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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39화 (39/200)

00039  떨어져 나온 개깍지, 눈에 붙은 콩깍지  =========================================================================

태양은 오늘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나 보다.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여, 빨래도 말리고, 곡식도 내리쬐고, 아이들 머리도 비춰주더니 어느덧 정해진 하늘 길을 걸어 하루의 노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찬란한 빛을 잃은 하늘은 달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은은한 빛에 기대어 사람들은 눈을 비비며 잠자리를 찾아 간다.

로드리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손에 들린 루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만다.

다시 그 곳에 가야 할까?

낮잠을 자며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좀처럼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다시 황혼의 기사를 만나는 일은 몹시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떳떳치 못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기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만나고 만나지 않고를 본인이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경우에는 웬만해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게 마련이다.

로드리고는 결국 루트를 침대 아래에 숨겨 버렸다.

오늘은 그냥 자자.

그를 만나면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날 비난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거부감이 드는 걸?

그렇게 로드리고는 심정적으로 성장통을 앓으며 당분간 성장을 거부했다.

성장은 좋은 것이지만 고통은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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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도 일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하루 일과는 그녀에게 고단한 몸을 선물해주었다.

이제는 밤 동안 그 누구보다도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침대 맡에 놓인 곰 인형이 자신을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인형 스스로 인사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낸시는 뒤편의 문을 슬쩍 살피더니 문 너머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 하고 나서야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돌아올 길이 없는 인사를 건넸다.

“아...안녕? 나 다녀왔어....호..혼자 심심했지?”

좀처럼 지어지지 않는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자리 잡는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미소라 어색하긴 하지만 나름 귀여운 표정이었다.

낸시는 조심스럽게 곰 인형을 안아들고 가슴에 꼭 안아주었다.

분명 곧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하지만 그래도 왜인지 곰 인형의 어딘가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기를 안아들 듯 조심스런 손길로 곰을 몇 번 훑어 주고는 다시 침대 맡에 올려둔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집어 들고는 인형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침대 맡에 내려놓는다.

소녀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고는 잠을 청했다.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어.

이상한 일도 있었고, 창피한 일도 있었고...

그리고...파렴치한 일도...

내일은 좀 더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다.

아...피곤해...

하아~...

낸시는 그렇게 하품을 한차례 하고는 곧바로 꿈나라로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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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나로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 활기차게 하루를 보내지도 않았고, 자연스레 몸은 아직 피곤을 호소하지 않는다.

아비슈에게 안겨 울기도 했었지만 그걸 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 조금은 피곤을 느낀다.

하지만 정신만은 아직 또렷하다.

몇 번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잠을 청해보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다.

아빠한테 가볼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경우, 아빠는 분명 반겨줄 테지만 엄마는 꽤 매서운 눈으로 나를 꾸짖는다.

그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럼 낸시 언니?

그치만...이젠...싫어...

거칠게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더니 베개 밑으로 얼굴을 쏙 묻어버린다.

으음...아~!

몸을 뒤틀며 요상한 소리를 내던 소녀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비슈...

그래도...가슴 따뜻했었는데...

어차피 친해지기로 했었고...

한 번...걔 방으로 가볼까?

같이 자자고 하면 재워 줄까나?

재워 주겠지?

어차피 고용인이고, 뭘 어쩌겠어?

내가 그러자고 하면 그러는 거지.

아무튼 낸시 언니는...흥!

결국 헤나로는 자기 베개를 집어 들고, 방문을 열었다.

어두운 복도가 펼쳐졌다.

왜인지 슬쩍 두려움을 느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다시 자기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릴지, 아니면 좀 더 용기를 내 아비슈의 방으로 가야 할지 고민이 된다.

나...겁쟁이 아냐!

마음속으로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을 있는 힘껏 외치고는 소녀는 방문을 닫고,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낮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삐걱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조금 무섭다.

몇 걸음만 가면...아비슈 방이 분명하다.

어둡지만 집안의 구조가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몇 걸음이 이리도 무서울 줄이야...

다시 한걸음...

삐이~걱!

나무판자의 눌림이 다시 한 번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저 어둠 저편에서 뭔가가 튀어 나오지는 않을까?

그냥...그냥...방으로 돌아갈까?

소녀는 몇 걸음의 여정이 몹시도 두려워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그냥 내 방으로 가자.

아비슈 따위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내 방이 훨씬 좋고...

그러니까...

헤나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돌아서면 뒤에서 유령이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싹하다.

무...무서워...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지...?

자기 방으로 돌아갈 수 없다.

조금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내 방에 가면 되니까.

그런 생각으로 조금은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고개는 정확히 정면으로 고정되어 있다.

머리를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슬쩍 눈만 움직여 뒤편을 보려 했지만 보이진 않는다.

아니야.

보이지 않은 편이 정말 다행이야.

혹시...뭔가 봤다면...

......

...

.

이제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어두운 밤길을 걷던 나그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목만 달랑 들고 있는 듀라한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다시 한 걸음...

삐이~걱~!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그러나 참아야만 했다.

우는 아이는 이래저래 유령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그런 이야기를 어른들은 자주 해주었다.

밤에 울면...안 된다.

품에 안은 베개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눈에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떨어지지 않게 버텨가며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하게 걸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소녀는 이미 흘러간 어둠 속의 시간을 도무지 상기해 낼 수 없다.

그저 이제는 손으로 만져지는 방문을 있는 힘껏 재빨리 열면서 불렀다.

“아...아비슈~.”

그러나 대답은 없다.

“드르렁~! 푸우~! 크르릉...푸우~!”

창문도 커튼이 쳐져 있는지 그리 밝지 않다.

물론, 복도보다야 밝지만...

그래도 헤나로는 누군가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다.

시끄러운 코골이로 잠에 빠진 아비슈를 보면서도 화내지 않고, 고함도 치지 않고, 이렇게 흔들어서 깨우는 것을 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야..일어나..바보야..흑...흑흑...어서...일어나...”

“어! 아...아..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아..아후...”

아직도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아비슈가 쳐다보자 헤나로는 놀러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분명 방에 들어서며 울지만 않았어도 사실대로 말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물은 엎질러졌고, 소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화..화장실 같이 가자고...친해졌으니까...특별히...”

“...울면서요? 그러니까...특별히?”

“어떻게든...양을 줄여야 했어!! 안 그러면 쌌을 거야. 어서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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