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검의 신전 =========================================================================
그의 손에는 처음 보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들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길고도 날렵한 검신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로드리고는 낯선 장소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서있는 커다란 공터 주변에는 커다란 석벽이 일곱 개 늘어서 있었다.
그건 큰 비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드리고는 석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벽에는 익숙지 않은 문자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무슨 문자인지는 알고 있다.
고어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문자다.
오랜 옛날 대륙에서 사용되었다는 문자로 오래된 유적지에서 종종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그뿐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로드리고에게는 조금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다.
한참을 들여다보곤 고개를 흔들며 옆에 놓인 석벽으로 갔다.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고어가 적혀 있었다.
역시나 의미는 알 수 없다.
로드리고는 계속해서 석벽들을 살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어와는 다른 언어로 적혀 있는 석벽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읽을 수 없는 것임에는 마찬가지였다.
석벽을 돌고 돌아 마침내 그가 읽을 수 있는 석벽을 발견했다.
그건 일곱 번째 석벽이었다.
요즘 대륙에서 사용하는 글이 분명했다.
비록 사용하는 단어가 무척이나 오래된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의미를 파악하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는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검의 신전’에 들 수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시대를 대표하는 검의 절대자로 나의 비전을 남기니 후인은 이를 참고하여 더욱 뛰어난 경지에 발을 들이기를 빈다.
황혼의 기사, 발렌티노 아우구스 타발렌.
그 밑으로는 그의 검술의 요체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검을 든 형태의 그림도 그려져 있다.
검의 신전?
여기가 검의 신전이라고?
검의 신전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니...이건 단순히 내가 너무 간절히 바라서 벌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실제로 내게 기연이 주어진 것이라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림이 귓가를 울렸다.
발렌티노 아우구스 타발렌.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검의 절대자’라고 칭하였다.
내가 찾아낸 낡고 부러진 검이 매개체였을까?
그걸 쥐고 잠들면 이곳에 올 수 있다는 말인가?
로드리고의 머릿속에 아직 확신하기 어려운 가설들이 떠오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황혼의 기사’가 남긴 석벽을 손으로 훑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은 아니겠지?
하..하하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기연을 얻은 셈이다.
고어는 모른다.
얼마나 공부해야 저것들을 해독해서 비전을 알아낼 수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읽을 수 있는 이 하나라도 내 것으로 제대로 거머쥘 수 있다면 대륙을 호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회, 나약함 따위는 더 이상 내 인생과 연이 없다.
나는 이제 거머쥐는 자가 되는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박동은 점점 빨라져 그의 흥분을 소리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비욘느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조셉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인다.
부끄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깔고 살짝 움직이는 그 입술이 얼마나 부럽던가.
그것이 나를 향하게 되는 날이 과연 올까?
숱하게 질문하고 숱하게 고개를 흔들던 지난날의 괴로움이여...
이제는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혼자서 가슴 쓰리게 울며 뒤돌아서는 모습은 더 이상 내게 필요 없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젠 조셉이 서있는 그 자리에 내가 서있으면 되는 거야.
그만한 힘을 얻고, 그만한 자신감과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말이야.
더 이상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았던 낸시와의 결혼생활도 이젠 필요 없다.
그런 석녀 따위 아무래도 좋다.
어느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건 기쁨의 눈물일까?
하지만 여전히 내 가슴 속에서 싸하게 흐르는 아픔과 통증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답을 알지 못한 채, 내가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석벽의 남은 부분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눈물 때문에 흐릿해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팔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것 참.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군.”
나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였고, 근육도 극한까지 단련한 모습이다.
상체를 벗고 있었는데 마치 온 몸이 햄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가득하게 나있는 흉터가 얼마나 거친 인생을 살아왔는지 짐작케 했다.
그러나 그런 몸과는 다르게 얼굴만은 빙그레 웃고 있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자 그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검의 신전에 잘 왔네. 나는 이곳을 지키는 자. 수호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저...저는 로드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있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딘지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로드리고 자신은 좋으나 싫으나 이곳의 불청객이었고, 저자는 이곳의 주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수호자라고 스스로 말한다면 이곳에 본인처럼 처음 온 자는 아니지 않겠는가?
“하하. 그래.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무척이나 당황스럽겠지. 그러나 곧 익숙해 질 걸세.”
사내는 시종일관 친절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 눈빛에는 호기심도 있었고, 어딘지 장난기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친절에 힘입어 로드리고는 가장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검술을 수련할 수 있나요? 저기...이곳에서...?”
로드리고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러자 자신을 수호자라고 밝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진하게 자리 잡은 미소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물론이지. 검의 신전에서 검을 수련하지 않으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여자를 품으려면 홍등가에 가야하고, 배움을 위해서는 아카데미에 가야 하지. 그리고 검을 배우려면 당연히 검의 신전이지. 검을 배우려는 자에게 이곳은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는 다네. 원하는 만큼 실컷 배울 수 있을 거야. 너무 서둘지 않아도 되네. 시간은 충분하니까. 다만 자네는 선택해야만 하네. 어떤 검술을 배울지 말이야.”
“선택만 하면 그 검술을 배울 수 있나요?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검술이라도?!”
“물론이네. 다만 성취는 자네하기 나름이야. 그 부분까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모두 대단하고 굉장한 검술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든 사람에겐 개개인의 재능이란 부분이 있지. 포괄적으로 검술에 대한 재능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그건 틀린 말이니까. 누구든 본인에게 맞는 검술을 배우게 되면 경지에 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물론, 그 경지라는 것도 각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말일세.”
“하지만 제가 읽을 수 있는 건 마지막 일곱 번째 석벽밖에 없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그것밖에는 배울 수 없어요.”
“하하! 이보게 자네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이곳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네. 그 시간 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검술은 이미 경지에 들면 저런 글만 보고도 대략 짐작해서 그 올바른 형태와 오의를 펼칠 수 있지. 그러나 자네 같은 초보는 어림없어. 선생이 필요한 법이지. 무엇이든 골라보게나. 내가 가르쳐 줄 테니.”
로드리고는 우뚝 솟은 일곱 개의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는 어떤 것이 제 재능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좋은 마음가짐이군. 이런 부분에선 뭐든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좋은 법이니까. 흐음...어디 보자.”
사내는 로드리고의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의 근육 형태와 뼈를 만지며 한참을 고심하더니 말했다.
“자넨 타고난 신력도 없고, 몸도 그리 튼튼하지 못하군.”
사내의 혹독한 평가에 로드리고는 절로 서글퍼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기연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단 말인가?
로드리고의 표정이 눈에 띠게 의기소침해지자 사내는 재빨리 이어서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내가 말을 실수한 모양이군. 자네도 충분히 경지에 들 수 있네. 무엇보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