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도련님!”
로드리고가 방을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부른다.
돌아보자 그곳에는 아비슈가 서있었다.
이곳이 아직 낯선 빈민가 출신의 비쩍 마른 소녀는 눈동자 속에 가득히 쓸쓸함을 간직한 채 이곳과의 유일한 연결점인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녀는 살며시 입가에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로드리고는 아직 머리가 이래저래 복잡했지만 그래도 소녀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어 짜증스런 어투는 낼 수 없었다.
그 나름의 친절한 목소리로 애써 답하자 그녀가 조금 주저하더니 말했다.
“그야 아직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곤 없으니까. 그러니까...기다렸어...요...?”
어딘지 미묘한 문장의 어미가 존대인지 평대인지 아리송하게 만들어 버린다.
소녀도 그걸 느꼈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갸웃 거린다.
이렇게 해도 되는지 스스로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로드리고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진 않는다.
흐음...뭐, 그렇겠지.
소녀의 사정은 곧바로 이해했다.
아비슈가 아무리 빈민가에서 나름 거칠게 살아왔어도 어찌되었든 여기는 낯선 곳이고,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거야 당연하다.
그리고 나이도 어리지 않은가?
이 말라깽이 소녀가 경험한 거라곤 좋든 싫든 빈민가 ‘키베라’가 전부인 셈이다.
그것이 소녀에겐 세계의 전부였고, 지식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세계는 급격하게 팽창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이곳에서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다.
그러려면 어찌되었든 실수를 줄이는 편이 좋으니 내 옆에 적응하는 동안은 붙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귀찮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데려온 아이이니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만 한다.
로드리고는 소녀를 빤히 쳐다봤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걱정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의기양양했는데 그저 어린애의 허세였던 모양이다.
이쯤에서는 간단히 농담이라도 건네는 편이 좋으려나?
그럼 긴장도 풀릴 테고.
“이봐, 키베라에서도 무서울 것이 없는 소녀가 너무 겁먹은 거 아니야?”
“거..겁먹은 건 아니야!”
아비슈는 ‘겁먹은’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로드리고가 놀리듯 물고 늘어지자 아비슈는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냥...조심...조심하는 거야. 여긴...잘 모르니까. 그래야 살아남는 거야.”
기분이 상했는지 입술이 삐쭉 나와 있다.
“그럼 계속 조심해야지. 당분간 내 옆에 붙어 있어. 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해 줄 테니까. 그럼 문제없지? 자, 내 옆으로 와. 이제 한동안 여길 네 자리로 삼아도 좋으니까.”
아비슈는 창피한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끄덕였다.
뭐, 마음이야 이래저래 복잡하겠지.
그래도 아비슈의 긴장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그녀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주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동안 내 입가에 꽤 오랫동안 미소가 걸려 있었는지 아비슈가 물었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면 날 놀리는 게 그냥 재미있는 거야?”
“글쎄. 둘 다 아닐까?”
“정말~!”
아비슈가 발끈해서 내 팔을 꼬집으려 했지만 얼른 피했다.
“워...워워...그만 둬. 그만 놀릴 테니까.”
“여기 오더니 성격이 못되어졌어.”
“설마. 나는 그대로야. 다만 네가 위축됐을 뿐이지.”
“......”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여긴 위험하지 않으니까. 안심해.”
“...응...저기...좋은 일이란 뭐야?”
“뭐?”
“조금 전에...둘 다라고...그러니까 좋은 일도 있을 것 아니야?”
“아! 그거...뭐, 아직 나도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무슨 대답이 그래?”
아비슈가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린다.
“원래 인생은 그래. 특정지어 확실히 어떻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무슨 애늙은이 같은 말이야?”
“우선, 좀 더 살아 보라고. 그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로드리고가 조금 아는 척을 하며 고개를 쳐들고 말하자 아비슈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눈썹을 찌푸린다.
“부잣집 샌님이 너무 잘난 체 하는 것 아니야? 내가 봤을 때는 이빨도 안 났다고.”
“하하!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넌 겁먹어서 그런 샌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잖아?”
“거..겁먹은 거 아니라고!”
“예. 예. 어련하시려고요. 하하하! 일단 아침부터 먹자. 그 후에 낸시나 헤나로에게 확실히 말해둘 테니까. 나중에 뭔가 곤란한 일 있으면 물어보고.”
“다시 말하지만 겁먹은 거 아니야. 그냥...싸우면 좋지 않으니까 조심하는 것뿐이라고. 여기선 굳이...서열 같은 거 정할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쓸데없는 다툼이 싫은 것뿐이라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질근질근 입술을 씹는 표정이 꽤나 불량해 보인다.
좀 더 놀리듯 말했다가는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달려들 것 같아 일단은 더 이상 자극하지는 않았다.
식당도 가까워 졌는데 괜히 부모님이나 다른 고용인들이 보고 좋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나야 어떻게든 괜찮겠지만 가뜩이나 빈민가에서 데려온 아비슈는 그런 이미지라도 한번 덧씌워지면 한동안 고생할 테니 내가 조심해 줘야 한다.
아침으로는 늘상 그렇듯 따스한 고기 스프와 빵이 나왔다.
저녁에는 좀 더 그럴듯한 것들이 차려지지만 아침은 이렇게 간소한 편이다.
식탁에는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앉아 계셨다.
나도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 앉았고, 아비슈도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낸시는 베니를 도와 분주히 식기도구를 날랐다.
곧 있자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헤나로가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놈의 계집애는 하여간 아침부터 뭘 한 거야?
메뚜기라도 잡으러 뛰어 다녔나?
찬찬히 살펴보자 한손에는 내가 선물한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보아하니 저걸로 이리저리 쑤시고 돌아다녔군.
괜히 나까지 부모님께 잔소리를 듣는 건 아닌지 신경이 곤두선다.
지금은 어린애지만 그래도 꾸중 듣는 건 좀 어색하다.
아무리 봐도 젊다 못해 한창때인 부모님에게 말이다.
역시나 어머니께서 헤나로를 혼내셨다.
“어머나! 헤나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화단을 손보려고요.”
활짝 웃는 모습으로 어머니께 순진한척 어필해 보지만 그런 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라면 어떻게든 됐겠지만 여자들은 같은 여자들에겐 아무리 나이 차가 많이 나도 꽤 엄격한 룰이 있는 것 같으니까.
“손보긴 뭘 손봐?! 화단은 이미 훌륭하단다. 괜히 이리저리 들쑤시며 엉망으로 만들지 마렴. 정말 꼴이 이게 뭐람. 여보, 헤나로에게 뭐라 한마디 해주세요. 여자아이가 저래서야 좋지 못한걸요.”
별로 문제를 느끼지 못하셨던 모양인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재촉에 살짝 몸을 움찔 거렸다.
굳이 혼내고 싶지 않은 표정이 역력해 보이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다투기 싫으신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나로에게 시선을 맞추셨다.
“헤나로, 어서 씻고 오렴. 그대로는 아침을 먹을 수 없어. 그리고 어머니 말대로 여자아이는 그러면 못쓴다. 좀 더 얌전히 굴렴.”
“하지만 이건 오빠가 선물한 걸요? 그럼 열심히 사용해야지요. 그렇지 않나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올려다보는 헤나로의 모습에 아버지의 입가에 바보 웃음이 자리 잡았다.
그래. 내가 봐도 조금이지만...아주 조금이지만 그 순진한 표정이 꽤나 귀여웠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저 계집애!
왜 갑자기 나는 끌어들이고 지랄이야?!
내가 쌍심지를 켜고 헤나로를 노려보자 이 년도 지지 않고 슬쩍 입꼬리를 비튼다.
그러나 너무 순식간이라 아버지는 눈치 채지 못하신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완전히 콩깍지가 끼었던가.
나도 가만히 있기 그래서 얼른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화단을 망치라고 선물한 것이 아니야. 이렇게 아침부터 흙투성이가 되서 들어오라는 것도 아니었고. 어서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씻고 와서 식사나 해.”
“...흥...”
내가 어른스럽게 굴며 슬쩍 빠져나가려 하자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헤나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하지만 오빠 선물을 이대로 쓰지도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좋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따 아침 먹고, 오빠하고 같이 다니면서 이것저것 배우고 싶어요.”
저 계집애가!
내가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 전에 아버지께서 끼어 드셨다.
“하지만 로드리고도 딱히 화단 손질 같은 건 배운 적이 없단다. 그러니 내가 좀 거들어 주지. 우리 공주님.”
아버지께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헤나로를 예뻐 죽겠다는 듯 쳐다보셨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가로막으셨다.
“당신은 농장도 나가보고 하셔야죠. 상행 때문에 며칠 비우셨었잖아요? 잘못하면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구요.”
“그...그렇지. 그렇지만...잠깐이고...”
아버지께서는 아쉬운 듯 마지막까지 핑계를 대보셨지만 소용은 없었다.
정작 헤나로조차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낸시 언니도 같이 할 거니까. 그렇지, 언니?”
돌아보자 낸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뭐야? 저 계집애? 평소랑 반응이 다른데? 뭔 일 있나?
그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게 좋겠구나. 아비슈도 같이 다니면서 오늘 하루는 아이들끼리 재밌게 놀렴. 여기가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여러 가지 가르쳐 주기도 하고. 하지만 화단을 망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으면 로드리고 네가 혼날 줄 알아!?”
아! 정말! 헤나로 저 계집애, 조금만 있어봐라. 잔뜩 혼내줄 테니까.
내 원망 어린 눈초리에도 헤나로는 만족스런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