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식사를 마치고 로드리고는 마당으로 향했다.
잠시 햇볕을 쬐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가 덧칠해 두었던 진실은 일부분 칠이 벗겨져 다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다른 고민과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로드리고는 황혼의 기사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두려움과 아픔도 수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루트를 손에 쥐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밤은 오게 마련이지 않던가?
아무리 버텨 봐도 시간은 흐르고 다시 흐른다.
아주 조금의 시간도 내 마음대로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겨우 아침을 먹었을 뿐이다.
아직 시간은 있어.
그 정도 시간이면 마음을 다잡고, 그를 만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낙관해 본다.
당장은 햇볕을 마음껏 쬐고, 이 시간을 즐기면 되는 거야.
복잡한 것도 잊고, 괴로운 것도 잊고 말이야.
태양은 아침의 신선함을 머금은 채, 마음껏 그 눈부심을 뽐냈다.
아직 지표면이 데워지지 않아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마당 구석에 듬성듬성 핀 잡초조차 그 싱그러움과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가 마당에서 나른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버지는 농장으로 향하셨다.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표정이 좋지 못하셨고,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사내 몇이 집에 들러 잡일을 도왔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지시하셨겠지.
그들은 일을 마치면 얼마간의 식량을 받아 기쁜 얼굴로 돌아갈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자 마침내 낸시가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로드리고와 눈이 마주치자 우연을 가장한 것처럼 시선을 피한다.
뭐야?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비집고 올라온다.
어제일 때문인가?
그래도 시선을 피할 필요는 없잖아?
나도 혼란스럽다고!
알긴 아냐?
뭐, 일단은 말이나 걸어보자.
“어이!”
정확히 낸시를 겨냥해 말한 것이지만 낸시는 마치 자기가 아니라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다른 사람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주변에는 로드리고와 낸시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낸시가 답했다.
“저...저요?”
저런 뻔히 보이는 수작을...
당장이라도 혀를 차며 한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분위기만 더 이상해 질 것 같아서 꾹 참는다.
“그래. 오늘도 빨래하냐?”
딱히 궁금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물었다.
원래 대화란 것이 그런 법이니까.
“아니요. 오늘은 다른 거.”
“무슨 일?”
“...모르셔도 되요.”
“나도 알아. 몰라도 별로 상관은 없지. 그래도 알아도 상관없는 거잖아?”
“...오늘은 물레 돌릴 거예요.”
“아...그거.”
나는 물레 돌리는 낸시를 떠올려 보았다.
회귀 전에 낸시를 그다지 예쁘고 귀엽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물레 돌리는 모습만은 조금 운치가 있어서 꽤 오랫동안 그 모습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원래 여자가 조용히 앉아 반복적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보면 조금은 예뻐 보이는 법이다.
아니...신비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조금이지만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럼...가볼게요.”
휙~!
물론, 실제로 ‘휙~!’소리가 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급하게 자리를 뜨려고 한다.
나도 계속 낸시를 상대하며 내 마음의 혼란을 더 가중시킬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오면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잠깐 기다려!”
낸시의 걸음이 뚝 멈추고 만다.
벌써 두어 걸음이나 옮긴 후였다.
“...왜..왜요? 그..급한데...”
“아니, 그냥...네가 날 피하는 것 같아서...”
살짝 낸시의 어깨가 움찔하고 만다.
“그...그런 적 없어요.”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하면 되는 거고. 아무튼 나는 아직 너랑 확인해 보기로 한 걸 못해서 말이야. 누구누구가 날 밀치고 도망가 버렸으니까. 그때, 허리가 무지 아팠다고. 잘못해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으니까. 그것도 나는 환자였는데...아이고..아직도 아프네. 허리가...”
“......”
로드리고는 아무 말도 못하는 낸시 곁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귓가에 악마의 유혹처럼 낮고 흐물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확인만 하고 나면, 비밀은 영원히 잊혀 지게 되는 거지. 우리 꿋꿋한 낸시가 사실은 엄청난 울보라는 사실 말이야. 어때? 응?”
낸시의 다리가 떨린다.
얼굴은 푹 숙이고 있지만 드러난 목덜미와 뺨이 새빨간 것이 그 얼굴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뭐, 실제로 낸시가 꽤나 곤란해 하면 실제로 가슴을 주물럭거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반응은 그가 알고 있던 석녀, 낸시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갈아엎는 광경이기 때문에 왜인지 자꾸만 이렇게 놀리게 된다.
아...젠장...
이러다 진짜로 낸시가 나 엄청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물러나며 그냥 농담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놀려볼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찰나, 다시 문이 열리는 삐걱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빠! 오빠!”
나는 바짝 붙어 있던 낸시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며 돌아보았다.
후다닥~!
젠장!
낸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뭐야?”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답하자 헤나로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나랑 같이 마을 어귀까지 나가서 곡예사 오는 거 기다리자. 응?”
“바보야,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올 거야! 나는 알아. 그런 기분이 들어.”
헤나로가 주먹을 가슴 높이로 불끈 쥐어 보이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안 올 거야. 나도 알거든? 그런 기분이 든다.”
“그러지 말고~! 요즘은 소꿉놀이도 안 해주고~!”
“그건 어디까지나 내 맘이지. 하기 싫으면 안하는 거니까.”
“같이 가!”
“싫어. 정 가고 싶으면 낸시나 아비슈 꼬셔서 가던가? 아, 낸시는 물레 돌린 다고 했으니까 안 되겠네. 흐...흐흐흐...”
“뭐야? 그 웃음은?”
“아니. 아무것도.”
괜히 낸시 놀릴 생각에 쓸데없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할 것도 없잖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뭐 할 건데?”
작정을 했는지 헤나로가 허리에 양 손을 떡하니 얹고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인다.
여기서 낸시 놀릴 거라고는 차마 말을 못하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있는데 헤나로가 기다리다 지쳤는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자! 어서 가자! 응?”
그 순간이었다.
건물 모서리에서 모습을 숨긴 채 이쪽을 훔쳐보는 낸시를 발견한 것은!
큭큭큭...
아마도 내가 헤나로에게 자기가 울었던 사실을 말할까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뭐, 이럴 때는 이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지.
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헤나로 네가 정 그렇게 가고 싶다고 한다면 한번 가 볼까나? 가면서 오붓하게 서로의 비밀 이야기도 해보고.”
“헤~! 정말? 정말 같이 가는 거지? 아마 아비슈도 같이 갈 거야. 내가 불러 올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이따 딴 얘기 하기 없기다? 알았지?”
“알았어. 계집애가 속고만 살았나? 기다릴 테니까 얼른 다녀와.”
“헤..헤헤!”
그리고는 헤나로가 집으로 뛰어갔다.
그와 동시에 낸시가 건물 귀퉁이에서 뛰어 나왔다.
내 지척까지 뛰어 와서는 한다는 말이...
“뭐...뭐예요?! 무...무슨 말 하려고?!”
“글쎄?”
“야...얄미워!”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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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볼품없는 사내와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사내가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은 시골길이었다.
한적하고 따스하다.
좌우로 펼쳐진 곡식이 여물어 추수를 기다리고,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한껏 소박한 풍경을 더해준다.
새벽이 남기고 간 서늘함이 흩어지고 한창 태양이 기지개를 켜며 본격적으로 지표를 데우려는 참이다.
중년 사내가 길을 따라 자라난 코스모스 한 송이를 ‘툭!’소리가 나게 뽑더니 허공에 몇 번 휘휘 휘두르다 저만치 던져 버린다.
고추잠자리가 놀랐는지 날아오르고, 사내는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본다.
중년 사내는 시선을 돌리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힘없는 미소를 띠고, 사내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입술을 몇 번 움찔 거리고, 잘근잘근 깨물기도 한다.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주저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영감, 솔직히 이젠 절반씩 나누는 건 못하겠어.”
노인은 묵묵히 지팡이를 의지해 걷고 있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사내는 그 표정이 짜증스러웠고, 답답했다.
“생각해 봐. 나는 재주넘기도 하고, 접시도 돌려. 필요하면 재담꾼 역할도 톡톡히 하지. 그런데 영감은 하는 게 대체 뭐야?”
목소리에는 자신의 공치사와 노인에 대한 비난이 가득 담겨있다.
“나도 저글링을 하고 있어.”
노인은 이렇듯 자신의 역할을 강조해 본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사내는 조금 전보다 더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 저글링? 그딴 건 나도 할 수 있어. 아니, 내가 영감보다 몇 배는 더 잘 할 걸? 영감은 해봤자 5개가 한계지? 나는 6개까지 할 수 있어. 조금 더 연습하면 분명 7개도 할 수 있을 거야.”
“7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젊었을 때, 오랜 연습 후에나 겨우 했다고. 지금은 5개 밖에 못하지만.”
“됐어! 됐다고! 또 옛날이야기! 그딴 거 듣고 싶지도 않아. 아주 지겹다고. 아무튼 이젠 돈을 절반씩 나누는 짓은 더 이상 안 해.”
단호하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그럼, 어쩌잔 거야?”
노인이 힘없이 물었다.
“내가 7. 영감이 3.”
슬쩍 시선을 피하며 사내가 말했다.
스스로도 좀 너무했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일까?
당연히 노인은 펄쩍 뛰었다.
“뭐야?! 이봐, 자네 기술은 전부 내가 가르친 거야. 자네가 저글링만 할 때도 정확히 절반씩 나눴잖아? 기억하지?”
그러나 사내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런 말로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다.
“아무튼 안 돼. 구질구질하게 과거를 논하지 마! 이것도 옛정을 생각해서 내가 손해 보기로 한 거니까. 공평하게 하려면 내가 9를 가져도 부족하지. 솔직히 이젠 영감은 그냥 짐이야. 영감도 알고 있지? 자기 자신이 아무 쓸모없다는 것 말이야. 가끔 저글링도 못해서 놓치기도 하잖아? 5개에서 놓치면 어떻게 해? 그럼 4개로 하려고? 세상에! 그건 아무도 안 봐. 4개짜리 저글링을 보는 사람은 세 살짜리 어린애들이나 바보들 밖에 없다고! 영감, 다른 사람에게 부담은 주지 말아야지. 정말 민폐야. 숨 쉬는 것 자체가 민폐라고.”
한번 터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마음속에 담아두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사내는 할 말 못할 말 전부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똑같이 나눴어. 내가 더 많이 일하고, 내 재주가 더 좋을 때도 항상 똑같이 나눴다고...그런데...”
섭섭한 걸까?
노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힘주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겨우 몸을 세우고 있다.
“아! 정말! 더 이상 과거를 논하지 마! 노망이라도 난 거야?! 아까 했던 얘기 또 하고 있잖아?! 그리고 나와 영감은 사정이 다르지. 나는 갈수록 잘하게 될 거라는 기대와 확신이 있었지만 영감이 이젠 더 잘하게 되는 건 불가능해. 그런 걸 알면서도 똑같이 나누자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바보야? 엉?! 바보냐고?! 제발...제발 부탁이니까 양심 좀 있어봐! 응? 저번 마을에서는 어땠는데?! 기억하지? 저글링 5개 간신히 하고 숨 헉헉 대면서 한참이나 쉬었잖아?! 이러다 아프다고 다시 못 일어나면 그 약값은 누가 내는데? 설마 나? 아휴~! 그건...제발 그건 좀 참아줘라. 응?”
“......”
“흠흠...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까...돈 나누는 건은 불만 없는 거겠지?”