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카메론의 기연을 찾아서 =========================================================================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기 전에 여관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로드리고는 조금도 조급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근 한 달간의 기대가 무너져서일까?
몇 십 년이란 세월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대감은 생각보다 큰 후유증을 불러온 것 같았다.
게다가 밤새 몸을 움직여 피곤함도 더해졌다.
실망감과 무력감과 나른함에 저항할 여력이 조금도 없다.
손에 들린 낡고 볼품없는 검 조각을 내려다보자 어이없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일도 다시 와봐야 할까?
그런다고 찾을 수 있을까?
대체 카메론, 그가 얻은 기연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이 볼품없는 곳에서 뭔가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가 우연한 기회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부풀려진 것이다.
그는 딱히 그 소문을 바로잡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고.
어쨌든 그는 손해 볼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간단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기연들도 이것과 마찬가지라면...
로드리고는 어깨가 축 쳐지고 말았다.
망상에 불과했단 말인가?
내가 기대했던 것들은 전부 이루어질 수 없구나.
다시 비욘느는 조셉에게 반하겠지.
당연하다는 듯 조셉은 비욘느를 취하고, 수많은 미녀들을 취하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나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애간장을 태우고, 마지막엔 멋진 척 혼자서만 아무렇게나 수긍해선 남은 삶을 지루하게 흘려보내야 한다.
분했다.
이걸로 끝?!
하..하하하!
걸음이 비틀거렸다.
도무지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이대로 쓰러진다고 생각한 순간 뭔가가 몸을 붙든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뭐하는 거야?! 그렇게나 지쳤어? 하여간 부잣집 도련님들이란...”
아비슈가 언짢은 목소리로 로드리고를 부축하며 쏘아붙인다.
“왜 가지 않아?”
“어디로? 키베라로? 그런 농담은 별로 재미없는데. 돌아갈 곳이 있다고 모두 그곳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큭..큭큭...그 말이 정답이군. 정말 맞는 말이야. 크크큭...아하하하하!”
로드리고의 자조적인 웃음소리에 아비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뭐야, 철부지 도련님? 허무맹랑한 기연 좀 못 찾았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잖아? 네가 이야기속의 말도 안되는 초인이 되지 못할 뿐이라고. 매일같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 살아가야하는 나 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낫잖아? 내 삶은 매일이 지옥이야. 그래도 그따위로 웃지는 않아.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더러워도 말이야. 어리광이라면 집에 가서 피우라고. 네 투정을 받아 줄 사람들 앞에서...”
“하아...가차 없군. 너는 꼬마 따위가 너무 건방져.”
“너에게만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세상에 말이 돼? 이런 곳에서 기연을 찾아 밤새 무너진 벽돌이나 파낸다는 게? 얼마나 곱게 자라면 그런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야.”
소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로드리고는 인상을 썼다.
“그렇게 곱게만 자란 건 아니야. 나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거칠게 살았으니까. 전쟁도 겪어 봤고.”
“전쟁이라고? 하지만 근 몇 십년간 전쟁은 없었는데?”
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있어.”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는 로드리고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소녀는 다시 물었다.
“너..좀 위험한 거야?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 못하는 그런 건가?”
로드리고는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부인했다.
“아니거든! 현실과 이야기는 확실히 구분하고 있어!”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보여?”
소녀가 놀리듯 한쪽 입가를 삐쭉 올리며 묻는다.
“넌 그냥 슬럼가의 불량소녀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흐음...공주님처럼 보이진 않고?”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유혹하는 듯 한쪽 손을 허리에 올리고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절대로.”
로드리고의 단호한 목소리에 기분이 상했는지 소녀는 이내 포즈를 풀어 버린다.
“칫...”
“아무튼 이제 가봐야겠어.”
로드리고는 더 이상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는 없어 소녀에게 말했다.
“데려다 줄게.”
소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기...이래 봐도 내가 남자거든. 그런 말 같은 또래 여자애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 로드리고는 얼른 바로잡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녀의 대꾸는 조금 전 로드리고가 읊조렸던 방향으로 치달렸다.
“...언제는 슬럼가의 불량소녀라며?”
“기분 상했어?”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말했으면 좀 무서웠을 것 같은데? 그랬더라면 데려다준다는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
“뭔가 상황이 미묘한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걸어. 그런데 어디로 가면 되는 거니?”
“여행자의 쉼터. 거기서 묵고 있어.”
“여관 거리에 있는 곳.”
“응.”
“그럼 가자.”
소녀가 로드리고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손은 잡지 않을 거야. 어린애도 아니고. 그리고 이럴 때는 남자가 손을 내미는 거라고!”
“뭐, 그렇지. 옛날이야기에서는 그러더라.”
“아니라고!”
로드리고가 발끈했다.
“아하하하! 아무튼 넌 바보지만 조금은 귀여운 것 같아. 물론 같이 살게 되면 답답해서 엄청 때려줄 것 같지만 말이야.”
“흥!”
단단히 삐진 것 같았지만 아비슈는 아랑곳 하지 않고 로드리고의 손을 잡았다.
로드리고가 다시 발끈하며 말했다.
“어린애 아니라고!”
그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 전에 아비슈가 손을 보다 꽉 잡으며 말했다.
“어린애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뭐?”
“그냥 잡고 싶을 뿐이야. 손을 잡고 있으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생각할 수 있으니까.”
뭔가 숙연한 분위기에 로드리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냥 걸었다.
걷는 내내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아비슈라는 계집애는 누군가 놀려먹는 걸 삶의 낙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맞잡은 손이 무척이나 따뜻하다고 생각하며 로드리고는 계속해서 걸었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확실히 그 온기로 인해 마음까지 조금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거리는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보였다.
여관 거리에 들어서자 ‘여행자의 쉼터’는 금방이었다.
여관 앞에서 둘은 멈추어 섰다.
아직도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밝았다.
밤새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던 아비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앙상하고 마른 얼굴이었다.
하지만 푸르고 커다란 눈동자는 꽤나 귀여워 보였다.
로드리고는 뭔가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소원이 뭐야?”
“뭐?”
아비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에게 부탁하고 싶다던 소원 말이야.”
“뭐야, 어차피 찾지 못했으니 소용없는 거잖아?”
“그냥 듣고 싶을 뿐이야. 그게 뭔지 듣지 않으면 뭔가 개운치 않을 것 같거든.”
“안됐네요! 벌써 잊었어.”
아비슈가 과장되고 장난스런 어투로 말하고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로드리고가 꽉 붙잡고 소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놓지 않아.”
“왜 이래? 정말! 이상한 거에 고집 부리지 말라고.”
“이상한 거에 고집 부리는 거 아니야. 밤새 날 도와준 누군가에게 고집 부리는 거지.”
아비슈는 시선을 피하며 조금 얼굴을 붉혔다.
이미 날이 밝아 로드리고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보...뭐라는 거야...”
“괜찮아. 말해봐. 어쨌든 나는 벽돌 말고 썩은 고철 하나는 찾아냈잖아? 이게 내가 찾던 게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는 기연 따위 없을 걸? 혹 있었더래도 지금은 그 형편없는 모습처럼 전부 썩어 버렸을 것 같아.”
“아무튼 좋아. 말해봐. 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