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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7화 (17/200)

00017  카메론의 기연을 찾아서  =========================================================================

아비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을 잊은 것처럼 입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로드리고는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저 기다렸다.

소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 양피지처럼 그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무한한 가능성만을 남겨둔 채 로드리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하지만 어림짐작으로 소녀의 생각을 읽어보려 치면 어김없이 뭔가가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녀의 무표정에서 기인했다.

로드리고는 그녀의 얼굴 근육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확히 멈추어 있다.

이 세상에 ‘정지’라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소녀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그것이 단순히 비어있는 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텅 비어있는 그 모습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아무것도 누군가에게 내비치지 않으려는 결사의 노력이 소녀의 표정에서 읽혀졌다.

그건 말 그대로 로드리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로드리고의 이러한 의미 없는 생각의 흐름을 끊은 것은 역시나 소녀였다.

마침내 텅 비어있던 곳에선 작고도 고요한 파문이 일었다.

소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로드리고를 쳐다봤다.

허공중에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소녀는 습관처럼 입술을 움직여 웃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소녀가 의도했던 것처럼 제대로 되진 않았다.

그곳엔 씁쓸하고 처량한 비틀림만이 잠시 존재하다 사라져 갔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어그러지고 이내 울음을 참는 표정이 되고 만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히고, 이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소녀는 팔꿈치로 얼른 닦아내고는 시선을 피했다.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나는 어쩌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곤란한 사건에 개입하려는 건 아닐까?

그의 의구심이 점점 아직도 한참은 작은 그의 마음을 채울 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내 동생이 죽었어.”

“?!”

로드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막막했다.

억지를 부리지 말고 아비슈와 헤어지는 편이 더 좋았을 지도 몰랐다.

후회가 밀려온다.

로드리고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

아니, 그것을 죽음이라고 불러도 될까?

잘 모른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슬퍼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할 만큼 하찮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단절을 뜻하고, 그것은 슬픔을 자극한다.

일평생 본인 스스로 비슷한 경험을 하기 전까지 그도 죽음에 슬퍼했고, 눈물지었다.

특히 비욘느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단순히 그녀와 자신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자신의 떨어져 나와 내동댕이쳐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로드리고는 괜히 소녀에게 소원을 물어보았다는 후회를 했지만 또한 그 동시에 소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어떠한 행동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가 빠르지만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아비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동생인지는 몰라. 하지만 같이 지냈어. 꽤 오랫동안 말이야.”

“......”

여전히 로드리고는 말이 없었다.

“사실 친동생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별로 상관없어. 그냥...혼자 있는 것이 싫을 뿐이니까. 어쩌면 말이야...나는 그 아이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렇게 눈물이 나지만 이건...그 아이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야. 난 내 자신이 불쌍할 뿐이거든. 이제...혼자서 거기서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두려워. 아니...많이 두려워. 나도 몇 년 지나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내들에게 가랑이나 벌려주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될 거야. 보통 그렇게 되게 되어 있거든. 거기는 그런 곳이니까. 뭔가 다른 일을 하려 해도 소용없어. 보이지 않는 법칙에 의해서 마땅히 여자는 몸을 팔아야 해. 남자는 뭔가를 훔치고. 오직 몸 파는 일만이 여자와 남자 사이에 물물 교환이 이뤄지는 길이야. 나도 그런 과정에서 원치 않게 태어난 뭔가겠지. 내가 동생이라고 불렀던 핏덩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이런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러니까...날 데려가.”

소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쾌활하던 모습은 조금도 없다.

진지하고 고요한,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볼 뿐이다.

아무런 말이 없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소녀의 표정이 살짝 비틀린다.

“어때? 속았지?”

소녀가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눈물 자국도 팔뚝을 들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훔쳤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알고 있었다.

나는 속지 않았다.

그리고 너도 속이지 않았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밤새 생각 외로 고생했으니까 돈이나 더 주지 그래? 응?”

로드리고는 넉살 좋게 손을 내미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내가 데려갈게.”

“뭐?”

“그 소원 내가 들어준다고.”

“......”

로드리고는 소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사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 위치에 있든 각자는 그 나름대로 비정한 세상을 걸어가야 한다.

애초에 그 위치가 불리한 입장이어도 어쩔 수는 없다.

그 자체로 더 많은 동정과 도움을 구걸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로드리고의 마음은 움직였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로드리고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연을 놓쳐버렸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기대를 안고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몇 가지가 남아있다.

그는 증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확실히 기연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기연이 결코 자신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하고 싶다.

그는 그것을 위해 스스로 저 소녀에게 기연을 선물해 줄 셈이다.

물론 그가 주는 기연은 한시적이다.

내전이 터지고 나면 금세 무너져 내린다.

그건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막아 볼 종류의 위험이 아니다.

그러나 한시적으로 찾아온 평화가 그녀에게 주는 의미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통해 희망을 갖겠다.’

로드리고는 소녀의 손을 그대로 잡은 채 아버지에게로 갔다.

소녀의 손에선 심하게 땀이 배여 나왔다.

축축한 그 감촉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아버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계셨다.

방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인사를 건네셨다.

“일찍 일어났구나.”

내가 그저 일찍 일어났을 뿐이고 잠시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밤새 검의 신전에서 묻은 흙먼지와 흐트러진 모습이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뭔가 더 말을 잇기 전에 나는 아직도 방 밖에 서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나보다 더 엉망인 모습의 소녀가 방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당황하신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혼자서 도시 구경을 하고 싶어서 밤에 몰래 빠져나갔습니다.”

“뭐라고?!”

좀처럼 화를 내시지 않는 아버지께서 언성을 높였다.

나는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 겁먹은 것은 아니다.

나는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검의 신전에 갔던 것은 말하지 않았다.

길을 잃고 위험에 빠진 것을 아비슈가 도와주었다고 말하자 아비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녀에게 은혜를 갚고 싶고, 그래서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아버지도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도시에 머무는 며칠간 더 이상 검의 신전에 가지 않았다.

기연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는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며칠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곳에 올 때보다 한사람 더 늘어 귀성길에 올랐다.

아비슈는 나와 같은 짐마차에 탔다.

일꾼들은 나이 어린 소녀를 의식했는지 저번과는 다르게 음담패설을 주고받지 않았다.

아비슈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그래서 나는 짐칸에 누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도련님이라 불러.”

내 말에 아비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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