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조금 전에 보니까 도련님 장난이 심하시던데...힘들진 않아?”
잠시 동안 끊겼던 대화를 토미가 다시 잇는다.
갑작스럽게 나온 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라는 거야? 저 자식은?!
그냥 이맘때 이 나이면 그 정도 장난이야 칠 수 있는 것 아닌가?
단순히 농담 정도였고.
토미 저 자식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데 이렇게 뒷담화나 까려 하다니, 아주 질이 나쁘네.
“별 것 아니에요.”
낸시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말한다.
오늘 낸시가 했던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별 것 아닌 게 아니야. 아무리 도련님이어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지. 나는 낸시를 연약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하니까...그러니까...”
토미가 뜸을 들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헤로나가 내게 속삭이며 묻는다.
“대체 낸시 언니한테 뭐라고 했던 거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헤로나의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신경은 전부 귓가에 모여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글쎄요. 그냥 장난이었을 뿐이니까요. 물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저는 연약하기만 한 여자아이는 아니에요.”
나는 주먹을 쥐고 한차례 허공에 위아래로 짧고 강하게 휘둘렀다.
낸시의 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네가 연약하면 이 세상에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아주 자아정체성이 확고하네!
“아! 뭔가 오해한 모양이야. 나도 널 연약하기만 한 여자아이로 보는 건 아니야. 그보다는 그저...뭐라고 해야 할까? 그게...지켜주고 싶다고 할까?”
토미 개자식!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당장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이를 갈 뿐이다.
분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헤로나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헤로나는 나를 보며 한차례 씩 웃어주고는 내 어깨를 ‘투둑!’하고 두드렸다.
나는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헤로나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오빠, 걱정 마. 오빠한테는 내가 있잖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나만 믿어.”
“뭐?!”
내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되묻자 헤로나가 다시 싱긋 웃는다.
“후후후! 내가 가르친 학생이 이렇게 상심하고 있는데 어떻게 선생님이 나서지 않고 있겠니?”
그렇게 말하고는 숫제 내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나는 그 손을 재빨리 쳐내며 작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거야?! 이 계집애야?! 죽을래?!”
“저런...가엾어라. 벌써 상처 입었구나! 헤치지 않아요. 나는 네 편이란다, 워리.”
동생의 고사리 같은 손이 어느새 내 턱을 만지작거린다.
딱!
나는 동생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 주었다.
동생은 날 만지작거리던 손을 회수해서 자기 머리를 빠르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으으...아파...이게 무슨 짓이야?!”
“너야 말로 오빠한테 무슨 짓이냐?! 내가 개냐?!”
“나는 위로해주려고...”
“뭘 위로해?! 그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낸시 언니가 토미랑...”
“야! 너 완전 오해하고 있는데 나 낸시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 저런 애 관심 없다니까! 촌스럽고 못생기고, 퉁명스럽고!”
“낸시 언니는 예뻐. 그렇게 창피해할 건 없잖아? 그리고 낸시 언니에게 마음이 없다면 왜 여기서 엿듣고 있던 건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 헤로나가 아직도 머리를 비벼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엿듣던 거 아니야.”
“그럼 어떤 게 엿듣는 건데? 내가 지금까지 이 단어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계집애 왜 이리 말을 잘하지?
조막만한 게 도무지 질 생각을 안하네!
다시 한 대 때려줄까?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헤로나가 속삭였다.
“다 이해해. 암. 이 여동생만 믿게나. 무능한 오빠여!”
“믿긴 뭘 믿어?! 너는 나보다도 꼬마면서! 이 꼬꼬마야! 이성관계에 대해 네가 뭘 안다고!?”
“후훗! 나는 여자야. 그러니까 여자 마음은 내가 알지.”
“그리고 나는 네 오빠지! 이 발랑 까진 것아! 어서 꺼져!”
그러나 헤로나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짓더니 말릴 새도 없이 방앗간 문을 열어 젖혔다.
“언니! 여기 있었구나! 뭐해? 아직 멀었어?”
아무것도 모른 다는 투로 헤로나가 해맑게 웃으며 묻는다.
“아가씨? 여기는 어떻게...”
낸시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좀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토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서 나와 헤로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순박한 표정과 행동이지만 이미 다 봤다!
이 더러운 위선자 새끼!
감히 낸시를 꼬드기려고 들어!
게다가 내 뒷담화를 하려고 분위기 조성까지 했겠다?!
흉악한 녀석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식!
나는 한차례 이를 들어 내 보이며 으르렁 거렸지만 토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지 뒤통수만 긁적여 댔다.
“주인마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곡식을 좀 빻아 오라고 하셨거든요. 이제 다 끝났어요.”
“그래? 그럼 어서 놀러가자. 응? 우리랑!”
“잠깐! 우리라니?”
나는 헤로나가 갑작스럽게 꺼낸 말에 거칠게 반응했다.
“그야 오빠랑 나랑 낸시 언니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헤로나가 말했다.
심지어 한쪽 눈을 찡끗 거리기까지 한다.
“누가 저런 애랑 논단 말이야?! 나는 바쁘다고!”
“저...저런 애?”
낸시는 내가 한 말을 따라하며 눈가를 파르르 떤다.
“오빠!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헤로나가 쌍심지를 켜고 나를 노려보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제가 거절하겠어요. 기사놀이나 하는 어린애랑 놀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요.”
낸시가 고개를 휙 돌려가며 말했다.
“누가 어린애야?!”
“글쎄요?”
“너...정말...”
나는 손가락으로 낸시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곡식 빻은 것은 포대자루에 다시 담아 들었다.
그때까지 가지 않고 눈치만 보던 토미가 얼른 그걸 뺏어 들려고 한다.
하지만 낸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저는 약한 여자애가 아니에요. 그냥 여자애지!”
토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결국 낸시의 짐을 뺏어 들지 못했다.
그때, 헤로나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오빠, 지금이야!”
“뭘?”
내가 묻자 헤로나가 자기 가슴을 쿵쿵 두드려가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 짐을 들어주라고.”
“야, 미쳤냐? 지금 쟤가 뭐랬어? 토미가 들어주려고 했는데도 지가 들고 간다고 말했잖아? 저런 애는 그냥 놔두면 되는 거야.”
“아휴~! 정말!!! 특훈까지 받고서 왜 그 모양이야?! 어서 하지 못해!?”
순간 매섭게 나를 노려보는 헤로나의 모습에 나는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어서!!!”
헤로나는 재차 내게 말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옛정을 생각해서 낸시의 짐을 들어주어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결국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낸시를 따라서 뛰었다.
물론, 낸시가 토미의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가지 않은 것도 조금은 내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 영향은 무척이나 미미하다.
정말...정말로 조금이다.
“야, 그거 이리 내. 내가 들어 줄 테니까.”
내가 생각해도 진짜 남자의 표본 같은 꽤 멋진 말을 했다.
하지만 낸시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걷는다.
뭔가 울컥하지만 한 번 참았다.
“야! 내말 안 들려!?”
“저는 보기보다 훨씬 힘이 쎈 여자애라 이런 거 거뜬하거든요?”
낸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다리도 조금 휘청이는 것 같다.
으...짜증나!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 가지고!
저놈의 성격! 진짜!!!
게다가 속 좁게 그런 말이나 기억하고...계집애 정말...
하지만 이왕 마음먹은 거 여기서 ‘그럼 네 맘대로 해라!’하고 돌아서기에도 사나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낸시가 든 포대자루를 억지로 뺐어들었다.
“왜 그러세요?! 정말?!”
“내가 든다고! 너 같은 애는 그냥 내가 하는 말 들으면 되는 거야! 왜 그렇게 계집애가 말이 많아?! 응?! 고집 쌘 애는 시집가기 힘들다고! 너 같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냐?”
“도련님한테 데려가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뭐...뭐라는 거야?! 못난이가! 누가 너를 데려가?! 기대도 하지 마라, 너! 나는 너 같은 애한테 조금도 관심 없어요! 아주 조금도! 알아?”
“...으...정말...! 됐어요! 어서 포대나 내놔요!”
“내가 들 거야! 이건 수련이니까! 나중에 내가 왕국 10강이 되면 자랑이나 하라고! 그분은 어려서 내가 든 짐을 들어 준 적이 있다고 말이야.”
“훗! 정말...”
낸시가 어이없어 웃는 것 같긴 했지만 웬일인지 그 순간만큼은 조금 예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순간 찬란하게 내리쬐던 햇볕 때문에 잠시간의 착각이었을 테지만 회귀 전과 요 몇 주간을 통 털어 내가 아는 낸시의 모습 중 가장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