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세상에!
마누라라니!
낸시는 새빨개진 얼굴로 있는 힘껏 자신을 깔고 앉은 로드리고를 밀쳐냈다.
전혀 대비하고 있지 않던 로드리고는 그대로 밀려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한차례 로드리고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도망치듯 서둘러 그곳을 떠나버렸다.
아직도 가슴에 소년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지 양팔을 포개어 가슴을 꼭 감싸 쥔 채였다.
바닥에서 그런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로드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젠장...그렇지. 이제는 마누라 아니지. 나 참...난처하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로드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앉아 입맛을 다셨다.
아직도 손끝에는 물컹한 여운이 남은 것 같았지만 애써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그렇지...저맘때 애들은 당황스럽겠네. 아직 그런 건 전혀 알지도 못할 테고...아...진짜! 이거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겠어. 나중에 레이디 비욘느를 만나서도 이런 실수를 범하면 완전 미운털 박힐 테니까. 이따 낸시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면 괜찮겠지? 그냥 가슴 한번 정도고...그렇지만 이젠 좀 어색해 지겠어. 예전 마누라한테 미움 받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은데...’
로드리고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집안을 샅샅이 살펴봐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농장을 살펴보러 아침 일찍부터 나가신 모양이다.
로드리고도 재빨리 걸음을 옮겨 밭으로 향했다.
근처에 다다르자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로드리고에게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로드리고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여유를 가지고 적당히 응수해준 후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밭 가장자리에 서서 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을 바라다보고 계셨다.
“아버지!”
“오! 로드리고! 오늘은 어떠냐?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아버지는 로드리고를 반겨 미소 지어 주시지만 얼굴 한편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어제 그런 일을 겪었으니 겉보기에 괜찮더라도 갑자기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애가 타는 것이다.
“그런 것 없어요.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걸요. 하하하!”
로드리고가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드는 포즈를 취해본다.
그래봤자 알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하지만 쾌활하고 기운 넘치는 모습이 아버지를 안심시킨 듯 했다.
아버지께서 크게 소리 내어 웃으신다.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는 로드리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이 무척이나 상냥하다.
로드리고는 괜히 쑥스러워 한걸음 물러난다.
죽기 전으로 치면 자기 나이의 반 정도밖에 살지 않은 지금의 아버지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은 심리적으로 꽤나 거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에르줌에는 언제 가시나요?”
로드리고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아버지를 찾은 목적을 밝혔다.
“에르줌? 글쎄다. 특별히 가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왜? 도시에 가고 싶으냐?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뭐 그렇죠.”
로드리고는 대답을 어물쩍 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내심 속에서는 조금 난처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쩌지.
뭐, 몇 달 기다린다고 큰일 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한 김에 바로 가서 기연을 얻고 싶은데...
그래봤자 아직 기연 얻는 방법도 모르지만.
아는 거라곤 검의 사원에 굉장한 기연이 있다는 것. 그 이상은 없다.
그 기연을 얻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확률을 높이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서 좀 머물며 살펴봐야 한다.
운이 좋다면 하루 만에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뭐, 당장이라도 저번 삶에서 배웠던 검술은 혼자서도 연습해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검의 사원에 감추어져 있는 기연은 그가 배웠던 것에 비하면 정말 굉장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서두르고 싶었다.
“흐음...로드리고 네가 원한다면 한번쯤 가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울 일은 아니지.”
“정말요?!”
로드리고가 반색하고 묻자 아버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하! 그래. 그렇고말고. 당장은 좀 어려워도 한 달 내로 출발할 수 있을 거다. 그냥 놀러만 갈 수는 없으니까 이것저것 가져다 팔 물건 정도는 준비해야 하고.”
그래. 한 달 안에 출발한다면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다.
무력이 전혀 갖춰지지 못한 지금 혼자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일단은 내가 알고 있는 검술을 연습해 보자.
검술의 기본은 어디서나 다 비슷한 것이니까.
기연을 얻더라도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하는 일이다.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아버지는 조금은 의뭉스런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대체 뭐가 가지고 싶어서 에르줌에 가려는 것이냐? 응?”
“뭐가 사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그냥 도시 구경하고 싶을 뿐이죠.”
“그래. 그것도 좋지. 하하하!”
나는 그렇게 아버지와 좀 더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한 후 다시 집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할 시간이 좀 지난 참이라 슬슬 배가 고팠다.
나는 곧바로 내 방으로 가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뭔가 얻어먹고 배를 채울 셈이었다.
그러나 막 내가 주방으로 들어섰을 때, 마주친 것은 낸시였다.
낸시가 나를 보고는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어맛!”
커다랗게 뜬 눈이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어느새 두 팔을 들어 포개고 가슴을 가린다.
적개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다.
나는 배고픈 것도 잊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낸시...저기...아까는 미안했어.”
“......”
“......”
나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뭔가 화라도 내면 좀 나을 텐데 그냥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으니 죽을 맛이다.
“어제도 그렇고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엄청 멍하거든. 기억도 흐릿하고...절대 네 가슴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넘어져서 어쩌다 보니까...내가 네 가슴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지? 이젠 뭐...대수로울 것도 없고. 그냥 가슴이니까...그러니까...”
갈수록 낸시의 표정이 두려움은 사라지고 언짢음이 무럭무럭 커진다.
미치겠군.
왜 이렇게 말이 꼬이지?
아! 진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빛만 보내도 낸시가 다 알아서 해줬는데!
이건 뭐가 이렇게 힘들어!
그러나 더 이상 이런 푸념은 이어질 수 없었다.
“미안하게 됐네요! 전혀! 관심도 없을 제 가슴을 무진장 만졌으니까! 그냥 가슴일 뿐이니까!!!!”
“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과..관심 있지! 무척 관심 있지! 그야 가슴이니까! 무려 가슴인데! 그러니까 관심 있지! 아무리 네 가슴이어도 이맘때 가슴은 잘 모르고...아! 아니...그게 아니라....아...진짜....”
낸시가 한걸음 물러난다.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고 입술이 부들부들 떨린다.
“......”
나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한걸음 다가가려고 했다.
“아니야...그게 아니라...”
그러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걸음을 막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변태!”
나는 그렇게 석상이 되었다.
낸시는 나를 중심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빙 돌아 주방을 나가버렸다.
뭔가 더럽고 위험한 것을 피하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