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29화 (29/200)

00029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 공주님한테 기사가 소매치기를 하면 안 돼지!!!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서 퍽치기도 안 돼고!!!”

“뭔가 잘못된 건가요? 하지만 공주님은 설정상 돈이 많으니까 지갑 정도는...”

“당연히 안 돼지!!! 우리 오빠보다 더 못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왜 오빠가 너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이렇게 똑같을 줄이야!!!”

“조..좋아한다니...헤..헤헤...”

“여기서 얼굴 붉히지 마!”

이렇듯 헤나로와 낸시의 평행선을 그리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로드리고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는 빈둥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그 스스로는 무척이나 심각했다.

주먹을 쥐어 보기도 하고, 괜히 허공에 주먹질을 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입으로 내는 바람 소리는 아니었다.

몸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주먹으로 바위도 쪼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처에 있는 커다란 돌맹이에 시험을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접 해보지는 않았다.

황혼의 기사는 현실에서는 딱히 수련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빠른 기간 내에 대단한 실력을 갖추게 될 거라고 했지만 막상 몸 상태가 바뀌고 나자 뭔가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에 힘쓸 일이 뭐가 있을까?

말 그대로 10년간 범죄 없는 마을이라고 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법한 곳인데...

로드리고는 그렇게 하릴없이 걷고 또 걸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렸고, 마침내 냇가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누군가 있었다.

열심히 빨래 방망이 두드려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로드리고는 슬쩍 다가가 누군지 상대방을 살폈다.

낸시였다.

여기로 빨래하러 왔구나.

계집애.

하긴 회귀 전에도 여기서 자주 애 업고 빨래 방망이 두드려대곤 했지.

당시에는 재산을 되찾았다고 해도 예전만은 못했었으니까.

물론, 한 10년 지나서는 꽤 괜찮아졌지만 하던 가락이 있어서 그랬는지 낸시는 아랫사람 시키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을 선호했다.

멍청한...

허리 아프다고 하면서도 일하는 걸 멈추지 않곤 했지.

이래서 사람은 처음부터 고귀하게 태어나야지 갑자기 신분이 바뀌어봐야 제대로 활용해 먹지를 못한 달까?

못 본채 하고 그냥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그냥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흠...흠흠!”

내가 인기척을 내자 낸시는 하던 빨래방망이 짓을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날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건넸다.

“아...안녕하세요, 도련님.”

“뭐, 그렇지.”

“여기엔 무슨 일로...?”

“잠시 산책 나왔지. 너는 빨래하는 모양이야? 얼룩 안 지게 잘 좀 해라.”

“알고 있어요.”

뭔가 기분이 상했는지 낸시는 휙 고개를 돌리더니 좀 더 방망이에 힘을 주고는 두드려댔다.

규칙성 있게 탁탁 소리를 내며 방망이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 억척스런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양 없는 모습이다.

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 좀 보라지.

얼굴도 새빨개져서...

어깨도 오르내리고, 숨도 헐떡이고...

절대로 뭔가 안쓰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내 힘이 얼마나 좋아 졌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직접 빨래 방망이를 두드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야, 방망이 이리 줘봐.”

“예?”

“아, 진짜! 방망이 이리 줘보라고!”

“빨리 끝내야 해요. 도련님이 방망이를 가지고 놀면 빨래를 할 수 없다고요. 저기 가서 나뭇가지라도 꺾어서 노세요.”

이 계집애가 누굴 어린애로 아냐?!

응?

확 그냥!

“달라면 달란 말이야!”

나는 고함을 치고는 낸시에게서 억지로 빨래 방망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때, 낸시의 손을 잡게 되었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직 겨울은 되지 않았지만 물은 찼고, 오래도록 찬물로 적신 빨래를 두드려 대다보니 자연히 손은 차게 식을 수밖에 없었겠지.

물론, 그렇다고 불쌍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이건 일이니까.

당연한 거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낸시가 쪼그리고 앉아있던 자리를 차지하고는 그녀를 옆으로 억지로 밀어 냈다.

그녀는 반항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빨래를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회귀 전에도 집에 있을 동안은 빨래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전이 터지고 군대에 차출 된 이후로는 본인 빨래는 거의 스스로 해야만 했기에 나름 이 부분에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찰지고, 강하게 빨래를 두드려댔다.

그 모습을 옆에서 낸시는 멍하니 쳐다봤다.

나는 절로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가 좀 더 열심히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보통 이맘때, 이렇게 빨래를 두드려댔다면 숨을 몰아쉬며 어깨와 팔이 몹시도 아팠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황혼의 기사에게 한 수 배우고 나서 가장 처음 하는 일이 빨래라니...

아마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척이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시골 마을에서 힘을 시험해 볼 만한 일은 이정도 뿐이다.

뭐, 찾아보면 몇 가지 더 있겠지만 일단은 이걸로도 내 체력이 몹시 강해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우선은 만족하자.

빨래는 많았다.

일단 낸시가 두드려대던 것을 전부 끝내고 다른 것을 적셔서 다시 두드려대려고 했더니 낸시가 나를 밀치며 말했다.

“이젠 제가 할래요.”

“뭐?”

“이제 제가 한다고요. 제...일이니까...”

“야, 누가 그런 거 모르냐?! 엉? 그냥 내가 좀 시험해 볼 게 있으니까 지금 하고 있는 거잖아?! 잠자코 저기 앉아 있어.”

“도..도련님이 하면 빨래가 엉망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야! 이미 해 놓은 거 못 봤어? 응? 자! 보라고! 완벽하잖아? 어디 구멍 난 곳이라도 있어?”

“어..없어요...”

“그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말고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

“하지만 제 일이니까!”

“어허!!! 그냥 저기 있으라고!!!”

내가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이자 입술을 깨물며 낸시가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그래도 손 시렵거나 어깨 아프면 말하세요. 곧바로 제가 할 테니까.”

“내가 알아서 하거든?! 하여간 기집애가 예나 지금이나 귀염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서...고집만...으휴...”

나는 다시 빨래를 두드려댔고, 모든 빨래를 전부 끝낼 때까지 특별히 힘들다거나하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낸시는 옆에 있다가 내가 빨래를 두드려주면 그걸 물로 헹궜다.

얘는 어려서부터 맨날 이런 일 전부 해왔던 거구나...

지금은 그렇게 힘들지 않지만 회귀 전 군대에 차출 되었을 때는 빨래를 하며 몸 여기저기가 쑤셔오던 것이 기억났다.

이맘때 어린애라면 낸시도 꽤 힘들었을텐데...

그런데 원래는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어머니께서 낸시에게 이렇게나 많은 빨래를 시킬 리가 없는데?

나는 대충 빨래를 전부 두드려주고는 낸시가 빨래를 헹구는 것을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며 물었다.

“어머니가 시켰어?”

낸시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노라 아주머니께서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제가 하게 되었어요. 원래는 베니 아주머니께서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아이가 아파서 시간이 안 나시나 봐요.”

“그래도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너한테 전부 맡겨 놓고 그러면 안 돼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언짢음을 표하자 낸시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아, 진짜!!!

이 계집애는 지 걱정해 주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이럴 때는 그냥 고개 숙이고 얼굴 빨개져서 부끄러워하면 좀 좋아?!

“호?! 그러셔? 하지만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어?”

나는 조금 비꼬듯이 물었다.

왜 그런지 이래저래 속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그럼, 당연히 제가 다 했겠죠.”

“뭐?! 이걸 어떻게 너 혼자 다 하냐?! 엉?! 아까도 힘들어서 헥헥 대더니만! 너, 나 아니었으면 아주 힘들었을 걸?! 그래, 안 그래? 엉? 네 입으로 말해봐. 응?”

“...도와달라고 안했어요.”

뭔가 기분이 상한 듯 시선을 돌리며 낸시가 말했다.

저게 애써 도와준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인가?!

아호~! 빡쳐!

“아~!? 그러셔? 그럼 이거 다 다시 해도 되겠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세탁된 빨래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이거 전부 땅바닥에 내팽겨 친다? 응? 그래도 상관없는 거지? 어차피 네가 한 거 아니니까, 그래도 되겠지? 엉?”

내 말에 낸시는 아무 말도 없이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뱉을 뿐이었다.

그녀의 투명한 눈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 높이 치켜들었던 빨래를 다시 내려놓았다.

“젠장...그냥...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잖아?! 나쁜 계집애...”

내가 중얼거리자 낸시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고..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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