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33화 (33/200)

00033  굴러온 돌, 박힌 돌, 미묘한 두근거림  =========================================================================

“아이고...아이고...”

상황에 맞추어 아픈 척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날 부축한 낸시도,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아비슈도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먹힌다.

확실히 먹히고 있다.

나는 안도했다.

이대로 난감한 상황은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중에 유일하게 나와 핏줄이 이어진 소녀만은 그런 나의 자그마한 소망을 무참히 짓밟으려 했다.

“어디가 아픈데?”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청천 벽력같은 소리였다.

헤나로는 조금도 걱정하지 어투가 아니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훔쳐보니, 마치 죄수를 심문하는 수사관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날 의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계집애!

이럴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센스도 없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그렇게도 야속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딜 아프다고 해야 할까?

잠시 멈칫했다.

정말 그뿐이다.

흔히 말하는 찰나의 순간이랄까?

그러나 그 정도 시간이면 헤나로에게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이미 그녀는 심증을 잡고 미묘한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흐음?”

젠장!

뭘 하려는 거냐?

내 가슴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심하게 요동쳤다.

설레는 것도 아득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마조마할 뿐이다.

그건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혹은 비슷한 것을 경험했던 내게 있어서 그와 비견될 만한 시간이었다.

그때, 아비슈가 말했다.

“세상에! 이 땀 좀 봐요!”

내 심정을 반영하듯 식은땀이 꽤나 흐른 모양이다.

혹은 그 전에 낸시가 나를 혼란스럽게 해서 이미 흘러나온 땀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적절한 타이밍에 말해준 아비슈 덕분에 나는 난처한 상황이 될법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래, 아비슈. 장하다!

속으로 깡마른 소녀를 칭찬하며 조금 벌어진 기회의 틈에 내 발을 끼워 넣어 억지로 좀 더 그 크기를 벌렸다.

나는 일부러 좀 탁한 목소리를 흉내 내서 말했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말라비틀어진 노인의 몸으로 꽤 오랜 시간 살아 본 나이지 않던가?

대단한 기술은 없어도 때때로 위기를 모면할 노인의 스킬 정도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콜록! 콜록! 나...나 좀...침대로...”

더 이상은 특별히 머리 굴릴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낸시와 아비슈에게 몸을 맡긴 채, 침대에 누우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가늘게 뜬 헤나로는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방을 나가기 전, 낸시는 이리저리 흩어진 빨래더미를 주워들었고, 아비슈는 눈치껏 그걸 도왔다.

그렇게 사건은 종료였다.

아직도 점심나절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딱히 방에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때, 한 가지 의문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낮에도 루트를 사용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그런 의문을 오래 간직할 필요가 없었다.

직접 해보면 되기 때문이다.

두동강 난 반검을 찾아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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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드리고와는 다르게 쉽사리 의문을 풀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는 소녀가 있었다.

방을 나섡 헤나로는 로드리고의 방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멤돌았다.

‘뭔가 있어!’

헤나로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근거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타인에게는 없는 매우 날카로운 감이 있다고 믿었다.

그건 여자에게는 무척이나 유용한 종류의 것이었는데, 바로 로맨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물론,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아직 어린 소녀의 혼자만의 망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녀의 한평생이 지나도 그 유무를 밝힐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소녀는 믿었다.

그것도 아주 굳건히 믿었다.

그런 믿음은 본인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어 주었고, 소녀는 그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소녀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오빠는 정말 아팠을까?

아니...아니야.

흥건하게 흘러내리던 땀방울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뭔가 핑크빛 공기를 본 것 같아.

공기가 무척이나 달달했단 말이야.

물론 로맨스에는 왕자님과 공주님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오빠를 왕자님의 역할에 가져다 두고, 뭔가를 상상하기에는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로맨스는 로맨스다.

통밀빵도 먹지만 가끔은 호밀빵도 먹는다.

꼭...이상적인 로맨스를 기대할 수는 없잖아?

가끔은...아주 가끔은...마을주민A정도의 수준에서 식상한 로맨스를 상상해 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은 닫혔다.

나는 쫓겨났고,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

어쨌든 오빠는 지금 아픈 상태라고 인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엄마나 아빠에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궁금증을 이대로 묻어둘 수는 없다.

헤나로의 머릿속에 차선책이 떠오른다.

낸시 언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안고 있었다.

둘 사이의 일이고, 오빠한테는 더 이상 묻지 못하면 남은 건 하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낸시 언니는 내 편이다.

항상 사이좋게 지냈고, 마음도 잘 맞는다.

그리고 언제나 친절하다.

그렇다면 내가 묻는 것 정도는 말해줄 거야.

헤..헤헤헤!

헤나로는 막 계단을 내려서는 낸시를 쫓아갔다.

낸시의 옆에는 아비슈가 같이 주웠던 빨래를 얼마쯤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빨래 너는 것을 도와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저런 것이 아니다.

헤나로는 귀여운 목소리로 낸시를 불렀다.

“언니! 언니!”

두 번이나 연이어 ‘언니’를 연발하는 것도 나름 귀엽게 보이기 위한 헤나로의 스킬이었다.

낸시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예,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도련님이 걱정되세요?”

“응. 그래서 말인데 아까 어떻게 된 거야? 언니, 좀 자세히 말해줘. 응?”

헤나로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절대로 오빠를 걱정하는 동생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낸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비틀거리다가 저를 꼭 붙들었어요.”

아무리 봐도 껴안은 것처럼 보였지만 당사자가 그리 말한다면 또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부분은 헤나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그녀는 좀 더 자세한 경황이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반찬삼아 이것저것 더해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로맨스를 완성하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 로맨스...

그것을 헤나로는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고,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데?”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걸 계기로 좀 더 자세히 이것저것 물어보다보면 가슴 두근거리는 뭔가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낸시 언니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예?! 그...그게...별 이야기 아니었어요. 내 정신 좀 봐. 빨리 빨래 널어야 하는데...”

붉어진 얼굴로 말을 떠듬거리며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낸시를 바라보며 헤나로는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섭섭함이었다.

‘뭐야?! 언니...나하고 사이에서 비밀? 뭔가 숨기고 있어!!!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울상을 짓는 헤나로는 왜인지 기운이 빠져 어깨를 내려뜨렸다.

더 이상 로맨스 따위 어찌되든 알바 아니었다.

그렇게 입술을 삐쭉 내민 헤나로는 눈썹을 찌푸린 채,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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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는 빨래를 든채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무슨 이야기?

그..그야...나...울었던 이야기지.

차마 동생 같은 헤나로 아가씨께 자신이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건 낸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결국 말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쨌든 거짓말은 서투니까 조심해야만 했다.

위험했어.

그녀는 빨래를 널면서 생각했다.

옆에서 아비슈가 같이 빨래를 널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러나 결코 로드리고처럼 므흣한 감정 때문에 두근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뭔가를 숨긴다는 것이 어색했고, 그로인한 신체적 반응이 두근거림일 뿐이다.

하지만...아가씨가 도련님께 물어보면 어쩌지?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기는 했는데...그래도...말하면...

하지만 약속했으니까...

그래도...혹시...말하면?

그럼...

나...나는...몰라....

여전히 울상을 짓는 낸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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