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떨어져 나온 개깍지, 눈에 붙은 콩깍지 =========================================================================
긴 장대 위에 널린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소녀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하염없이 빨래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다른 소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만다.
“낸시 언니!”
바로 지척에서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소녀가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비슈라고 했었지?
아직 제대로 대화조차 나눠 본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낸시 언니라니...
게다가 나보다 어릴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
여기서 막간을 이용해 밝히자면 아비슈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혹은 말라서 그런지 또래보다 좀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심지어 그 본인조차 몰랐다.) 그 표현이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좀 더 분명하고 올바른 표현을 찾아보자면 키에 비해 얼굴이 찌들었다고 할까?
키는 오히려 낸시 보다 좀 더 작았다.
그리고 헤나로보다는 조금 더 컸다.
그래도 깡마른 몸 때문에 낸시보다 작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이렇게 지척에서 나란히 서지 않는 이상 혹은 어둠속에서 실루엣만 보지 않는 이상, 그 이미지에 기대어 어떻게 봐도 낸시보다 두어 살 많아 보였다.
그렇다고 밉상이란 말은 아니지만.
“언니라니...그런...”
뭔가 송구스럽다는 듯 낸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아비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서열이 있으니까.”
“서열이라니...그런 거 없어요. 아가씨가 그냥 장난치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부를 필요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싶은걸? 사이좋게 말이야. 그러려면 힘 있는 사람 기분을 굳이 상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낸시 언니라고 계속 불러도 불만 없어.”
아비슈는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었다.
그러나 낸시는 마음이 불편했고, 자기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언니’라는 호칭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나쁜 분 아니니까 막 괴롭히고 그런 거 안하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러나 아비슈는 고개를 저었다.
“낸시 언니와는 상황이 다르지. 언니한테 좋은 사람이었다고 나한테까지 그러란 법이 어디 있어? 알아서 조심해야지.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선 힘 있는 사람한테 잘못 보이면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곤 했어.”
대체 아비슈는 어떤 곳에서 자란 것일까?
머릿속에 제대로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아가씨 말을 조금 안 들어 준다고 해서 다음날...시체가 되진 않아요.”
“나도 그럴 것 같기는 해. 그래도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지. 그런데 낸시 언니는 왜 나한테 존댓말을 쓰는 거야?”
아비슈는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야...”
“그야?”
뭐라고 해야 할까?
저보다 나이 많아 보여서요?
그럼...싫어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낸시는 적당한 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직 낯서니까....일까요?”
낸시가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 거리며 말했다.
“흐응? 하지만 아가씨가 보면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이번엔 아비슈가 살짝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낸시를 흉내 냈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그냥 장난치시는 거니까...”
“그래도...아직은 조심하는 게 좋지. 지금이 나한텐...생애 최초로 평화로운 시간이니까. 그러니까...괜히 망치고 싶지 않아. 도련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그분은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주었고...나한테...좋아한다고도 해줬으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아비슈가 양손의 검지 손가락을 비벼대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낸시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고 크게 결심한 것처럼 말했다.
“그..그래도...어..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돼요.”
“그럼?”
“그냥...낸시. 그거면 되요. 제가 아가씨한테 말할 테니까.”
“뭐,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결정 되면 알려줘. 하지만 그때까진 낸시 언니.”
“아휴...알았어요. 도련님께 가볼 건데 같이 갈래요? 많이 아프시면 의사 선생님을 모셔 와야 하니까요. 주인마님께도 말씀드려야 하고요.”
“...싫어. 아픈 사람 보는 건...싫으니까...”
낸시는 당연히 같이 갈 거라고 생각했던 아비슈가 거절하자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씁쓸함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
젠장!!!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주먹은 곧 파랗게 질려버린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그 주먹을 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부끄러움?
후회?
죄책감?
그것도 아니면 극도의 분노일까?
모른다.
그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뒤죽박죽 되어버린 머릿속과 마찬가지로 그의 감정도 오르내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스스로를 생각했다.
그동안 그를 지탱해 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 무너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한평생 믿어왔던 것은 스스로를 위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진실은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걸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한 짓은 그가 한평생 비난해 마지않았던 조셉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 자신이 비욘느를 사랑했었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고 믿어왔던 것은 헛된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낸시는?
하...하하하! 몰라...모른다고...
스스로를 고결하고 순결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실수라면 실수도, 후회라면 후회도 얼마든지 있었다.
상당수 잘못에 대해 인정도 했고, 때때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고치고 감당한 것들도 많았다.
그건 현실과 직면해야 하는 작은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스스로 감당해 낼만한 것이었고 나름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이번만은 그가 평소 애용하던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를 살아갈 수 있게 버티어 주었던 네 개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조셉을 향한 원망...
비욘느를 향한 사랑...
낸시를 향한 비난...
스스로를 향한 연민...
로드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은 사정없이 무저갱의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는 황혼의 기사가 했던 단 한마디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부정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뼈 마디마디가 울부짖는다.
커다란 말뚝이 그의 가슴에 박히듯 신경이 가닥가닥 갈라져 내렸다.
나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인생이 허무했다.
익히 그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 사실은 더 이상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의 믿음을 흩어 버린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지금 이 순간에 와서는 그는 부인하려 애썼다.
가혹한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는 얼마든 탓할 자들이 있지 않았던가?
현실이 아무리 가혹하고 지루해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자들을 탓하며, 스스로 고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도달하지 못한 꿈을 가슴 속에 부둥켜 앉고, 현실을 잊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했었다.
끊임없이 불평하면서도 그 자체로 ‘지금’이라는 현실을 ‘과거’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로드리고는 회귀 전, 자신의 모습과 대면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사내가 외롭고 슬픈 표정으로 서있었다.
로드리고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과거의 환영은 지척에 있음에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허공을 저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내 흐릿하게 변하더니 사라져 버린다.
......
...
.
.
...
......
다시 로드리고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의 방이었다.
침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땀을 너무 흘려 순간적으로 한기가 몰려왔다.
루트는 아직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로드리고는 그것이 몹시도 무겁게 느껴졌다.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그의 손에서 힘없이 루트가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럼에도 로드리고는 다시 그것을 주워들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멍한 채로 침대에 기대어 있을 때, 방문이 슬며시 열렸다.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문으로 향했다.
낸시였다.
그녀는 로드리고를 보더니 서둘러 다가왔다.
“세상에! 이 땀 좀 봐! 도련님,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세요?”
낸시의 손이 땀으로 흥건한 로드리고의 이마를 훔쳤다.
그의 시선에 비친 소녀는 몹시도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드리고는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낸시...아...낸시구나...낸시...”
그의 입가에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어색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나를 이리도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안도감과 감격으로 다가온다.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가 말했다.
“낸시...미안...미안해...정말...미안해...”
고통을 참는 듯 중간 중간 목소리가 끊겼다.
“제대로 좀 봐요.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주인마님을 모셔올까요?”
낸시가 로드리고를 내버려두고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자리에 일어섰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낸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낸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
여전히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로드리고가 말했다.
“이대로...이대로 좀 있어. 그럼 괜찮아 질 거야.”
“하지만...”
“제발...내 말 좀 들어줘. 어디 가지 말고...내 곁에 있어줘.”
“...알았어요.”
낸시는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로드리고의 침대 한켠에 앉았다.
잠시 동안 대화는 없었다.
어딘지 어정쩡한 분위기가 흘렀다.
여전히 낸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살폈고, 로드리고는 고개를 들고 낸시를 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만 낸시의 손만은 놓지 않았다.
그 손을 놓치면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정없이 내팽겨 쳐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아파요...”
낸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너무 세게 잡았던 모양이다.
로드리고는 얼른 손에 힘을 뺐다.
그러자 낸시는 손을 빼려 했는데 그걸 막으려고 로드리고는 얼른 다른 손으로 낸시의 손을 덮어 버렸다.
“뭐...뭐예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낸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로드리고도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저..그..그게...추..추워서...손을 잡고 있으면 따뜻하니까...”
“그럼 이불을 목까지 덥고 누우세요.”
낸시는 직접 그렇게 해주려고 하는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외쳤다.
“아..안돼!!”
“왜...왜요?”
당황한 낸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불이 무거워!”
“뭐라고요?”
젠장...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나는!!!
“따..땀이 많이 나서...무거워...몹시...”
“...그래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낸시가 반문했다.
“저...정말...무거워...모..못 믿겠으면 내 옆에...누...누워...보던가...”
말해 놓고 로드리고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 올랐다.
그리고 그건 낸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