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아, 진짜!
무려 도련님이 가슴 좀 만졌을 뿐이잖아!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런 눈빛으로 본단 말이야!?
그리고 변태?!
웃기네?!
너랑 나는 며칠 전까지 부부였거든?!
70 넘은 네 모습도 질리도록 봤는데 변태는 무슨 변태란 말이야?!
우리 사이에 애가 몇이었는지 알고는 있어?!
무려 일곱이었다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인데 그렇게나 심한 말을 하다니!
나는 분을 삭이려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중에 한소리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슴 만진 것은 좀 잘못일지도 모르지만 낸시는 지금 우리집의 고용인일 뿐이다.
여긴 깡촌 시골마을이라 애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 밖에서 하녀들은 귀족들을 위해 하룻밤 노리갯감이 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물론, 내가 귀족이란 것은 아니지만...
그냥...좀 재산 좀 있는 집안의 아들이고, 간신히 준귀족의 작위를 할아버지 때 한 번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아직도 ‘아렌트’라는 성이 있는 것이다.
비록 준귀족 작위는 계승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부 권리는 관례상 후손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괜히 기분이 상해 땅바닥을 몇 번 구른 후 산책 겸 앞마당으로 갔다.
마침 여동생 헤로나가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놀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냉큼 달려왔다.
“오빠!”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
우리 헤로나.
어려서는 이렇게나 귀여웠구나.
70이나 먹은 주름진 얼굴이 익숙하다보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다.
나는 헤로나 머리를 쓱싹 쓱싹 쓰다듬고는 마주 웃어주었다.
“오빠! 오늘은 괜찮아?”
“그럼. 그보다 뭐하던 참이야?”
“그림 그리고 있었어. 엄마하고 아빠하고. 그리고 오빠.”
“그래? 그럼 한번 봐볼까?”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엉성하게 그려놓은 앙상한 뼈다귀 그림이다.
커다란 뼈다귀 두 개는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다.
그리고 그 곁에 서있는 조그마한 뼈다귀 두 개는 나와 헤로나겠지.
하지만 조마한 뼈다귀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건 누구야?”
내가 묻자 헤로나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한다.
“당연히 낸시 언니지.”
“낸시?”
“응!”
“낸시는 가족 아니야!”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기분이 상한 나는 조금 삐딱하게 말했다.
“낸시 언니도 가족이야.”
헤로나가 고개를 저으며 순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걔는 그냥 우리 집에서 고용한 애일뿐이야.”
“그렇지만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걸? 일하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별채에서 살잖아? 그러니까 낸시 언니는 우리 가족이지.”
“아! 정말! 마음대로 해!”
나는 더 이상 헤로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몸을 돌려 버렸다.
그렇지만 헤로나가 뒤에서 내 손을 얼른 잡으며 말한다.
“오빠! 가지마! 나랑 놀아줘. 혼자 노는 거 싫어.”
귀엽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라도 내가 저번 삶에서 단련하던 검술을 다시 수련할 생각이었다.
강해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헤로나. 오빠는 바쁘니까.”
“뭐 할 건데?”
“수련을 해야지.”
“수련?”
“응! 수련!”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자 헤로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뭘 수련해? 그냥 헤로나랑 놀아. 응? 인형 놀이할까? 오빠가 아빠하고, 내가 엄마하고. 응?”
“그럴 시간 없어. 나는 바쁘다고. 뭣하면 가족이라고 했던 낸시나 불러서 놀란 말이야.”
“하지만 낸시는 매일 일하느라 바쁜걸. 웬만해선 놀아주지 않아.”
“그럼 내가 수련하는 거 구경하던가.”
“그래도 돼?”
헤로나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우고 좋아한다.
“하지만 방해하면 안 돼. 그럼 혼내줄 테니까.”
“그럼. 아무 걱정 하지 마. 헤헤...”
그렇게 나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꺾어서 뒷마당으로 갔다.
하인들 몇 명이 뭔가 할 일이 있는지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며 정리하고 있었지만 딱히 우리를 보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뒷마당은 넓어서 충분한 공간도 있고.
내가 적당한 장소에 서서 나뭇가지를 들고 호흡을 골랐다.
헤로나가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맞잡고 나를 쳐다본다.
이거 참...멋쩍게 쟤는 시키지도 않는 포즈는 하고 그러는 거야?
그래도 허투루 할 수는 없지.
“하앗!”
나는 검을 힘껏 휘둘렀다.
아니...정정한다.
나뭇가지를 힘껏 휘둘렀다.
기대했던 ‘휘우우웅!’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냥 ‘휭!’소리가 짧게 났을 뿐이다.
그래도 헤로나는 마음에 들었는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깡충깡충 뛰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던 것인지 일꾼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를 보며 씩 웃는다.
저들이 보기엔 그냥 어린애가 소꿉장난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당하는 입장의 70넘은 노인은 상당히 창피했다.
난 더 이상 나뭇가지를 휘두르지 않고 헤로나에게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로나, 넌 저리로 가.”
“왜? 봐도 된다고 그랬잖아?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 걸?”
“그래도...방해되니까.”
“싫어.”
고집을 피우며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쫓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뭘 헤로나가 좋아했었지?
보통 나이 들고 70쯤 되고 나면 특별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좀 모호해진다.
그래서 평소 안 먹던 음식도 그냥 먹고, 잘 화도 내지 않게 돼서 뭔가 그 호불호를 알기가 상당히 난해해진다.
나는 힘을 내서 주먹을 쥐고 기억을 들쑤셔 헤로나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결혼 후 아이도 없이 남편과 사별하고 나중에 나에게 몸을 의탁한 불쌍한 동생이었을 뿐이다.
남편이 죽고 나서는 잘 웃지도 않았고, 뭔가 하고 싶다고 날 조르지도 않았지.
그렇게 몇 십 년을 보내다 내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나 귀여운데 젊은 나이에 혼자된다니...
뭔가 가여운 마음이 무럭무럭 차올라 헤로나를 쫓아내려던 생각이 금세 사라지고 만다.
분명 검술 훈련을 해야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헤로나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셨었지.
저번 삶에서 경제적으로는 보살펴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아버지께서 하신 의미는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 결국 나뭇가지를 멀리 던져버리고 잔뜩 골이난 헤로나의 손을 잡았다.
헤로나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하고 놀래?”
내가 묻자 헤로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꿉놀이 하자! 오빠가 아빠! 내가 엄마!”
솔직히 그건 정말 하기 싫었다.
그러나 헤로나의 맑은 눈빛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헤로나가 내게 안겨온다.
뭐...어쩔 수 없나?
부부 역할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이래 봐도 나는 꽤 오랫동안 남편 역할을 해왔던 사람이니까.
비록 아내를 엄청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고, 다른 여자만 주구장창 좋아했지만 이런 어린 동생이 원하는 완벽한 ‘아빠’역할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너무 안일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빠’역할은 힘들다.
생각보다 훨씬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