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카메론의 기연을 찾아서 =========================================================================
골목은 우울하고 암울했다.
공기 중에 이곳에서 죽어간, 혹은 아직도 이곳을 살아가는 자들의 한이 섞여있는 것만 같았다.
싸구려 창녀의 흐느낌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단순히 여자의 울음소리일 뿐이었지만 로드리고는 마음속으로 창녀라고 단정 지었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엔 어린아이 울음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로드리고는 뒤섞여버린 울음소리가 빨리 그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모든 울음소리가 그치자 왠지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에게 후회가 밀려왔다.
저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내전을 통해 충분히 잔인하고 비정한 경험을 했던 로드리고는 어렵지 않게 어떠한 영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손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 되내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다.’
한번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스스로 속삭였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외는 주문과는 다르게 어떠한 기적이나 이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아주 잠시 스스로를 옥죄는 괴로운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짧았다.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
비욘느를 생각하자.
나는 이번 삶을 비욘느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것을 위해 낸시 따위를 버린 것처럼 아주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저런 가치 없는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죽어라.
어차피 남은 인생,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봤자 너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이곳에서 언제 죽든지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전이 끝나고 새로 정권을 잡은 왕족은 각 도시에 있는 모든 슬럼가를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너희는 살아남아봤자 모두 노예로 팔려갈 뿐이다.
그런 인생인 것이다.
발버둥 치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자들.
그것이 너희다.
몇 번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손을 맞잡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불량소녀는 아무렇게나 걷는 듯 보였다.
거침없이 로드리고의 손목을 잡고 골목을 질주하고, 멈추고 이유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기도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거기에는 규칙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짐승의 본능 같기도 했고, 혹은 생존을 위해 체득된 하나의 지혜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정확히 소녀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어찌되었든 신기하게도 걷는 내내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느새 로드리고는 슬럼가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암울한 공기는 더 이상 그의 어깨를 짓누르지 않는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 밤의 차갑고도 고요한 공기가 가득 들어찼다 다시 빠져나간다.
그를 옥죄던 감정도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억지로 비욘느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머리는 알아서 움직여 주었다.
저 아이를 검의 신전까지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물론, 기연을 오늘밤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만약 얻게 된다면 그 형태가 어떻든 그걸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위험요소로 남게 된다.
아직 힘을 갖지 못한 나에게 있어선 아주 작은 위험 요소라도 피하고만 싶었다.
그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말했다.
“이제 됐어. 여기면 충분해.”
자신의 의도는 이 한마디로 모두 전달했지만 소녀는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혹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지 로드리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나야말로 됐어. 심심한 참에 잘됐지. 뭐 하러 가는지 거기까지 가서 살펴볼 생각이니까.”
놀리는 투가 물씬 묻어났다.
로드리고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돈 돌려달라고 안할 테니까 그만 가봐. 길은 나도 아니까.”
짜증과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어투에 소녀는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조금 언성이 높아져서 대꾸한다.
“흥! 뭐야? 이제 볼장 다 봤다 이거야? 이봐, 샌님? 내가 거리의 창녀라도 되는 줄 알아? 응? 돈 줬으니까 그만 떨어지라고? 하여간 남자들은 어리나 늙으나 하나같이 똑같지.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있고 싶은 곳에 있을 거야.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 알겠어?”
난감하다.
괜히 신경을 건드려 더욱 고집을 부리게 만들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로드리고는 달래줄 심산으로 말했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됐어.”
“......”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아직도 기억 한편에 남아있는 어둠속의 흐느낌과 울음소리가 ‘쿵’ 하고 마음을 흔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여운이 씁쓸한 형태로 머리를 드밀었다.
로드리고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같이 가자. 난 찾는 것이 있으니까 네가 도와줘.”
분명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소녀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정말?”
소녀는 아직도 조금 퉁명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그건 여전히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자신이 기뻐하는 감정을 숨기려는 의도가 더 큰 것 같았다.
“그래. 하지만 거기서 찾게 되는 것은 내꺼야. 네가 찾게 되더라도 반드시 내게 줘야해.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말이야. 약속할 수 있어?”
“...그게 뭔데? 비싼 거야?”
“글쎄...”
“...뭐, 좋아. 대신 내가 그걸 찾으면 내 소원을 하나 들어줘.”
“무리한 건 안 돼.”
로드리고는 미리 선을 그었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리하다 싶으면 들어주지 않아도 좋아.”
“그럼 좋아. 소원이 뭔데?”
“...그건 나중에 찾으면...내가 찾으면 말할게. 못 찾으면 어차피 의미 없는 거니까.”
“알았어. 일단 움직이자. 새벽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응. 이리로. 내가 지름길을 알아.”
소녀는 이번엔 걷는 내내 말했다.
“난 아비슈야. 모두가 그렇게 불러. 넌?”
“로드리고. 로드리고 아렌트.”
“귀족이야?”
소녀가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 그건 아니야. 예전엔 준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다만 아직 아렌트란 성을 사용하고 있지. 조금은 허세 같은 거랄까?”
“헤에? 괜히 놀랐네.”
“정말 놀라기는 한 거야?”
“그럼. 당연하지.”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그래도 너희 집은 꽤 부자지?”
“글쎄...먹고 살기 어렵지는 않지.”
“좋겠다.”
“뭐, 나쁘진 않지.”
“난 말이야, 부자가 되는 걸 매일 상상해 보거든. 그건 정말 멋진 거라고 생각해. 하루 끼니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사기 칠 필요도 없잖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잠자리가 있어. 거리를 배회할 필요도 없어. 어때?”
“뭐가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 전부 가지고 있어?”
“...응.”
“그럼, 넌 말이야, 내가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을 매일 누리면서 살고 있는 거야. 매일매일 행복해?”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난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내가 평생 꿈꿔온 곳은 저 멀리 있었다.
손을 뻗어 보아도 닿지 않았다.
아니...손을 뻗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손이 절대로 닿지 않는 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손조차 뻗지 않았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한 빈손을 바라보며 내가 느끼게 될 절망을 죽는 날까지 상기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 손은 항상 내 주머니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비슈는 내가 평생 동안 후회와 열등감 속에서 살아온 그 삶을 향해 그 손을 뻗고 싶어 한다.
매일 내가 누려온 하찮은 것들을 부러워하고, 그걸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난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둠은 그런 나를 가려주었다.
아비슈는 한참을 기다려도 내 대답이 없자 그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여 댔다.
“그냥 알고 싶을 뿐이야. 그런 걸 모두 가진 사람을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그냥 네가 느끼는 대로 말해주면 그걸로 충분해.”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야. 누구나 하나를 가지면 그 이상을 바라지. 너도 지금은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만 막상 그걸 가지게 되면 그건 당연한 것이 되는 거야. 더 이상...더 이상 값진 것으로 남을 수는 없다고.”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는 잘 알겠어. 너는...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진 않구나.”
그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아비슈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뭔가를 생각하는 아비슈를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뭐에 대해 생각하는지는 좀처럼 짐작이 되질 않았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검의 신전 입구에 서있었다.
낡고 허름한, 그리고 일부분 무너져 내린 건물이 홀로 쓸쓸히 오랜 시간을 버티며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후회의 삶을 버리고, 희망과 행복을 움켜 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꺼림칙한 의문이나 감정은 모두 흘려보내고 지금만은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뭔가를 움켜쥐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