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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25화 (25/200)

00025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분위기만 살피고 있는데 헤나로가 발끈해서 외쳤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은 정확히 아비슈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건 꽤나 위협적이고 적대적으로 보였다.

“너, 아비슈라고 했지? 잘난 체 하지 마! 어차피 아기는 뽀뽀하지 않으면 안 생기는 거야! 하룻밤 같이 보내도 아무 소용없다고. 우리 오빠는 낸시 언니랑 결혼할 거니까 괜히 찝쩍거리지 말란 말이야!”

“......”

“......”

“......”

나도 아비슈도, 그리고 낸시도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낸시였는데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그...그런 거...아니에요!”

그녀의 당황한 모습은 내게 꽤나 독특한 충격을 주었다.

뭣보다 그 순간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무뚝뚝함의 대명사로 기억되던 낸시가 얼굴을 붉히고 손으로 뺨을 가리다니...

몇 백번이나 상상해 보려고 노력해도 도무지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때, 또다시 헤나로가 말했다.

“언니,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마. 저렇게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고!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거야?”

헤나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조그만 계집이 그래봤자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가 충분히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 최선을 다한 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비슈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든 해달라는 눈초리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전부 아비슈가 자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참에 내가 낸시 가슴 만졌던 사건은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쉽사리 진흙탕 속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며 한걸음 은근히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확장된 그녀의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배신감과 당혹감이 적절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믿고 있다.

어려서부터 도시의 빈민가를 뒹굴며 지금껏 살아남은 아비슈라면 이정도는 쉽사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튼 그녀를 그 시궁창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준 셈이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내게 뭔가 얻는 것을 기대하기 보단 스스로 내게 어떻게 도움을 주며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암! 그것이 맞는 말이다.

세상 이치란 것이 원래 그렇다.

그때, 낸시가 말했다.

“저..저는 도련님에게 특별한 감정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별로 아비슈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날 좋아하고 있어야지!

나는 이렇게 물러나서 조용히 나만의 삶을 구가해 나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어린애들의 이런 다툼 금방 끝나고 전부 잊어버릴 뿐이니까.

그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이럴 수는 없잖아?!

나는 슬그머니 물러났던 발걸음을 다시 한발 앞으로 내딛으며 말했다.

“그..그렇단 말이지?! 그거 정말 잘 됐네!? 응? 나랑 아비슈는 정말 좋아하는 사이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비슈의 손을 잡아끌어 내 품에 안았다.

그녀는 ‘어..어어?’하는 당황스런 말을 내뱉더니 얼떨결에 내 품에 딸려 들어왔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그녀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흔들렸다.

그때였다.

아! 정말 헤나로 계집애 너는 잠자코 있을 수 없는 거냐?! 응?!

나의 마음속의 절규를 무시하고 헤나로는 자신의 할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의무감에 의해 말했다.

“그치만...그치만...오빠는 비욘느 브라우닝인가 뭔가 하는 계집애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젠장할!

미친 계집애...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지랄이야!

“...원래 남자는 여러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야!”

나는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이라곤 전혀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라 해도 억지였고, 당연히 헤나로는 다시 내게 대들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원래 그렇다니까! 말도 안 되는 건 입맞춤하면 아기가 생긴다는 네 생각이고!”

“뭐?! 그건 확실한 사실이야. 엄마가 그렇게 말해줬는걸! 아빠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똑같이 말했어! 오빠야말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란 말이야!”

“그건 네가 어리니까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잖아?! 바보 같은 계집애야!”

“그럼, 뭐야? 오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있다는 말이야?!”

“전부 알고 있어. 나만 아는 게 아니라, 너만 모르는 거라고! 넌 어른들이 말한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뿐이잖아!”

“그럼 설명해봐! 어떻게 해야 아기가 생기는데?!”

“그..그건...”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기선 그냥 넘어가자.

굳이 이런 어린아이에게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아주 잠시 동안 망설이는 사이, 닳고 닳은...혹은 까질대로 까진 아비슈가 말했다.

“그건 간단하지. 내가 말해줄게.”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주제가 이야깃거리로 등장해서 무척이나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이 멋대로 진실을 까발리기 전에 내가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강렬한 눈초리로 아비슈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헤나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아직 몰라도 돼!”

“흥! 그건 오빠가 괜히 날 놀리려고 하는 거짓말일 뿐이잖아? 엄마, 아빠가 내게 거짓말을 할리 없으니까!”

“...됐어. 바보 같은 말은 그만 할래. 암튼 난 아비슈를 좋아하니까...그러니까 그렇게 알라고.”

“낸시 언니! 언니도 멀뚱히 서있지 말고 뭔가 말해봐! 이대로...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였어?!”

“그...그런 거 아니예요. 정말...그런 생각 하지 않으니까...”

고개를 숙이며 더듬거리는 낸시의 목소리에 나는 울컥 하고 뭔가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나 아비슈랑 찰싹 붙어 있는데?!

왜!?

회귀 전에는 나랑 결혼까지 했으면서....

사이에 아이도 일곱이나 뒀으면서...

나는 더욱 아비슈를 꼭 품에 안으며 낸시를 쳐다봤다.

내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혼란스러움도 감추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빨리...그래...빨리 비욘느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이런 혼란스런 감정을 모두 정리하고 그녀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젠장할!

내전아, 빨리 좀 터져라!

그래서 그녀의 곁으로 내가 달려갈 수 있게 말이야.

이런 찌질한 애들 사이에서 바보처럼 멀뚱히 서서 멍청한 이야기나 주고 받는 것은 내가 원한는 것이 아니니까.

비욘느...내 사랑 비욘느...

하지만 난 도무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조금 전 얼굴을 붉힌 채 두 손으로 뺨을 가린 낸시의 모습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아비슈를 안은 채, 낸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때마다 내 가슴을 콕콕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이건...그냥 과거에 대한...집착일 뿐이야.

나는...그래...나는 비욘느처럼 아름다운 레이디를 좋아한다.

그렇게 고귀한 레이디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나, 로드리고 아렌트다.

저런 애를 좋아하면 내 자존심도 무너지고, 과거의 루저 인생을 되풀이 할 뿐이야.

이제 기연도 얻었잖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산과 바다를 가르며 내 힘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레이디를 안고 사람들 앞에서 과시할 수 있어.

한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계속될 거야.

나는 전설이 되고, 사람들은 나를 동경하게 된다.

그것이 내가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나는 본래부터 전설적인 영웅이 되어야만 했던 거야.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하찮은 인생을 살았고, 그것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이 장소, 이 시간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며 낸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비슈를 안았던 손도 거두었다.

나를 노려보는 헤나로를 바라보며 보다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봤다.

‘까불지 마! 이 계집애야!’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떴다.

아비슈는 망설이다가 내 뒤를 따랐다.

뒤에선 헤나로가 낸시에게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그럼 혹시...아기는 하룻밤을 남녀가 같이 보내면 생기는 거야?! 그런 거야?”

뭐, 완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맘때 낸시가 남녀의 밤일에 대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낸시의 대답은 내가 한참을 걸어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뭔가 말해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아비슈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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