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19화
47장 실버레인 평원 전투(2)
군사 지도 앞에 위치한 의자에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지휘관들이 의자에 하나둘씩 앉았다.
“상급 장교 신디아 타일리드. 현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예. 사령관.”
군사 지도 옆에 서 있던 단발의 여장교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군사 지도 앞에 다가가 지휘봉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휘봉 끝으로 군사 지도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지휘봉 끝이 가리킨 곳은 실버레인 중심도시 근처에 위치한 실버레인 평원이었다.
“현재 오우거 부족장 루우거드의 몬스터 군대 2만이 이곳 실버레인 평원에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루우거드의 군대는 사일드 윈스터크 자작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3천을 잃고 난 뒤, 잠시 물러나 몬스터 군단 본대로부터 3천을 보충받아 다시 실버레인 평원에 집결했습니다.”
상급 장교 신디아 타일리드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지휘봉이 방금 전 가리킨 곳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을 가리켰다.
“현재 이 부근에 북부 군단 주력, 약 3만의 아군이 위치해 있습니다.”
“양측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백발이 무성한 고위 기사가 상급 장교 신디아 타일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군사 지도에 익숙한 상급 장교라면 지도 상의 거리로 실제 거리를 아주 쉽게 유추해낼 수 있겠지만, 전술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군사 지도에는 상급 장교보다 익숙하지 않은 고위 기사들은 지도만 보고 실제 거리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다.
“도보 기준 하루 정도 거리입니다.”
도보로 하루 정도의 거리면 결코 먼 거리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서로 거리를 좁혀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그런 거리였다.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기병이 움직이면 순식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고 본진으로 퇴각할 수 있는 거리였으므로 방심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병대를 운용해서 기습을 통한 선제 타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건 어떻습니까?”
루시드가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실버레인 후작령의 고위 기사 로슈즈 경이 입을 열었다.
“북부 군단의 기병 전력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게다가 현재 적의 기병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되고 있지 않다. 섣부르게 기병 전력을 움직였다가, 기병 전력의 일부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대규모 기병대의 공격이 있다면, 아군은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로슈즈 경은 실버레인 후작령의 고위 기사이면서 북부 군단의 주요 기병대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래서 집결한 북부 군단의 기병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북부 군단의 기병 전력은 생각보다 많이 모이지 않은 상태였다.
가끔 전초전으로 기병들 간에 가벼운 전투가 벌어질 때가 있었는데, 기병 전력 일부가 기습 공격을 위해 이동한다면 그 틈을 타 적의 기병 전력이 뒤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마법 함정도 고려해야 합니다. 마법 함정을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실버레인 후작 가문의 차남, 하인즈 실버레인 경이 발언했다.
그의 말에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에 야영지 또는 주둔지 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
허술한 목책으로 인한 방어 공백을 채워주는 게 기병 장애물과 마법 함정이었다.
밟으면 폭발하거나 뜨거운 화염을 토해내는 이 위협적인 함정은 현재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지휘하는 북부 군단의 야영지 주변에도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원리는 지뢰와 비슷했지만, 지뢰보다 더 우수한 함정이었다.
피아식별을 할 수 없는 지뢰와 달리, 마법 함정은 몬스터와 인간의 구별이 가능했기 때문에 특히 다른 종족과의 전투에서 인간과 몬스터가 유용하게 사용해 왔다.
“고위 마법사가 포함된 보병 부대를 은밀하게 내보내 정찰 행동을 전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실버레인 후작 가문의 장남이자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한 하일론 실버레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그의 직책은 하급 장교였고 지휘관도 아니었지만 사실상 북부 군단의 차기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다.
테일러는 마른 침을 삼키며 손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 테일러 경. 말해보게.”
“저희 부대가 정찰을 전개하겠습니다.”
테일러의 말에 상급 장교 펜드로건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테일러의 대답에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정찰할 반경이 넓으니 다른 부대도 뽑아서 보내겠다.”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명심에 사로잡힌 하급 장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는 80명 정도 되는 보병대의 지휘관이었다.
고위 마법사는 소속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고위 마법사 한 명과 그를 호위할 기사 3명을 지원해주었다.
정찰대의 편성이 끝났다.
출발은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에 출발하면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새벽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봐, 테일러. 잘못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 그건 알고 지원한 거냐?”
정찰 임무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레드는 그 내용을 듣기 무섭게 창백해진 얼굴로 테일러에게 쏘아붙였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우리 모두 죽을 위험이 있습니다.”
테일러는 철제 흉갑을 입으며 대답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이면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테일러는 서둘러 챙기기 시작했다.
“테일러. 너무 위험한 임무만 고르는 거 아니예요? 그러다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요.”
테일러가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고 있던 일리아 웨스트우드도 레드의 공격에 힘입어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녀는 테일러가 위험한 임무를 맡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리아는 테일러와 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가 비명횡사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저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테일러는 일리아에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여주며 마병기 전쟁의 나팔을 요대에 걸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막사의 문이 열렸다.
하급 장교 하드슨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말했다.
“지금 나가도록 하지. 일리아. 나가봐야겠습니다.”
“알겠어요.”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테일러는 일리아와 레드의 곁을 지나쳐 막사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앞 넓은 공터에 테일러 부대의 병사들 전원이 집결해 있었다.
지독한 훈련을 거친 끝에, 그들은 정예병 못지않은 군기와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아이반 왕자와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배려 덕분에 넉넉한 보급을 받아 갑옷과 무기 상태도 상당히 좋았다.
그들 100명의 모습은 징집병이 아닌, 훌륭한 정예병의 모습이었다.
테일러는 그들에게 임무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병사들, 그리고 파티원들과 함께 적진으로 향했다.
예정대로 어두운 하늘에 빛이 서서히 밝아올 기미를 보이는 새벽에 적진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일러는 병사들로 하여금 기병 장애물을 설치하고 임시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오랜 시간을 머물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천막이나 막사 따위를 짓지는 않았다.
가이우스는 만약을 대비해 간단한 마법 함정을 주변에 다수 설치했다.
“가이우스, 병사 30명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주변에 마법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맡겨주게나.”
마법 함정은 교묘해서 탐지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고위 마법사는 되어야 마법 함정의 완벽한 탐지가 가능했는데, 현재 테일러 부대에는 고위 마법사가 가이우스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부대를 여러 조각으로 쪼개서 탐색 행동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부대 전체가 움직이면 적 순찰대의 눈에 쉽게 띌 수도 있었기 때문에 테일러는 부대를 두 개로 나누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알버트와 레드를 가이우스에게 붙여 주었다.
3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고, 아침 해가 하늘에 모습을 드러내자 가이우스와 레드와 알버트, 그리고 병사들이 돌아왔다.
돌아온 가이우스는 마법 함정의 위치가 기록된 군사 지도를 테일러에게 건넸다.
“철수 준비를 서두르도록.”
군사 지도를 받은 테일러는 철수 준비를 명령했다.
할당받은 곳을 모두 탐색했으니, 이제 물러나야 할 때였다.
“마법 함정은 어떻게 하면 되겠나?”
“그대로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몬스터 녀석들이 순찰을 하다가 밟을 수도 있으니까요.”
테일러의 말에 가이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급 장교 하드슨이 보고했다.
기병 장애물이나 천막이나 막사, 또는 목책이 설치된 것도 아니라서 철수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적이다! 늑대 기수 부대 출현!”
테일러가 철수를 명령하려는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병사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테일러는 전쟁의 나팔을 뽑았다.
[전쟁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군의 사기가 증가합니다. 지휘관이 살아 있는 한 절대 패주하지 않습니다.]
병사들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희미해졌다.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수를 파악해보겠네!”
가이우스는 마법을 사용해 적의 수를 파악했다.
마법의 빛이 번쩍이고 적의 수가 파악되었다.
가이우스가 스태프를 꽈악 쥔 채 입을 열었다.
“생명체 반응이 150이네. 늑대가 75, 기수가 75인 것 같네.”
“사각 방진을 구축한다!”
가이우스의 보고를 들은 테일러는 서둘러 방진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병사들이 돌아와 방진에 합류하였다.
그랑키아 숲에서도 정예로 이름난 늑대 기수가 75기나 된다면 아군에게 있어서 상당히 불리했다.
사각 방진 구축 훈련은 지독하게 많이 받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어려움 없이 신속하게 사각 방진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검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1열에 서고 2열과 3열에 창을 든 병사들이 섰다.
중앙에는 지휘부와 궁병들이 자리 잡았다.
궁병대의 수는 20명에 불과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특히 에이스 레인저 레드가 지휘하니 그들의 활약을 기대해 볼 법했다.
방진이 완성되기 무섭게 마법 함정이 폭발하는 소리가 귓가로 전해져 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붉은 용암이 하늘로 솟구치는 게 보였다.
마법 함정 3개 정도가 더 터지고 난 뒤에서야 늑대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 함정으로 인해 수는 상당히 줄어 60기 정도로 보였지만 여전히 많은 수였다.
“궁병대 사격!”
궁병대가 활을 45도로 들어 시위를 놓았다.
발사된 화살이 늑대 기수들을 덮쳤지만 훌륭한 갑옷을 입고 있는 기수들이 대부분이라 큰 피해는 없었고, 화살에 맞았다고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터프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꽤 터프하다만, 이건 어떻겠나!”
가이우스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허공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붉은 마법진이 회전하며 뜨거운 화염을 토해냈다.
“흩어져라!”
늑대 기수 지휘관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늑대 기수들은 급하게 흩어졌으나 적지 않은 수의 늑대 기수들이 화염에 휩쓸려 목숨을 잃거나 전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늑대 군주들이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일리아가 불의 정령 군주를 소환했다.
숲이 주변에 없어서 전력을 다할 수는 없는 상태였지만 불의 정령 군주는 강력한 광범위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불의 검을 휘두르자 불꽃 세례가 늑대 기수들을 덮쳤다.
“키에에엑!”
“크아아악!”
불길에 휩싸인 늑대와 기수들이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평화롭던 평원에 불길이 깃들고 가이우스는 불길을 조종해 더 큰 피해를 주었다.
불의 정령 군주를 피해 방진 근처에 도달한 늑대 기수들은 30에 불과했다.
“충돌에 대비하라!”
알폰스가 방패를 들어 올리며 경고했다.
병사들도 알폰스를 따라 방패를 들어 올리고 검을 앞으로 겨눴다.
2열의 병사들도 창을 앞으로 나열했다.
“충돌합니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늑대 기수들과 방진을 이루고 있는 병사들이 충돌했다.
알폰스 그레이의 방패가 충돌 직전에 빛을 내뿜어 선두 늑대 기수 다섯의 눈을 멀게 했지만 뒤이어 온 늑대 기수들의 몸을 던지는 충돌에 방진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지만 그랑키아 숲의 늑대 기수들과의 충돌에서 방진을 유지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방진이 무너지고 늑대 기수들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넘어져 있던 병사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테일러가 몸을 던졌다.
“당황하지 마라! 일어서서 적에게 맞서라!”
테일러가 휘두른 전쟁의 나팔에 늑대 기수 둘이 목이 날아가 늑대에서 떨어지자 창을 든 병사들이 사방에서 늑대를 찔러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테일러의 뒤로 알버트 후안이 따라와 검을 휘둘렀다.
고위 기사 2명의 난입에 방진 깊숙이 치고 들어왔던 늑대 기수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퇴로를 막아라!”
알폰스가 방패를 든 병사들과 함께 퇴로를 차단했다.
늑대 기수 지휘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방진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속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지된 상태고 주변에 여유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즉, 차단된 퇴로를 뚫는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는 소리.
늑대 기수 지휘관은 절망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려 했지만, 전장에서의 잠깐의 다른 생각은 죽음을 불러 왔다.
테일러가 찌른 전쟁의 나팔이 늑대 기수 지휘관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그가 전쟁의 나팔을 뽑아내자 늑대 기수 지휘관은 붉은 피를 입과 가슴의 구멍에서 쏟아내며 늑대에서 떨어졌다.
늑대는 기수의 죽음에 분노해 테일러에게 달려들었지만, 테일러의 옆을 지키고 있는 알버트가 휘두른 검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마력검은 두꺼운 갑옷과 늑대의 목을 한 번에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