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39화
16장 충성을 받아내다(1)
희미한 마력검이 눈에 띄는 알버트 후안의 검이 허공을 베고 지나쳐 뱀파이어 기사의 갑옷을 종이 찢듯 찢어버리고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뱀파이어 기사라고는 하지만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부상에 그는 아까운 피를 폭포처럼 쏟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또 다른 뱀파이어 기사가 지켰다.
“허억, 허억.”
알버트 후안은 상당히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뱀파이어는 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것을 노리고 해가 떠 있는 동안 쳐들어왔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파도와 같은 물량 앞에선 고위 기사를 노리고 있는 젊은 기사조차 지칠 수밖에 없었다.
“가이우스. 일리아. 슬슬 저희가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잘 싸우고 있던 알버트 후안이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자 테일러는 즉시 개입할 것을 선언했다.
더 이상 두고 보다간 알버트가 죽을 확률이 있었다.
“알겠네!”
가이우스는 대답과 함께 은신 마법을 해제했다.
테일러 파티를 뱀파이어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던 유리처럼 투명한 장막이 걷히고,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근처에 있던 뱀파이어 기사들의 시선이 테일러들에게 향했다.
“바람의 정령 군주여!”
장막이 걷히기 무섭게 일리아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바람의 정령 군주를 소환했다.
폭풍이 덮친 것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칼날과 같은 예리한 바람의 움직임은 곧 일리아의 앞에 모여 바람의 갑옷을 입은 거대한 기사가 되었다.
바람의 검을 들고, 바람의 방패를 든 정령 군주는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뱀파이어들을 노려보았다.
“부정한 것들이여! 바람에 찢겨라!”
정령 군주가 외침과 함께 바람의 검을 휘두르자 강력한 바람의 칼날 수십 개가 앞으로 쏘아졌다.
뱀파이어 기사 몇 명이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뱀파이어 귀족이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멍청한 것들! 피해라!”
뱀파이어 귀족은 경고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바람의 칼날은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 뱀파이어 기사들의 몸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하나하나가 숙련된 고위 기사의 마력검과 비슷한 절삭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검으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으윽!”
“하아, 하아.”
바람의 칼날이 덮친 곳은 처참했다.
수십의 뱀파이어 기사가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소수도 멀쩡하지 않았다.
다리나 팔이 깨끗하게 잘려 붉은 피를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저 어린 기사는 나중에 처리한다. 엘프 년을 먼저 죽여.”
뱀파이어 귀족들과 기사들을 소집한 폴겐 유스겔 자작은 하이 엘프 일리아 웨스트우드를 먼저 공격할 것을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는 정령 군주를 소환한 하이 엘프 일리아였다.
알버트 후안 정도는 사소한 존재였다.
“자작님의 명령 들었나? 모두 저 하이 엘프를 친다!”
“네!”
뱀파이어 기사들과 귀족들의 살기가 일제히 일리아에게 향했다.
살기와 함께 혈마법으로 만들어진 피의 화살과 창이 소나기처럼 일리아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가이우스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가 스태프를 살짝 흔들자 불투명한 유리와 같은 보호막이 파티를 덮어 혈마법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제길. 고위 마법사가 있나?”
무너진 탑의 잔해 위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던 폴겐 유스겔 자작은 강철조차 꿰뚫을 수 있는 단단하고 강력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고위 마법사가 있을 경우 귀찮아진다.
적당한 호위가 붙은 고위 마법사는 전장에서 굉장히 귀찮은 존재였다.
그런 고위 마법사의 마법을 방해하거나 제대로 맞서기 위해서는 혈마법에 조예가 깊은 뱀파이어 귀족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소집된 뱀파이어 귀족 중에선 폴겐 유스겔 자작만이 높은 수준의 혈마법 구사가 가능했다.
“내가 나설 수밖에 없겠군.”
폴겐 유스겔 자작이 망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피가 튀기고 살이 찢기는 전장으로 몸을 던졌다.
폴겐 유스겔 자작이 나서기 무섭게 가이우스의 방어막이 박살 났다.
“저기도 제법 하는 녀석이 있나 보군요.”
“그런 것 같네. 호위는 정령 군주에게 맡기고 자네는 알버트를 확보하게나.”
“감사합니다. 가이우스. 그렇다면 버프를 부탁드립니다.”
가이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대답 대신 스태프를 들어 올렸고, 그 모습을 본 테일러는 말없이 다가오는 뱀파이어 귀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준남작 작위를 나타내는 브로치를 찬 뱀파이어 귀족은 마력검을 빛내며 달려드는 테일러의 모습에 크게 당황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으나, 그것은 마치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르는 눈먼 칼질과도 같았다.
맞을 리가 없었다.
[바람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민첩이 증가합니다.]
[불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힘이 증가합니다.]
[대지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방어력이 증가합니다.]
[물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자연회복력이 증가합니다.]
‘버프가 들어왔다!’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테일러는 빠른 움직임으로 뱀파이어 준남작의 검을 살짝 피하며 옆으로 파고들며 스치듯 지나치며 검으로 옆구리를 깊이 그었다.
“큭!”
뱀파이어 준남작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고 또 다른 뱀파이어 귀족이 나타났다.
드물게 창을 든 귀족이었는데, 창끝에는 붉은 피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혈마법이 분명했다.
브로치를 보니 작위는 남작.
테일러는 긴장한 얼굴로 남작이 찌른 창을 쳐냈다.
창은 쳐냈지만 붉은 기운이 꺾여 테일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쳤다.
흉갑이 상처라도 난 것처럼 벌어지고 새빨간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변칙적인 공격이었지만 테일러는 곧 익숙해졌고, 반대로 테일러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남작의 혈마법은 파마의 검에 베여 약해져 갔다.
중간에 기사 2명이 개입했지만,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이, 이럴 수가! 마병기인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뱀파이어.”
경악하는 뱀파이어 남작의 말을 부정하며 그가 내지른 창을 검으로 베어내고 단검을 뽑아 그의 이마에 꽂았다.
급소인 뇌가 파괴당하자 뱀파이어 남작은 절반가량 날아간 창을 놓고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혔다.
정신없이 적들을 베며 전진하다 보니 어느새 알버트 후안과 가까워져 있었다.
알버트 후안은 준남작 작위를 가진 뱀파이어 귀족의 목을 잘라내고 있었다.
테일러는 뱀파이어 기사를 상대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알버트 후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알버트 후안의 눈동자가 테일러에게 향했다.
처음 보는 이가 분명한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알버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쪽으로!”
“도움에 감사합니다.”
테일러의 말에 알버트는 감사를 표하며 합류했다.
테일러가 누군지 몰랐지만 알버트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테일러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알버트는 테일러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잠시만,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뱀파이어들의 수는 처음에 비하면 많이 줄어, 이제는 20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가이우스는 폴겐 유스겔 자작과 마법전을 펼치느라 제대로 된 고위 마법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일리아가 소환한 정령 군주가 정말 많이 활약해주고 있었다.
밤에 기습을 당했을 때에는 적의 대부분이 귀족인데다가 공간도 협소해서 소환하기 무섭게 금세 역소환되었지만 이번에는 공간도 넓어서 적이 오는 중에 바람의 칼날에 맞고 마구 잘려나갔다.
거기다가 앞에서 테일러와 알버트가 적의 수를 적당히 줄이고 있으니, 뱀파이어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알버트. 저기 저 뱀파이어 보이십니까?”
알버트는 테일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집중했다.
뱀파이어 준남작 한 명의 호위를 받으며 혈마법으로 만들어진 붉은 핏덩어리를 가이우스를 향해 쏘아내는 뱀파이어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
“예. 보입니다.”
“우두머리로 보입니다.”
“머리를 치자. 이 말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알버트 후안의 검에 길을 막아섰던 뱀파이어 기사의 몸을 두동강 내었다.
그는 뱀파이어 기사의 시체를 발로 밟아 넘어서며 고개를 돌려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함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알버트. 함께 합시다.”
테일러가 검을 들어 올렸다.
마력검으로 인해 피가 묻지 않아 새것처럼 깨끗했다.
테일러와 알버트는 폴겐 유스겔 자작을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을 막는 뱀파이어들은 없었다.
두 사람의 뛰어난 무력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폴겐 유스겔 자작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위협을 느끼고 고위 마법사 가이우스와의 힘겨루기를 중단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푸른 마력이 깃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고작 엘프 하나와 인간 셋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고위 마법사 가이우스와 힘겨루기를 하느라 주변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폴겐 유스겔 자작은 뒤늦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는 경악했다.
포겐 유스겔 자작은 다른 뱀파이어 자작들에 비하면 약했기 때문에 인간을 크게 무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기사 작위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뱀파이어 100명 정도가 고작해야 4명 정도 되는 인원에게 절반이 넘는 수가 목숨을 잃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이었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크악!”
어느새 자신을 호위하던 뱀파이어 준남작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폴겐 유스겔 자작은 자신이 흘린 피를 제물로 혈마법을 발동시켜 날카로운 피의 무기의 파도를 소환해 두 사람을 향해 쏟아냈다.
날카로운 피의 무기로 이루어진 피의 파도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덮쳤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알버트. 자작의 상대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알버트의 대답을 들은 테일러는 앞으로 튀어 나가 파마의 검과 마력검이 활성화된 검을 휘둘러 혈마법을 잘라냈다.
사람 한 명이 통과할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으로 알버트 후안이 통과하여 무방비 상태의 폴겐 유스겔 자작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인간 녀석이!”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폴겐 유스겔 자작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알버트 후안의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테일러를 향해 혈마법으로 피의 창을 만들어 던졌다.
붉은 피의 창은 테일러의 파마의 검에 의해 파훼되었지만 테일러의 전진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고, 테일러가 잠시 멈칫한 사이 폴겐 유스겔 자작의 검이 알버트 후안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알버트!”
테일러의 다급한 외침이 작은 성의 뜰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