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찌할 바를 몰라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 거리는 소녀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비쩍 말랐고, 눈이 컸다.
얼마 전까지는 빈민가를 어슬렁거리며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던 소녀다.
그리고 친동생은 아니지만 가깝게 지내던 아이와 사별했다.
그것도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비슈.
그녀는 지금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직 상실의 고통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선뜻 그녀에게 다가온 호의에 끌려 낯선 이곳까지 와버렸다.
그 손을 내밀어 준 사내아이에게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이 애틋하고 야릇한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선뜻 들기에는 그녀가 살아온 환경이 무척이나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나 미움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본능처럼 행하고 느끼는 감정이지 않던가?
‘나를 좋아한다고?’
두근...
심장의 고동이 무척이나 크게 한번 울린다.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아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나는 뭐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그렇지만 나를 좋아하니까...그러니까...
모..몰라...
정말...모른다고....헤..헤헤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예쁘게 생긴 걸까?
너무 말라서 제대로 미모를 꽃피우지 못한 모양이야.
좀 더 제대로 먹고, 좋은 환경에서 살다 보면 분명 미모가 빛을 발하게 될 거야.
그걸 알아보고 로드리고는 날 데려온 거지.
정말로 내가 예뻐지면...그러면...
꺄아아악!
몰라...!
정말...앙큼하긴!
정말 앙큼한 것이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의 상상은 도를 지나쳐 어딘가 아주 멀리로 하염없이 뻗어 나갔다.
소녀는 행복했다.
소년을 만난 이후로 줄곧 행복했다.
이곳은 낯설지만 그녀가 익숙했던 그 장소보다 훨씬 따스했고, 훨씬 안심이 되었다.
심지어 아비슈 자신을 적대하는 헤나로조차도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헤나로와도 그리고 낸시와도 분명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정말 어쩌면 로드리고...도련님과 사랑에 빠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꽤나 멋진 일이었다.
아니...아주 멋진 일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상상해온 가장 밝고 아름다운 미래도 지금 그녀가 생각한 미래와 비슷한 것조차 없었다.
훨씬 가혹하고 비정한 미래였고, 그 정도로도 아비슈는 자신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그건 익숙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욕설과 비아냥, 그리고 괄시에 익숙하지 않던가?
나에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 자격이 있는 걸까?
사정없이 내 마음에 깊고도 쓰라린 상처를 남기는 행위가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내 가슴의 고동은 멈출 줄 모르고 갈수록 그 파문을 크게 만들어 간다.
이것은 언젠가 견디기 힘든 크기가 되어 사정없이 나를 두드리고 마침내 나를 터트려 버릴지도 모른다.
거기엔 고통도 슬픔도 없다.
나는 그저 행복이란 낯선 감정을 견디기 힘들었을 따름이다.
그것이 나를 망가뜨리고 마는 거야.
그건 행복의 연장선일까?
아니면 너무나도 가혹한 슬픔일까?
아비슈는 자신을 가득 채운 행복감에 몸을 부르르 떨고 만다.
그녀는 그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나는 오연히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 자신을 추스를 수 있을까?
모른다.
자신이 없다.
아비슈는 머리를 흔들었다.
바보 같은 행복감은 그대로 두자.
어쩌면 내 평생 단 한번만 느껴 볼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니까.
좋은 일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
나는 이 끝을 알고 있다.
그건 삭막하고 두려운 슬픔을 동반하고 내가 지금껏 느껴본 그 무엇보다도 더욱 강하게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갈 거다.
그것이 삶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내 동생이 죽은 건...
그 상실감은 그 다음 내게 다가올 더욱 큰 상실감을 위한, 혹은 더욱 큰 상처를 위한 준비였을 따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닥을 모르는 암흑의 구덩이로 애써 찾아갈 필요는 없다.
해가 비춰 올 때는 그대로 그 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다시 어둠이 찾아왔을 때, 아픔을 참을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거야.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감을 작은 부스러기조차 남기지 않고 샅샅이 음미하고 말거라고 아비슈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일찍이 내가 경험해 본적이 없는 친절함으로 날 대하는 로드리고의 친절은 날 한없이 풀어지게 만들어.
이 행복감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설령 죽음에 다가가는 행위라도 나는 그걸...거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이대로...불 속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나방처럼 황홀함에 취해 있는 힘을 다해 날개 짓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뿐이다.
그리고...
혹 내 끝에 파멸이 존재치 않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건 더없는 기쁨이 되겠지.
어쩌면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대로 내 삶을 끝내는 우스운 결말이 될지도 몰라.
그래도 이미 내가 기대하고 꿈꿔왔던 그 어떤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을 나는 얻은 셈이야.
이젠 후회 같은 것도, 두려움 따위도 전부 저 멀리 던져버리고 나는 내 앞에 주어진 곧은길을 걸어가야지.
나는...그래!
나는 정말로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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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도련님?”
다음날 아침, 로드리고의 방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서 기다리던 아비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대체 언제부터 문 앞에서 서성였을까?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로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응...그래. 좋은 아침. 오래 기다렸어? 뭣하면 먼저 식당으로 내려가 있던가 하지.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아비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도련님이 저와 같이 내려가고 싶을 것 같아서요...”
몸도 비비 꼬는 모습을 보며 로드리고는 반걸음쯤 물러났다.
그는 생각했다.
젠장....어제 제대로 말해뒀어야 했는데...
이거 참.
이놈의 인기는...
그렇지만 낸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
살짝 얼굴에 내비치는 그의 아쉬움을 보았는지 아비슈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내가 특별히 존댓말 제대로 쓰면서 아침 마중까지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좀 더 얼굴을 펴라고요! 도련님! 응?”
“그...그럴까?”
어색한 목소리로 로드리고가 말하자 아비슈가 활짝 웃었다.
그는 자신의 팔에 찰싹 매달린 아비슈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섰다.
이마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멈추질 않았다.
이대로 내가 어제는 사정이 있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고 말해야 옳을까?
하지만 나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럼 몹쓸 짓이지 않을까?
뭐, 낸시 고년의 마음을 좀 더 알아보려면 얘의 이런 적극적인 공세도 좀 필요할 것 같고, 어쨌든 레이디 비욘느를 만나기 전까지는 딱히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대로도 괜찮겠지.
이렇게 하면 이 애도 여기 적응하는 데 좀 수월할 테고.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며 로드리고는 식당에 들어섰고, 찰싹 붙어있는 둘을 보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농을 던졌다.
적당히 아비슈가 낯을 가린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자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놀리지 않으셨다.
하지만 헤나로는 눈썹을 역팔자로 비틀어대며 불편한 심기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코흘리개가 표정을 찡그려봤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우리 공주님! 뭔가 걱정이라도 있어?”
크윽!
아버지는 예외였다.
기회다 싶었는지 헤나로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아빠아아아~! 아무리 낯을 가려도 저렇게 찰싹 붙어있으면 안되지 않아요? 차차 우리 집에 적응도 해야 하고...”
“하하!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아 그러니? 하지만 우리 헤나로가 좀 봐주렴. 낯을 가린다니 어쩔 수 없지. 로드리고가 좋은 모양이고. 허허허.”
봤지?
계집애가 수를 쓰고 있어! 확! 그냥!
내가 눈을 부라리자 헤나로도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리고는 눈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도 토미 오빠한테 찰싹 안겨도 되요?”
헤나로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묻자 아버지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말했다.
“당연히 안 돼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오빠하고 아비슈는 되고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묻자 아버지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비슈, 아무래도 낯을 가리더라도 떨어져 있는 편이 좋겠구나. 너도 다른 사람들과도 안면을 익혀야지. 그렇지 않니?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험...험험...”
“예. 주인어른.”
아비슈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나는 그 와중에도 열심히 낸시의 표정을 살폈지만 낸시는 조금도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식사에 열중할 뿐이었다.
젠장할!
저놈의 무뚝뚝 석녀!
내가 앓느니 죽는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