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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3화 (13/200)

00013  카메론의 기연을 찾아서  =========================================================================

로드리고는 밤을 틈타 잠자리를 빠져나왔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버지는 깊이 잠들어 그가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검의 신전에 가야 한다.’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회를 엿보았지만 낮 동안에는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내일 낮에도 사정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려면 지금밖에는 없다.

빠르고 은밀하게 복도를 걸어 1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같이 온 일꾼들과도 마주치진 않았다.

아직도 여관 1층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쪽에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가죽 갑옷을 입었고, 중요 부위는 쇠붙이로 덧댄 것을 보면 용병들이 확실했다.

그들은 맡았던 일을 마치고 받은 보수로 오늘 밤 기분을 내는 모양이었다.

반대편에는 이곳에 같이 온 일꾼 몇 명이 앉아있다.

로드리고는 벽 뒤편에 숨어 잠시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다지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았다.

조용조용히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실내에 용병들이 많아 괜한 분란은 피하려고 하는 듯 했다.

간혹 용병들의 웃음소리가 커지면 그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다른 쪽에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로드리고는 호흡을 고르고,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시선은 일꾼들이 앉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다행이랄까?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용병들은 웃고 떠드느라 바빴고, 주인과 종업원은 주문을 받고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일꾼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골목으로 나서자마자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나중엔 있는 힘껏 뛰었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내 호흡이 거칠게 변했다.

그러나 머리가 어찔해 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뛰는지 생각해 보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까지 뛴다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만은 머리가 놀라울 정도로 맑았고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뛰는 건 고집일 수도 있다.

혹은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몸부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오랫동안 꿈꿔온 미래를 향해 이렇게라도 손을 뻗고 싶어서 일까?

어두운 골목 어딘가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깨가 미친 듯이 오르내렸다.

폐는 끊임없이 더욱 많은 산소를 요구했다.

아무리 빠르게 숨을 몰아쉬어도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딜까?

한손으로 벽을 짚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고 형편없는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좀 더 주변을 걸었다.

이 도시가 익숙하기는 하지만 밤에도 자주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기억과는 여러모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로드리고가 기억하는 에르줌은 지금으로부터 60년 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모습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얼마간 더 걷고 나자 확실히 여기가 어딘지 기억이 났다.

60년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거리다.

에르줌의 슬럼가, 일명 키베라.

여기저기서 모여든 자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곳이다.

그리고 살인과 절도가 묵인되는 장소다.

그걸 깨닫자 로드리고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거리가 그리도 위협적이게 느껴질 수 없었다.

또 다른 골목에서 금방이라도 누군가 튀어나와 단검으로 배를 뚫고, 품을 뒤질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의 수명도 조금씩 옅어져 간다.

일련의 사내 무리가 반대편에서부터 걸어온다.

꽤 거리는 있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벽에 붙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디로 가야 안전한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나왔다.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에르줌에 온 사실이 그를 필요 이상으로 들뜨게 만들었다.

적어도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도 못하고 무작정 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앞에서 걸어오는 저들이 나를 그냥 지나쳐 줄까?

답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와서 어딘가로 도망가더라도 이내 붙잡히고 말리라.

마른침을 삼켰다.

요행을 바라며 다가올 결과를 기다렸다.

로드리고는 생각했다.

나는 내가 회귀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여전히 상황이 알아서 좋아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것이 분했다.

그리고 창피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돌아보자 누군가 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서 정확히 상대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실루엣으로 보아 로드리고보다 한두 살 어려보이는 아이였다.

아니, 어쩌면 나이가 같을지도 모른다.

슬럼가의 특성상 잘 먹지 못해 체구가 나이에 비해 작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 아이는 다짜고짜 로드리고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로드리고는 그 아이를 따라 걸었다.

서두르지도 않고, 당황한 기색도 없이 아이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근처에 있는 다른 골목으로 로드리고를 데리고 들어섰다.

그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아이의 걸음은 아버지의 상행과 비슷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차곡차곡 어딘가를 향해 꾸준히 움직였다.

마침내 다른 골목보다 현격히 더 좁아진 어느 골목 언저리에서 아이는 멈추어 섰다.

그때까지 로드리고의 손은 그 아이의 손을 여전히 잡은 채였다.

로드리고는 자신의 손이 무척이나 축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로드리고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보니까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의외로 가는 미성이 튀어 나왔다.

아직도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여자아이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갈 곳이 있어서 나왔다가 길을 잃었어.”

로드리고가 말하자 아이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 거리며 말했다.

“그게 말이 돼? 얼마나 멍청하면 키베라로 기어와 길을 잃는데? 정말 재수도 없군.”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도와준 아이에게 막말을 할 수는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함을 내비쳤다.

“어쨌든 고마워.”

“흥! 말로만 그러지 말고 뭔가 사례를 해.”

로드리고는 얼른 주머니를 뒤졌다.

가진 돈의 대부분은 여관에 두고 왔지만 다행히도 은화 몇 개가 손에 잡혔다.

전부 꺼낸 후 은화 한 개를 소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소녀는 잽싸게 다른 은화까지 낚아채고는 말했다.

“워워...도련님, 째째하게 굴지 마. 아까 그 녀석들에게 걸렸으면 지금쯤 산 목숨도 아니었을 텐데 동전 하나로 값을 치르기엔 좀 너무하잖아?”

그리 큰돈도 아니고, 지금은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이라 슬럼가의 소녀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전부 가져도 좋아. 그렇지만 여길 빠져나가게 도와줘.”

“...뭐,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도와줄게. 여긴 내가 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전을 공중에 던졌다가 잡았다.

분명 서너 개를 한 번에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았다.

허리를 뒤로 기댄 채 하는 품새가 꽤나 불량해 보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도 조금 귀에 거슬린다.

내전까지 경험했던 로드리고지만 자신이 마음먹고 불량해 보이려고 해봤도 왜인지 저 소녀에게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딜 가는 건데?”

소녀는 일단 목적지를 듣고 지나야 할 골목길을 정하려는 모양이었다.

“검의 신전.”

“어디?”

“검의 신전.”

소녀는 이마를 긁적거리며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물었다.

“에르줌에 그런 데가 있던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서쪽 입구 근처에 있잖아. 입구에 검도 그려져 있고.”

“아! 거기가 검의 신전이었나? 그렇지만 가보면 알겠지만 완전 폐허일 텐데...뭔가 오래된 유적 같은 거라고 해서 시에선 그대로 놔두기는 하지만 딱히 뭔가 있는 건 아니야. 가봤자 실망한다고. 이런 한밤중에 가볼 만큼 가치 있는 곳은 절대로 아닐 텐데...”

“난 꼭 거기에 가야 해. 여기서 벗어나는 것만 도와줘도 좋으니까 부탁해.”

“그렇게까지 부탁하지 않아도 돼. 가기 싫다는 건 아니니까. 그냥 네가 가봤자 별 것 없다는 걸 알려줄 뿐이지. 나야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안내해 줄게.”

그리곤 소녀가 다시 로드리고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드리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손을 마주 잡았다.

소녀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 무슨 병 있냐? 아까 손잡았을 때, 땀 엄청 나던데? 설마 아리따운 나랑 손잡아서 긴장한 건가? 응?”

“...맘대로 생각해.”

“너야말로 맘대로 해야지 않겠어? 어차피 오늘 밤은 너에게 돈 받고 팔린 몸이니 말이야.”

“......”

나는 그날 밤, 질 나쁜 소녀 안내인을 따라 검의 신전으로 향했다.

나의 기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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