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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7화 (7/200)

00007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오전 내내 여동생에게 붙잡혀 인형놀이를 해야 했다.

여동생은 확실히 오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정해 주려 해도 도무지 믿으려 하질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에이, 부끄러워하긴...’이나 ‘언니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혹은 ‘오빠는 내덕에 장가 갈 수 있게 된 거야.’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더 이상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 간단히 점심을 먹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해가 하늘 높이 떠서 꽤나 더웠다.

좀 게으름을 피우고 싶으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에는 검술을 수련해야 한다.

일단 목표는 무려 왕국 10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될 가능성은 까마득하지만 그래도 다른 놈들보다야 훨씬 유리하니까 어떻게든 그 근처에라도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비욘느에게 잘 보이려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만 한다.

조셉 그 자식은 미남에 능력도 좋다.

게다가 집안도 좋지 않던가?

놈은 귀족이다.

이전 생에서 그와 결혼해서 조금도 행복하지 못했던 비욘느를 생각하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놈보다 더 비욘느의 눈에 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생김새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조셉에 비하면 많이 쳐진다.

어느 것 하나 그 녀석에 비하면 내세울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비욘느로부터 호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급 우울해진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아니 많이 초조해졌다.

아무리 회귀했어도 나 같은 것이 정말 비욘느를 차지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며 손톱을 이빨로 뜯어댔다.

젠장...

내가 전공도, 사랑도 모두 친구에게 양보했다고 속으로 되내이며 살아왔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나 스스로의 핑계에 불과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았으니까.

내가 전쟁 중에 이룬 전공은 전적으로 운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양보한 그 정도 전공이 없었더라도 조셉은 충분히 많은 활약을 했다.

조금 늦기는 했겠지만 녀석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이 최종적으로 이룬 만큼의 경지와 지위를 얻어낼 수 있었으리라.

비욘느...

제대로 사랑 고백도 못했는데 그녀의 행복을 위해 친구에게 양보했다고?!

그건 패배자의 알량한 넋두리에 불과하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지나가는 행인1 정도의 인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왜 사랑 고백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두려웠으니까.

비웃음 살지도 모른다는 걱정.

비교도 되지 않는 까마득한 명품남, 조셉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굳이 지나가 버린 것을 왜곡해 자존심을 어떻게든 세워보려는 속임수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검을 휘두르고 실력을 키우는 것.

그것뿐이다.

나는 검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 힘껏 휘둘렀다.

“하앗!”

나의 진지한 검술 연습에 주변을 지나가던 하인들이 돌아본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는 꼬마 놈이 기사 흉내 내며 노는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정말 기적적으로 잘만 되면 전설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중에 내 평전에 이렇게 한 줄이 기록되는 것이다.

‘세기의 영웅, 로드리고 아펜트는 집 뒷마당에서 나뭇가지로 검술 훈련을 했다. 그의 훈련을 지켜본 자들은 충성스런 하인들이었다. 석양이 물드는 시간까지 쉬지 않고 검을 수련하는 그의 모습은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너무 멀리 간 모양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전이 터지기 전에 암튼 쓸만한 실력을 얻어야 할 텐데...

나뭇가지를 100번 휘둘렀다.

체력이 없어서 그런지, 혹은 아직 팔 근육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금세 자세가 흐트러진다.

마음은 조급한데 영 제대로 되질 않는다.

팔굽혀펴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까마득하게 먼 여정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저만치서 낸시가 다가온다.

뭐야? 저 계집애?

아까는 나한테 변태라고 했으면서.

이참에 한마디 해줄까?

수련이 제대로 되질 않아 기분이 상한 참이고, 마침 회귀 전에도 가장 만만하던 마누라라 기분 좀 풀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낸시 곁에서 졸랑졸랑 따라오는 조그마한 것이 보인다.

젠장할!

헤로나다!

저 계집애...혹시 쓸데없는 말 하지는 않았겠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나뭇가지를 까딱거리며 다리를 떨었다.

그 모습은 꽤나 불량해 보였을 것이다.

내전에서 갈고닦은 불량한 포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주변에서도 좀 한 가닥 하는 녀석인 줄 알고 잘 건드리지 않았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는 한번 깐보이면 끝이기 때문에 싫으나 좋으나 할 수밖에 없었고, 늘그막에 심신이 쇄약해지기 전까진 자주 하던 포즈였다.

그러나 12살짜리가 그렇게 포즈를 잡아봤자 코믹해 보일 뿐인지 하인들이 ‘푸풋!’하고 웃는다.

나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포즈를 풀고 단정히 섰다.

낸시와 헤로나는 이미 내 바로 곁까지 다가온 참이었다.

하지만 낸시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돌리고 내 반경에서 일정 거리 이내로는 다가오지 않고 빙 돌아서 날 지나가려 했다.

나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낸시를 불러 세웠다.

“야! 낸시. 너 잠깐 얘기 좀 하자.”

낸시가 걸음을 멈추고 곁눈질로 나를 쳐다본다.

바로 곁에서 헤로나가 두 손으로 자기 뺨을 감싸 쥐고 ‘꺄아아아!’하고 자그맣게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헤로나, 넌 저리 가있어.”

괜히 아침에 있었던 일을 헤로나가 알게 되어도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 되서 일단 헤로나를 치우기로 했다.

그러나 헤로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난 여기 있을래. 내 학생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 볼 의무가 있어. 난 선생님이니까.”

발랑 까진 계집애!

뭔 헛소리야?!

누가 누구 학생이라고?!

귀여워서 몇 번 봐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어?!

내가 헤로나에게 다시 한 번 뭐라고 하려는 순간 낸시가 먼저 말했다.

“아가씨는 저와 볼일이 있어요. 그리고 도련님과 같은 곳에 둘만 있는 것은 사양이거든요?”

나는 이마에 혈관마크가 삐죽하고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뭣보다 나를 향한 혐오하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도련님이 말하면 그냥 들어야지. 고용인 주제에. 확! 그냥!”

내가 짜증을 내자 헤로나가 갑자기 끼어든다.

그녀는 검지를 들어 올리고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며 말했다.

“어허! 학생! 그러면 안 되지! 오전 내내 연습시켰더니 정말 성과가 나지 않는군!”

뭐냐?!

저 우쭐대는 어투는!

콩만 한 게 그냥!

부글부글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는데 낸시가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

“뭐?!”

“간다고요. 계속 기사 놀이 하면서 노세요.”

“야! 이건 기사 놀이가 아니라 검술 수련하는 거야! 진지한 거라고!”

욱해서 반박하자 낸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쿠쿡...알아요. 12살 맞으시죠? 호호...”

어투에 비웃는 투가 역력하다.

12살인데 아직도 그런 거 하고 노느냐는 깔보는 어투에 나는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이건 진짜로 제대로 된 검술 수련으로....”

“예...예...알겠어요. 그럼 이만 바빠서...”

낸시는 더 이상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헤로나가 따르며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마...내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게. 근데...정말 기사 놀이는 이제 그만해. 오빠. 나도 창피하다. 12살이잖아? 암튼 오빠는 내가 책임지고 특훈 시켜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마.”

나는 돌이 되어 그 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헤로나가 낸시에게 말하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온다.

“언니, 우리 오빠 어때? 응? 괜찮지? 이제 기사 놀이 못하게 할 테니까...그러니까...너무 미워하지 마.”

나는 결국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있는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뒷마당을 떠났다.

그렇게 내 첫 번째 검술 수련은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고, 낸시와 여동생에게는 철이 덜난 12살짜리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너희들 알고 있니?

나 70도 더 살았거든?

그리고 진짜로...진짜로...검술 수련이거든?!

나는 내일부터는 몰래 어딘가에서 숨어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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