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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타임(Rotten Time)
로튼 타임(Rotten Time)
Written by. 아르카나
로튼 타임(Rotten Time)-(4)
새벽과 아침의 중간, 스네이프는 코끝을 간질이는 촉촉한 이슬냄새를 맡으며 햇살이 그리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밝은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헤르미온느 그레인저가 알려준 주소를 따라 가다보니 영국과 프랑스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이 한적한 마을에는 동이 터오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마을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거침없던 그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은 아닐까, 꿈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스네이프의 발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그는 지팡이로 방수마법을 쓰려 하다가 머글들의 세계에 나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근처에 있는 머글 집에서 소환마법으로 우산을 잠시 빌렸다. 우산을 쓰고 난 후에야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우산을 돌려놓을까 고민했지만, 이미 갖고 있는 우산을 또 다시 마법을 써서 돌려놓기에는 머글 세계에서 너무 많은 마법을 쓰는 것 같아 돌려놓기를 포기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담하고 평화로운 마을은 예상보다 넓었다. 그레인저가 알려 준 주소를 작게 중얼거리며 걷던 스네이프는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집에 조금씩 길을 헤매가며 집을 찾았다.
마을에 끝자락에 도착하자 그의 앞에는 푸르른 숲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스네이프는 길을 잘못 든 것인지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곳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을 때 마다 부드러운 흙의 조용한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한참을 걸으며 오솔길의 끝에 도착하자, 아담한 이층집이 나왔다. 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는 낮은 대문 앞에서 멈춰 섰던 스네이프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문까지의 거리는 몇 발자국 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한 스네이프는 새하얀 문을 두드렸다. 똑똑-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Qui est-ce(누구세요)?"
집 안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가 목이 뜨거운 무언가로 콱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집 안에 있던 여자가 다시 한 번 물었다.
"Qui est-ce? Madame Leroy?(누구세요? 르루아 부인?)"
발걸음 소리가 문 쪽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스네이프가 미처 반응을 하기 전에, 새하얀 문이 열리더니 원피스 같은 형식의 새하얀 잠옷을 입고 하늘색 가디건을 걸친 금발머리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스네이프는 릴리아나를 보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머리색과 분위기가 바뀐 탓에 그가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랐지만, 스네이프는 한눈에 릴리아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빠르게 뛰고 있던 그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가 우산을 투둑투둑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아나의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이 놀람으로 커다랗게 떠지더니 이내 증오를 품었다. 릴리아나가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꿈속에서나 그리던 그 모습이 나타나자 말문이 막혀버렸던 스네이프는 이것이 환상인가 꿈인가 싶어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눈을 감는 순간 이대로 릴리아나의 모습을 놓칠까 싶어 후회했지만 눈을 뜬 후에도 여전히 스네이프의 앞에 존재하고 있는 릴리아나의 모습에 스네이프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나는……."
스네이프가 목이 막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릴리아나가 여전히 신랄하게 물었다.
"됐어요. 헤르미온느가 알려주었겠지요. 아니면 해리나 론. 여기 주소를 아는 사람은 그 애들뿐이니까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의 시간 끝에 스네이프가 물었다.
"……할 말이 있다."
"나는 당신에게서 들을 말이 없어요."
릴리아나의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쿵쿵 뛰었다. 이 상황을 끝내고 싶으면서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알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했다. 바로 그때 위층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아나는 스네이프를 흘끗 바라보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현관 옆에 세워둔 스네이프는 현관에서 못 박힌 듯 멈춰서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집 안은 안주인의 취향대로 꾸며놓았는지 밝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곳곳에 놓여 있는 금방 꺾어온 듯한 싱싱한 꽃이 꽂힌 화병들이 창가에 조르륵 놓여 있었고, 집안 곳곳에서는 아기의 물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간 릴리아나는 칭얼거리고 있는 세비나를 안아들었다. 그러자 아기는 금세 엄마의 품 안에서 안정을 찾았다.
"깼니, 이브?"
릴리아나가 세비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면서 말했다. 세비나가 엄마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방긋 웃었다.
"오늘은 엄마가 안 올라와서 부른 거니?"
평소라면 침대에 얌전히 누워 모빌을 바라보며 손을 쪽쪽 빨고 있었을 세비나는 엄마가 올 시간인데도 오랫동안 오지 않자 릴리아나를 칭얼거림으로 부른 듯 했다. 세비나를 토닥거리며 기저귀를 확인한 그녀는 새로운 기저귀로 갈아준 다음 다시 아기를 안아들었다. 요즘 입이 트인 세비나는 하루 종일 옹알거리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방싯방싯 웃음을 터트렸다.
"배고프지? 엄마가 금방 맘마 만들어 줄게."
"으우 꺄아!"
영국에서 프랑스로 오고 난 이후 세비나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아침에 봤을 때와 저녁에 봤을 때가 다른 것 같을 정도였다. 릴리아나의 품에 안겨 내려오며 인형 같은 세비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자 릴리아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만큼은 스네이프에 대해서 잊을 수 있었다.
"그랬어?"
"꺄하!"
"그랬었구나."
아기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아래로 내려온 릴리아나는 능숙하게 분유를 탔다. 스네이프의 시선을 무시하며 손등에 분유를 떨어뜨려 온도를 확인한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젖병을 물렸다.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과 그보다 작은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이 마주쳤다. 세비나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맛있어?"
세비나가 옹알거리며 방긋 웃었다. 릴리아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세비나가 분유를 다 먹을 때까지 스네이프에게 시선도 주지 않던 릴리아나를 아기를 트림시킨 후, 졸려하는 아기의 등을 토닥이며 아직도 현관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스네이프를 보고 작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안가고 있었어요?"
"……할 말이 있다."
"……빨리 말하고 이 집에서 나가요."
릴리아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천천히 걸어온 스네이프가 맞은편 소파 옆에 멈춰 섰다. 세비나는 배가 부른데다 포근한 엄마의 품에 안겨 있으니 다시 나른해지는 듯 했다. 이윽고 아기가 잠에 들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기를 내려다보던 릴리아나가 아기를 소파 옆에 있던 간이침대에 세비나를 옮기고 나자 그 얼굴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조용하면서도 싸늘하게 물었다.
"할 얘기가 뭔데요, 스……네이프."
릴리아나가 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로 항상 세베루스라고 불러왔던 것을 그만두고, 어색하지만 스네이프라고 발음하자 그는 조금 놀란 듯 했다.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것이 역겹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그답지 않게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스네이프의 물음에 릴리아나가 잔뜩 비꼬며 대답했다.
"무난했어요. 죽음을 위장해서 프랑스로 오기 전까지 집 밖에는 죽음을 먹는 자들이 가득하고, 그 덕분에 항상 퍽스와 순간이동을 해야 했죠."
릴리아나가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머뭇거리던 스네이프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기는……."
"이브에게는 아빠가 없어요. '내' 아이라고요. 당신 아이 아니니까 역겹게 '우리'라는 말 따위 붙이지 말아요."
릴리아나가 사납게 대답했다.
"나에게 폭언이란 폭언은 다 퍼부어놓고 떠났으면서 왜 찾아온 거예요?"
"……보고 싶었다."
"내가요?"
릴리아나가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열었다.
"왜요, 해리의 어머니의 대용품이 사라지니까 그토록 보고 싶어 미치겠던 가요? 똑같은 얼굴, 비슷한 이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았을 텐데 대용품마저 사라지니까 아쉽던가요?"
"그런 것이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고요? 역겹게도 착각하고 있다면서요. 대용품, 아무것도 아닌 여자이라면서요. 더러운 잡종을 사랑했을 리가 없다면서요."
릴리아나가 점점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이를 악물었다.
"난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아닐 거야. 아니겠지. 날 대용품으로 생각할 리가 없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요.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그런데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하고 떠났죠. 그것 때문에……그 때문에 이브를 잃을 뻔 했다고요. 그런데 보고 싶었다고요?"
릴리아나가 차오르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며 비웃었다.
"웃기지마요. 무슨 생각이 들어서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이 집에서 꺼져요. 세바스찬이 대학 친구를 만나러 가서 이 자리에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요. 세바스찬이 여기 있었다면 당신을 죽이려고 했을 테니까."
"미안하다."
"당장 꺼지란……."
"아나."
스네이프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릴리아나를 불렀다. 그녀는 그 호칭에 놀라 잠시 말을 멈췄다. 스네이프가 맞은편 소파에서 릴리아나의 옆으로 걸어오더니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미안하다. 사정이 있었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다. 정말……나는……."
"난 대용품이 아니에요."
릴리아나가 작게 속삭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난 대용품이 아니라고요, 세베루스 스네이프. 당신이 이런다고 내가……."
스네이프의 검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릴리아나가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난 릴리 포터의 대신이 아니에요."
"알고 있다."
"난……. 뭐요?"
릴리아나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너는 릴리 포터가 아니다. 전혀 비슷하지도, 닮지도 않았다."
스네이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한때 릴리 포터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신으로 대했던 것도, 겹쳐 보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스네이프가 천천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 대신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그러자 그의 지팡이 끝에서 은빛 불사조가 튀어나왔다. 입안 여린 살을 깨물며 그것을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눈물을 삼키려고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요? 나에게 대용품이니 아무것도 아닌 여자이니 잡종이니 온갖 폭언은 다 퍼부어놓고 떠났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릴리 포터가 아니라고 하면, 패트로누스를 불러내면 내가 뭐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때 당시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생각했던 최악이지만 최선인 방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상황을 돌이킬 수 없었어. 나에 대한 미련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했기에 상처받은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렸었다. 정말 미안하……."
"당신에 대한 미련 없이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길 원했다고요. 그러면, 그러면, 왜!"
릴리아나가 스네이프의 말을 끊으며 소리를 쳤다가 잠들어 있는 세비나가 깰까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났어요.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나기 원했다면서요. 왜, 도대체 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던 릴리아나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복합적인 감정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쳐 온 몸을 잠식하는 것 같았다. 양손에 얼굴을 묻은 릴리아나가 숨을 죽이며 펑펑 눈물을 쏟자 스네이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릴리아나의 옆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릴리아나가 앙칼지게 외치며 물기 가득한 눈으로 스네이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려고 내게 그런 말을 했으면, 나를 떠났으면, 괴롭게 했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왜!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서……."
릴리아나가 스네이프의 셔츠를 구겨지도록 잡으며 원망스럽다는 듯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몇 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를 때리던 릴리아나가 힘없이 손을 내리며 셔츠를 구겨지도록 잡았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서럽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스네이프가 조심스럽게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번에 그녀는 저항 없이 안겼다. 릴리아나는 그의 품에 안겨 눈물로 그의 검은색 셔츠자락을 더욱 까맣게 물들였다.
여전했다. 커다랗고 포근한 품은, 은은하게 났던 비누 냄새는, 빠르게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의 울림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너무나 힘들었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려져서 괴로웠고, 그로 인해 나비효과처럼 나타나게 된 일들로 인해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어 미안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화가 났었다. 그동안 내색하지 못했던 심정이 빠르게 고동치며 눈물로 변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스네이프가 울고 있는 릴리아나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릴리아나가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것을 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삼켰다.
"다시는, 다시는 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 행복하게 해줄게."
스네이프가 릴리아나를 품 안에 가득 채우며 더욱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녀의 대신은 필요 없어. 나는 단 한사람. 네가, '아나'가, 당신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눈물이 뿌옇게 앞을 가렸다. 서러운 울음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발 옆에 있어줘. 난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스네이프가 릴리아나의 금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릴리아나가 스네이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금방이라도 입 안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소리를 삼켰다.
"난…….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미안해."
"당신이 너무 미워요."
"미안해."
"그런데 나는……. 그런데 왜 나는……."
입 안 여린살을 깨문 릴리아나가 눈물이 흐르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당신에 대한 마음을 버릴 수 없었을까요."
스네이프가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악물었다. 오랫동안 거실에는 스네이프의 품에 안긴 릴리아나가 흐느끼며 울음을 삼키려는 소리와 연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스네이프의 목소리만이 감돌았다. 참아왔던 서러움을 모두 내뱉듯 눈물만 뚝뚝 흘리던 릴리아나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스네이프의 품에서 묻고 있던 얼굴을 떼고 눈물로 인해 흐릿한 시야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릴리아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잠시 그녀의 눈물 가득한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이 스네이프를 바라보았다.
그가 낮고 깊은 탄식이 섞인 숨을 내뱉었다. 역시 달랐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녀를, 릴리아나를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포터에게 그를 보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달랐다. 릴리 포터와 똑같은 눈이라는, 릴리아나와 똑같은 눈이라는 해리 포터의 눈과 릴리아나의 눈은 달랐다. 릴리아나의 것이 좀 더 깊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애정을 품고 있는…….
스네이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릴리아나가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눈가를 쓸어내리는 것은 막지 않았다. 그때 소파 옆에 있는 자그마한 침대에서 칭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릴리아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아기를 안아들었다.
"미안해, 깼니?"
릴리아나가 훌쩍이며 아기를 얼렀다. 스네이프가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릴리아나와 작은 아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또다시 뜨거운 무언가가 목을 콱 틀어막는 것 같았다.
아기는 새롭게 나타난 낯선 남자가 무섭지도 않은지 무어라 옹알거리며 스네이프에게로 손을 뻗었다. 얼떨결에 아기를 넘겨받게 된 스네이프가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작지만 뜨거웠고, 가벼워 보였지만 꽤나 묵직했다. 어색한 자세로 아기를 안으며 바라보고 있자, 아기가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을 스네이프와 맞췄다.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그녀와 똑같은 아몬드 모양의 사랑스러운 녹색 눈, 오밀조밀한 살아있는 인형 같은 이목구비……. 그가 작고 작은 딸을 그의 검은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이름이……."
"……세비나."
잠시 머뭇거리던 릴리아나가 시선을 내리며 속삭이 듯 말했다. 분명 릴리아나가 장난스럽게 세베루스의 여성 형으로 만들었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과 그녀의 이름을 적당히 섞은 것 같은 아기의 이름에 다시 한 번 뜨거운 무언가가 목에 막히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세비나를 내려다보던 스네이프가 마침내 목이 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빠가 늦어서 미안하구나."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 하면서도 따끔거렸다. 묵직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던 스네이프가 세비나의 부드럽고 따뜻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세비나가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을 사랑스럽게 반으로 접어보이며 방긋 웃었다.
어느새 릴리아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네이프가 아기를 안고 있지 않은 다른 팔로 릴리아나를 안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셨다 내쉬며 폐 속 가득히 그녀의 체향과 아기의 달큰하고 부드러운 향을 가득히 담았다. 눈가는 먹먹하고 가슴은 간질거리면서 따끔거렸지만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그동안 억눌러 왔던 말을 참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랑해, 아나."
스네이프가 릴리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릴리아나가 그의 품 안에서 눈물을 참으려는 듯 두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웠다.
그리웠다. 나직한 숨을 내쉰 그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두 눈을 감았다. 스네이프의 입가에서부터 행복해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