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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31화 (31/200)

00031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좀 걷다보니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은 거리가 멀어 누군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로드리고 집에서 가끔 잡일을 거드는 마을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낸시는 그걸 보고는 급하게 옷소매로 엉망이 되어 버린 얼굴을 닦았다.

서둘렀지만 대충 얼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눈 주위는 꼼꼼히 옷깃으로 찍어 내듯 눌러서 물기를 닦아내고, 빨개진 눈도 몇 번 깜박이며 하늘을 쳐다보곤 붉은 기운을 없앴다.

그 동작이 무척이나 익숙해서 순식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 되어 버린다.

조금 전까지 엉엉 울었었다는 걸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로드리고조차 자신이 뭔가 착각했던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로드리고가 계속해서 쳐다보자 낸시가 물었다.

“...왜요?”

아직은 코맹맹이 소리다.

겉모습이야 어떻게든 했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우진 못했다.

그걸 알게 되자 로드리고는 왜인지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물론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니...그냥...”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얼굴이 익숙한 사내였다.

서로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지나쳐 갔다.

그 후로도 둘은 계속해서 걸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입이 근질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대체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아니 지금 뭔가를 물어봐도 괜찮은 걸까?

또 울어 버리면 어쩌지?

이제 집도 가까워져서 울어 버리면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 뭔가를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빙글빙글 돌았다.

혼자서 끙끙 거리며 답답함을 느꼈다.

보통 내가 낸시 눈치를 보지는 않았는데, 도무지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손해 본 기분이었다.

나는 도련님이다.

낸시는 단지 우리 집에 얹혀사는 하녀일 뿐이고.

굳이 회귀 전 인연을 끄집어 낼 필요까지 없더라도 내가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은 잘못 되어도 한참이나 잘못 되었다.

뭐, 내가 바구니를 대신 들어 주는 것 가지고 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건 어차피 내가 들어 주려고 했던 거고.

내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 주된 요인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 상황이다.

묻고 싶은 것을 눈치 보며 묻지 못하다니!!!

어떻게 봐도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그때, 낸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바...바구니...”

“뭐?”

우물쭈물하는 말에 다시 묻자 낸시가 뜸들이다 다시 말했다.

“..바..바구니...제가 들 테니까...돌려주세요...”

손가락을 마구 꿈틀거리며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걸 보니 낸시도 뭔가 마음이 심란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밀며 바구니를 돌려받으려 했다.

그 모습에 슬쩍 장난기가 밀고 올라왔다.

이제는 더 이상 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내가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낸시가 물었다.

“아니, 뭐 그렇잖아? 지금 와서 마치 네가 들고 온 것처럼 해서 어쩌자는 거야? 응? 그건 너무 치사하다. 계속해서 ‘제 일이예요~!’하고 말하면서 실제로 빨래도 내가 해줬고. 이걸 들고 가서 전부 네가 했다고 말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얌전한 낸시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구나? 응?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애가 앙큼하네?”

“그런 거 아니에요!”

“오호~! 그러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낸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키득거렸다.

낸시는 분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로드리고는 노려봤다.

“그런 생각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그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계산적이란 말이야? 그것 참 대단한데?”

“......”

이젠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이 이상은 다시 울지도 몰라서 그만 둬야 할 것 같았지만 이건 마치 마약 같아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있는 대로 이성을 끌어 올려서 욕구를 잠재워 보았다.

“알았어. 주면 될 것 아니야? 자 받아.”

낸시는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바구니를 놓치는 않았다.

“뭐하는 거예요?”

“아니, 잠깐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빨래 절반을 바구니에서 빼들었다.

그리고 바구니를 낸시의 머리에 올려 주었다.

낸시는 알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둘 다 같이 한 셈이 되지. 그렇지 않아?”

“...뭐...그..그러네요...”

나와 낸시는 그렇게 나란히 걸었다.

누가 더 앞서거나 뒤서지 않았고, 둘 다 짐을 든 채였다.

“야, 그런데 나 오늘 정말 놀랐다. 너도 우는구나? 어? 크..크크큭...큭큭...”

낸시가 얼굴을 붉혔다.

“우..울지 않았어요!!”

“보통 눈물 흘리고 ‘엉엉’하면서 소리 내면 우는 거거든?”

“그런 적 없어요!!!”

“아하 그러셔? ‘힘들어! 나도 힘들다고!!!’”

나는 낸시가 울면서 했던 말을 흉내 내어 보았다.

그러자 낸시의 얼굴은 조금 전 보다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하..하지 마요!!!”

“왜? 너는 운적 없다며? 나는 그냥 혼잣말 하는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운적도 없는데?”

내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낸시를 쳐다보자 그녀는 분한 표정을 짓다가 입술을 몇 번 움찔 거렸다.

그러더니 결국 말했다.

“..우...울....”

“뭐? 잘 안 들리는데?”

“...울..었...”

“아, 당최 뭐라는지 모르겠네? 아까 무슨 소리를 들었더라? 아! 그렇지! ‘자...자꾸...아비슈는 귀여운데...나는...흑흑..안 귀엽다고...’...큭...큭큭...아하하하하!”

“알았어요!!! 울었어요! 그러니까...이제 그만 하란 말이에요!!! 그만 웃어요! 뭐가 웃기단 말이에요?!”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왜 그런 걸까? 너는 알고 있어?”

“...몰라요...”

“그럼 알 때까지 계속할까?”

“울었다고 인정했잖아요? 그럼 그만 해야죠!!!”

“내가 언제 그만 한다고 그랬어? 난 그런 말 한적 없는 것 같은데?”

“뭐에요!! 치사해!!!”

“하...하하하!”

낸시가 제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낸시보다 지금의 낸시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어딘지 서럽고, 안타깝고, 그리고 기뻤다.

나는 계속해서 웃었고, 낸시는 계속해서 내게 그만 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아마도 집 사람들에게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몹시도 싫은 모양이었다.

“이따가 헤나로에게 말해봐야겠다.”

“뭘요?!”

낸시가 꽤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울었던 거...일려나?”

“절대로 안돼요!!!”

단호하고 절박하다.

“글쎄...”

“정말 왜 그래요?! 아무튼 그런 말해도 난 운적 없다고 할 테니까...”

“그래? 그럼 상관없는 거지?”

그렇게 몇 걸음 더 걷자 낸시가 결국 바구니 잡았던 양 손 중 하나를 떼더니 내 옷깃을 붙잡았다.

“왜? 상관없잖아?”

“......”

“이거 놔. 그래야 가지.”

“.....어...어떻게 해야 말하지 않을 거예요?”

단단히 골이 난 표정으로 낸시가 말했다.

솔직히 나는 가족들에게 낸시가 울었던 일을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낸시를 놀리는 일이 좀 재미있었을 뿐이다.

거의 볼 수 없었던 낸시의 표정 변화도 새로웠고, 뭔가 내 마음을 자극하는 느낌도 좋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내가 말했다.

“말하지 않을게.”

낸시는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잠시 동안 들여다보았다.

뭐냐?

감동이라도 받았냐?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낸시의 대답은 꽤나 나를 울컥하게 만들고 말았다.

“...믿을 수 없어요.”

“야! 정말이야! 말 안한다니까.”

“근데...왜 웃고 있어요?”

“그거야 사람은 원래 웃으면 좋은 거니까.”

“......”

“자, 그만 가자!”

내가 활기차게 말했다.

그러나 낸시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서 말해요.”

“뭘?”

“말 안하는 조건...”

그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 정말 낸시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구나.

그건 조금이지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뭔가 적당한 것을 하나 생각해 내야만 할 것 같았다.

뭐가 좋을까?

슬슬 쓰라려오는 마음 때문인지 나도 꽤나 짓궂은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

이건 전부 낸시 네가 자초한 거야.

나는 정말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네가 자꾸 고집부리니까 이렇게 된 거라고!

나는 애써 내 행동을 있는 힘껏 정당화 시키며 말했다.

“그럼...”

“그럼?”

낸시가 뜸 들이는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짝 벌어진 낸시의 입술이 유난히 윤기 있게 보였다.

“뽀뽀...”

“뽀?”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뽀’를 발음하는 낸시의 입술은 꽤 귀여웠고, 탐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

“뽀뽀라고. 저기서 하자. 나무 뒤에서. 그게 조건이야. 그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잠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날 멍하니 쳐다보던 낸시는 곧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그건 절대로 안돼요!!!”

아니, 나랑 입 한번 맞추는 게 그렇게 싫으냐?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나 거부하자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너, 알고는 있냐?

회귀 전에는 네가 내 자식 일곱을 낳아주었거든?!

“왜 안 되는데?!”

나도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그러자 얼굴이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개진 낸시가 조그맣게 말했다.

“그...그야...뽀...뽀뽀하면....아....아기가 생기잖아요!!!”

뭐라고?

너...너도냐?

나는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낸시를 보면서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적으로 섞이고 섞여 뭔가 내 마음에 작용을 한 것 같았다.

아주 이상한 울림이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두근....

뭐냐?

대체 뭐냐?

두근...큥~!

나도 분명히 알고 있는 울림이다.

이거...아니지?

설마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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