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리고 사가-35화 (35/200)

00035  떨어져 나온 개깍지, 눈에 붙은 콩깍지  =========================================================================

“그러니까 제 마누라였는데...좋아했던 것은 아니었고...그냥 살았거든요. 결혼은 다 하는 거니까...안할 수도 없고, 마침 옆에 나이도 비슷하고, 뭐 그런 애가 있었으니까...오랫동안 고민하기도 귀찮아서...솔직히 비욘느가 아니면 전 누구라도 다 똑같게 느껴질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도 반대 안하시고, 오랫동안 봐왔던 애니까 맞춰주려고 크게 노력할 필요도 없고...대충 그런 거죠. 무슨 느낌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엄밀히 말하면...뭐라고 해야 할까? 아! 그래! 제가 낸시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셈이죠. 제 불행으로 좀 득을 봤다고 하면 딱이겠네요.”

황혼의 기사는 어느새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보게. 지금 이야기가 뒤죽박죽이군. 내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낸시라는 소녀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걸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괜찮겠나?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하게나. 레이디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런 투로 말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네.”

“어디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거죠? 이만큼 명확하고 지루한 인생이 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낸시는 레이디가 아니에요. 그냥 우리 집에 얹혀사는 애니까. 아무튼 그것 때문에 요즘 좀 제 마음이...아니..아닙니다. 우선은 기사님 궁금증부터 풀어보죠. 뭐가 이해하기 힘드신 거죠?”

“글쎄...명확하네, 지루하네...뭐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 사람의 인생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니까. 쓸데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켜 본질을 흐리지 말게나. 각설하고 내가 궁금한 것은 무엇보다도 ‘회귀’라는 부분이네. 여기가 혼란스러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할까? 그리고 내 의문과는 상관없지만 한 가지 덧붙이지. 무슨 일을 하던 레이디는 레이디야. 그런 차별하고 깔보는 어투는 좋지 않네.”

로드리고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래저래 잘못했다는 듯 지적당하고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자신의 이야기의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회귀’를 황혼의 기사가 믿지 않는 것 같자 더욱 기분이 상했다.

뭐야?!

나름 믿고,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왕년에 유명했더라도 지금은 이곳에서 감옥살이 하고 있을 뿐이잖아?

그 왕년도 벌써 1000년도 지났고...

자연스레 그의 어투는 짜증이 묻어났고, 조금은 퉁명스레 변했다.

“그게 뭐가 어렵나요? 일흔까지 살고, 다시 어려졌다니까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요. 그게 전부죠.”

“...말은 쉽군. 하지만 가능한 일은 아니지.”

단호한 어투로 황혼의 기사가 말했다.

그러나 그 단호함이 더욱 로드리고의 기분을 건드리고 만다.

“지금 제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건가요?!”

이제는 공격적이기까지 한 말투였다.

그러나 황혼의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다네. 개인적으로 나 스스로도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현실과 개인의 망상을 구분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네. 그 경계가 흐릿해지면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흔히들...미쳤다고 하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로드리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황혼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면 당신은 1000년도 더 살았잖아요? 그게 더 믿기 힘든 일 아닌가요?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아주 멀쩡하다고요. 현실과 망상을 구분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100% 정상이라고요!”

로드리고는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황혼의 기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말실수를 했군. 용서하게나. 자네 말이 맞아. 내 존재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인데...정말 할 말이 없군. 미안하네.”

황혼의 기사가 이렇게까지 사과해 오자 로드리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대방이 자신을 믿지 못한 다는 것이 화가 났고,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미쳤다고 말하자 울컥해버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아니...아닙니다. 제가 좀 지나쳤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이거, 좋은 방향으로 이어가려 했는데 뭔가 꼬여버렸군. 서로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잊도록 하지. 하지만 여전히 회귀라는 말은 쉽사리 믿기 힘들군. 용서하게나.”

“용서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기사님을 이해합니다. 누군가 제게 이 같은 말을 했었다면 분명 비웃고 말았겠지요. 하지만 기사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해는 시간과 의지가 있으면 전부 풀어지게 마련이라고요. 그럼, 저는 앞으로도 이곳에 자주 올 테고, 기사님과 저 사이를 가리고 있는 오해가 풀어졌으면 하는 의지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맞는 말이네. 너무 처음부터 많은 것을 바라는 것 좋지 않겠어. 이것은 내가 대화 처음에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군.”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요?”

“그렇지!”

“계속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럼. 그렇게 하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나는 일단 자네의 말을 사실이라 가정하고 그에 적절한 충고를 준비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일단 낸시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이야기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전...낸시를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집에 있었고, 계속 집안일을 했습니다. 항상 저를 도련님이라 불렀고,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는 톨핀 아빠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좀 더 지나선 영감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를 부르는 호칭은 차츰 바뀌었지만 그녀는 항상 그녀였어요. 변함이 없었죠. 뭐라 해도 잘 웃지도 않고, 매일 무표정이었습니다. 비욘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제게 기쁨을 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사람이 바라는 것 정도는 있지 않습니까? 전 좀 더 따뜻한 가정을 바랐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그녀 탓이었습니다. 전...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빠짐없이 이행했으니까요. 가정은 제게 기쁨을 주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더욱 제가 갖지 못한 저의 사랑...비욘느만을 그리워하게 됐습니다.”

“흐음...계속해보게. 흥미가 생기는군.”

황혼의 기사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후우...낸시는 제게 아무 의미 없는 마누라였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조금 아주 조금뿐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거지?”

황혼의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글쎄요.”

“이봐, 대답을 회피하려 하지 말게나. 지금 이 이야기는 내가 1000년 만에 듣는 이야기야. 혹은 그보다 몇 백 년쯤 더 지났을지도 모르지. 내게는 아주 값진 이야기일세. 이대로 군데군데 의문을 남기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넝마가 되어 버린 옷감으로는 좋은 옷을 만들 수 없듯이 나 역시 자네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나?”

로드리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황혼의 기사가 말한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차마 인정하기 싫었던 혹은 입술을 통해 직접 말로 내뱉기 싫었던 것을 기어코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좋아요. 좋습니다. 말하죠. 아마...아마도...미안한 마음은 제가...그녀를 곁에 두고서...계속 비욘느를 그리워했기 때문일 겁니다.”

“확실하나?”

“...그렇습니다. 그것 말고는 없죠.”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군.”

“기사님의 의문은 항상 제 기분을 상하게 만들 것 같군요.”

“하하! 항상이란 말은 좀 더 우리의 만남이 길어진 후에 하는 것이 좋겠군. 아무튼 묻겠네. 자넨 조금 전 아내에게 남편의 의무를 전부 했다고 그랬지. 그리고 자네가 만족할만한 따뜻한 가정을 만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탓이라고도 했고 말이야.”

로드리고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저 기사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랬던 것 같군요.”

“그런 어중간한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야!!!!”

갑자기 언성을 높인 기사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뻗어 나왔다.

마치 전장을 호령하는 최고사령관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로드리고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분명히...그렇게 말했습니다.”

기사는 곧바로 기세를 풀고는 싱긋 웃었다.

“그래. 자네는 분명 그렇게 말했네. 내 묻지. 남편의 의무는 뭔가?”

“......”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그렇다면 다시 묻겠네. 경제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네. 밤일도 물론 중요하고.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마찬가지야. 이 일을 모두 제대로 했다고 자신하나?”

로드리고는 대답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 부족했던 부분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분명 기사가 말했던 역할에 있어서 충실했다.

그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충실히 말씀하셨던 일을 행했습니다.”

로드리고는 조금은 안쓰럽다는 듯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나도 그랬다네. 하지만 이곳에서 계속 있다 보니 말이야 흐릿한 것이 점차 뚜렷해지더군. 내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남편의 의무는...본질은 빼놓은 것이었지.”

“대체 무슨?!”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네. 자네도 이미 알고 있었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지. 그래도 자넨 인정하기 싫겠지.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충분히 생각할 시간은 부족했었을 테니까. 70년...충분히 집착과 거짓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시간이라네.”

“저는 아직도 모르겠군요. 기사님의 말씀은 제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럼, 자네가 이해하기 쉽게 말해주겠네. 자넨, 조셉이란 자가 비욘느를 차지하고도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바람도 많이 피고, 새 아내도 많이 얻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

“그래. 마치 내 과거의 모습 같군. 후회스런 과거의 모습 말이야.”

“......”

“그래. 계속하겠네. 자넨 조셉에 대해 뭐라고 말했지?”

“그는...비욘느에게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비욘느를 조금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느니...그러느니 차라리...차라리...제가...”

이를 악문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황혼의 기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인간이여! 하하하! 어리석은 인간이여!!!”

로드리고의 표정이 다시 험악하게 바뀌었다.

“대체 뭐가 재밌다는 겁니까?!”

“이제는 알아야하지 않겠나? 이봐, 조셉은 비욘느를 굶겼나? 아니면 그녀를 헐벗게 했나? 자식을 내다 버렸어? 뭐, 경험이 많았다면 밤일도 잘 해주었겠지. 그렇지 않나?”

“!!!”

“그래. 표정을 보니 자네도 깨달은 모양이군. 남편의 의무...그건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작은 것이 아니야. 좀 더 멀리 보게.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말고. 자네 좋을 대로 해석해서 자네를 두둔하는 근거로 삼으려 하지 마. 비욘느가 불행했듯이 자네 곁에 있었던 낸시도 마찬가지였네. 자넨, 그녀에게 조셉과 같은 짓을 저지른 거야. 아마도 그녀를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자네가 하찮게 여겼던 그 마누라를 말이야. 누구 떠오르는 사람은 없나? 회귀 했다면 있을지도 모르겠군.”

로드리고는 순간 토미를 떠올렸다.

몸이 떨려왔다.

내가...내가...조셉과 같았다고?

그럴 리가...그럴 리가...

하지만 그는 그것이 아니라고 황혼의 기사에게 자신을 변명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