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96화
38장 슈발리에(1)
마병기 슈발리에.
그것은 멸망 전 인간의 세력이 약하고 오크 부족 연합, 엘프 왕국, 뱀파이어 제국이 반도와 대륙을 지배했을 때 뱀파이어 후작 제네시스가 사용했던 마병기였다.
이 마병기를 들면 5m 내의 생명체의 혈액을 흡수할 수 있어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아주 강력한 마병기였다.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고위 기사와 마법사는 저항할 수 있었지만, 평범한 병사는 저항할 수 없어 대규모 전투에서 가히 학살을 펼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마병기다.
이 대단한 마병기는 멸망이라고 불리는 이종족 문명의 몰락 이후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인간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어 신성교가 그것을 보관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당시 사우스 왕국에선 이 마병기를 사용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특수한 저주가 걸려 있는 것인지 마병기 슈발리에에 접촉한 기사나 고위 기사는 빠짐없이 미쳐버렸다.
그 이후, 사우스 왕국에선 슈발리에를 무기로 사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실비아 그레이로부터 슈발리에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테일러는 즉시 피곤한 일리아를 제외한 파티원들을 소집했다.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다들 피곤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테일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슈발리에라는 마병기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레드를 제외한 파티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주군. 현재 신성교에서 보관하고 있고 멸망 전의 강력한 마병기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알버트가 대답했다.
가벼운 차림의 알폰스도 입을 열었다.
“실비아에게 들은 모양이군요.”
그의 말을 테일러는 부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실비아의 곁에 붙어 다니는 알폰스였지만 오늘 밤 실비아가 테일러에게 마병기 슈발리에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때 곁에 있지 않았다.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을 얻기 위해선 슈발리에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성교에서 슈발리에를 쉽게 내주지는 않을 겁니다.”
테일러의 말에 알폰스 그레이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병기 슈발리에는 신성교에서 특히 중요하게 관리하고 있는 마병기었다.
테일러 정도 되는 기사의 요청에는 결코 내주지 않을 것이다.
국왕의 요청에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주군.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알버트의 물음에 테일러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슈발리에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후로 한참을 의논했지만 결국 방법은 나오지 않았고, 다음 날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레드가 테일러를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레드.”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레드는 테일러의 옆에 바짝 붙었다.
“테일러.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레드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테일러의 눈이 빛났다.
“무엇입니까?”
“쉿! 쉿! 목소리가 커!”
레드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다급하게 목소리를 낮출 것을 요청했다.
테일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레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훔치면 돼.”
“쉽지 않을 겁니다.”
충격적인 레드의 말에 테일러가 대답했다.
상황이 다급한 만큼 반대는 하지 않고 다만 힘들 것이라고 경고하는 그였다.
테일러의 경고에 레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용병 생활을 하면서 더러운 일도 많이 해봤다는 건 대충 알고 있을 거야.”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는 여동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정말로 악착같이 용병 일을 했고, 손을 더럽히는 어두운 일도 거절하지 않고 해 왔었다.
그중에선 당연히 도둑질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우리에겐 알폰스 그레이와 실비아 그레이가 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알고 있겠지? 너는 똑똑하니까.”
신성교의 성기사 알폰스 그레이.
신성교의 성녀 실비아 그레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신성교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수도의 신성교 신전의 지리와 구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의 힘을 빌리면 신성교의 신전 내부로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성기사인 알폰스 그레이 같은 경우엔 슈발리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신성교에선 슈발리에의 경비를 성기사들이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알폰스도 경비를 선 적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알버트 후안이 반대할 겁니다.”
바로 알버트 후안이었다.
정의롭고 선한 성격의 그는 결코 도둑질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파티를 나갈 수도 있었다.
가이우스를 되찾더라도 알버트 후안을 잃기는 싫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를 위그드라실에 남겨두면 돼.”
“어떤 핑계를 댄다는 말입니까? 레드.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레드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테일러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고 레드는 곧 입을 열었다.
“하이 엘프 왕의 생각이 변할 수도 있으니, 남아서 동향을 살피라고 하면 되겠네.”
“좋습니다. 그럼 당장 실행에 옮기죠.”
테일러는 레드를 내보내고 알폰스 그레이를 찾았다.
알폰스는 마당에서 지나가는 엘프들을 구경하고 있는 실비아 그레이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테일러의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테일러는 방금 전 레드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뭔가 은밀한 일을 계획하고 계신 것 같군요. 행동을 보아하니.”
알폰스의 지적에 테일러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슈발리에.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지요?”
알폰스의 시선이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한 번 경비 근무를 선 적도 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슈발리에는 저주 때문에 쉽게 보관 장소를 바꿀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슈발리에를 훔치려고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테일러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알폰스의 시선이 다시 테일러에게 향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실비아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러고는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신을 믿지 않는 성기사답게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실비아. 다 들었지요?”
테일러의 말에 딴짓을 하고 있던 실비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테일러는 그녀의 앞으로 이동했다.
실비아는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었고 신성교의 문장 모양의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에 목걸이가 살짝 흔들렸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뭔가 의기양양한 듯한 표정의 실비아를 볼 수 있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네요?”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내키지 않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알폰스와 다르게 실비아는 성녀였다.
어느 정도 신앙심이 없으면 신성력도 가질 수 없다.
그런 점을 놓고 볼 때 그녀는 신성교가 보관 중인 마병기를 훔친다는 계획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확률도 있었다.
“도와줄게요!”
하지만 그것은 테일러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하얀 피부에 붉은 홍조가 깃든 실비아 그레이는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일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실비아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이, 이거 놓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물든 실비아가 소리친 뒤에서야 테일러는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고는 손을 놓았다.
그 모습에 알폰스는 뭐가 좋은지 웃음꽃을 피운 채 고개를 저었다.
“단, 조건이 있어요.”
“조건 말입니까?”
테일러의 물음에 여전히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실비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하면 제 소원. 하나 들어주셔야 해요.”
테일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소원이 어떤 것이 될지 몰랐기 때문에 확답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실비아가 자신에게 심한 것을 요구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했다.
실비아 그레이와 알폰스 그레이.
신성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남매를 포섭한 테일러는 금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려 정리한 후 알버트를 찾아갔다.
알버트는 숙소 근처의 공터에서 혼자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한 얼굴로 위그드라실에 남아 하이 엘프 왕의 동향을 살펴달라는 부탁을 했다.
알버트는 고민을 하긴 했지만, 흔쾌히 테일러의 요청에 따르기로 했다.
* * *
계획의 세부적인 부분이 완성되고, 테일러는 로이츠에게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다시 수도로 향했다.
다행히 테일러의 파티가 국경을 넘을 때에는 뱀파이어 패잔병들이 모두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가 되어 국경 폐쇄가 끝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국경을 넘어 말을 타고 한참을 달린 끝에 수도에 도착한 테일러는 가장 먼저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을 만나 현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물론 슈발리에를 훔치겠다는 대단한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보고를 끝낸 테일러는 자리를 비운 자신을 대신하여 제이드 기사단을 통솔하고 있는 로펜 경을 찾아갔지만 아쉽게도 로펜 경과 제이드 기사단은 다른 임무를 하달받고 수도를 떠나 안키아 백작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반도의 그림자 기사단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소수는 남아 공작을 펼치고 있었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특수 전투 집단은 제이드 기사단을 포함하여 몇 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이드 기사단과 로펜 경은 언제나 바빴다.
어쩌면 지금쯤 테일러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성 내의 제이드 기사단 주둔지에 있는 숙소로 돌아온 테일러는 슈발리에를 훔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계획이 완성되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실비아와 알폰스가 신전 구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전 깊숙한 곳까지 일리아, 레드, 테일러를 인도한다.
그리고 실비아 그레이가 신전을 보호하는 신성한 결계를 약화시키면 일리아가 불의 정령으로 아주 작은 화재를 만들어낼 것이다.
일리아가 만들어낸 화재로 소란스러워지면 레드와 테일러가 혼란을 틈타 슈발리에를 훔친다는 계획이었다.
“내일,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테일러의 말에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파티원들은 테일러를 믿고 따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테일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가이우스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이우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어서 오게나.”
가이우스가 힘없이 말했다.
테일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들떠 있었지만 수확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린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희망을 잃은 듯한 가이우스의 모습에 테일러는 가슴이 아팠다.
“가이우스.”
“난 괜찮네. 자네는 충분히 노력했네.”
테일러는 가이우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6월이 오기 전에 반드시 당신을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믿겠네.”
가이우스는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테일러는 가이우스를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린 후 그의 방을 나섰다.
“가이우스는 조금 어떤가요?”
문을 열고 나서니 일리아 웨스트우드가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상태가 좋지는 않습니다.”
테일러는 솔직하게 말했다.
같은 파티원인 그녀에게 숨길 필요는 없었다.
테일러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일러와의 거리를 좁혔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