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마지못해 화단으로 끌려 나왔다.
헤나로는 실실 멍청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고, 아비슈는 내 곁에 조용히 서서 호기심과 흥분, 기대감이 혼재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을 지은 채 언짢은 기분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러나 헤나로도 아비슈도 내 심정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낸시는 베니가 설거지 하는 것을 돕느라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땅바닥에 발길질을 하며 한숨을 쉬고 나서야 낸시가 뛰어왔다.
나름 서둘렀는지 얼굴이 상기되고, 숨을 몰아쉬었다.
살짝 입가에 미소도 걸려 있다.
놀게 되어 좋은 걸까?
에이 설마.
낸시가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어린애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그 점만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빨리 털어 버리는 것이 좋다.
일단 짜증이나 풀어 보자는 생각에 낸시에게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
“야! 왜 이리 오래 걸려? 너 때문에 한참이나 기다렸잖아? 하여간 여자들은 전부 굼떠가지고...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순간 낸시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떻게 봐도 한평생을 봐왔던 무표정이지만 거의 본적이 없던 미소가 사라져서 그런지 무척이나 우울해 보였다.
왠지 입맛이 써서 더 이상 윽박지르듯 뭔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정말...아주 조금 다시 미소 짓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나 정말 왜 이런 거야?!
저런 거 신경 써봤자 어쩌려고?!
내 마음은 전부 비욘느꺼니까...그러니까...흔들리면 안 된다!
한참 마음을 다잡고 있는 그때, 가뜩이나 얄미운 헤나로가 끼어들었다.
“낸시 언니는 일하고 오느라 바쁘니까 그렇지! 오빠는 맨날맨날 놀기만 하면서!”
“뭐?! 이 계집애가! 내가 언제 놀기만 하냐? 미래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데! 놀기는 네가 놀지!”
“흥! 뭘 노력하는데? 막대기 휘두르기? 그런다고 오빠가 기사가 될까봐?!”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쪼만한게 정말...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니까! 그리고 뭐야? 네가 낸시 보호자냐? 엉?! 낸시는 말 못해? 낸시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성화야?!”
“그건 오빠가 잘못하니까 그런 거잖아?! 왜 고생하고 오는 낸시 언니한테 성질부리는데?!”
“아오오~! 정말! 내가 정말!!!! 내가 오빠니까 참는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흥! 웃기지도 않아. 정말 별꼴이야. 참기는 누가 참는 건데?”
“......”
더 이상 했다간 정말 헤나로 볼기짝을 사정없이 때려줄 것 같아 대꾸도 하지 않았다.
헤나로 년은 완전 악의 축이야!
이 일의 원흉!
왜 괜히 나까지 끌고 나와서 피곤하게 하냐고!?
정말 알 수 없는 계집애다.
물론 나도 내가 조금은 잘못했다는 걸 안다.
괜히 낸시에게 짜증을 낸 것은 아주...아주 조금이지만 내 잘못일지도 모르지.
그 정도는 안다.
그래도...버릇이란 무서운 게 회귀 전에 항상 마누라한테 하던 버릇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는다.
이렇게까지 말다툼할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헤나로 계집애가 끼어들어서 일만 크게 만들고...짜증나!
조금 전 보다 기분이 더 상하고 만다.
아비슈도 적당한 때에 친하게 지내라고 해놔야 하는데 분위기만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아! 진짜...헤나로...아휴~! 헤나로!!!
그냥 낸시한테 조금 짜증내고, 낸시는 그대로 무표정한 표정 짓고, 낸시가 조금 고개 숙이고 있으면 내 기분도 그럭저럭 풀리는 수순인데 괜히 딴지야!
헤나로는 간단한 일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아주 역력하게 내 심정을 보여주었다.
이 모임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얄미운 계집, 헤나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뭐부터 해볼까? 응?”
눈을 반짝이는 모양새가 더욱 얄밉다.
낸시는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약간 꾸물거리다 말했다.
“일단 잡초부터 뽑아야겠어요.”
“뭐? 잡초?”
나는 짜증난다는 투로 말했다.
헤나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또 대들려고 했지만 그 전에 내가 빠르게 말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헤나로가 말했잖아? 내가 선물한 모종삽을 사용하고 싶다고 말이야. 그럼 뭔가 심을 수 있는 그런 거나 하자고. 괜히 시간 오래 끌지 말고.”
하지만 낸시는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으! 저 표정!
저건 아주...아주 간혹 낸시가 반박하기 힘든 자기 의견을 말할 때 짓는 표정이다.
무척이나 단호하고 차분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참고로 내가 별로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다.
왜인지 날 위축하게 만드는 표정이니까.
젠장할...오늘 일진이 사납다.
“뿌리가 깊이 박힌 건 삽으로 조금 파고 뽑으면 더 쉬워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삽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한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고, 잡초 뽑는 것 보다는 뭔가 심는 편이 더 만족스러울 테니까 금방 끝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거다.
저 계집이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막 이 말을 하려는 데, 또 얄미운 헤나로가 끼어든다.
“헤헤헤! 바보!”
헤나로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의기양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넌 정말 왜 이러냐?! 응? 맞고 싶어?!”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주먹을 쥐고 허공중에 흔들자 헤나로가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기만 해봐! 때리면 아빠한테 곧바로 이를 거야.”
혼나는 게 무섭지는 않지만 귀찮은 것은 사실이라 화를 삭였다.
정말 얄밉다.
너무 너무 얄밉다!
언제든 기회만 오면 단단히 혼 줄을 내줄테다!
그때, 낸시가 다시 말했다.
“그..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리고는 헤나로에게 모종삽을 빌려 정말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모종삽으로 살짝 흙을 들춘 뒤에 뿌리까지 확실히 제거한다.
어려서부터 솜씨가 좋았구나.
새삼 감탄하며 추억에 잠겨 보았다.
말을 많이 주고받는 편은 아니었지만 뭐, 낸시와의 추억이라면 보통 이런 형태다.
그녀가 뭔가 하고 내가 쳐다보고.
생각해보면 그녀와 평생 함께하며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그녀는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그랬겠지?
내가 뭐, 바람 핀 것도 아니고.
가장으로서 일도 열심히 했고, 밤일도 못한 것은 아니니까.
애도 일곱이나 사이에 뒀었잖아?
그 정도면 아무리 생각해도 일등 남편이다.
그런데...왜 이리 가슴이 쓰리냐고!?
나는 멍하니 낸시를 바라보았다.
너...정말 행복했냐?
젠장...
아...젠장!
지금은 이렇게나 보들보들하고 윤기 있는 피부도 언제 부턴가는 고생을 많이 시켜서 완전히 자글자글해졌었지.
억척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정말 억척스러웠던 건지...아니면...내가 그렇게 만든 건지...하아....
나는 나도 모르게 낸시 곁에 다가가 눈물을 글썽이며 낸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낸시의 손이 뚝 멈추었다.
그녀는 나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뭘 했는지 깨닫고 얼른 손을 치웠다.
고개를 돌리자 헤나로가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비슈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지금 이게 일상적인 것인지 아니면 뭔가 이례적인 것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런...젠장!
나는 얼른 낸시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이...이건 딱히 뭔가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그냥...만져 본거야. 감촉도 궁금하고...왜, 돌이나 그런 거 만져보고 싶을 때 있잖아? 응? 그냥 그런 거니까...”
“......”
“......”
“......”
세 소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내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땀방울은 어느새 내 뺨을 지나 턱에 맺혀 있었다.
의뭉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줄기차게 올라가는 헤나로를 보며 뭔가 마땅찮은 대화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낸시!
너는 왜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없는 거냐?! 대체 왜!
아비슈, 너는...너만은 나를 어떻게든 도와야지!
마음속에서 두 방망이 치는 절규는 결국 돌고 돌아 내 마음속에만 머물고, 나는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외쳤다.
“왜, 이정도 가지고 그러는데!? 낸시, 넌 얼마 전에 가슴 만졌을 때도 가만있더니, 지금은 뭘 부끄러워하고 그러는 거야?!”
난 말해 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내 입술을 타고 빠져나간 목소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가..가슴?!”
어느새 헤나로 얼굴에 맺혀있던 능글맞음은 경악으로 뒤바뀐 후였다.
낸시는 더 이상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완전히 돌린 후고, 아비슈는 여전히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지 않는 표정이다.
나는 아비슈에게 입술만 움직여 도와달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역시 눈칫밥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그녀답게 이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 얼른 다가오더니 말했다.
“맞아! 가슴 가지고 뭘 그래? 도련님과 나는 하룻밤도 같이 보낸 사인데? 그렇죠, 도련님?”
그녀는 마치 나에게 ‘잘했죠?’하는 표정으로 칭찬을 바라는 시선을 보냈다.
내가 아비슈에게 대체 뭘 바랐던 걸까?
어느새 내 뺨에 심한 경련이 인다.
뭐, 아비슈 덕분에 낸시가 돌렸던 시선을 다시 내게로 향하긴 했지만...결코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다.
낸시도, 헤나로도 마치 나를 짐승 보듯 하는데, 나 지금 이거 해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