갔다 와볼게."
스네이프에 대한 욕을 끝낸 후 안심을 시켜주듯 릴리아나의 손을 한 번 더 꽉 잡은 헤르미온느가 발걸음을 옮겼다. 헤르미온느마저 사라지고 나자 찾아온 적막은 무시무시했다. 이불에 손자국이 남도록 꽉 쥐며 입술을 깨물던 릴리아나가 자신의 배에 손을 대었다가 불에 덴 것 같이 화들짝 놀라며 떼었다. 별 다를 것 없이 평평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만드는 불안감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찰나 같기도 하고 몇 년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헤르미온느가 돌아왔다. 릴리아나가 쥐고 있던 이불을 내리며 불안하면서도 간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헤르미온느는 고개를 저었다.
"가 봤는데 안계셨어. 혹시 몰라서 교무실에 가봤는데 아침부터 스네이프 교수님은 안보였다고 플리트윅 교수님이 그러시더라."
한층 더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릴리아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자 헤르미온느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확실한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스트레스를 받으면 주기가 늦어지기도 하잖아. 그리고 스네이프는 밤에 찾아가 보자. 그때쯤이면 돌아와 있겠지."
"그렇지. 그렇……지."
릴리아나가 중얼거렸다.
"일단 내려갈래?"
헤르미온느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릴리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숙사 침실에서 내려오자 휴게실에는 론이 앉아 있었다.
"릴리!"
릴리아나를 발견한 론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릴리아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헤르미온느와 릴리아나가 소파에 앉자, 론은 해리가 방금 덤블도어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교장실로 오라는 두루마리를 받고 교장실에 갔다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교수님께서……그걸 찾으신 것 같아."
론이 속삭였다. 론과 헤르미온느는 호크룩스가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식으로 파괴를 하는 것인지 같은 호기심에 가득 찬 대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릴리아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아무래도 통금 시간이 되고 나면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니 해리의 투명망토를 빌려서 신중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차근차근 하자 불안했던 마음은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해리가 휴게실로 돌아왔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잔뜩 화가 난 채로 씩씩거리며 돌아오자 헤르미온느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해리, 너 괜찮니?"
"난 괜찮아."
해리는 짧게 한마디 던지고 그대로 달려갔다.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침실로 들어간 그는 잠시 후 물건들을 가지고 내려왔다.
"시간이 별로 없어."
해리가 숨을 헐떡였다.
"해리, 저기……."
"릴리, 미안해. 덤블도어 교수님께서……"
해리는 급해보였지만 마찬가지로 급했던 릴리아나는 해리의 말을 잘랐다.
"혹시 오늘 밤에 투명망토를 빌려줄 수 있니?"
"투명망토를?"
해리의 얼굴이 의외라고 말하는 듯 했다.
"미안해, 덤블도어 교수님께서 투명 망토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거든. 갔다 오고 나서 빌려줘도 괜찮을까?"
릴리아나가 입안 여린 살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