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29화
51장 제국의 창(2)
“고위 기사, 테일러입니다.”
신분을 밝히자 고위 기사는 육안으로 간단한 확인을 거친 뒤, 막사 문을 살짝 열고 아이반 왕자에게 테일러가 찾아온 사실을 알렸다.
막사 안에서 아이반 왕자가 승낙을 하자 고위 기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막사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테일러를 향해 섰다.
“들어가도 좋습니다.”
고위 기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러섰다.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반 왕자가 군사 지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주시하는 곳은 군사 지도에서도 수도가 있는 곳이었다.
“아, 테일러 경인가. 앉아도 좋다.”
테일러가 들어온 것을 뒤늦게 확인한 아이반 왕자는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테일러가 의자에 앉자 아이반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찾아왔지?”
“실은 따로 보고드릴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직속상관에게…… 아, 경은 지금 직속상관이 없는 상태였지. 계속해.”
5만 명이 이탈하고 부대가 재편성되면서, 테일러는 직속 상관이 없는 독립 부대 지휘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중요한 보고 사항이 있다면 이렇게 직접 아이반 왕자를 찾아와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얼마 전에 마법 함정 설치 작업을 하게 되면서 황금 군단의 기병대와 조우하여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테일러의 말에 아이반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출된 보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황금 군단 기병대의 돌파력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여러 보충병으로 재편성되어 단합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정예병으로 구성된 제 부대가 마법 공격과 정령 군주의 공격을 뚫느라 소수만 남은 기병대의 공격에 진형이 갈라졌습니다.”
“흠. 그 부분은 보고서에 없었는데. 하긴, 종합 보고서이니,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군.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마법 함정 설치 작업에 투입된 부대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들이 제출하는 보고서를 전부 아이반 왕자가 읽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보부 요원이 내용을 요약하여 종합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내용이 누락된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은 누락되면 안 되지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가끔 요원의 실수로 중요한 정보가 누락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그것을 테일러도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혹여 누락되었을까 봐 직접 아이반 왕자를 찾은 것이었다.
“물론 진형을 돌파하고 생존한 기병의 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아군에게 있어서 상당히 치명적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을까? 혹시 좋은 의견 있으면 말해보도록. 없으면 내일 지휘관 회의에 이걸 올려야겠다.”
아이반 왕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테일러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병사 모형들을 움직였다.
재배치가 끝나자 아이반 왕자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거 괜찮군.”
아이반 왕자는 감탄했고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공간에서 싸우지 않더라고 사용할 수 있는 전술입니다.”
“그렇군. 내일 지휘관 회의에서 모두에게 이 전술을 전파해야겠어.”
아이반 왕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지휘관 회의에서 아이반 왕자는 테일러가 알려준 전술을 모두에게 전파했다.
그리고 실버레인 평원을 거의 돌파했다는 왕국 정보부의 첩보에 따라, 곧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각 지휘관에게 수성전 발생 시 수비해야 할 구역을 할당해주었다.
테일러는 가장 중요한 구역을 맡았고, 그 옆은 나일 쉬바스 백작의 충신이나 다름없는 상급 장교 펜드로건이 맡았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남부 레인저 여단의 에이스 레인저 출신으로 눈이 매우 좋은 레드는 가이우스와 함께 탑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보급받은 비스킷을 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고 있었다.
레드는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먼 곳을 훑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갑자기 멈췄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여명의 빛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황금 군단과 칠흑과 같은 검은빛의 갑옷을 입은 그림자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가이우스. 적의 수를.”
“알고 있네.”
레드의 말에 가이우스는 대답을 하며 마법으로 적의 수를 파악했다.
왕국 정보부의 첩보로 적의 수는 대충 파악하고 있었지만, 적이 군을 우회시켰을 수도 있을뿐더러, 적의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마법을 이용한 2차 파악은 필수였다.
가이우스의 스태프가 빛을 뿜어냈다.
다른 탑에서도 고위 마법사가 적군의 수를 파악하기 위한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인지, 탑마다 형형색색의 불빛이 번쩍였다.
“정확하군.”
“즉시 지휘부에 통신을.”
가이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각 탑에 배치된 고위 마법사들이 지휘부로 통신을 거의 동시에 보내면서 통신실은 폭주했다.
아이반 왕자는 즉시 전군에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통보했고 무장한 병력이 성벽로를 가득 메웠지만, 그림자 대공의 군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어째서 전진하지 않는 것일까요?”
일리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전투를 앞두고, 근처에서 활을 점검하고 있던 레드가 시위를 시험 삼아 당겨보며 입을 열었다.
“공성 병기 조립.”
레드의 말대로였다.
그림자 대공의 군대는 신속한 이동을 위해 무겁고 운반이 힘든 공성 병기를 분해한 상태로 이동했고, 이제는 공격을 위해 공성 병기를 조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리가 제법 멀어서 망원경으로 살피더라도 자세하게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거대한 공성탑이 조립되는 모습은 대충 확인할 수 있었다.
“곧 공성 병기의 조립이 끝날 겁니다.”
알폰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벌어질 전투에서 실비아를 지켜야만 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처음으로 여동생을 지킬 자신이 없는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알폰스 그레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먼 곳의 희미한 적진을 바라보았다.
방패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왕국을 위하여!”
알버트 후안은 스스로를 고무시키기 위해 검을 뽑아 입으로 가져가 검면에 입술을 맞추며 큰 소리로 외쳤다.
“국왕 폐하를 위해!”
“사우스 왕국을 위하여!”
그에 호응하듯 기사와 병사들 몇 명이 큰 소리로 외치며 창이나 검을 흔들었다.
테일러 또한 전쟁의 나팔을 뽑을 준비를 했다.
다행히 사기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황금 군단과 그림자 기사단이 프랑츠 제국에서 유명한 최정예 병력이긴 했지만, 아군의 수도 그렇게 적은 편은 아니었고, 최근 몬스터 군단과의 전투에서 승전한 덕분에 사기는 꽤 높은 편이었다.
“마법 함정 설치는 어떻습니까?”
테일러가 가이우스에게 물었다.
인간 대 인간의 야전 전투에선 마법 함정의 사용이 드물지만, 수성전에서는 적의 공격을 늦추기 위해 성 또는 도시의 앞 평원에 마법 함정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심도시로 오는 길은 마법 함정으로 가득하다네. 일일이 해제를 하지 않는 이상, 최소 수백에서 천 명 정도의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만 할 걸세.”
마법 함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마법 작업이 필요했다.
마법 함정은 대부분 중심 도시의 사정권에 있었고, 마법 해제를 시도하면 장거리 마법 공격을 이용한 방해가 있을 것이다.
방해가 있으면 정교한 마법 작업할 수 없기에 해제가 불가능했다.
대마법사가 대마법인 대규모 무효화를 시전한다면 마법 함정 대부분을 무력화시킬 수 있겠지만, 가이우스는 적에게 대마법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적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옆의 탑에서 적진을 살피고 있던 남부 레인저 여단 소속의 에이스 레인저가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큰 소리로 알렸다.
테일러는 고개를 돌려 전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에이스 레인저의 말대로 그림자 대공의 군대가 중심 도시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마법 함정 근처에, 선봉이 도달할 때쯤이었다.
가이우스는 그림자 대공의 군대에서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른 고위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마력의 파장은 느끼기 힘들 정도로 거리가 멀었지만, 이 마력의 파장은 워낙 강력하여 중심 도시의 모든 마법사가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의 파장이 일어나고, 빛이 번쩍이더니 모든 마법 함정이 무력화되었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지만, 마법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대규모 무효화라니 대마법사라니!”
가이우스만큼은 아니지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고위 마법사치고는 젊은 남자가 경악했다.
대마법 대규모 무효화에 의해 모든 마법 함정이 무력화된 것이다.
대마법은 대마법사만 사용이 가능한 궁극의 마법.
대규모 무효화가 시전되었다는 것은, 적진에 대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마법사들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테일러는 가이우스에게 질문했다.
가이우스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규모 무효화. 모든 마법 함정이 무력화되었네. 대마법사가 있는 것 같네.”
가까운 곳에서 듣고 있던 레드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미쳤군. 대마법사가 있다면 게임 끝났어.”
레드는 절망했다.
대마법사는 정말 엄청난 존재였다.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대마법사의 존재가 순식간에 전파된 것인지, 아이반 왕자의 군대는 흔들리고 있었다.
적의 선두가 사정권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투석기와 장거리 마법 공격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보다 못한 테일러는 탑으로 올라가 성벽 뒤쪽에 배치된 투석기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뭐 하고 있나! 적이 사정권에 들어왔다! 당장 움직여!”
테일러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하급 장교가 투석기 발사를 명령했다.
하나의 투석기가 바위를 던지자 다른 투석기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들도 정신을 차리고 발사를 명령했다.
수십 개의 거대한 바위가 성벽을 넘어 그림자 대공의 군대를 노리고 날아갔다.
이윽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와 지면이 충돌했다.
투석기의 명중률은 높지 않은 편이었다.
한 차례 공격으로 100명이 조금 넘는 수의 황금 군단 보병이 목숨을 잃었다.
마법사 전력이 전개한 방어 마법 탓에 더욱 피해는 크지 않았다.
동료의 시체를 밟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그들을 향해, 투석기가 장전하는 사이 사우스 왕국의 마법사 전력이 장거리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일리아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 군주 역시 탑에서 바람의 칼날을 쏟아냈고 가이우스 또한 거대한 불덩이를 날렸다.
“방어 마법 전개!”
“방어 마법을 전개하라!”
황금 군단과 그림자 기사단 소속의 마법사들 일부가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그들이 방어 마법을 전개하여 마법 공격을 막는 사이, 남은 마법사들은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사우스 왕국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이 끝났다.
황금 군단과 그림자 기사단은 신속하게 방어 마법을 전개했지만, 방어 마법이 모든 마법 공격을 막지는 못했고 적지 않은 수의 병력이 손실되었다.
전개된 방어 마법이 사라지자 황금 군단과 그림자 기사단의 마법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마법 공격은 일리아가 소환한 탑 위의 바람의 정령 군주에게 1차적으로 집중되었다.
바람의 정령 군주는 아주 귀찮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