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카메론의 기연을 찾아서 =========================================================================
집으로 향하는 여정은 도시로 향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여전히 서두르지 않으셨다.
적당한 장소에서 식사를 했고, 숙영지를 잡았다.
일꾼들은 열심히 일해 주었고, 나와 아비슈는 한켠에서 그걸 지켜보며 재잘거렸다.
“저기, 집에 가면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내가 조금 주저하다 말했다.
“무슨 이야기?”
아비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바라보며 물었다.
“...기연...”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말했다.
물론, 내가 말하는 기연은 절대로 허튼 것이 아니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이 말하는 그런 것과는 얻을 수 있는 확률 자체가 다른 것이니까.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망상을 쫓는 바보일 뿐이다.
되도록 숨기고 싶었다.
“아! 기연. 알았어. 도련님. 나만 믿어.”
그렇게 말하고는 아비슈가 자기 입술을 꿰매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그 과장된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고, 아비슈도 따라 웃었다.
“집에는 헤나로라고 발랑 까진 것이 하나 있는데 아주 골치 아프단 말이야. 사사건건 참견하려고 하고.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좀 상냥하게 대해줬더니 아주 끝이 없어. 그 녀석이 알게 되면 좋지 않아. 반드시 명심해.”
“동생?”
“응. 여동생이야.”
“흐음...그렇구나.”
갑작스레 아비슈의 표정이 조금 우울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죽어버린 그 녀석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얼른 말을 이었다.
“그보다 집에 가면 낸시라는 아이가 있어.”
“낸시?”
“응. 가족은 아닌데, 그러니까 뭐, 그래...가족이랑 다름없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 거두어 주셨어. 그래서 우리랑 같이 살아. 아마 네게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줄 거야.”
“그러니까 나에겐 선배 같은 거구나.”
“뭐, 그렇지.”
“어떤 앤데?”
아비슈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직접적으로 자기에게 가장 영향을 끼칠 사람이니까.
나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낸시는 어떤 아이일까?
뭣보다 말이 많지 않고, 좀 퉁명스럽고, 억척스럽다.
여우같은 마누라를 원했지만 곰 같은 마누라였달까?
처음부터 그랬던가?
이제는 하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결혼 초창기는 잘 기억도 나질 않는다.
항상 내가 소리치고, 낸시는 묵묵히 듣기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대화도 없었고, 눈빛만으로 내 의향을 아는 수준에 도달했던 것 같다.
같이 살면서 답답하고 심심했던 적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평생 같이 살고 나서 생각해 보건데...나쁘지 않았다고 평가 내릴법한 그런 사람이다.
물론, 회귀하고 나서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이래저래 발견하게 되었지만...
뭐랄까?
좀 더 보통 여자애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엔 가끔 내게 화도 내고, 어떤 별 볼일 없는 녀석이랑 딱 붙어서 므흣한 분위기도 내고...
젠장!
생각하니 갑자기 열이 받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보통 내기가 아니야! 단단히 마음먹어야 한다고.”
“그..그래?”
아비슈가 좀 난감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낸시는 좀 까칠한 편인가?”
“그래. 걔는 까칠하고 말도 별로 없고. 게다가...문란해!”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문란한 것은 아닌데...
심란한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까지 늘어놓다니...
“무...문란?! 도대체 몇 살인데?”
순간 대답하기가 무척이나 난처했다.
“...12살.”
“그런데 문란하다고?!”
당연한 아비슈의 반문이 이어진다.
“...그런 게 있어!”
나는 괜히 짜증을 냈다.
“아..알았어. 도련님, 진정해. 흥분하지 말란 말이야. 낸시를 조심하면 되는 거지?”
아비슈가 나를 달래듯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 뻐기듯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너는 내가 데려온 아이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낸시에게 괜히 기죽어 살 필요 없다고. 나만 믿어! 내가 따끔하게 낸시에게 말해서 허튼 수작 못하게 해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스스로 잘 할 수 있어. 낸시가 조금 까칠한 편이거나 혹은...거...그러니까...문란해도 아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나도 제법 거칠게 살아왔으니까. 그러니까 일단 혼자서 해볼게. 응?”
“그래. 그럼 알아서 해.”
나도 조금 뻐기듯 말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낸시에게 아비슈를 두둔해서 지금보다 더 어색한 관계가 되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해도 회귀 전에는 평생을 같이한 사람인데 자꾸만 구박하듯 말하는 건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못하다.
낸시 계집애...잘 있으려나?
토미 자식과 그렇고 그런 일이 있던 것은 아니겠지?
내가...낸시 고년 선물도 사왔는데...받으면 좋아하려나?
집을 떠나기 전에 그렇게 짜증내듯 소리칠 필요는 없었는데...
헤나로, 고년...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어도 설마 토미 자식과 낸시가 짝짜꿍하는데 나 몰라라 하진 않았겠지?
아...진짜!
괜시리 머리가 복잡해져서 마구 머리를 긁적여댔다.
그때 귓가에 아비슈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도련님,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말이야...고마워...”
돌아보니 아비슈가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슬쩍 시선을 피한다.
호오...저 계집애도 부끄러워 할 줄 아는군.
평소 보여주던 선머슴 모습과는 좀 다르니까 부끄럽기도 하겠지.
좀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입가에 살짝 비틀린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고맙긴. 그런 것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 하지만 도련님에겐 좀 더 공손한 어투를 사용해야 해. 내가 도련님이라고 내 호칭을 정해준 것은 그런 숨은 뜻이 있는 셈이니까. 알겠어?”
“으..응.”
아비슈가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했다.
“이런...이런. 그게 아니라 ‘예, 도련님.’이겠지. 자, 다시 해봐.”
나는 검지를 들어 올려 좌우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예, 도...도련님.”
좀 전 보다 아비슈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 다시 말했다.
“명심해야해. 나는 그런 겉치레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널 좋지 않게 볼 테니까. 다 너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야.”
“아..알았어. 아니..알았어요.”
하는 짓이 귀여워 좀 더 놀려볼까 했지만 아비슈의 표정이 눈에 띠게 의기소침해져 이쯤에서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크..크큭...농담이야. 그냥 편하게 해.”
순간 아비슈가 미간을 찡그리며 살짝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내게 달려들어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으..으아아아아~! 뭐..뭐하는 거야?!”
“날 놀렸겠다?!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손가락이 옆구리를 찌를 때마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온 몸이 자지러지게 온 신경이 파닥거린다.
“그만! 그만해! 도련님한테 그런 짓 하면 안 된단 말이야! 누가..누가 좀 도와줘~!”
나는 주변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지만 나를 돕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허허’하고 웃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버지와도 눈이 마주쳤지만 날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줄 뿐이었다.
그래.
애초에 그리 위엄 넘치는 집안도 아니고, 주변에서 ‘도련님, 도련님’하고 부르지만 그냥 동네 유지를 예우해 주는 차원일 뿐이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몇 번이나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고서야 아비슈는 나를 놔주었다.
“괜찮아? 도련님?”
개운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아비슈가 묻는다.
나는 이를 갈며 으르렁 거렸지만 그녀의 미소가 풀리지는 않았다.
“야, 집에 가면 낸시라는 무서운 애가 있다고! 걔가 널 잔뜩 괴롭혀도 조금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흐음...글쎄? 그건 가봐야 알겠지. 기왕이면 새로운 터전에서 누군가와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무튼 잘 지내보자고. 이래저래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