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21화 (21/200)

00021  검의 신전  =========================================================================

“뭐, 숨길 일도 아니니 솔직하게 말하겠네. 나는 저 일곱 번째 석문의 주인인 황혼의 기사 ‘발렌티노 아우구스 타발렌’이네. 하하!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 워낙 유명했으니 말이야. 나를 동경해서 따라다니던 기사들만 해도 몇이었는지  전부 세기 힘들었지. 정말 구름떼 같다는 표현 그대로였어. 내게서 한수라도 배우려고 어떻게든 몸부림치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마음만 먹었으면 나라를 하나쯤 세우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 그러나 왜 그런 건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나? 내가 바로 그런 쪽 부류였지. 뭐, 원하기만 하면...정말 원하기만 하면 곧바로 왕 정도는 되어 버렸겠지만 나는 조금도 바라지 않았지. 오직 내게는 검밖에 없었어. 그런 따라다니는 얼치기들도 전부 귀찮을 따름이었고. 어쩌다 한 수 정도 가르쳐주면 얼마나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던지. 그런 것도 좀처럼 부끄러워서 말이야. 물론, 알다시피 내가 아주 조금...정말 조금 가르쳐준 자들은 다 이름을 날렸지.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워낙 수준이 낮은 녀석들이라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하더란 말이야. 그 있지 않은가? 창공의 작은 기사라던가, 폭풍의 휘파람 기사 같은 녀석들. 그 녀석들은 내가 한 5분쯤 지도해줬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코딱지 만한 명성을 얻고, 이리저리 왕이나 유명한 영주들이 부르는 곳에 불려 다니며 이것저것 해주었지. 그들은 아마 지금까지 이름이 전해지지는 않을 거야. 고작해야 늘그막에 대륙적인 명성 좀 얻은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처음에는 가당치 않게 창공의 기사나 폭풍의 기사 같은 이름을 사용했지만 내가 용납하지 않았지. 그건 당연한 거야. 그런 거창한 이름을 써도 좋을 정도의 실력이 없는데 어떻게 사용한단 말인가? 정말로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실력을 착각한 상대방이 제대로 검 한 번 휘두르면 비명횡사 하고 말텐데 그건 불쌍하잖아? 결코 내가 황혼의 기사인데 그것보다 좀 더 멋져 보인다던가 뭐 그런 이유로 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야. 나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지. 어디까지나 배려였지. 남자 중의 남자라는 말은 전부 나를 위해 준비된 말이었지. 하하하! 그나 저자 내 이름을 듣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자네는 꽤나 강단이 있는 모양이군. 작고 어리지만 나중에 크게 되겠어. 잘하면 자네는 종달새 기사 정도의 명성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네. 하하하! 그냥...확인 차원에서 묻는 것이네만...저기...그러니까...요즘 내 평판은 어느 정도지? 시간이 지나면 대개 어떠한 위인이든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너무 과장되게 미화되어 버리면 얼굴이 화끈거려서...좀 오래된 자기 평판에 신경 쓰이는 건 누구나가 마찬가지일 테고...통 여기 있다 보면 밖의 사정은 알 수가 없으니까...”

로드리고는 잠시 고민했다.

한 번도 이름을 듣지 못한 자에 대해서 뭐라 말해야 좋을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나는 당신 이름 따위 전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하지만 저 눈을 봐라.

반짝반짝 빛나며 뭔가 그럴듯하고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저 눈빛을...

그냥 아직도 굉장히 유명하고, 모든 기사들의 귀감이 된다고 말해야 좋을까?

여기 저기 동상도 세워져 있다고?

그러나 아는 척을 했다가 괜히 뭔가를 묻기라도 하면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에 처할 우려도 있었다.

로드리고가 대답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사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모른다고?! 이 나를!? 황혼의 기사를 모른단 말이야?! 악한 자를 멸하고, 과부와 고아의 제일 좋은 친구이자 모든 레이디들의 첫 번째 애인을 자처하는 나를 모르다니!? 그뿐이냐?! 왜 황혼의 기사겠어?! 황혼이 질 때면 어김없이 과부가 되어버린 귀부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러 찾아가던 상냥한 기사이기 때문이잖아?!”

그...그런 의미였냐...?

지금까지의 친절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광기까지 보이며 거친 콧바람을 뿜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겨댔다.

그런 사내의 모습은 꽤나 무서웠다.

로드리고는 그를 달래보려고 했지만 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걸음 물러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커다란 사내의 광폭화는 무척이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한참이나 땅바닥에 발길질을 해대었고, 눈에 띠게 바닥이 움푹 패이고 나서야 씩씩 거리며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로드리고를 돌아보며 멋쩍게 웃었는데 이미 좋은 이미지는 상당수 깎여나간 후였다.

그러나 어색한 미소와 함께 뒷머리를 긁적이는 건 무척이나 순박해 보였다.

“흐음...흠...이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하긴 꽤 시간이 지났으니 모를 수도 있지. 경솔한 짓을 하고 말았어. 하지만 자네는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그..그렇죠.”

로드리고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쉬운 소리를 하며 검술을 배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딴지를 걸어 봤자 미운 털이 박히고, 손해만 볼 테니까.

그러나 이미 기분이 약간 상한 것인지 사내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군. 좀 더 기쁘고 당연하다는 듯 말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무척이나 좀스러운 처사였지만 로드리고는 얼른 헤헤 거리며 간도 쓸개도 전부 빼어줄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렴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하하하...”

“그렇지? 아하하하하! 역시 말이 통한단 말이야. 하하하하하!”

탕탕!

로드리고의 어리고 외소한 어깨를 소리 나게 치며 한참을 웃어대는 사내 덕분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려 서있기 조차 힘들었다.

정말 힘이 장난이 아니라 통증이 상당했다.

물론 사내가 의도하고 아프라고 치는 것은 아니지만 신체 조건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튼 내가 가르치는 이상 자네는 분명 강해질 거야. 사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했을 뿐이지 검술은 다 섞어서 써야 강해지는 법이네. 딱히 일곱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를 필요도 없지.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해야 했겠지만 그런 걸 일일이 따지기에는 내가 이곳에 너무 오래있었어. 저기에 없는 검술을 가르쳐주지. 내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도 없는 시간동안 고심해서 만들어낸 최강의 검술이라 할 수 있지. 자네에게 가장 알맞은 검술과 마나 심법을 전수해 줄 터이니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말게. 자! 상상해 보게나! 대륙을 호령하고 왕이나 황제도 자네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절대자의 모습을 말이야. 자네도 내게 배우면 그렇게 될 수 있어.”

“저..정말요?”

“당연하지. 다만 아주 작은 한 가지 부탁이 있으니 그걸 들어줘야만 하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손을 떼겠네. 자네는 원칙대로 저기 있는 오래된 내 비전이나 좀 읽고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다가 주화 입마를 당해 폐인이 되는 수순을 따르게 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원래 원칙을 벗어나 뭔가 추가적인 것을 얻으려면 가고 오는 것이 있어야만 하는 법이거든.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원래 어린애는 어른이 시키는 것만 잘 하면 칭찬받고 미래가 보장되는 법이니까. 하..하하하!”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나를 자기 의도대로 세뇌시키려는 사내의 언변에 조금 고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부탁이 뭔지에 대해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일단 물어 보았다.

“그 작은 부탁이란 것이 뭔가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사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정말 작은 부탁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그 일을 알지 못하고 조용히 묻혀 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그걸 알려주세요.”

“......”

사내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다른 먼 곳을 쳐다보았다.

로드리고는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하게.”

“예?”

사내의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게 너무 작은 소리였다.

로드리고가 다시 묻자 사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왕을 부활시키게.”

“뭐...뭐요? 뭘 부활시켜요?”

“...마..마왕...그러니까...마왕....”

로드리고는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동안 생각해 보았다.

내 청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저 사내가 미친 것일까?

마왕이라니?

마계에 사는 초 강력한 그거?

가끔 마법사들에 의해서 마물은 소환되기도 하지만 마왕이 소환되었었다는 이야기는 이젠 전설로밖에 치부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왕이라니?!

고개를 갸웃 거리는 로드리고를 보며 사내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추려고 했지만 그래도 워낙 덩치가 커서 여전히 로드리고는 한참을 올려다보았고, 사내는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올려다본 그 사내의 눈빛은 무척이나 올곧고 무척이나 간절했다.

“오해하지 말게나. 여기에는 사정이 있어. 이 곳은 아주 옛날 그 기원을 알기도 어려운 시기에 만들어진 장소이네. 나도 내 이전의 수호자에게 전해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이곳은 마왕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련 공간이라고 보면 되네. 한마디로 용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곳이지. 이곳에 적을 두게 되면 보통 수련을 하게 되지. 잠에서 깨면 다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고. 하지만 수호자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저렇게 석벽을 세우게 되면 사정이 달라지지.”

“어떻게 말이죠?”

“이전 수호자는 해방되고, 석벽을 세운 이가 차대 수호자가 되어야 하네.”

“그럼?”

“그래. 하아...내가 한창 활약하던 때만 하더라도 검의 신전으로 들어올 수 있는 루트는 10가지나 되었지. 즉, 자네가 잠들기 전에 쥐었던 그 검이 10개나 세상을 돌아다녔다는 말이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 둘 파괴되어 이제 남은 거라곤 자네가 가진 것밖에 없어. 수호자가 되면 그 루트의 존재를 느낄 수 있거든. 나는 그것마저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가슴 졸이며 살아와야만 했지. 정말 길고도 긴 시간이었네. 내 전대 수호자들은 보통 오래 걸려봤자 500년 남짓이었어. 그 정도만 있으면 다음 대 수호자가 탄생하곤 했지. 아무래도 루트도 당시에는 더 많았고, 그래서 이곳에서 검을 수련할 수 있는 자도 더 많았으니까. 그러나 나는 1000년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날짜를 세는 것을 포기해 버렸네. 이젠 얼마나 지났는지 나조차 모르겠어. 자네가 나를 모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그럼 벗어나기 위해서? 제가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 건가요?”

“하..하하하! 이보게 수호자가 되는 것은 자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네. 자네의 수련 성과가 얼마나 나올지 나조차도 알 수 없어. 물론, 대륙을 질타할 정도의 무력 정도야 갖추게 되겠지. 다름 아닌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정도로 이곳에 석벽을 세울 자격은 얻을 수 없네. 게다가 이건 1000년이 넘도록 고심한 끝에 깨달았는데 절대로 영예로운 일이 아니야. 그냥 개 작업일 뿐이지. 마왕이 부활할지 안할지도 모르는 일을 위해 실력 있는 자를 가둬놓고 준비시킨다는 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나? 만약 자네가 어쩌다보니 수호자가 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보게. 그럼 자네는 아마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여기서 보내야 하네. 게다가 루트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그것마저 파괴되면...끝이지. 정말 만에 하나 마왕이 부활하기만을 기다려야만 하지. 그건 너무도 가혹하지 않나? 나는 내가 견딘 시간을 자네도 이곳에서 견디라고 말할 수는 없네. 그건...올바른 일이 아니야. 그러니...마왕을 부활시키게. 그럼 내가 그 장소에 소환되어 손쉽게 마왕을 쓱싹 해버리고, 내 생을 마감할 수 있을 테니까.”

로드리고는 어딘지 자신감 넘쳐보이던 이 사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만약 이 사내가 마왕에게 지면 어떻게 하지?

그 의문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로드리고는 고심해야만 했다.

게다가 마왕을 부활시키는 방법 따위 알지도 못하고.

그냥 로드리고가 얻고 싶은 것은 비욘느와 적당한 명성, 그리고 적당한 재력일 뿐이다.

물론, 그러다보면 필요한 만큼의 권력도 얻을 수 있고.

회귀하기 전의 조셉 정도,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덜한 정도면 되는데...

아무래도 마왕은 너무 스케일이 커지는 것 아닐까?

사내는 한참을 고심하는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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