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12화 (12/200)

00012  카메론의 기연을 찾아서  =========================================================================

짐마차 세 대가 나란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마차 마다 서너 명의 사내가 짐칸과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홀로 말을 타고 선두를 이끄셨다.

나는 마차 짐칸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가누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나도 말을 내어달라고 했었지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받지 못했다.

이렇게 며칠이나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지만 앞으로 얻게 될 달고도 값진 열매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힘이 났다.

무려 대륙 10강, 용병왕 카메론의 기연.

내 가슴은 빠르게 요동쳤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펼쳐질 장밋빛 미래가 나를 마중할 것 같았다.

아름다운 비욘느의 붉고 매력적인 입술이 내 입술을 스치고, 귓가엔 사랑을 속삭인다.

내전의 영웅이 되고, 영지를 얻고, 귀족이 된다.

넘치는 재물과 사람들의 환호가 나를 뒤따른다.

나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는 조셉의 얼굴도 생생하다.

그 첫 번째 발판이 이 노정의 한 부분에 걸쳐 존재하는 것이다.

초조하고, 흥분되고, 또한 두렵고도 떨린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과연 그곳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짐칸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건 생각보다 시간을 잘 흘러가게 해주었다.

내 마음은 꽤나 조급했지만 아버지는 노정을 서두르지 않으셨다.

아버지껜 애초에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고, 시간을 급하게 요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이 따라온 일꾼들도 별로 긴장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옆에 앉은 동료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다른 이야기라고 해봤자 에르줌에 도착하면 뭘 할 것인지 정도였다.

물론 음담패설도 있었지만 그리 솔깃할 정도로 흥분되거나 재미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딱히 내가 짐칸에 타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식사 때가 되면 적당한 장소에 마차를 세우고 불을 피웠다.

분주하지만 질서정연하게 각자의 일을 했다.

누군가 마차에서 땔감을 내리면 다른 누군가는 숲을 돌며 마른 땔감을 사전에 모아두었다.

아침에는 이슬이 내리고, 갑작스런 비라도 쏟아지면 땔감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사전에 하루치 분량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말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고, 짐이 제대로 묶여 있는지, 마차의 상태는 어떤지 쉬지 않고 확인한다.

이동하는 동안은 음담패설과 게으름의 대명사로 보이던 사내들이 마차가 멈추고 나서는 조금도 쉬지 않고 척척 일을 해냈다.

아버지는 일이 잘 되고 있는지 전부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셨다.

대단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따뜻했고, 그 점이 좋았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느껴지는 식사지만 회귀 전 소싯적에는 내전을 겪으며 그리 사정이 좋지 않았다.

딱딱한 빵을 입에 넣고 한참을 씹어야 겨우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다.

물론 그 빵은 차가웠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거칠게 흔들고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밤에는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그러나 낮과 마찬가지로 긴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을 피워 놓으면 짐승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 서식하는 약한 몬스터들도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와 나는 불침번에서 제외 되었다.

그렇게 일행은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움직였다.

중간에 곤란한 상황은 조금도 없었다.

굳이 뽑자면 마차 한 대가 도랑에 빠졌지만 그것도 금세 해결되었다.

다른 마차의 말을 풀어 마차를 당기게 했고, 도랑에는 큼지막한 돌을 잔뜩 받쳤다.

뒤와 옆에 달라붙어 사람들이 마차를 밀자 마차는 순식간에 도랑을 빠져나왔다.

이정도가 가장 크고 곤란한 일이었다.

어쩌면 요즘 같은 때에 이보다 더 곤란한 일을 우려한 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 혼자 그 길을 지나왔다면 사정은 많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약하다지만 몬스터가 달려들었을 테고, 밤엔 내가 눈을 붙일 동안 불침번을 서줄 누군가도 없다.

식사도 그리 형편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출해서 에르줌까지 가지 않고, 이렇게 기다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이틀째부터는 같은 마차에 탄 사내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지루함을 느낄 겨를도 없어졌다.

잘 이해가 안가는 듯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회귀 전 들었던 음담패설을 지껄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내들이 소란스럽게 웃어 재꼈고,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셨다.

그래도 나와 사내들을 혼내시진 않으셨다.

우리는 사흘 만에 에르줌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여관을 잡고는 상점을 돌며 가격을 흥정하셨다.

물론, 나도 아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아버지는 이참에 내게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실 생각인 것 같았다.

뭐 그래봐야 다 아는 것들이지만 나는 굳이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 정신은 오직 카메론의 기연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 도시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기연을 찾지 못하면 다시 몇 달을 쓸데없이 막대기만 휘두르며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건 절대로 싫었다.

아버지께선 일꾼들은 여관에 남아 짐과 마차를 지키게 하셨다.

혹 볼일이 있으면 교대로 도시에서 볼일을 보도록 하셨지만 절대로 짐만 남겨놓지 않게 주의를 주셨다.

아버지는 여관을 나선 후 내게 말씀하셨다.

“일단은 ‘빌튼 상점’부터 가보자꾸나. 몇 군데를 돌아보아야 제대로 된 가격을 알 수 있으니까. 이참에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 테니 잘 보고 배워 보거라. 이제 몇 년 지나면 네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야. 너라면 날 닮아 잘 할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검의 신전에 가서 기연을 찾아보고 싶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배우지 않아도 지금의 아버지보다 훨씬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다.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일이다.

게다가 새로 주어진 삶을 이런 일을 하며 낭비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뭣보다 아버지를 섭섭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조금 시간이 지체된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로 궁금한 것은 없었지만 일부러 아버지께 물어보면 좋아하실 법한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며 성심성의껏 답해 주셨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자주 두드려 주셨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이 내 생각과 전부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같은 일을 하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걸 통해 깨닫고 기준을 세우는 건 각자의 역할이자 자유다.

뭣보다 내가 보낸 시기는 아버지께서 보낸 시기보다 훨씬 혼잡하고 역동적이고 힘들었다.

그러니 깨닫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더 낫다, 덜 낫다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각 시대에는 각 시대에 어울리는 기준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걸 경험을 통해 담금질 하고 결국 하나의 날선 검을 만들어 곁에 두고 휘두르면 된다.

그뿐이다.

아버지는 서너 군데를 들러 보시곤 결국 두 번째로 가격을 높게 불러준 곳에 가서 물건을 팔기로 하셨다.

우리가 가져온 물건은 내일 양도하기로 하고, 필요한 물건을 이것저것 말씀하셨다.

주인과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서있는 곳이 상가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경쟁하듯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로드리고, 어떠냐?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 처음엔 어렵겠지만 계속 이 아비가 하는 걸 따라다니면서 보다보면 금세 익숙해 질 게다. 뭣보다 중요한 건 상점 주인들과의 관계야. 우리가 섭섭지 않게 하면 그쪽도 마찬가지지. 이익을 보려고 너무 높게만 고집하다보면 결국 관계는 틀어지게 된단다. 그럼, 장사하기는 더 힘들어지고 말이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줄 알아야 해. 이것만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네가 살아가는 동안 큰 어려움은 없을게다.”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이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도 결국은 내전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런 상도는 어디까지나 큰 변화가 없는 삶 속에서나 유용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처럼 살 생각이 없다.

이 모든 것을 잃더라도 더 큰 것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아버지처럼은 한 번 살아봤으니까 이번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고야 말겠다.

그러나 속마음과는 다르게 지금 상황에 맞게 적당히 답했다.

어차피 일일이 설명해봤자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고, 설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예. 아버지. 그보다 도시 좀 둘러봐도 될까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한 어린애를 연기했다.

어차피 카메론의 기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눈빛은 어린애의 호기심과 상당히 비슷하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혼자서 말이냐?”

아버지는 조금 걱정된다는 투로 물었다.

“예! 이제 저도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치기어린 목소리를 내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고민 하는 듯 하시더니 결국 고개를 저으셨다.

“그건 안 된다. 여긴 우리 마을이 아니야. 도시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위험하니까 항상 조심해야만 해. 혼자 돌아다니기엔 너무 어리고. 너는 다 컸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어린 내 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좋은 먹잇감일 뿐이고. 정 둘러보고 싶다면 이 아비와 같이 가보자꾸나. 어디든 좋으니까 말이야.”

조금 곤란하다.

뭐, 나라고 해도 아버지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12살짜리가 혼자서 낯선 도시를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냥 12살짜리는 아니다.

에르줌 정도야 질리도록 와봤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생의 기로에 있는 것이다.

회귀 전처럼 루저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쥘 것인가?

그 첫 번째 걸음이 바로 여기 있는 셈이다.

나는 어떻게든 그 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괜히 고집을 피우면 이 도시에 머무는 남은 날 동안에도 곤란해진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나를 감시하실 테니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어머니와 헤로나 선물이나 골라 보죠. 어차피 그러려고 했던 거니까.”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하하! 그래. 낸시 것도 골라보렴. 네가 낸시를 좋아한다고 헤로나가 그러던데 사실이냐?”

“그건 아니에요!”

“하하! 그래. 그래. 다 안다. 다 알아.”

나는 계속해서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내가 부끄러워 부인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 말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헤로나, 이 계집애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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