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떨어져 나온 개깍지, 눈에 붙은 콩깍지 =========================================================================
다시 그 공간이다.
황혼의 기사가 말한 대로라면 진정한 의미의 ‘검의 신전’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서있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일곱 개의 석벽과 빼곡한 글씨, 그리고 잘생기고 건장한 사내가 있는 곳.
황혼의 기사가 로드리고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자네, 무슨 일인가? 아직 밤은 되지 않았을 텐데?”
추궁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그저 가볍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였다.
로드리고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끔 낮잠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황혼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나야 고독한 시간이 줄어드니 반길만한 일이지만 낮잠은 자네의 평판을 깎아버릴지도 모른다네. 항상 조심해야지.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처럼 혼자라면 아무래도 좋지만 말이야. 하하하!”
“어쨌든 제가 온 것이 좋다는 말이군요?”
“당연하지. 이곳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오는 것은 언제라도 환영할만한 일이지. 심지어 엄청난 악당이라도 마찬가지일걸세. 고독도 때로는 유익하지만 길어지면 그만한 지옥도 없으니까. 그래도 너무 우쭐해 하지는 말게나. 자네가 아니었어도 나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을 테니까.”
“하하! 그렇지만 이곳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올 가능성은 없지 않나요?”
“뭐, 그렇지. 이제는 말이야. 다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를 너그럽게 용서하게나. 아직 자존심이 남은 사내의 투정이니까.”
“뭔가 배울 수 있을까요?”
로드리고가 묻자 황혼의 기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자네는 강해질 걸세. 서두르든 그렇지 않든 그 시기도 크게 차이가 나진 않을 거야. 그리고 한계는 오게 마련이지. 굳이 그 한계를 빨리 도달하려 하지 말게나. 그럼 자네도 고독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물론, 그 다음의 경지는 있네. 그러나 경쟁할 자가 없는 상태에서 경지만 올라간다고 고독의 감정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야.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시는 어리석음에 비견될 수 있지. 갈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실력에 비견될 정신적 성장이 수반되지 않으면 파멸될 뿐이지. 나는 그런 자들를 많이 봐왔네. 그리고 나와 연이 있는 자네가 그런 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아. 뭐든 차근차근 가야 한다네. 내가 자네에게 가장 적당한 것을 준다고 생각하게. 나는 검술에 있어서 전문가니까. 필요할 때에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 날 믿게나.”
황혼의 기사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그가 말하는 경지에 가본 적이 없고,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와 같은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저는 빨리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싶고요. 마음이 급해요. 다시...아니..아닙니다.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황혼의 기사는 잔잔한 눈빛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서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연륜과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자넨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꼭 말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진 않아. 말하지 않더라도 대충 짐작할 수는 있으니까. 나는 자네가 가려고 하는 길을 이미 한 번 걸어봤지. 그게 어떤 것이든 커다란 틀 안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어. 강한 힘과 권력, 사람들의 환호와 수많은 여자들과의 사랑, 동료라고 생각했던 자들로부터 쏟아지는 시기, 질투, 다툼...그리고 쓰라린 배신도...그뿐만이 아니야. 아쉬울 것 없는 부도 쌓아봤고, 원한다면 왕도 될 수 있었지. 그래...나는 많은 것을 경험했네. 흔히 사람들이 태어나 꿈꾸는 것들을 거의 빠지지 않고 손에 쥐었었지. 바로 이 손에 그 모든 것이 있었다네. 꽤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평생을 노력해도 가기 어려운 곳까지 가본 셈이지. 물론 나 혼자 잘나서 내 능력으로 모두 이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적당한 행운이 뒤따랐다는 것은 나도 부인할 수 없어.”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로드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기사님처럼 멀리까지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제 그릇은 기사님만큼 크지 않고, 그래서 더 금방 만족할 겁니다.”
로드리고의 말에 황혼의 기사는 껄껄대며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런 말이 어디 있나? 말의 본질을 놓쳤군 그래. 어디까지 가고자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랬다면 내가 지금 한 말은 단순한 자랑에 불과하지 않겠나? 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네.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자네에게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어. 어쩌면 사랑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지.”
그 순간 로드리고는 한 걸음 황혼의 기사에게서 물러섰다.
표정에도 경계하는 빛이 뚜렷이 떠오른다.
“이런! 이런! 오해했나보군. 내 발언에 그만한 여지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용서하게나. 하지만 내 말의 의미는 남색을 뜻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다시 곁으로 오게나. 응?”
그러나 로드리고는 다시 황혼의 기사 곁으로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뭐, 좋아. 거기가 좋다면 그대로 있게나. 오해는 언젠가는 풀리게 마련이지. 충분한 노력과 충분한 시간만 수반된다면 말이야. 난 노력할 의향이 있고, 게다가 그 누구보다 시간도 넉넉한 편이니 우리 사이에 생겨난 오해가 풀릴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네. 자,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나처럼 1000년 넘게 혼자서 이런 공간 속에 갇혀있다 보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마련이야. 성별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만나서 이야기 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쁨을 느끼게 된다네. 내가 사랑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저도...농담이었습니다.”
“정말?”
“......”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지. 굳이 깊숙이 파봐야 서로에게 그리 유쾌한 이야기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러고 보니 자네가 생각했을법한 음담패설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는군. 아니, 아직 그럴만한 나이는 아닐까? 아직도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고 생각하는 나이인가?”
“아니요. 그 부분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호오~!?”
“저기...기사님, 이번엔 기사님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당히 놓치신 것 같은데요?”
“아! 그렇지. 방금 있었던 이야기는 잠시 잊는 것이 좋겠군.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도 나중에는 심도 있게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어.”
“그...글쎄요.”
“그거야 나중 일이니까. 자네도 그런 것으로 고민할 때가 올 거야. 그때는 주저 말고 경험 많은 황혼의 기사를 찾게나!”
“...그러죠.”
“다시 각설하고 이야기를 본래 궤도로 올려보겠네.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면 그 다음은 뻔한 이야기이지 않겠나? 난 자네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길에 대해 적당한 조언을 해줄 수 있네. 그게 나만큼 멀리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도 말이야. 어쨌든 내가 지나온 길임에는 다름없으니까.”
“전...그것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더 작고, 훨씬 작은 범위 내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것을 기사님이 한때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같은 것이 아니에요. 이 이야기의 본질을 벗어난 것은 제가 아니라 기사님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그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모두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갖으려고 하지. 하지만 그 과정은 우리 생각보다 복잡하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간단하단 말이야. 원하는 것...그것을 위해 힘을 갖고, 혹은 돈을 갖고...아니면 시간을 들이고...뭐든 좋아. 자신에게 있는 뭔가를 포기하고 그걸 손에 넣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준비해 나가지. 누군가는 실제로 성공하고, 또 누군가는 실패해. 나도 자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국지적인 부분에 굉장히 큰 가치를 부여했던 적이 있었을 걸세. 얻은 것이 많다고, 모두가 그 모든 것을 얻으려고 발버둥 쳤던 것은 아니야. 자네가 말하는 것처럼 시작은 그런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게 멀리까지 가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본질을 잃고, 자신의 꿈은 원래부터 원대했고, 그런 큰 꿈을 가지고 착실히 노력했기 때문에 그리도 멀리 올 수 있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이지. 그러나...처음은 모두 같았을 뿐이야. 자네가 지금 추구하려는 것...그건 나도 추구했던 것이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그 곳은 내가 지나온 길이야. 틀림없네. 그리고 내 삶은 길었네. 그래서 시간도 많았고, 거기에 생각할 기회도 많았지. 아무튼 혼자였으니까 낮잠만으로는 시간을 전부 흘려 보낼 수 없었거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그럼 처음엔 삶을 멋지게 포장해서 사실을 흐리게 만들지. 거짓도 붙고, 실수에 대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서 자신을 정당화 시키지. 그러나 더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그 짓도 할 수 없게 되지. 그럼 흐릿하게 가려두었던 것들이 점차 뚜렷해진다네.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지 않고, 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 그랬더니 당시에는 멋지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너무 하찮게 느껴지더군. 보다 진실에 가까워지지. 허세도 뭣도 필요 없어지는 거야. 그래서 가끔은 혼자서 얼굴을 붉히고 창피함에 몸부림치기도 했었지.”
“그래서 결국, 제게 그럴듯한 충고를 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자네가 굳이 뭘 원하고 뭘 하려는지 말하지 않더라도 꽤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네. 실제로 자네가 날 신뢰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건 자네의 행동에 조금도 변화를 주지 못할 텐데 말이야. 내가 했던 후회를 자네도 경험할 필요는 없어. 아니, 적어도 나만큼 많은 실수와 후회를 경험할 필요는 없지. 그 첫 단계를 나는 이미 시작했다네. 다음 차례는 자네야. 오른발만 앞으로 나간다고 사람이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말해도 좋을지...”
“......”
더 이상 황혼의 기사는 로드리고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드리고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고민할 수 있었다.
회귀한 사실을 말해도 좋을까?
과거에 얻지 못한 것을 평생 동안 그리며 안타까워했다고?
하지만 이제 다시 그것을 손에 넣으려 한다고?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을 그가 믿어 줄까?
그래도...내가 원하는 것의 가치를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는지 말하려면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그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회귀한 이후, 누군가 자신에 대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격려도 받고, 조언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누가 믿을까?
또, 믿는다고 하더라도 날 이용하려고만 하진 않을까?
수많은 의문과 의심이 그를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황혼의 기사는 이곳을 나갈 수 없다.
혼자일 뿐이라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비밀을 안전하고, 그를 도와줄 연륜과 지혜도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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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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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로드리고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입을 연 로드리고의 이야기를 황혼의 기사는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회귀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정말 순간일 뿐이었다.
한 번 시작된 이야기는 요즘 그가 걱정하는 고민거리로 이어졌다.
그렇다.
그는 낸시의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