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지금은 소꿉놀이 중이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우울한 삶을 살은 여동생을 향한 동정이 결국 나뭇가지 대신 인형을 잡게 한 것이다.
“여보, 오늘 하루는 어떠셨어요?”
여동생이 묻는다.
목소리가 제법 어머니를 흉내 내어 보는 것 같지만 그래봤자 꼬마 계집애의 짹짹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손에는 작은 인형이 하나 쥐어져 있다.
머리가 긴 것이 확실히 여자 생김새를 흉내 냈다.
물론, 내 손에도 작은 인형이 하나 쥐어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자 인형은 아니다.
인형 머리에 달려있는 긴 머리칼을 자른다면 어떻게든 남자 생김새로 봐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내 의견에 여동생이 절대 안 된다며 기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설정만 남자로 하기로 했다.
훗!
나는 너무 손쉬운 여동생의 질문에 간단히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여자가 알아서 뭘 하게? 밥이나 줘.”
“......”
동생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훗!
예전에 낸시도 젊을 적에 내게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다.
아니, 꽤 자주 있다.
즉,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한 모범답안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바로 이렇게 말해주면 된다.
“어서 밥 달라니까? 밖에서 사람들 다루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뭘 지시해 놓으면 게으름만 피운다니까. 내가 없으면 안 된다구. 여자는 남편이 들어왔으면 그런 성가신 것 묻지 말고 어떻게 해야 남편이 좀 더 편할지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하여간 여자가! 아이구! 내가 저런 것과 혼인했다니...”
“......”
또 동생이 아무런 대꾸도 없다.
이번엔 살짝 입술도 삐쭉 나와 있다.
아...진짜...!
어떻게 옛날 일 생각나게 그때랑 하나에서 열까지 표정이 전부 똑같냐?
그래도 뭐...이래서 남편 역할 하기가 쉽기는 하지만.
나는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면서 인상을 쓰고 조금 거친 목소리를 흉내 내서 물었다.
그래도 원래 의도했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애들은 어때? 잘 지내?”
뭔가 대화 거리가 다시 흘러나와 기쁜지 잠시 주춤했다가 애써 미소 지으며 여동생이 말한다.
“...큰 애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어요. 팔꿈치도 조금 다치고. 하지만 금방 나을 거예요.”
“뭐?! 다쳤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집에서 대체 하는 게 뭐야? 애 돌보는 거 말고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하여간...너 잘할 생각은 있냐? 엉? 아...진짜...비욘느라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바닥을 손으로 탕탕 두드리며 말하자 헤로나가 움찔하며 겁에 질린 모습을 한다.
흐음...이건 낸시랑 좀 다르네.
낸시는 그냥 무표정을 유지했는데...
뭐, 그래도 대답 안하는 것은 같으니까 그때처럼 해볼까?
“......”
“왜 말이 없어? 응? 남편이 우습냐?”
“...그만할래.”
쌍심지를 켜고 헤로나가 내게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만 한다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자기가 직접 놀아준다고 했으면서...흑...흑흑...”
애가 울기 시작했다.
“야, 울긴 왜 울어? 한창 재밌어지는데?”
“이게 뭐가 재밌어?! 완전 못됐어!”
“야, 원래 남자 여자 혼인하면 다 이렇게 사는 거야. 내가 다 안다니까. 하려면 리얼하게 해야지. 실전처럼! 암! 실전이 중요하지. 괜히 어려서 너무 기대하고 그러면 나중에 실망이 커요. 이 오빠말 들으라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혹독한 현실을 미리미리 경험해야 나중에 맷집이 생겨서 남편한테 잘하지.”
“그런 거 아니야! 남자는 여자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아빠도 그렇게 안하잖아?!”
“그건 네가 잘 모르니까 그렇지. 아버지도 우리 안 볼 때는 다 그렇게 하실걸?”
“내가 잘 알거든?! 아빠는 절대로 그렇게 안하셔!”
계집애...성격있네.
내가 다 경험해봐서 아는 건데...
이놈의 지지배, 진짜로...내가 생각해서 같이 놀아줬더니 고마운 것도 모르고.
그래도 괜히 헤로나가 훌쩍이는 것 부모님께 보이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달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좀 더 상냥하게 하란 말이야. 나를 사랑하는 아내라고 생각하고!”
“상냥하게라...”
상냥하게?
상냥하다.
그건 대체 어떤 거냐?
“하지만 원래 남자는 여자를 대할 때...”
“그냥 내가 좀 해달라는 대로 해줘. 나랑 놀아주는 거잖아?! 남자가 대체 왜 그래?! 고집 좀 부리지 말고! 그러다간 평생 가도 결혼도 못할걸? 오빠같은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하?!
이 계집애가 지금 뭐라는 거야?
현실을 전혀 모르니까 이런 일에도 삐져서 성깔이나 부리면서.
이래 봐도 나는 결혼도 해봤고, 그 기억도 그대로 있는 사람이거든?
게다가 실제로 오랫동안 같이 살아도 봤고.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낸시가 바로 내 마누라였다고!
너는 남편 일찍 여의고 부부생활 몇 년 하지도 못했고.
나는 조금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헤로나? 그건 아니지. 나는 여자에 대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안단다.”
“말도 안 돼! 그건 오빠 착각이야.”
“정말이야. 가슴 설레는 사랑도 해봤고, 결혼도 해봤으니까.”
“하?!”
헤로나가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계집애가 정말!
내가 인상을 쓰자 헤로나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런 거짓말 믿을 리가 없잖아? 오빠가 대체 언제 사랑을 해봤다는 거야? 결혼은 누구랑 하고? 나도 이젠 알거는 다 안단 말이야. 12살인데 벌써 결혼했다고? 가족인 나도 모르게?!”
“그래. 뭐 네가 알 리가 없지. 후훗!”
여유 있는 승자의 미소를 짓자 여동생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려댄다.
눈썹도 역팔자를 그린다.
“그럼 말해보란 말이야. 누구랑 결혼했는데?”
“낸시.”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헤로나의 눈빛이 흔들린다.
“왜?”
내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묻자 헤로나가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지금 낸시 언니 말하는 거야?”
“그렇지.”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게 무슨 말인데?”
“몰라도 돼. 그런 게 있으니까.”
“오빠, 혹시 낸시 언니 좋아하는 거야?”
뭔가 설레는 표정으로 뒤바뀐 헤로나가 두 손을 맞잡고 꿈결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묻는다.
“야, 그럴 리가 없잖아?! 괜히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
내가 인상을 쓰지만 헤로나는 여전히 헤실헤실 웃으며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헤헤...그렇구나? 하지만 지금 같은 태도로는 낸시 언니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걸? 여자는 꽃이란 말이야. 좀 더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응! 그렇고말고.”
“......”
어이없어 대꾸할 말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방실방실 웃는 헤로나가 무척이나 귀여워 딱히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나 웃을 수 있으면서 계집애가 그렇게 우울하게만 살았다니...
나중에 내가 기억하는 그놈이랑은 절대 결혼시키지 말아야겠다고 혼자서 다짐하며 그냥 손을 들어 헤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헤로나는 내 손을 잡고 치우며 말했다.
“아, 진짜...이렇게 말 돌리지 말고. 내가 도와줄게. 응? 오빠?”
“뭘 도와?”
내가 묻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헤로나가 신이나 말했다.
“그야, 여자를 정복하는 법이지.”
“뭐?!”
이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나만 믿어! 내가 낸시 언니가 홀딱 오빠한테 반하게 해줄 테니까.”
“아니, 나는 정말 낸시 좋아하는 거 아니고...”
“됐어! 됐어! 자 인형 잡아! 어서!”
여동생의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이 귀여워 그냥 어울려주기로 했다.
내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인형을 다시 집어 들자 여동생이 말했다.
“어머! 그대는 누구인가요?”
“...야? 이거 소꿉놀이 아니었냐?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그러나 여동생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머! 그대는 누구인가요?”
“...하아...로드리고 아렌트.”
그렇게 나는 연예의 기술을 여동생과 인형놀이를 하며 습득하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