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어린 시절과의 조우 =========================================================================
휘이잉!
나무 막대가 허공을 가른다.
이제는 제법 위협적인 소리를 내서 그런지 조금은 뿌듯했다.
벌써 2주 정도 수련한 성과다.
처음엔 근육도 체력도 전혀 없어 죽을 맛이었지만 요 며칠사이에는 제법 자세가 잡힌 것을 느낀다.
뭣해도 한 번 해봤던 경험이 있어서 나름 요령이 있다고나 할까?
지금쯤 조셉 녀석은 어느 정도 실력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입맛이 쓰다.
안 봐도 며칠 연습한 나보다는 훨씬 강할 것이다.
젠장!
대충 막대기를 옆에 던져두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땀을 식혔다.
여기는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언덕 아래 공터다.
주변엔 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다.
아주 울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밖에서는 공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기사 놀이나 하는 바보로 취급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여기 말고는 딱히 검을 수련할 장소가 없었다.
뭐, 집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고 힘들면 나무 그늘에서 쉬면되니까 조건은 나쁘지 않다.
본래 로드리고가 회귀 전 익혔던 검술은 낙향한 기사에게서 배운 검술이었다.
그가 15살 때, 근처 영지에서 살던 노기사 한명이 이 마을로 낙향하였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간청하여 사사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는 사실 따위는 알지 못했다.
뭐 수도에서야 분위기가 흉흉하다든가 그런 거라도 알 수 있었겠지만 이런 시골이야 그런 것조차 쉽지 않다.
수도의 소식이 궁금하더라도 여러 사람을 거쳐 이곳에 도착하면 너무 뒤죽박죽 섞여 믿을만한 소식은 아니게 되어버린다.
당시의 나는 그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고 아버지처럼 농경지를 관리하며 시골 부농의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 이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에게 있어 미래는 이미 지나온 과거처럼 단단히 고정된 것이었다.
뭐 이리저리 돌고 돌아 결국은 당시에 했던 생각처럼 되긴 했지만.
아버지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평소 느끼시던 아쉬움까지 고스란히 내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검술.
아버지는 검술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셨다.
아니, 거의 하지 못하셨다.
실력을 논하자면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정도였을까?
따라서 안전을 위해 도시로 상행을 떠날 때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대동해야만 하셨다.
그러나 필요이상의 인원을 데려가는 것은 이래저래 손해였다.
낙후된 시골길에 뭔가 나와 봤자 별 볼일 없는 산적 정도였고, 깊은 숲도 없어 몬스터가 튀어나와봤자 약해빠진 고블린 몇 마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실력이 부족하고 인원이 적으면 놈들에게 얕보여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철 농사를 전부 손해 보는 일이라 절대로 피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을 대동해 도시와 마을을 오가고 나면 식비부터 고용비까지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이것을 제하면 남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검술을 제대로 배운다면 그런 부수적인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이점이 생기는 셈이다.
혼자 상행하기는 힘들어도 몇 번 검술 실력을 보여 위협하면 산적 정도는 겁을 집어먹고 다시 공격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검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노기사의 실력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고수처럼 느껴졌고, 그 노기사도 내 착각을 굳이 정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나쁜 사람도 사기꾼도 아니었다.
일평생 칼 밥을 먹으며 갈고 닦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검술을 익히지 않았었다면 잃어버렸던 재산도 다시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대로 우리 가족은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조셉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야 한다.
저번 삶에서 간신히 손에 쥐었던 것조차 못 쥐고 패가망신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손에 나무 막대기를 쥐었다.
이미 땀도 식은 상태고 다시 몸을 움직여 볼 여력은 충분하다.
그렇게 다시 수백 번 막대기를 휘두르고 나자 호흡이 거칠어진다.
어느덧 시장기도 느껴진다.
막대기를 나무 둥치에 던져두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었다.
공터를 빠져나오자 저만치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하나는 내 또래의 소녀 같았고 또 하나는 나보다 몇 살 많은 청년과 소년의 어중간한 나이처럼 보인다.
점점 가까워지자 또렷이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녀는 낸시였고, 옆에서 같이 나란히 걷고 있는 녀석은 고용인 중 하나였던 토미였다.
토미는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편이라 회귀 전에는 오랫동안 내 농장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겼었다.
성실하고 뚝심도 있어서 믿고 맡길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다.
그래도 한 예순 살쯤 먹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버려 그 후로는 녀석의 아들에게 맡겨버렸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쁜 마음에 나는 오른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토미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 안녕하세요?”
“응. 오랜만이네. 잘 지내?”
“그럼요. 다 주인어른 덕분입니다.”
“뭘, 아버지는 너희들이 열심히 일해주어 다행이라고 매일 말씀하시는 걸. 그보다 어디 가는 거야?”
내가 묻자 놈이 얼굴을 붉히며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방앗간에 가고 있습니다. 낸시가 혼자서 포대를 옮기는 것은 힘들 것 같아서요. 마침 저도 가는 길이고 해서 이렇게 도와주고 있죠.”
“그래?”
내가 낸시를 돌아보자 마지못해 날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하지만 인사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뭔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좀 퉁명스럽게 말하고 말았다.
“별로 그럴 필요 없을걸. 낸시는 보기보다 힘이 쎄. 애 낳고 그 다음날도 곧바로 밭일 하고 그러는 애라고.”
“예에?!”
토미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와 낸시를 쳐다본다.
낸시의 무표정한 표정도 산산조각 나서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그렇다고. 나는 칭찬하는 거야. 낸시는 여자답지 않게 힘이 쎄다고 말이야.”
낸시는 나를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리고는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토미도 얼른 내려놓았던 포대를 어깨에 지고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낸시를 따랐다.
젠장.
왜 이렇게 기분이 상하지?
배 고파서 그런 거지.
절대로 이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에 도착했고 서둘러 식사를 했다.
그러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의자에 앉아 식탁에 머리를 박고 비비적거리고 있는데 헤로나가 뛰어 들어오더니 말했다.
“점심은 뭐야? 맛있는 냄새 나는데?”
우리 집의 식사를 책임지는 베니가 푸근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가씨, 손부터 씻으셔야죠.”
“헤엥...알았어. 근데 오늘은 뭐 먹는 거야? 응?”
헤로나가 손을 씻으며 재차 묻는다.
“소고기 스프하고 통밀빵이에요.”
“그래? 맛있겠다. 헤헤.”
옆 자리에 나무 마찰음이 들린다.
헤로나가 앉은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대로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다.
“이건 뭐야?”
헤로나가 다시 뭔가를 묻는다.
한 템포 쉬었다가 베니가 답했다.
“그야, 도련님이죠.”
“헤에? 이거 살아있어?”
헤로나가 나를 쿡쿡 찌르며 묻는다.
“그런 소리 하시면 못써요.”
베니가 헤로나를 가볍게 혼내지만 그래도 헤로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찌르는 걸 그만두지 않는다.
나는 한손만 휘둘러 헤로나의 손가락을 쳐냈다.
“내버려 둬. 이 계집애야.”
“왜 그런데, 오빠? 응?”
“아...진짜...그냥 좀 내버려 둬. 기분 별로 안 좋단 말이야.”
“무슨 일? 응? 무슨 일?”
나는 더 이상 헤로나를 상대하기도 귀찮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식당을 나서려고 하니 헤로나가 얼른 내 손을 잡는다.
입에는 숟가락을 문 채다.
눈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제법 귀엽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내 꿀꿀한 기분이 풀리지는 않는다.
난 헤로나의 입에 물린 숟가락을 쑥 빼고 아직 식탁에 놓여 있는 통밀빵을 헤로나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은 후 식당을 빠져나와 버렸다.
그대로 내 방에 틀어 박혀 잠이라도 자볼까 했지만 침대에 누워 있어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삐이익’거리는 경첩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려 힐끗 보았더니 헤로나가 고개를 쑥 내밀고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넌 또 뭐야?”
내가 짜증을 가득 담아 말하자 헤로나는 어차피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방으로 들어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