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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28화 (28/200)

00028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로드리고가 언짢은 마음으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는 중에 헤나로가 아양을 떨며 아버지에게 다시 말했다.

“아빠, 아비슈가 계속 오빠하고만 같이 다니면 낸시 언니나 저하고는 친해질 기회가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언니나 저랑 같이 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쳐 주게 해주세요. 예?”

헤나로의 아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아버지의 입은 다물어 질줄을 몰랐다.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헤나로는 어쩜 이렇게 똑똑하고 착하니? 누구를 닮아서 그런 걸까나?”

“아이, 차암...그야 당연히 아빠지...”

“오호호호호호호! 아하하하하하하! 여보 들었소? 우리 헤나로가 하는 말 들었소? 응?”

“그럼, 저는 전혀 닮지 않은 모양이네요. 착하고 똑똑한 걸 전부 당신한테서 닮았다면 제게서는 나쁜 것밖에 닮을 것이 없으니까.”

어머니께서 어딘지 새침하게 말하자 아버지께서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이리저리 칭찬을 늘어놓으며 어머니를 달래기 시작했다.

헤나로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바는 전부 달성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만들어 낸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며 히죽 웃었다.

나야, 뭐 이런저런 것 생각할 겨를도 없고, 머리도 복잡한 참에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아비슈도 낸시나 헤나로와 지내다보면 나에 대한 집착도 사라질 테고, 그러면 전에 있었던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유야무야 사라지지 않을까?

말하기 꺼려지는 걸 일부러 꺼내서 서먹한 분위기가 되는 건 나도 사양이다.

그렇게 나는 아비슈에게 헤나로와 낸시를 따라다니라고 말했고, 그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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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잠깐 이리 와 봐!”

아직 어리지만 맹랑하고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상대방에 대한 악의가 넘치도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살짝 턱을 치켜들고 자기보다 좀 더 큰 상대방을 어떻게든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려 하지만 그래봤자 올려다 볼 뿐이다.

“예. 아가씨!”

아비슈는 재빨리 헤나로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잠시 아비슈를 노려보던 헤나로가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아니야. 다시 저리 가봐.”

“아...예. 아가씨.”

다시 기운차게 대답하고 깡마른 소녀는 자기가 있던 장소로 뛰어갔다.

그러자 곧바로 헤나로가 다시 말했다.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다시 이리와.”

아비슈는 조금 전처럼 헤나로를 향해 뛰어갔다.

헤나로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진하게 자리 잡는다.

그와는 반대로 아비슈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약이 오른 건지 살짝 꿈틀 거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헤나로가 꼬투리를 잡는다.

“왜? 기분 나쁘니? 응?”

“...아니요. 그럴 리가요.”

아비슈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헤나로는 쉽사리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왜 조금 전에 얼굴이 찌푸린 건데?”

“제가요? 그런 적 없는 데요?”

아비슈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천진한 표정으로 맞대응하자 헤나로는 언성을 높였다.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 한다는 거야?!”

“설마요. 그저 잘못 보셨을 뿐이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오빠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너는 우리 오빠랑은 안 돼. 오빠한테 일러도 소용없어. 여자들은 여자들만의 서열이란 게 있으니까 너도 그 서열을 따라야 한다고! 알겠어? 그렇지 않으면 여자들 사이에서는 널 없는 사람 취급할 수밖에 없어. 암튼 내가 가장 위고, 다음이 낸시 언니야. 그리고 네가 가장 아래고.”

“그럼 주인마님은요?”

“어...!?”

헤나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그냥 우리 셋의 서열만 말한 거야. 다..당연히 엄마는 나보다 높지!”

“아무튼 제가 가장 낮다는 말씀이죠?”

“그..그렇지! 그게 중요해! 아주 중요한 거야!”

“그렇네요. 저는 제 위치만 알면 되는 거니까.”

“흥! 그..그렇다고 날 미워하면 안 돼. 네가 가장 늦게 우리 집에 온 거니까 그 순서대로 정해지는 거란 말이야.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흐음...그런 낸시는 아가씨보다 더 늦게 여기에 온 건가요?”

“......쓰...쓸데없는 것 묻지 말란 말이야!!! 아무튼 네가 가장 낮다고! 가장 바닥. 그리고 낸시가 아니라 낸시 언니라고 불러야지!”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지는 않은걸요?”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서열! 서열대로 해야 한다니까!”

답답하다는 듯 헤나로가 가슴을 쿵쿵 두드려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비슈는 슬쩍 웃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아가씨는 왜 서열이 더 높으면서 낸시한테 언니라고 부르는 건가요?”

“!!!”

“?”

“......너...너! 저...저리로 가 있어. 어서 시키는 거나 하란 말이야!”

아비슈는 슬쩍 어깨를 으쓱 거리고는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헤나로는 그럼에도 분한 듯 인상을 찌푸린 채, 뭐라 해줄 말을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괜히 서열이란 말을 썼나?

대체 쟤는 뭐야?

그냥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정말 밉상이란 말이야.

오빠는 저런 애가 뭐가 좋다고 난리람?

그때, 낸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거지를 마친 모양이었다.

헤나로는 얼른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여기야!”

“예. 아가씨. 하지만 오늘은 놀아드릴 수 없어요. 곧바로 빨래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흐응...그러지 말고 놀자. 응?”

“빨래 마치고 나면 좀 시간이 빌지도 몰라요. 그때면 어떻게...”

“시러어...그럼 내가 아빠한테 말해볼게.”

“그건 안 돼요!”

웬일인지 무척이나 단호한 표정으로 낸시가 헤나로를 말렸다.

헤나로는 주눅 든 표정으로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하루 종일 나는 뭐하라고....”

“하지만 저는 조금이라도 주인님께 신세를 갚아야 해요. 할 수 있는 일을 게으름 필 수는 없는 걸요.”

“나랑 놀아주는 것도 일이야!”

“그래도 안 돼요.”

“히잉...그럼 나 혼자 심심하단 말이야!”

“...저기 아비슈하고 이야기 해보세요. 마침 가르쳐 줄 것도 많으실 테니까. 그것보다 쟤는 왜 저기 가 있는 건가요?”

“내가 저기 있으라고 시켰어! 서열을 가르쳐 줘야 하니까!”

“서...서열요?”

“응! 서열!”

“대체...무슨?”

“내가 가장 높고, 다음이 언니, 그리고 아비슈가 가장 아래야. 헤헤...”

“그러면 안돼요.”

“뭐? 왜? 나는 언니가 칭찬해 줄 줄 알았는데?!”

“친하게 지내야죠. 주인어른도 그런 의미로 우리와 같이 다니라고 하신 걸 텐데...그렇게 괴롭히면 안돼요.”

“...괴..괴롭힌 거 아니다, 뭐!”

“하아...그런 게 괴롭히는 거예요. 아가씨는 착한 분이시잖아요? 원래 모습을 보여주세요. 낯선 곳에 와서 이것저것 익숙지 않을 텐데...”

“그...그치만 나는 언니 생각해서...쟤는 오빠랑 뭔가 있다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랑 낸시 언니가 결혼하게 해줄 테니까...그러니까...”

이내 붉어진 얼굴로 낸시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그럴 필요 없다니까요...저는 정말 도련님께 아무런 감정 없으니까...”

“그..그래도 나는 저런 애가 갑자기 와서 오빠랑 결혼 하는 건 절대로 싫으니까, 그냥 언니가 오빠랑 결혼해!”

“..아..아무튼 저는 이제 빨래하러 가야 하니까, 아비슈에게 여러 가지 가르쳐 주세요. 마을사람들에게 소개도 좀 시켜주시고.”

“흥!”

낸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헤나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뛰어서 가버렸다.

그런 낸시의 모습을 섭섭한 듯 지켜보던 헤나로는 한숨을 내쉬고는 저만치 가있는 아비슈를 불렀다.

“야! 너 거기, 다시 일로 와봐! 어서 와! 멍청한 소처럼 느리적 거리지 말란 말이야!”

아비슈는 조금 전처럼 다시 뛰어서 헤나로에게 왔다.

헤나로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너, 할 줄 아는 게 뭐야? 인형 놀이 정도는 할 줄 알겠지?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무조건 공주님이나 엄마 역할이니까 그리 알아! 남은 건 아빠 역할이랑 왕자님, 그리고 기사 역할인데 내가 특별히 그 세 가지 중에서 고를 수 있게 해줄 테니까...고...고마워 하라고.”

“...예?”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비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헤나로는 가슴을 두드려대며 말했다.

“바보야! 내가 너랑 놀아주겠다는 말이잖아! 원래 서열대로 하고 싶은 역할 정하는 거야! 낸시 언니도 한 번도 공주님이나 엄마 역할은 못해봤거든!? 그러니까 불만 갖지 말라고! 네가 공주님 역할 하는 건 10년은 일러!”

아비슈는 무척이나 난감했다.

뭔가를 하자고 하는 것 같은데, 소매치기나 날치기 따위는 익숙하지만 저런 건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친해져 보자는 것 같은데 못한다고 하기도 뭣해서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좋아. 그럼 따라와. 일단 내 방으로 가자. 내 인형 보여 줄 테니까. 잠깐 그 전에 너...손부터 씻고 가자. 조심스럽게 만져야 해. 망가지면 혼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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