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타임-92화 (9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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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성물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죽음의 성물-(1)

달빛이 비치는 좁은 오솔길, 한 남자가 허공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지팡이를 들고 다른 이가 있는지 경계하던 남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자 지팡이를 다시 망토 속에 집어넣었다가, 그곳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다른 물건에 지팡이 끝이 걸리자 남자는 반대편 망토 속에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남자, 세베루스 스네이프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솔길 왼쪽에는 낮게 자란 야생 가시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말끔하게 손질한 산울타리가 높이 솟아 있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스네이프의 긴 망토 자락이 발목 근처에서 펄럭거렸다. 스네이프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가 달빛을 가릴 때마다 흐릿한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다.

이윽고 오른쪽으로 돌아선 스네이프의 앞에 저택으로 이어지는 진입로가 나타났다. 역시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높은 산울타리는, 길을 가로막고 우뚝 선 화려한 문양의 철 대문을 지나서 안쪽으로 한없이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하듯 왼쪽 팔을 번쩍 치켜들더니 마치 어두운 철문이 연기로 변해 버린 것처럼 곧장 통과해 버렸다.

빽빽이 들어선 주목나무 울타리가 스네이프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의 오른편에서 새하얀 공작새가 산울타리 위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걷고 있었다.

곧게 뻗은 진입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마름모꼴 유리를 끼운 아래층 창문에서 불빛들이 반짝였고, 산울타리 너머 어두운 정원 어딘 가에선 분수가 물을 내뿜고 있었다. 스네이프가 현관문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는 자갈이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현관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하지만 문을 열어 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불이 밝혀진 현관 복도는 아주 넓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는데, 대리석 바닥 대부분이 근사한 양탄자로 뒤덮여 있었다. 벽에 걸린 파리한 얼굴의 초상화들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스네이프를 계속 주시했다. 스네이프는 옆방으로 통하는 육중한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망토 안에 넣어둔 물건을 한번 세게 움켜쥐었다가 마침내 청동 손잡이를 돌렸다.

응접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긴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방에 있던 다른 가구들은 아무렇게나 벽 쪽으로 밀쳐져 있었다. 금박을 입힌 거울이 놓인 웅장한 대리석 벽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희미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스네이프는 잠깐 동안 문간에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어둠에 차츰 익숙해지자, 방 안에서 가장 기묘한 광경 쪽으로 시선이 저절로 올라갔다. 분명 의식을 잃은 듯한 한 사람이 테이블 위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투명한 밧줄이 그자를 매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거울과 밑에 놓인 테이블의 매끄러운 표면에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 이상한 광경을 쳐다보지 않았다. 딱 한 명,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바로 밑에 앉아 있는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만 예외였다. 그는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듯, 거의 1분마다 힐끗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스네이프."

테이블 머리 쪽에서 날카롭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늦었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벽난로 바로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방금 방에 들어온 스네이프의 눈에는 한동안 검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이 점차 드러났다.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고, 콧구멍은 가느다랗게 뚫렸으며,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진 새빨간 눈이 번뜩거리는 것이, 꼭 뱀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낯빛이 어찌나 창백했던지 마치 진주처럼 뿌연 광택을 발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스네이프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를 바라보던 볼드모트는 잠시 어떤 벌을 줄 것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호의를 발휘하여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세베루스, 이리로."

볼드모트가 자신의 바로 오른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네이프는 지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스네이프를 뒤쫓았다. 볼드모트가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도 바로 그였다.

"어떻게 됐지?"

"주인님, 불사조 기사단은 다음 주 토요일 해질녘에 해리 포터를 현재의 은신처에서 이동시킨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술렁였다. 어떤 이는 몸을 꼿꼿이 세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시선은 오직 스네이프와 볼드모트에게로 쏠려 있었다.

"토요일……해질녘이라……."

볼드모트가 되뇌었다. 그러더니 새빨간 눈으로 스네이프의 까만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고 무시무시하던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중 몇몇은 슬며시 눈을 돌렸다. 자신들도 그 소름 끼치는 시선을 마주하게 될까 봐 벌벌 떠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어떤 동요도 없이 볼드모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입술이 없는 볼드모트의 입이 살짝 벌어지면서 미소 비슷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좋아. 훌륭해. 이런 정보는 어디서……."

"전에 말씀드렸던 그 정보원으로부터 얻었습니다."

스네이프가 대답했다. 볼드모트의 얼굴에 있던 미소 비슷한 모양이 더욱 짙어지더니 뱀처럼 동공에 세로로 쭉 찢어진 붉은 눈이 번뜩였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볼드모트가 벌어진 입의 뾰족한 부분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 테이블에서 킥킥거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잡종 계집을 말하는 것이냐?"

이번에는 더욱 큰 비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스네이프의 얼굴에는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해 보거라, 세베루스."

"아닙니다, 주인님."

스네이프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하긴 그 잡종 계집과는 관계가 끊긴지 꽤 되었겠군."

볼드모트는 마치 방금 깨달은 사실처럼 이야기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아쉽더냐, 세베루스."

볼드모트가 뱀처럼 나긋하면서도 차갑게 속삭였다.

"18년 전 네가 그렇게도 살려달라고 빌었던 잡종 계집과 똑같이 생긴 계집이 네 눈앞에 나타났는데 다시 헤어지지 않았느냐."

벨라트릭스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웃음을 터트릴 때마다 왼쪽 얼굴에 난 기다란 흉터가 씰룩거렸다.

"아닙니다."

스네이프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라고?"

볼드모트가 붉은 눈을 뱀처럼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는 딱딱한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스네이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안타깝구나, 세베루스. 네가 내게 말했던 것 치고는 그렇게 많은 정보를 빼내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되면 볼드모트 경은 덤블도어가 부르짖고 다니는 '사랑'이라는 불치병이 그대에게 다시 찾아 왔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스네이프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게다가……."

볼드모트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진 빨간 눈이 드레이코 말포이를 향했다. 겁먹은 듯 거꾸로 매달린 채 의식을 잃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말포이가 화들짝 놀라며 볼드모트를 바라보았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 있는 드레이코의 말로는 이 볼드모트 경의 명령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하던데 말이지."

볼드모트와 스네이프의 시선이 동시에 말포이에게 향했다. 말포이는 두 사람의 시선을 갑자기 받게 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말해보아라, 드레이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말포이는 두려운 듯 입술을 꾹 깨문 채로 그의 아버지, 루시우스 말포이를 바라보았다가 그의 어머니 나시사 말포이를 바라보았다. 나시사 말포이는 꼿꼿하게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테이블 밑으로 창백한 손을 뻗어 드레이코 말포이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네가 본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모습은 어떻더냐. 덤블도어가 그러게도 말하던 '사랑' 같더냐."

침을 꿀꺽 삼키며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던 말포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왼 얼굴에 난 기다란 흉터를 씰룩거리며 입이 찢어져라 스네이프를 비웃던 벨라트릭스가 감정을 잔뜩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님. 제가 계속해서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볼드모트의 시선이 벨라트릭스에게로 향하자 드레이코 말포이는 다시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서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 잡종 계집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젖비린내 나는 포터의 친구라 그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니요. 그전에 포터의 어미와 똑같이 생긴 잡종 계집의 얼굴을 보고 흔들릴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벨라트릭스, 내가 얻은 정보는 유용하게 쓰였던 것 같은데 말이지."

스네이프가 벨라트릭스의 말을 끊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벨라트릭스의 기다란 흉터가 한층 더 일그러지더니 그녀는 더욱 빠르게 볼드모트를 향해 속삭였다.

"주인님, 저는 그 잡종 계집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볼드모트가 내기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쉭쉭거리는 뱀처럼 속삭였다.

"세베루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잠시 벨라트릭스를 바라보던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게는 벨라트릭스가 저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그 여자가 그녀의 얼굴에 저런 흉터를 내 주어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스네이프가 한쪽 입 꼬리를 보일 듯 말듯 하게 올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저 흉터가 그녀의 얼굴을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벨라트릭스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뻘게졌다.

"아님 그 흉터가 어떠한 마법으로도 지워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자신의 실력에 미치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던 나약한 머글 혈통에게 그렇게 방어할 틈도 없이 당해서?"

스네이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음을 먹는 자들 사이에서 간간히 킬킬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벨라트릭스가 모욕을 당하는 꼴을 보고 신이 난 것 같았다. 벨라트릭스가 이를 악물며 무시무시하게 눈을 번뜩였다.

"그 입 닥쳐, 세베루스 스네이프."

벨라트릭스가 차갑게 명령했다. 입을 열려던 스네이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주인님, 그 계집을 죽이십시오. 분명 스네이프는 그년의 얼굴에 휩쓸려서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일을 망칠 겁니다."

"벨라."

"주인님 제발……."

"그만 벨라."

벨라트릭스가 간절한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쭉 빼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볼드모트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볼드모트는 손을 올리며 그녀를 제지했다. 벨라트릭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세베루스."

볼드모트가 나긋하지만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네가 그 대용품 잡종 계집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구나. 덤블도어가 항상 운운하던 '사랑'이라는 것은 고쳐지지 못하는 병 같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지. 볼드모트 경도 네가 그 '사랑'이라는 멍청한 감정에 휩쓸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씩씩대던 벨라트릭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주인님,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그 여자는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네이프의 단호한 말에 볼드모트의 얼굴에서 미소 비슷한 일그러짐이 생겨났다.

"그래……그렇단 말이지……."

스네이프를 바라보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느리게 툭툭 치던 볼드모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잡종 계집을 어떻게 처리하든 신경 쓰지 않겠구나."

잠시 침묵하던 스네이프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주인님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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