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떨어져 나온 개깍지, 눈에 붙은 콩깍지 =========================================================================
자그맣고 예쁜 방이었다.
조금 변색되어 누르스름한 색을 띠고는 있지만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 창문에 걸려 있다.
작은 탁자도 놓여 있고, 그에 걸 맞는 의자도 갖춰져 있다.
대단한 장인이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정성이 느껴졌다.
침대는 다른 가구에 비하면 컸는데, 누군가 예전에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침대 커버와 이불은 역시나 소녀의 취향에 맞게 귀여운 하트 모양이 수놓아져 있고, 레이스도 한껏 멋을 내고 있다.
귀족 가문의 아가씨 방에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시골에서 이정도 되는 소녀 방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의 부모님이 얼마나 소녀를 사랑하는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방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게다가 방 안에 홀로 있는 소녀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팔로 포갠 채, 머리까지 깊숙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굴은 귀여웠지만 볼이 잔뜩 부풀은 것이 가득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소녀는 낸시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헤나로였다.
소녀는 홀로 생각했다.
언니와는 항상 같이 놀았는데...이럴 수 있는 거야?
나는 우리가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나만...그동안 나만 언니를 좋아했던 걸지도 몰라...
언니는 나 같은 건 귀찮았지만 그냥 상대해 준거고.
생각해 봐.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아무튼 이 집의 아가씨니까.
귀찮고 싫어도 함부로 할 수는 없고...
혹 내가 부모님께 뭐라고 안 좋은 소리라도 하면 무척이나 곤란할 테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친절했던 건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항상 언니를 따라다니고 그랬던 거야.
얼마나 귀찮았겠어?
의기소침한 표정이 좀 더 찡그려진다.
조금 후에는 뭔가를 참으려는지 호흡을 멈추고, 무척이나 붉은 얼굴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결국은 소용이 없었나보다.
흑...흑흑...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혼자만의 암울한 우물을 파내려 가는 헤나로.
누군가...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게다가 자신이 그동안 믿고 의지해 왔던 낸시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이 그렇게나 서럽고 슬플 수가 없었다.
흑..흑흑흑...흑흑...
호흡을 참아보려 해도 결국 딸꾹질처럼 히끅 히끅 소리를 내며 기어코 가슴이 오르내리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누군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 방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무척이나 난처할 테니까.
소녀는 그렇게 한참을 훌쩍거리다가 눈물을 소매로 쓱 닦아냈다.
복수하겠어!
눈에 꽤나 험한 빛을 띠우며 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빨래...
그걸 전부 엎어버릴까?
그럼 분명 곤란해 하겠지?
그렇지만...빨래하기 힘들 텐데...
가끔 낸시 언니가 빨래할 때, 옆에서 지켜보면 얼굴 가득 땀을 흘리며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시간도 무지 오래 걸리고...
하루에 그런 일을 두 번이나 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면...지쳐 쓰러질 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복수라지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해버리면 다시는 친해지기 어려울 지도 몰라.
소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좀 더 평범한 걸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기왕이면...낸시 언니도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그러면 더 이상 복수가 아니게 되잖아?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그래도...해야 해!
나만...나만 언니를 좋아하는 건 너무 서글프잖아?!
하지만 어떻게?
머리를 쥐어짜며 이젠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대던 헤나로는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역시! 나는 천재야!
헤...헤헤헤!
소녀는 벌떡 일어서서 방을 뛰쳐나갔다.
얼굴은 다시 희망을 찾아 밝게 빛났고, 발걸음에는 힘이 넘쳤다.
내가 아비슈랑 친하게 지내면 분명 낸시 언니도 셈을 낼 거야.
그러면 내가 얼마나 언니한테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겠지?
언니가 잘못했다고 내게 사과하면 못이기는 척 하면서 다시 친하게 지내면 되는 거지.
그렇지만 조건을 걸어서 앞으로는 절대로 내게 뭔가를 숨기거나 하면 안 된다는 걸 맹세하게 만들어야지!
헤나로가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낸시는 없고, 아비슈만 홀로 햇볕을 쬐며 실없이 졸고 있었다.
아! 낸시 언니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인데...
헤나로는 탄식을 했다가 이내 생각을 고쳤다.
그게 아니야!
아마 곧바로 친해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을 거야.
아비슈는 애가 뭔가 이상하니까, 적응 기간이 충분히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분명 어색할 테고...
그러니까 이건 기회지.
준비 시간이 주어졌잖아?
“야! 아비슈!”
헤나로가 아비슈를 불렀다.
아직 좀 거리가 떨어진 상태였다.
아비슈는 조느라 한참 이리저리 흔들리던 머리를 바로 세우고, 잽싸게 흘러내린 침을 닦았다.
“아,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너 이리 와 봐.”
저 조그마한 아가씨가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헤실 거리며 아비슈는 헤나로의 곁으로 다가갔다.
굳이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아비슈의 기본 방침이다.
아비슈가 곁에 서자 헤나로는 뭔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 표정으로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우...우리 친하게 지내자.”
슬쩍 시선도 피한다.
절대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예?”
이 아가씨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보다 내가 들은 것이 맞나?
저 표정은 아무래도...마지못해서...
낸시가 뭔가 말했던 것일까?
떠오르는 이런 저런 의문을 내버려 둔 채 아비슈가 물끄러미 헤나로를 쳐다보자 헤나로는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내..내가 좀 고집을 부린 것 같으니까...이제는 그런 거 안 하고...치..친하게 지내자고...어때?”
그래.
아무려면 어때?
일단은 무리 없이!
“저야 당연히 좋죠. 헤..헤헤.”
“그..그래? 뭐, 너야...당연히 좋겠지. 근데...낸시 언니는?”
낸시가 뭔가 말해서 온 것은 아니란 건가?
그럼 뭐지?
“아! 도련님 방에 갔을 거예요. 살펴보러 간다고 했으니까. 제가 불러올까요?”
“아니! 그..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곧...오겠지?”
“예?”
“여기로...곧 오겠지?”
“글쎄요. 뭣하면 제가 불러올 테니까...”
“피..필요 없다니까!!!”
헤나로가 삐익 하고 고함을 친다.
하지만 곧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반응한 것 같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당황한 눈빛이 흔들린다.
이상하게 되어버린 분위기를 어떻게든 빨리 수습하고 싶지만 머릿속이 뒤엉켜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그걸 눈치 챘는지 아비슈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뭘 할까요? 따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그렇지! 바로 그거! 따로 시킬 일이 있어!”
“?”
아비슈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자 산 너머 산이라고, 헤나로는 또다시 막막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여기까지는 전혀 계획에 없었는데...
“그럼, 저..절로 가서 좀 서있어.”
스스로 말하고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헤나로는 자신의 발만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무척 화끈거린다.
아비슈는 살짝 어깨를 으쓱 거리고는 손을 들어 헤나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헤나로의 몸이 움찔 거렸지만 그 손을 거칠게 쳐내거나 하진 않았다.
아비슈가 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 친하게 지내요. 무리하지 말고. 응?”
여전히 자신의 두 발만 내려다보며 헤나로는 대답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소란스런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소녀의 시선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돌아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낸시가 두 손으로 뺨을 가린 채, 두 소녀를 향해 뛰어온다.
바로 지척까지 다가오자 두 손 사이로 보인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붉었다.
헤나로는 얼른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언니, 나 아비슈랑...!”
그러나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지나쳐 저 멀리로 뛰어가 버린다.
그녀의 중얼거림이 조그맣게 들렸는데 확실치는 않았지만 아마도 ‘몰라...몰라...파렴치....’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헤나로는 다시 느끼게 된 상실감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아아앙~!”
왜 우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아비슈는 헤나로를 안아주었고, 그날 헤나로는 그녀의 앞섶을 완전히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