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아버님, 정신 차리십시오!”
누군가 내 몸을 마구 흔든다.
그만...아...제발 좀 그만.
이제는 편히 가고 싶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어차피 이렇게 갈 것을 왜 그렇게 마음 졸이며 살았는지 모르겠군.
항상 남의 눈만 의식했지.
날 어떻게 볼까?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는 않을까?
이 정도는 욕심내도 괜찮겠지?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어.
다른 놈들 좋은 일만 잔뜩 시켜주다 이렇게 끝나버린 거야.
마음에 드는 여자도 친구에게 줘버리고, 전공도 전부 양보해 버렸지.
그래, 사람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내 임종의 시기에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을 자랑할 일 있나?
어차피 죽으면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야?
갖고 싶다.
다시 갖고 싶어.
내 사랑 레이디 비욘느.
내가 조셉 보다 당신을 먼저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정말 멍청한 짓이었지.
왜 그런 멍청이에게 당신을 양보했을까?
녀석이 나보다 우수해서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지금의 못난이 마누라랑 일평생을 살았지.
하지만...당신 정말 행복했어?
내가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웠지만 왜 전공은 전부 양보해 버린 걸까?
조셉, 성공하니 좋더냐?
비욘느를 내팽겨 두고 삼처사첩 얻으니까 좋았느냔 말이다!?
젠장! 흥분했더니 점점 더 정신이 몽롱해 지는 구나.
너무 좋은 사람으로만 살 필요는 없었던 거야.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면 됐을 것을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구나.
마누라한테도 못할 짓을 했지.
평생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았고 말이야.
그래도 불만이 없었던 억척스런 우리 마나님.
하하하!
애들도 훌륭하게 키워냈고.
그래도 마누라, 자꾸 생각난다네.
그 곱던 비욘느의 모습이 말이야.
이제 다시 비욘느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가 없던 20년은 너무 길었어.
이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마누라, 그녀 대신 내 곁을 따뜻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이젠 숨쉬기도 힘들어.
머리가 팽팽 도는군.
하...이게...죽음인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할 것은 없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
그래도 일평생 남 싫은 일은 한 적 없으니 천국이겠지?
캄캄하구나.
나는 한참 만에 정신이 들었다.
온통 새카만 공간이다.
손을 꼼지락 거리면 뭔가 만져진다.
뭐랄까?
그래, 이건 이불인데.
엥?
하지만 아무리 만져도 촉감이 분명 이불이다.
눈꺼풀을 살짝 움찔해보며 눈을 뜨자 어두운 방안의 정경이 보인다.
뭐야?
나 안 죽은 거냐?
으....창피해!
어제 엄청 분위기 잡으면서 유언도 하고 그랬는데...
괜히 폼 잡았군.
그래도 다시 살아난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군.
나는 몸을 한번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 이런 힘이 남아 있었구나.
그런데 몸이 거뜬한데?
아직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여기 내 방 맞나?
익숙한 정경이긴 한데 왠지 낯설어.
뭔가 시공간을 격한 괴리가 존재한다.
다른 방으로 옮겼나?
그래도 아직 죽지 않았는데 침실을 옮기다니...이거 아들놈들 너무하는군.
한소리 하고 싶지만 그럼 또 서운해 하겠지.
그냥 한 번 더 참자.
어차피 조만간 끝날 인생, 이런 것쯤 꾹 참고 가면 되는 것을.
내가 죽고 나서 좀스런 아버지였던 걸로 기억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조금만 더 참으면 죽음 이후에도 계속 근엄하고 멋진 아버지로 기억될 수 있는 거야.
몸을 일으켜 허리를 바짝 꼬부리고 창문을 열어 재꼈다.
하~이것 참, 역시 새벽 공기는 좋아.
깊게 숨을 들이 쉬고는 다시 내뱉었다.
기침도 안 나오고, 허리도 아프지 않구나.
대체 무슨 치료를 한 거지?
마누라, 이거 아무래도 돈 좀 썼나 보군.
돈 없다고 그냥 조용히 가라고 하더니, 역시 혼자 있기는 쓸쓸했나 보군.
그래, 자식 놈들 암만 잘해줘도 못난 남편만 하겠어?
하지만 비욘느 만나는 것은 또 늦어지겠구나.
하아~이거 잘된 건지 안 된 건지 알 수가 없군.
마누라와는 정말 질긴 운명이야.
하..하하하!
창가에 기대어 서서 중얼거리고 있는데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린다.
뭐, 엠마겠지.
나는 뒤 돌아 서지도 않고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오늘은 몸이 거뜬해. 오랜만에 가족들과 같이 아침을 들고 싶군. 나도 식당으로 내려간다고 전해주게.”
목소리에 좀 위화감이 있다.
처음엔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아이 목소리처럼 들려 창피한 마음에 일부러 목소리를 거칠게 하며 말해야 했다.
조그마한 계집애 앞에서 어린아이 목소리로 말하는 노인네라니.
이거 생각만 해도 창피하군.
뭐,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동안 내가 쌓아올린 이미지란 것이 있는데. 험험!
“도련님, 대체 뭐하세요? 허리를 바짝 꼬부리고 창가에 서서...목소리도 이상하고. 어디 편찮으세요? 감기?”
엥? 뭐라는 게야? 엠마 목소리가 아닌데?
나는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마누라가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 시녀복을 입고 서있었다.
뭐...뭐야!?
나는 손가락으로 마누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새 손녀인가?”
“무슨 말이에요, 도련님?! 농담하시는 거예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재미도 없어요.”
살짝 미간을 좁히고 날 쳐다보는 모양새가 완전히 마누라 어린 시절과 판박이다.
“저기...아이야, 넌 이름이 뭐냐? 새로 온 아이냐? 젊었을 적 내 마누라랑 너무 닮아서...그러고 보면 마누라는 어디 있지? 간밤에 같이 안 잤나? 내가 아파서 불편할까봐 다른 곳에서 잔 게야? 어서 이리로 오라고 해라. 당최 좀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아서...”
“도..도련님?”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마누라를 닮은 시녀는 내게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굉장히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아, 걱정 말아라. 몸은 거뜬해. 허리도 안 아프고. 기침도 안 나온단다. 다시 전쟁터라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몸이 젊어진 기분이야. 하하하.”
나는 그러면서 시녀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주었다.
딱 나이가 막내 손녀딸 정도다.
젊은 시절 마누라를 꼭 빼닮은 모습이라 더욱 정이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못할 짓이라도 했나?
이 아이가 왜 이리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지?
잘 익은 사과 같은걸?
물론 귀엽지만...
세상 다 산 노인네가 머리 좀 쓰다듬어 준 걸로 부끄러워 할리는 없고.
당최 이유를 모르겠군.
시녀 아이는 내 손을 살며시 잡고 내리더니 말했다.
“지금 장난치시는 거죠? 도련님...그렇죠? 이...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시녀가 내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지 울먹인다.
이것 참...
“아이야, 울지 마라. 얼굴도 귀엽게 생겼는데 그렇게 하면 보기 흉하지. 허허허.”
시녀가 기어코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방안이 떠나가라 커다랗게 소리쳤다.
“큰일 났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남겨두고 방을 뛰쳐나갔다.
뭐가 큰일 나? 정말 이상한 아이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야.
안됐군. 정말 안됐어. 아직 어린 아이인데...
내가 다시 죽기 전에 잘 치료 해주라고 아들 녀석에게 말해놔야겠어.
치료가 제대로 안 되면 좀 일을 못하더라도 내쫒지 말고 보살펴 주라고도 하고 말이야.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펼쳐진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부산스런 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한두 명이 아니다.
뭐야?
혹시 나 어제 죽었던 건가?
그럼, 어쩌다보니 기적적으로 오늘 아침 살아났을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말이 되지.
이것 참, 허허허!
그래...놀랄 만도 하지.
나는 곧 모습을 보일 아들들과 마누라를 기다렸다.
창문에 등을 기대고 있자 곧 문으로 사람들이 들어선다.
그런데...들이닥친 사람들은 아들도..마누라도 아니었다.
오, 맙소사!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못 뵌 지 오래 되었지만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아버지?”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버지다.
“로드리고, 괜찮으냐?”
내게 다가오며 아버지가 물었다.
“정말 아버지세요? 하지만 분명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아버지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날 쳐다보는 눈빛에 걱정의 빛이 훨씬 심해진다.
“의사는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히스테릭한 여성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렇다. 어머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나는 간밤에 죽은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천국.
하..하하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리 없지.
왜 천국이란 생각을 곧바로 하지 못했을까?
“아! 여기는 천국이군요! 그래서 몸도 안 아프고 부모님도 있으신 거예요! 하하하! 아하하하하! 역시 착하게 살았더니 천국이야! 정말 다행이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다시 한 번 외치셨다.
“의사선생님을 빨리 모셔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