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타임-91화 (9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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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왕자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혼혈 왕자-(19)

따뜻한 온기가 계속해서 얼굴에 닿았다. 그 온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눈을 뜬 릴리아나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듯 여러 번 눈을 깜빡거렸다. 눈물을 흘렸었는지 눈가가 뻑뻑했다. 창밖에는 이미 주홍빛 노을이 깔려 있었다. 하얀 천장, 하얀 벽, 희미한 소독약 냄새. 병동 같았다. 하지만 호그와트의 것은 아니었다. 살며시 고개를 돌린 릴리아나는 자신의 팔에 꽂혀있는 우악스러운 주사바늘과, 바늘과 연결된 투명한 액체가 든 봉지를 바라보았다.

"릴리! 릴리! 정신이 좀 드니?"

릴리아나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던 헤르미온느의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멍한 정신 때문에 흐린 눈으로 헤르미온느를 바라보고 있던 릴리아나가 입안이 메말라 잔뜩 갈라진 껄끄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병원이야?"

눈물 젖은 얼굴의 헤르미온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어째서 호그와트의 병동이 아니냐고 물어보려던 릴리아나가 기절하기 직전 배에서 느껴졌던 엄청난 고통을 기억해내고 두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가씨!"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아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세바스찬이 릴리아나를 껴안았다. 등을 토닥거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던 릴리아나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세바스찬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물기 젖은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괜찮아요."

"크흠."

그들의 뒤로 낯선 남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세바스찬에게서 떨어진 릴리아나가 그의 어깨 너머로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를 발견하고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퀸 씨?"

헛기침 소리의 주인공이 릴리아나를 불렀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물기 젖은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레인저 씨의 말로는 낙마 사고를 당하셨다고……. 임신한 상태신데 그런 활동을 하시다니, 모르셨습니까?"

의사의 질문에 릴리아나가 숨을 헉 소리 나게 들이키며 불안한 눈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그녀의 손을 꽉 잡아줄 뿐이었다.

"이미 보호자 분들께는 말을 해놓긴 했지만……. 7주정도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의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깜빡이던 릴리아나가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세바스찬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토닥이고 있었다.

"파트너……크흠. 파트너 분이 좋아하시겠군요."

의사가 세바스찬을 파렴치한 보듯 살짝 노려본 후, 다음날 몇 시부터 어떤 검사를 받게 될 것인지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릴리아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의사가 한 번 더 세바스찬을 노려본 후 방을 나갔지만 셋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졸지에 —머글 세계 기준으로— 미성년자를 임신시킨 파렴치한으로 의심을 받게 된 세바스찬이었지만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마침내 릴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 날로부터 얼마나 지난거야?"

"이틀정도."

헤르미온느가 간이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너한테 가보라고 한 뒤에 뭔가 불안해서 뒤따라 가봤거든. 그런데 너는……."

헤르미온느는 적당한 단어를 찾는 듯 했다.

"쓰러져 있고 해그리드는 기절한 해리와 너를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고……. 폼프리 부인이 고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성 뭉고 병원도 안 될 것 같아서 플루가루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머글들의 응급실로 왔어."

"그랬구나……. 고마워."

고개를 숙이며 작게 인사를 한 릴리아나가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그럼……누가 더 알고 있어?"

"지금은 나랑 세바스찬 씨. 해그리드는 어두워서 그런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더라."

"그래……?"

릴리아나가 중얼거렸다. 헤르미온느는 간단하게 그녀가 쓰러져 있던 이틀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기 시작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말을 하던 헤르미온느가 전혀 듣는 것 같지 않은 릴리아나의 얼굴에 안쓰럽다는 듯이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주었다.(영국의 병원은 면회 시간 이후에는 보호자도 출입할 수 없다)

"그럼 나는 가볼게 릴리."

헤르미온느가 다시 한 번 세게 그녀를 안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르미온느가 떠나고 나자 세바스찬은 그녀가 앉아 있던 간이 의자에 앉아 릴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세바스찬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듯 몇 번 입을 벙긋거렸으나 이내 입을 다물고 릴리아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지금은 우선 회복하는 것에만 신경 써요."

"면회시간 끝났다니까요!"

간호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세바스찬이 릴리아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져 준 뒤 병동을 나섰다. 헤르미온느와 세바스찬마저 가버리고, 간호사까지 사라지자 릴리아나 홀로 남은 병동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노을이 찾아왔던 창밖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 밖에 희미하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있었다. 가정이 확신이 되자 모든 것이 막막해 보였다. 예상하지도 못했던지라 불안하고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전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스네이프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모욕적인 말을 던지며 그녀를 떠났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과 두려움에 릴리아나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잘게 어깨를 떨던 릴리아나에게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요한 적막과 차가운 공기와 홀로 남았다는 불안감과 앞으로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에 눈물을 끊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어둠 속 어디에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아나는 한 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고 구슬픈 노래였다. 오랫동안 흐느끼고 있던 릴리아나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난간에 어둠속에서도 확연한 붉은빛을 드러내고 있는 새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릴리아나는 홀린 듯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붉은 새가 병동 안으로 들어와 빙글빙글 날며 구슬프고 처연한 노래를 불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서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일까. 비통함을 담은 노래를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붉은 새는 날면서 노래하던 것을 멈추고 내려와 간이 의자 위에 앉았다. 릴리아나는 그 새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불사조……."

덤블도어의 불사조, 퍽스였다. 퍽스는 릴리아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부리를 딸깍거렸다. 릴리아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불사조의 깃털을 만졌다. 깃털은 마치 불에 갓 구워진 빵처럼 따끈따끈했다.

어렸을 적 불사조를 갖고 싶어 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 날의 추억에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릴리아나는 그것에 스네이프가 끼어있다는 것을 알고 미소를 지웠다. 머릿속으로 지금보다 젊었던 그와 어린 자신의 모습과 대화가 스쳐지나가자 릴리아나는 입안 여린 살을 깨물며 또 다시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 퍽스는 슬픔이 느껴지는 작은 얼굴을 푹 숙이며 릴리아나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얼떨결에 퍽스를 안은 릴리아나는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끈한 온기 때문인지 아님 그녀가 모르는 불사조의 능력 때문인지 온 몸을 지배하고 있던 불안한 한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누군가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았다.

"……같이 있어줄래?"

불사조가 그녀의 말을 수락하듯 가볍게 울었다. 릴리아나는 침대에 주저앉듯이 앉으며 불사조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그렇게 따뜻하고 든든한 온기를 텅 비어버린 심장에 넣으려는 것처럼 그녀는 한참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

퇴원을 한 릴리아나는 덤블도어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다시 호그와트를 보니 그날의 일이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장례식에는 덤블도어의 생전 명성을 알려주듯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수수한 검은 망토를 입고 머리숱이 많은 자그마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덤블도어의 시신 앞에서 '고귀한 영혼'이라던가 '지적인 공헌'이라던가 '진정한 위대함'같은 단어를 띄엄띄엄 섞으며 추도사를 마쳤다.

덤블도어의 장례식이 끝난 후 잠시 지니와 사라졌던 해리는 루퍼트 스크림저에게 잡혔다가 단호한 얼굴로 론과 헤르미온느, 릴리아나가 기다리고 있는 너도밤나무 그늘 아래로 다가왔다.

"스크림저가 무슨 요구를 했어?"

헤르미온느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 요구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어."

해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 덤블도어에 대한 내부 정보를 알려 주고, 나더러 마법부의 새로운 마스코트가 되어 달라는 거야."

론은 한동안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걸 애써 참는 것 같더니 마침내 큰 소리로 헤르미온느에게 외쳤다.

"아무래도 당장 돌아가서 퍼시를 한 대 때려 줘야겠어."

"안 돼."

헤르미온느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분이 풀릴 거 같아!"

해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헤르미온느와 릴리아나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성을 올려다보는 릴리아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헤르미온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호그와트가 문을 닫을 수 있지?"

"어쩌면 안 그럴 수도 있어."

론이 위로했다.

"우리가 집에 있다고 해서 여기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한 건 아니야, 안 그래? 이젠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솔직히 호그와트가 훨씬 더 안전할 수도 있어. 이 성 안에는 이곳을 지키는 마법사들이 더 많으니까 말이야. 네 생각은 어때, 해리?"

"학교가 다시 문을 연다고 해도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해리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론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지만, 헤르미온느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니?"

"우선은 더즐리네 집으로 돌아가야지. 덤블도어 교수님께서 그러길 원하셨거든."

해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주 잠시 동안만 머물러 있다가 영원히 떠나 버릴 거야."

"학교로도 안 돌아온다면서 그럼 어디로 가려고?"

"고드릭 골짜기(해리의 부모님이 볼드모트를 피해 숨었던 머글 마을)를 찾아가 볼 생각이야."

해리가 중얼거렸다.

"나로서는 그곳에서부터 이 모든 일이 시작된 셈이니까. 어쩐지 그곳에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갈 수도 있겠지."

"그런 다음에는 뭘 할 건데?"

론이 물었다.

"그런 다음에는 나머지 호크룩스들을 찾아다녀야지, 안 그래?"

해리는 이렇게 말하며 호수 반대편 수면에 비친 덤블도어의 하얀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게 덤블도어 교수님께서 내가 하길 원하셨던 일이야. 그래서 나에게 호크룩스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 해 주셨던 거야. 만약 덤블도어 교수님의 생각이 옳았다면……난 분명히 그분이 옳다고 확신하지만……아직도 저 바깥 어딘가에는 나머지 네 개의 호크룩스가 남아 있어. 난 그것들을 찾아서 없애 버려야만 해. 그런 다음 볼드모트의 일곱 번째 영혼 조각을 추적해야만 하겠지. 아직 그자의 몸속에 들어 있는 것 말이야. 내 손으로 그자를 없애 버리겠어. 그리고 만약 그러는 도중에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만나게 되면……."

해리가 덧붙였다. 릴리아나의 어두웠던 얼굴이 칠흑같이 물들었다.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고, 그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불운이 되겠지."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우리도 갈게."

론이 불쑥 말했다.

"뭐라고?"

"네 이모와 이모부 댁에 말이야."

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너와 함께 갈 거야."

"안 돼!"

해리가 얼른 말했다.

"네가 전에도 한 번 우리에게 말한 적이 있었어."

헤르미온느가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가 원한다면 되돌릴 시간이 있다고 말이야. 우리는 충분히 그 시간을 거쳤어, 안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론이 다짐했다. 론이 동의를 구하듯 릴리아나를 바라보자 잠시 망설이던 릴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는 안 될 것 같아."

"뭐?"

론이 경악한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론……."

헤르미온느가 론을 나무라듯 말하자 론은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릴리아나는 어둡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어째서 함께하지 못하는 지를 설명했다. 해리의 얼굴에는 경악이 드리워졌고 론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새빨개졌다.

"내가 그 개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론이 심한 욕설을 덧붙이며 무엇이라 욕했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릴리아나는 얼굴에서 어두움을 몰아내려고 하며 밝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거야."

"고마워. 나도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할게."

해리의 얼굴에는 여전히 경악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침내 길고 긴 욕을 끝낸 론이 덧붙였다.

"나도 있어."

"나도."

헤르미온느 역시 덧붙였다. 릴리아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불사조를 안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불안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미래에 버틸 수 있다고 힘을 내라고 친구들이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

릴리아나가 목이 메는 것을 헛기침 소리와 함께 감추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줌과 함께 떠나버렸지만 릴리아나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 남아 있었다. 울컥하고 솟구치는 감정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릴리아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혼혈 왕자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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