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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22화 (22/200)

00022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심각한 표정을 짓던 로드리고는 결국 결심했는지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대륙을 질타할 실력을 얻으면 좋겠지만 굳이 그 정도는 아니어도 원하는 건 다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마왕은 좀...”

사내는 한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몹시도 씁쓸한 표정을 짓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정말...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네. 그러나 이건 전부 자네가 자초한 일이야.”

“예?”

대체 저 사내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혹시 폭행이라도 하려는 걸까?

로드리고는 불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사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렇게 나쁘거나 모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

“...?”

사내는 뭔가를 초월한 미소를 짓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

단순히 빈손이었을 뿐이다.

그리고는 일곱 번째 석판을 향해 휘둘렀다.

단 한차례 휘둘렀을 뿐인데 폭풍이라도 온 것처럼 이리저리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일었다.

로드리고는 얼른 팔을 들어 올리며 얼굴을 감쌌다.

눈도 꼭 감은 채였다.

거센 바람이 멎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가루가 되어 휘날리는 석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로드리고가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이 흔들리더니 새 석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도 크기도, 위치도 모두 처음과 같았다.

로드리고의 눈에 기대감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기에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것이었다.

로드리고가 입을 쩍 벌리고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수호자 본인 것에 대해서만큼은 수정이 가능하지. 오랜 시간 여기서 생활하다보면 경지는 높아지게 마련이고, 처음 써 놓은 것들을 수정할 필요가 생기니까 말이야. 안타깝게도 다른 수호자의 석판은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 하지만. 그러나 뭐, 상관없겠지. 자네는 조금 전 스스로 말했듯 고어는 모르는 모양이니까.”

로드리고는 어느새 무릎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사내는 그런 로드리고를 위로해 주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안 그래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자네가 익히지 못하게 하려고 석판을 지운 것은 아니야. 이건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네. 다만 다시 석판을 새기려면 한 백년쯤 찬찬히 고심한 후에 정말 최고의 걸작을 적어볼 참이라...안타깝게도 자네가 석판을 통해 내 검술을 익히기는 어려울 것 같네. 물론...다른 방법을 통해 충분히 익힐 수 있지만 말이야. 석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방법이지.”

“......”

로드리고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내의 저 집념이 무섭다.

실로 무섭다.

이제 이곳에서 검술을 익히려면 고어를 공부하든가 아니면 마왕을 부활시키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골마을에서 대체 누가 고어를 가르쳐 줄까?

그만한 학식을 가진 사람은 커다란 도시를 가 봐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만난다고 하더라도 고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설프게 조금 공부하고 석판의 내용을 어림짐작해서 배우다간 곧바로 주화입마가 찾아올 것이다.

물론, 마왕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만 하고 실제로 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저 사내는 그런 우려를 그냥 내버려 둘 자가 아니었다.

그런 먹튀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능이 경고한다.

그냥 다른 기연을 찾을까?

하지만 다른 것은 좀 더 나을까?

괜히 시간만 더 낭비하는 것은 아니야?

조셉 자식은 지금쯤 붕붕 날아다닐 텐데...

젠장할!

기연 한 번 얻기 정말 힘드네.

그러나 마왕...

듣기만 해도 찜찜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단어였다.

생각을 정리해보자.

기연은 찾기 힘들다.

찾아도 저 사내의 말대로 석판이나 책 같은 것만 보고 경지에 들기도 힘들다.

잘못하면 욕심에 눈이 뒤집힌 새끼한테 뒤에서 칼 맞기 십상이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기연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략 어디쯤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는 것 정도다.

어쩌면 저 사내보다 더한 뭔가를 요구하는 자를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마지막 것은 아마도 잘못된 생각일 것 같았다.

마왕 부활 보다 더 대단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마왕이 부활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저 사내가 뿅 가서 쓱싹 한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방법도 저 사내가 어떻게든 알려주겠지.

집요함을 보면 분명히 무슨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혹 저 사내가 마왕한테 깨진다고 하더라도 대륙에는 날고 기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전부 힘을 합치면 마왕은 결국 다구리를 당하지 못하고 전설대로 다시금 영면하게 되지 않을까?

내가 부활시켰다는 것만 비밀로 하면 되는 일이다.

혹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나는 아무튼 뭔가 잘못되면 비욘느만 데리고 깊고 깊은 오지로 들어가서 알콩달콩 아이 낳고 살다고 잠잠해지면 다시 나와서 떵떵거리며 살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사정 따위 알바 아니다.

운 좋게 다시 얻은 이번 삶은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 전부 하면서.

좋아 하는 여자와 함께.

거기까지 생각한 로드리고는 고개를 번쩍 들고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마왕 까짓거 부활시키죠. 하나로 안 되면 스무 명이라도 부활시켜 버릴 테니까 그 검술 가르쳐 주세요.”

로드리고의 대답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내가 말했다.

“자네는 정말 크게 되겠군.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륙 최강자가 되게 해주겠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암! 당연히 되어야지! 하하하하하하하하! 보면 볼수록 나와 닮았어. 하하하하하하하하!”

사내는 정말 좋아했고, 그만큼 오랫동안 웃어 댔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렇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때였다.

주변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이런...이런...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군. 자네는 그만 가봐야 해. 내일 다시 오는 것 잊지 말고. 수련은 내일부터 곧바로 시작하지. 그편이 좋으니까. 그럼 잘 가게나.”

로드리고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빙빙 도는 시야를 어찌하지 못하는 순간 강하게 자신을 잡아끄는 느낌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거기는 자신의 침대였다.

손에는 여전히 낡고 반토막 난 검이 들려 있었다.

루트...

잘 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좀 더 궁금한 것은 내일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책상 서랍 속에 깊숙이 루트를 숨겼다.

아무튼 이제 강해지는 일만 남았다.

빈손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폭풍이 이는 그 사내의 실력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 건 회귀 전 전쟁터를 떠돌 때도 본적조차 없는 신기다.

로드리고는 마왕도 그 정도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애써 자신이 저지를 일의 무게감을 줄여 보려고 했다.

강해지는 것만 생각하자.

좋은 일만 생각하자.

내가 얻게 되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누릴 행복만 생각하자.

이걸로 비욘느에게 다시 한 걸음 다가간 거야.

조셉과 비욘느 사이는 좀 더 벌어진 거고.

다시 한 번 시골에서 한평생을 보내는 일은 사양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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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잠시 꾸물거리는 움직임도 없이 곧바로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

평소 같으면 그대로 창문을 열고, 방을 환기시키고, 능숙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며, 옷을 갈아입었겠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행동이 하나 끼어들고 만다.

그녀는 침대 맡에 놓여 있는 뭔가에 손을 뻗었다.

그건 곰 인형이었다.

조심스럽게 인형을 안아들고, 더욱 조심스런 손길로 인형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무척이나 좋았다.

정말 귀여웠다.

이런 것이 내 방에 있어도 좋은 것일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선물이 뒤바뀌어 버린 건 아닐까?

도련님은 원래 아가씨에게 이 선물을 줄 생각이었는지도 몰라.

도련님이 아가씨를 놀리다보니 어쩌다 내 차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게 어울리는 건 모종삽이지.

실제로 아가씨보다 사용할 일도 훨씬 많을 테고.

인형을 오늘 다시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건 꽤나 슬픈 일일 것 같았다.

그래도...하루는 내 방에 놓여 있었으니까...그러니까 그것만 해도 만족해야지.

너무 욕심내면 안 된다.

이 집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하고, 갚을 은혜가 넘쳐나니까.

오늘도 열심히 일하자.

게으름 따위 피우면 안 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침대 모서리에 곰 인형을 놓아두었다.

하지만 조금 삐뚤어지게 놓였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손으로 방향을 조정했다.

낸시는 방을 나서기 전 곰 인형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다녀올게.”

살짝 낸시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짓이었다.

그리곤 얼른 도망치듯 방문을 닫고 나서 버린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잘 잤어?”

헤나로였다.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웬일일까?

이렇게 이른 아침에?

평소대로라면 좀 더 늦잠을 주무셨을 텐데...

찬찬히 살펴보자 헤나로의 손에는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설마 곰 인형이랑 바꿔가려고 하시는 걸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가슴에 시린 통증이 찾아왔다.

하루 밤 뿐이었지만 정이 들은 걸까?

그렇지만...아가씨께서 바라시면 바꿔줘야 한다.

그게 이 집에 은혜를 갚는 길이니까.

싫은 마음은 있었지만 스스로를 독려하며 낸시는 쉬지 않고 자신의 나약하고 불합리한 마음을 채찍질했다.

곰 인형일 뿐이니까.

마음속으로 열심히 중얼거리며 아주 작은 일일 뿐이라고 주문을 외듯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저기...부탁이 있는데...”

헤나로 아가씨의 주저하는 목소리에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곰 인형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거다.

그러면 저 반짝이는 모종삽을 얻을 수 있다.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분명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고, 그로 인해 주인마님께도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리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을까?

“...말씀하세요. 아가씨.”

낸시는 간신히 평소대로 대답했다.

“언니는 뭐 심고 그러는 거 잘하지? 그렇지?”

“그..그렇게 잘하지는 못하지만...할 수는 있어요.”

낸시는 스스로 어쩐지 말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말이야...저기...꽃 심는 것 좀 도와줘. 오빠가 사다 준 이걸로 앞에 있는 화단을 좀 손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오빠는 자기가 쓸 심산으로 이걸 사다 준 것 같지만 내가 더 제대로 사용해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거든. 그럼 오빠 코도 납작해지겠지? 그렇지? 그러니까 언니 도와줘~! 응?”

아...이럴 수가...

낸시...나란 아이는 어찌 이리도 나쁜 아이란 말이야?

아가씨는 처음부터 곰 인형과 모종삽을 바꾸자는 생각은 갖지도 않았었는데...

그 순간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아가씨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치고 올라와 낸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마음을 들키면 무척이나 창피할 것 같아 일부러 조금 무뚝뚝한 목소리를 가장해서 말했다.

“지금은...할일이 있으니까...조금 있다가요. 아침 먹고...”

하지만 헤나로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졌다.

“그럼 약속 했어! 언니!”

그렇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헤나로를 바라보며 멀뚱히 선 낸시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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