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저기...도련님?”
뭔가 미심쩍다는 투가 역력한 어투로 아비슈가 나를 불렀다.
“왜?”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대답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비슈는 온몸을 비비 꼬면서 말했다.
“나는...몰랐어...도련님이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줄은...나...그렇게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고...이렇게 비쩍 말라서...그..뭐시냐...그러니까...”
이게 뭔 소리야?!
누가 누굴 좋아해?!
물론, 어두운 빈민가에서 날 도와준 이 말라깽이 소녀를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 호감도 가지고 있고, 내게 크게 위해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도와줄 용의도 있다.
그럼에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남녀의 므흣한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욘느다.
이런 비천한 출신을 좋아하는 건 내 스스로의 가치를 한없이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니, 오히려 회귀 전 보다 훨씬 못한 삶이 되진 않을까?
낸시 때문에 조금 욱했을 뿐이라 잠깐 이용했을 뿐이다.
아니, 이용했다는 것은 어감이 좋지 않으니까 살짝 도와주었던 값을 조금 치루게 했을 뿐이라고 납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번 오해하고 나면 갈수록 그 오해가 사정없이 커지고 날 조여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이젠 이런 부분은 따끔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아비슈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한쪽 발로 땅을 사정없이 헤집고 있었다.
나름 부끄러움을 발산하는 혼자만의 방법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조금 귀엽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천박하고 못배운 티가 역력해 보였다.
비욘느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위이다.
그녀는 부끄러우면 살쪽 고개를 돌리고 눈을 내리깔겠지.
가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크윽...얼마나 귀엽고, 우아할까?
하지만 현실은...
내 눈앞에서는 멋대로 막 자란 무식하고 비쩍 마른 볼품없는 계집애가 단단히 오해해서 몸을 비비 꼬며 발로 흙을 아무렇게나 파헤치고 있지 아니한가?!
정말...갈길이 멀다.
비욘느에게 도달하려면 피땀나게 노력해서 기연을 완전히 내것으로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왕 따위 모르고...
세상 전부 멸망해도 오지로 들어가서 비욘느와 알콩달콩 사는 것만 가능하면 아무래도 좋다.
내게 소중한 것은 비욘느밖에 없으니까.
내가 막 따끔한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뭐, 대충 내용은 ‘너랑 내가 같냐? 나는 도련님, 너는 그냥 견습 하녀 정도인데 우리가 당최 어울리냐? 절대 아니다. 좀 더 자각을 가져라. 앞으로는 그런 허황된 생각 말고, 어떻게 하면 도련님의 은혜를 갚을지만 생각해라.’ 정도의 말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을 막 하려는 때였는데, 모퉁이에서 낸시 년이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시나 저 계집애는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암요.
나 좋다고 일평생 같이 살았던 사이인데.
크크큭.
내가 이정도지.
마음속에 남아있던 찝찝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는 좀 더 낸시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기 위해 거침없이 아비슈를 끌어안으며 조금은 과장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럼! 암, 우리 사랑은 변치 않을 거야.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아비슈가 꼭 내 품에 안겨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도...도련님...흐...흑흑...”
우...우냐?
내가 조금 당황해서 축축하게 젖어가는 앞섶을 느끼고 있을 때,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낸시가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얼른 낸시를 눈으로 쫒았다.
그래!
표정이나 한 번 보자.
마음 아프지?
그렇지?
얼른 질투에 사로잡힌 표정을 지어 보라고!
그러나 낸시는 조금도 나와 아비슈를 보지 않고 곧바로 우리를 뒤로하고 뛰어갔다.
그리고는 얼마간 더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토미 오빠! 주인마님이 핸슨씨 집에 가서 옥수수 한포대만 받아 오래요!”
어디선가 토미 녀석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놈이 뭐라 했는지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나...나를 무시하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애를 이렇게 안고 있는데?
정말...정말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거냐?!
그럼...그럼 대체 왜, 회귀 전에 나랑 같이 살았던 거냐?!
응?!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비슈를 좀 더 꽉 껴안았다.
내 몸의 떨림이 분노 때문인지 혹은 창피함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팔에 힘을 줄수록 따스한 뭔가가 가슴에 와 닿았고,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낸시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나갔다.
거기엔 질투의 감정도, 혐오감도...아무 것도 없었다.
이 감정은 뭘까?
씨발...
대체 뭐냐?!
나는 애써서 비욘느와 함께하는 밝은 미래를 생각하려 애썼다.
낸시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내 품에 아직도 있는 아비슈를 안은채, 혹은 그녀에게 안긴채 내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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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내 방의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루트를 찾았다.
반토막 난 검만이 이런 혼란을 모두 날려줄 하나의 기준이 되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루트는 어김없이 나를 다시 그 공간으로 이끌어 주었다.
황혼의 기사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고심해 봤지만 자네가 내 뒤를 이어 이 공간을 이어갈 수호자가 될 생각이나 재능은 보이지 않고, 나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우리의 이해는 일치하는 셈이네. 그러니 우선은 가장 빠르게 경지에 오르는 법을 생각해 보았지.”
나는 그토록 원했던 기연이었지만 딱히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황혼의 기사는 만족스러웠는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은 마나를 모으는 것이 좋겠지. 원래 수준 낮은 애들은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운이 좋게도 최고의 스승이 있고, 이곳은 마나가 무척이나 풍부한 곳이니 초심자에겐 최상의 환경이라 할 수 있지.”
“그럼 전 뭘 하면 되는 거죠?”
내가 묻자 황혼의 기사가 말했다.
“내가 만든 마나로드 중 하나를 전수해 주도록 하지. 무척이나 빠르게 마나를 모을 수 있지만 나름 안정적이야.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는 나도 모르네. 그러나 고수인 내가 보았을 때, 자네에게 뭔가 위해를 끼칠 법한 요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분명 단시간 안에 대륙을 질타하는 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걸세.”
“마나로드의 이름은 뭐죠?”
“글쎄. 그저 131번 마나로드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서...원한다면 자네가 이름을 붙여도 좋네.”
“아니요. 그냥...131번. 그거면 충분합니다.”
“뭐, 자네가 괜찮다면 나도 그편이 익숙하니까. 자, 그럼 자세를 취하고 앉아보게나.”
그는 나를 앉히고 내게 마나를 느끼는 법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나는 회귀 전에 이미 마나로드를 개척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그 궤를 달리 했으며 훨씬 명쾌하고 심오했다.
괜히 급한 마음에 알고 있던 마나로드를 익히지 않은 것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하나를 익히면 다른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성을 생각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마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미 굳어있는 마나로드를 어렵지 않게 툭툭 뚫어가며 그의 마나가 전진했고, 나는 그때마다 콕콕 찌르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라면 몇 년은 걸렸을 일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자리에서 모두 해치워 버렸다.
내 마나로드는 알아서 움직였고, 몸과 소통했다.
차곡차곡 심장과 복부에 쌓여가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황혼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씽긋 웃으며 말했다.
“이젠 자네가 할 일은 매일 밤 여기에 와서 대륙 급으로 마나를 쌓으면 되는 것이네. 간간히 쓸만한 검술도 내게서 배우며 말이야. 요즘 대륙 급은 어느 정도 마나를 쌓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봤자 몇 년이면 충분 하겠지. 이젠 알 수 있겠지?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고수인지 말이야. 음하하하하하하하하!”
황혼의 기사는 허리를 젖혀가며 웃었다.
그 모습은 꽤나 경박해 보였지만 나는 그걸 비웃을 수 없었다.
내 몸에 일어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나 역시 회귀 전에는 검을 익혔던 자다.
이만큼의 마나로드를 개척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어쩌면 나같은 놈에겐 평생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단 한번 내 손목을 쥐었던 것만으로 해낸 것이다.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내 몸에 저절로 알아서 흐르는 마나를 느껴보았다.
그것은 거세고도 부드러웠고, 야수처럼 흉포하면서도 양처럼 온순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빠르게 그 세를 불려 나갔다.
차곡차곡 내 몸에 쌓여 나가는 마나의 크기는 나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당신은 정말 대단한 고수입니다.”
내 감탄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이곳에서의 변화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작용할 걸세. 내가 없는 곳에서 무리하며 수련할 필요는 없어. 나와 함께 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테니, 마음껏 현실을 즐기게나.”
그렇게 안개가 쌓이기 시작하더니 모든 흐릿해지고 나는 다시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내가 눈을 떴을 때, 현실에 존재하는 내 몸에도 넘쳐흐르는 마나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정말로 기연을 얻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이 씁쓸함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있다.
이젠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충분한 실력이 갖추어 진다면 나는 비욘느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망설여진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이 맞을까?
나는...아직도 비욘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더이상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없는 거지?
평생을 바래왔던 것인데......
맙소사...지금 낸시를 생각하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