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뭔가 더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되어버렸다.
나쁜 계집애...그러려면 좀 더 일찍 고맙다고 하던가...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낸시는 그러는 와중에도 빨래를 정리하더니 번쩍 머리 위에 바구니를 이고는 일어섰다.
나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같이 따라서 움직였다.
이미 내가 힘이 세졌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했기 때문에 굳이 빨래 바구니를 빼앗아 들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물기를 뺐다고는 하지만 건조되기 전이라 여전히 많은 물기가 남아 있고, 그 무게가 꽤 나가는지 낸시 계집애가 또 헥헥 거렸다.
하긴, 저만한 어린애가 감당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무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써 무시하며 그냥 걸으려고 했다.
괜히 도와줬다가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면 난처하다.
가뜩이나 헤나로 계집애가 이상한 꿍꿍이를 보여서 힘든 타이밍에 그런 여지를 주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러나 낸시는 갈수록 걸음이 느려졌고, 호흡도 거칠어 졌다.
나도 악마는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왜? 무겁냐? 응?”
내가 묻자 낸시는 날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으며 말했다.
“아니요. 전혀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숨 몰아쉬는 거 보면 완전 쓰러지기 직전이고만!
생각해서 물어봤더니 이 계집애가 말을 해도...아오! 열 받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럼, 좀 더 빨리 걸어!!! 무겁지도 않은데 자꾸 이렇게 엄살 필래?! 응?”
흔들흔들 거리는 것만 봐도 더 이상 빨리 걷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낸시는 이를 악물고 좀 더 걸음을 빨리 했다.
이거 참...저러다 너무 이를 악물어서 이라도 부러지겠군.
“야, 그만 하고 이리 줘. 내가 조금 들어줄 테니까. 물론, 너 좋으라고 그런 건 아니고...그냥...그래, 너 좀 불쌍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낸시의 머리 위에 있는 바구니를 받아 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 계집애가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저...조금도 불쌍하지 않거든요?”
아...진짜!
그건 그냥 한 말인데, 뭘 저렇게 과민 반응이야?
쟤 열등감 진짜 쩐다!
“......”
당황스러워 내가 말도 못하고 쳐다보자 낸시는 나 같은 것은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열 받는다.
조금도 귀엽지 않고...
이대로는 분이 풀리질 않는다.
나는 옆의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는 낸시를 따라가며 허리나 등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안무거우면 더 빨리 가라니까...어서! 응? 아, 저 앞에 돌맹이 있다. 걸려 넘어지지 말고, 좀 더 빨리! 응? 이러다 해 지겠네? 야, 안 들려? 응? 빨리 가라니까?”
마침내 낸시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그녀의 이마에선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고, 호흡도 무척이나 거칠었다.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온몸으로 나 지금 몹시도 힘들어요를 외치는 것 같았다.
“자꾸 왜 이러세요?!”
화를 낸다.
저 모습도 그리 자주 본 모습은 아니다.
회귀 전에는 웬만한 일은 전부 꾹 참으로 내색도 하지 않았었으니까.
“글쎄...힘들지 않다니까...그냥 격려 차원에서...”
“그런 격려 필요 없으니까...그만 해요....”
속으로 삭인다.
저 표정은 그럭저럭 본 표정이다.
“싫은데?”
나는 삐딱하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아...정말!!!”
낸시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걸음을 옮겼고, 나는 허공중에 나뭇가지를 휘휘 돌리며 따라갔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아비슈라면 분명히 좀 더 귀엽게 도와달라고 했을 텐데...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누구는 전혀 귀염성이 없다니까...항상 꽁해있어서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고...힘은 아주 장사라, 뭘 들어도 지치질 않아요. 조금도 여자답지 않다니까.”
다시 낸시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울고 있었다.
젠장!
왜 우는 거야?!
새빨개진 눈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낸시도 울 수 있는 거냐?
저 석녀도 울 수 있다고?!
새로운 발견이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운다.
투명한 콧물이 흘러내림에도 닦을 줄 모르고 계속해서 울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엉엉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소리 없는 눈물이 더 처량해 보였다.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도무지 뭐부터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너...너도...울 수 있구나...?”
“......”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야, 그냥...해본 말이야....우...울지 마라...차..착하다..자...착하다...”
나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올려 낸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가 자기 손으로 내 손을 쳐내고 말았다.
단단히 미움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무겁지? 내가 바구니 들테니까...그러니까, 자 줘봐. 응?”
그럼에도 나는 화내지 않고 낸시의 바구니를 대신 들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낸시는 몸을 뒤로 버티며 바구니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야...자꾸...고집 부리지 말고...나는 처음부터 잘 해주려고 했던 것뿐인데...젠장...”
“훌쩍...훌쩍...제...제가 할 수 있어요...흑...흑흑...”
낸시가 콧물을 빨아 먹으며 말했다.
우는 모습이 몹시 추해보이긴 했지만, 한편에서는 귀엽게도 보였다.
분명 내 눈이 좀 잘못되었음에 틀림없다.
“다..할 수는 있지. 그런데...그냥...그 힘드니까...그러니까...그런거지...도와준 다니까...”
내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낸시는 훌쩍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흑...그럼...제발...방해하지나 말아요...훌쩍...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흑...나뭇가지로...흑흑...자꾸...찌르지...말고...흑흑....불쌍하다고...훌쩍...말하지도....말고....흑흑...빠...빨리....자꾸...빨리...걸으라고 하지....말고...훌쩍...훌쩍...”
“그건...네가 자꾸 힘들지 않다고 하니까...그러니까...내가...”
나는 나름 내 자신을 변호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마침내 최후의 선을 넘고 만 모양이다.
낸시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힘들어!!!! 힘들다고요~! 엄청....나도...엄청 힘들단 말이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앙앙~~~!”
낸시도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도 엄청난 발견이었지만, 이렇게 어린애처럼 소리내어 울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낸시가 자기 입으로 힘들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강하게 울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훌쩍이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나도...흑...흑흑...힘들어요...정...정말....힘드니까....그러니까...괴롭히지 말고....나쁘게 말하지....흑흑...말고....자꾸...못생겼다고...흑...흑흑...말하지...말란 말이에요....”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나도 억울했다.
대체 내가 언제 못생겼다고 했단 말인가?
“야, 내가 언제 못생겼다고 했냐? 그냥 귀엽지 않다고 했지. 응? 잘 생각해봐. 울지만 말고. 그렇지? 내가 못생겼다고는 한 번도 말 안했지? 그치?”
“으아아아아아앙앙앙~~~~!”
이 계집애가 한 번 울고 나니까 아주 끝도 없이 우는구나.
괜히 자기가 불리하니까 더 크게 울어 재끼고...젠장...
“아..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 너 못생겼다고 말했던 거 같다. 그래. 너 못생겼어. 그래...했어. 너 못생겼다. 그치? 지금도 했지? 엉?”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앙앙앙~~~!
사태가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줘야 한단 말인가?
뭐라 해도 낸시는 울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낸시 달래는 법을 전혀 모른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내 뺨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낸시가 다시 훌쩍이며 말했다.
“나...나한테...자꾸...못생겼다고...자꾸...흑흑....”
“예...예쁘다...내...낸시 예..쁘네? 그치? 응?”
“자꾸...아까부터...자꾸...아비슈는 귀여운데...나는 안 그렇다고...자꾸...비교하고...여자답지 않다고도...흑흑...하고....”
“그..그냥 해본 말이지. 네가 자꾸 고집 부려서 그런 거라니까.”
“지...지금도...전부...내탓으로...”
“아..아니야! 전부 내가 잘못했지. 하...하하하! 그래, 내가 아주 잘못했어. 응. 그러니까 그만 울고, 그거 무겁지? 힘드니까 내가 바구니 들어줄게. 자, 이리 줘. 응?”
마침내 낸시는 바구니를 내게 건네줬다.
여전히 그녀는 훌쩍였고, 나는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낸시를 달래며 집으로 향했다.
이런 모습의 낸시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하지만...왠지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